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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진주와 대북정책①
[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31)-제2부 해방과 외세(12)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한반도 분할 점령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국가이다. 소련은 대략 2,500만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이 기간 세계 전체 희생자의 절반에 이르는 수치이다. 전범국가인 독일이 600〜700만명, 같은 전범국가인 일본이 300만명 내외이고, 연합국이었던 미국이 40만명 내외, 영국이 50만명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소련의 인명 피해가 얼마나 막심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소련을 제외하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중국의 경우도 1,200만명 내외여서 소련에는 미치지 못한다. 인명 피해는 다른 물적 피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련이 전쟁 중에 입은 피해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주1)
소련이 이처럼 막대한 인명과 물질적 피해를 입고도 세계최고의 공업국가, 고도로 발전한 산업국가였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1930년대 ‘스탈린 혁명’으로 불리는 급속한 공업화, 산업 발전이었다. 모든 국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모든 가용가능한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지만 특히 소련의 경우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인력의 동원이 중요했다. 스탈린이 주창한 이른바 ‘사회주의 모국 수호 전쟁’에 모든 인민이 총동원되었고, 산업·공업에서 뒤지는 부분을 인간의 노동력으로 대체하며 독일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소련은 유럽전선에서 정말이지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기에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침공, 일본과의 전쟁을 무엇보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도 상황은 비슷했다. 물질적으로 압도적인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일본 또한 소련과 싸울 여력이 없었다. 일본으로서는 태평양에서 미국과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중국전선에서 최소한이라도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련과의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조건이 맞아떨어졌던 소련과 일본은 1941년 4월 13일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소련(러시아)과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계속해서 충돌했고, 여력이 된다면 언제든 전쟁을 할 수 있는 앙숙관계였다.
전쟁의 균형추가 연합국 측의 승리로 확실히 기울기 시작하면서 소련과 일본은 조만간 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하면서부터 소련을 참전시켜 일본을 패배시키고자 했다. 1942년 6월 하와이에서 거리 멀지 않은 북태평양에 위치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이 승리한 이후 전세는 바뀌었고, 1943년 중반부터는 일본이 전세를 뒤집기 어렵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944년 6월의 사이판 전투, 1945년 1월의 레이테 섬 전투, 1945년 4월의 오키나와 전투를 거치면서 일본의 패배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트루먼이 회고록에 밝힌 바에 의하면 미국은 소련의 참전이 없다면 1946년 11월 이전까지는 대일전의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미국은 소련에 계속해 대일전 참전을 요구했다. 미국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일본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소련의 참전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소련이 최초로 대일전 참전 의사를 밝힌 것은 1943년 10월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였다. 그해 11월의 테헤란회담에서 스탈린은 “히틀러 독일이 괴멸된 후 소련은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전쟁에서 연합군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관련된 정치적 문제들이 1944년 12월 14일 스탈린과 주소련 미국대사 해리만의 대담에서 드러났다. 스탈린은 남사할린과 쿠릴열도의 소련 반환,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포함한 요동반도 일부의 조차, 중국 중동철도와 남만주철도의 조차, 외몽고의 현상유지 등을 대일전 참전의 대가로 요구했던 것이다.(주2)
소련군 작전지도(1945.7)
1945년 2월 러시아 크림반도 남단 흑해 연안의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미국에 대독전이 끝난 2〜2개월 후에는 대일전에 참전할 것을 약속했다. 소련의 참전 대가로 루즈벨트와 처칠은 “외몽고의 현상유지, 사할린 남부 및 그 부속도서의 반환, 소련의 우선권 보장하에 다롄항의 국제화, 소련의 해군기지로서 뤼순항 조차 부활, 중국과 공동으로 중동·남만철도 이용 재개, 쿠릴열도의 소련 할양” 등이었다. 다만 외몽고와 다롄항과 뤼순항, 그리고 철도에 대한 협정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전제가 제시되었다. 얄타회담에서는 한반도 문제는 제외되었는데, 한반도는 소련의 동북아 전략 구상에서 만주와 일본에 비해 부차적이었기에 미국 등 연합국과의 협의 처리하기로 방침을 정했던 것이다.(주3)
소련은 얄타회담 약 2개월 후인 1945년 4월 5일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폐기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대일전 참전을 공식화했다. 5월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후 소련군은 극동으로 대규모 부대 이동을 개시했다. 부대는 철도를 통해 비밀리에 이동했는데 3개월 만에 극동의 병력수가 118만5천명에서 174만7천명으로 증가했다. 6월 말 바실리옙스키 원수가 이끄는 장령그룹이 치타에 도착해 대일전 준비를 지휘하기 시작했고, 7월말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가 공식 설치되었다. 8월 5일에는 연해주집단군이 제1극동전선군으로, 극동전선군이 제2극동전선군으로 개칭되어 개전을 위한 준비를 마무리했다. 그 사이 일본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막기 위해 7월 13일과 28일 두 차례에 걸쳐 스탈린에 사절단을 보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주4)
뤼순을 점령한 소련 해군 병사들이 소련국기를 세우고 있다.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오랫동안 종용했으나 1945년 7월 16일 원자탄 실험이 성공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원폭을 일본에 투하함으로써 전쟁을 조기에 종결짓고, 전후 경쟁자로 부상할 소련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하고자 했다.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열린 회담 중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원폭실험이 성공했음을 밝히자 스탈린은 크게 화를 냈으나 이미 소련은 그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계획대로 8월 6일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되었고,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소련 또한 8월 8일 일본 정부를 향해 대일전 참전을 선언하였고, 8월 9일부터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향해 전투에 돌입하였다.
소련군의 8월 9일은 연합국에 참전 약속한 마지막 날짜에 해당했다. 스탈린은 8월 7일 오후 4시 30분 공격작전 지령에 서명했으며, 소련군은 준비 부족에도 불구하고 연합국과의 참전 일자를 준수하였다. 소련은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일본이 조기에 항복하기 전 참전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의 이권도 확보하고 연합국과의 약속도 지키려 했던 것이다. 미국의 원폭 투하와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본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고 8월 10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으며, 일본의 조기 항복은 결국 한반도의 군사적 분할로 이어졌다.
소련군은 ‘해방군’인가?
1945년 8월 9일 0시를 기해 소련군은 전장 4,000km가 넘는 전선에서 관동군을 주력으로 한 일본군을 상대로 전면공격을 개시하였다. 바실리옙스키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는 자바이칼 전선군, 제1, 2 극동전선군, 태평양함대, 아무르강 적기 소함대로 이루어졌다. 170만 명이 넘는 소련 극동군은 75만명에 불과한 일본 관동군을 수적으로 압도했다. 한반도를 담당한 것은 제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이었는데, 치스차코프 대장이 사령관이었다. 제25군은 애초에는 보조적인 역할에 한정되었으나 8월 10일부터 임무가 변경되어 전선의 주요 타격 방향에서 행동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의 소련군들. 1945년 8월 9일 0시 소련군의 대일전이 시작되자
군인들이 출동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9일과 10일 태평양 함대 소속 소련 공군이 일본 해군기지가 소재한 웅기, 나진, 청진에 맹폭을 가하면서 소련군의 한반도 진격이 시작되었다. 10일 오전 소련 제1극동전선군 소속 제25군 부대가 경흥을 점령하였다. 11일에는 태평양 함대 소속 정찰대원들이 별다른 작전 없이 웅기항에 상륙하였고, 그 이튿날 육전대 주력이 도착하여 25군 제393보병사단과 공동으로 이 지역을 장악하였다. 12~13일에는 일본군과의 소규모 전투가 벌인 후 나진을 접수하였다. 그러나 13~16일에 걸쳐 일본군이 거세게 저항하면서 청진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청진에서 4천명의 수비대를 배치해 저항했는데 소련군 제25군 393보병사단이 일본 나남 보병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16일 오후 육전대와 공동으로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17일 소련군은 나남을 점령하였으며, 일본군이 해로를 통해 본국으로 퇴각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19일에 어대진(漁大津), 21일에 원산에 해군을 상륙시켰다. 소련군의 군사작전은 주로 함경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서북지방의 진주는 다소 늦게 이루어졌다. 8월 24일 제25군 39보병사단 낙하부대가 평양과 함흥에 투하되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주5)
배 위에서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는 소련 해군 병사들(1945.8.9.)
8월 10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인다고 연합국에 통보하였고, 15일 일본천왕 히로히토가 항복방송을 하였다. 같은 날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38선을 경계로 하는 미소 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을 담은 일반명령 제1호 초안을 스탈린에게 제안했고, 16일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였다. 소련은 만주와 쿠릴열도 등에서의 이권을 생각하고 한반도의 분할 점령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항복 선언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곧장 군부대들에 전투중지와 항복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스탈린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이 있을 때까지 전투행동을 계속 수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일본군이 완전히 항복하게 되는 20일까지 한반도 이북지역에서 소련군과의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소련의 대일전은 열흘 정도에 불과하였고 일본의 항복 선언이 신속히 이루어졌지만 전투는 예상보다 격렬했다. 일본군 전체 전사자는 83,737명에 달했고, 전쟁포로는 9월 3일 이후에 항복한 인원수 79,276명을 포함하여 640,276명에 이르렀다. 제25군 사령관 I. M. 치스차코프의 회고에 의하면, 제25군은 6천명의 장군 및 장교를 포함하여 총 17만 명의 일본군 포로를 잡았다. 소련군이 입은 인명 손실 역시 적지 않았다. 대일전에 참전한 3개의 전선군 즉, 자바이칼전선, 제1극동전선, 제2극동전선은 도합 3만 5천명 이상이 전사, 부상 혹은 질병 등의 피해를 입었다. 이 가운데 조선으로의 진격을 담당한 제25군이 입은 피해는 사망 1,446명을 포함하여 총 4,717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다. 이 가운데 한반도 전투과정에서 입은 소련 지상군과 해군의 사상자 총수는 1,963명이며, 이 중 전사자는 691명에 달하였다. 한반도 내 소련군 전사자 691명은 중국 내 전사자 9,272명에 비하면 적은 수이지만 전장 규모와 짧은 작전 기간을 감안할 때 일본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3년 동안 소련군의 총 전사자 수가 299명이었는데, 실질적으로 10일 남짓한 기간에 그 배 이상의 희생자가 난 것을 감안하면 비교적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것은 틀림없었다.(주6)
이 때문에 소련과 지금의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본의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전투를 벌인 유일한 군대가 소련군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러시아 학자 유리 바닌은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은 곧장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해방시켰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주7) 이러한 주장은 일면 타당한 측면이 있지만, 일본의 항복은 1941년 12월 이후 진행된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온 결과물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태평양 전쟁을 통해 일본군의 전쟁 수행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에서 소련군의 참전이 일본군 지도부의 마지막 전의를 상실시킨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일본은 미국이나 소련 단독의 힘이 아니라 두 세력의 유기적인 결합 때문에 항복했던 것이다.(주8)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 소련의 참전 목적은 대일전을 통해 일본군국주의를 분쇄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것이었다. 소련군이 한반도 해방에 적극적인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대일전 참전의 부수적인 결과물이었다. 미국은 소련에 사전 예고도 없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조기항복을 받아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무산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고, 소련 또한 원폭 공격을 받은 일본이 미국에 조기 항복할까봐 부족한 준비상황에서도 참전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었던 것처럼 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 또한 조선의 해방을 목적으로 대일전을 벌인 ‘해방군’은 아니었다.
소련군의 북한지역 점령과 북한 정책
한반도에 대한 진격작전을 전개한 소련군 제25군 선발대가 21일 함흥에 진주했다. 24일 비행기로 함흥에 도착한 치스차코프는 시내로 들어가 도청간부들과 행정권 접수 교섭을 개시했다. 25일 일본헌병과 경찰이 치안을 유지하고 행정사무는 종전대로 도지사와 그 부하직원이 집행하며, 치안을 어지럽히는 자는 엄벌에 처하고 공장과 사업장, 광산 등은 조업을 계속하며, 물자의 도외반출을 금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이날 오후 함경남도 공산주의자협의회의 송성관, 최기모, 임충석, 김인학과 건국준비위원회 함경남도지부의 도용호, 최명학 등 6명이 치스차코프를 방문, 조선민족함경남도집행위원회를 결성한 사실을 알리며 행정권을 비롯한 일체의 권한을 이 위원회로 이양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치스차코프는 일본측과의 합의를 취소하고, 도용호를 위원장으로 하는 집행위원회가 앞으로 함남의 치안과 행정 일체를 장악할 것임을 통고하고, 경찰의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이후 집행위원회는 공산주의자협의회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각각 11명씩을 선출해 22명으로 지도부를 구성하고 함경남도 임시인민위원회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주9)
1945년 8월 24일 함흥에 도착한 치스차코프_사령관
8월 24일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공수되었으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8월 26일 오후 평양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을 마중 나온 라닌 중좌의 권유에 따라 비행장에 모인 조선인들에게 짤막한 연설을 했다. “친애하는 동지들, 볼셰비키 당과 소련 정부가 일본 침략지들로부터 해방시키라고 우리를 이곳에 보냈습니다. 우리는 정복자가 아니라 해방자로서 이곳 당신들에게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질서를 당신들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당신들 인민은 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당신들의 손으로 권력을 장악하십시오. 그리고 당신들의 미래를 건설하십시오. 우리는 당분간 당신들을 보호할 것이며 당신들의 새 생활 건설을 도울 것입니다.”(주10)
연설을 끝내고 숙소인 평양시내 철도호텔에 도착한 치스차코프는 일본군 평양수비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 중장을 불렀다. 치스차코프는 다케시타에게 일본군 무장해제 절차 등을 통보하였다. 이 자리에는 평남 건준위원장이었던 조만식도 함께 했다. 이어 치스차코프는 후루카와 가네히데 평안남도 지사를 만나 행정권 이양 절차를 통보했는데, 후에 조선여성동맹 위원장을 지내는 박정애가 통역을 맡았다. 그날 밤 치스차코프는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및 건준 관계자들을 함께 만났다. 이 자리에는 건준 평남위원회 위원장 조만식과 공산주의자 현준혁 등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던 좌우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조만식은 치스차코프 대장에게 “소련군은 해방군인가, 아니면 점령군인가”라고 물었고, 이에 치스차코프는 “나는 순수군인이니 정치적인 문제는 정치전문가인 레베데프 소장이 오면 그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했다.
치스차코프 소련군 25군 사령관과 후루카와 가네히데 평남지사. 뒤쪽에 통역을 맡은 박정애의 모습이 보인다.(1945.8.26.)
평남건준 및 단체 대표들과 만난 치스차코프는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사위원회 위원들을 불러들여야 되겠다고 판단했다. 28일 레베데프가 평양에 도착하자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29일 소련군 지도부는 건준측과 공산당측 대표들을 소집해서 건준과 공산당이 1대 1로 합작해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할 것을 요구했고, 양측이 이를 수용하자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했다.(주11)
함흥과 평양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군의 초기 점령정책은 좌우세력의 연합에 기초하여 한국인에 의한 행정권 접수를 받아들이는 방향에서 이뤄졌다. 이 같은 방식은 소련군이 진주하는 지역마다 차례차례 적용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 집행위원회, 자치위원회 등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하던 명칭들도 점차 인민정치위원회, 인민위원회 등으로 통일되어 갔다. 평안북도에서는 민족주의계열의 이유필이 주도하는 평안북도자치위원회를 공산당과의 합작에 기초한 평안북도임시인민위원회로 개조, 이 조직에 행정권을 이양했다. 황해도에서는 소련군 장교들이 개입해 건국준비위원회 황해도지부를 황해도인민위원회로 개조시켜 행정권을 넘겨주었다.(주12)
소련의 대북한 점령정책은 스탈린의 ‘훈령’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9월 20일 스탈린은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리옙스키,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그리고 25군 군사회의 앞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훈령’을 보냈다.
1. 북조선 영토에 소비에트 및 여타의 소비에트 권력기관을 수창설하거나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 것.
2. 모든 반일민주정당 및 조직들의 광범위한 연합을 기반으로 북조선에 부르주아민주주의 권력수립을 방조할 것.
3. 이와 관련하여 붉은군대가 장악한 지역에서 반일민주조직과 정당의 설립을 방해하지 말고 그들의 사업을 도울 것.
4. 지역주민들에게 다음을 해설할 것.
a. 붉은군대는 일본침략자들을 괴멸시킬 목적으로 북조선에 들어왔으며, 조선에 소비에트질서를 도입하거나 조선영토를 획득할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
b. 북조선 공민의 사유 및 공공 재산은 소비에트 군 권력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
5. 지역주민들의 평화적인 노동을 계속하고, 산업, 상업, 공공 및 여타 기업들의 정상 작업을 보장하며, 소비에트 군 권력의 요구 및 지시를 수행하고,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군 권력에 공조할 것 등을 지역주민들에게 호소할 것.
6. 북조선 주둔군에 규율을 엄격히 준수하며, 주민들을 모욕하지 말고 예의있게 행동하도록 명령할 것. 종교의식‧예식의 수행을 방해하지 말고, 사원과 다른 종교기관들을 침해하지 말 것.
7. 북조선 민정사업의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가 실행할 것.(주13)
이 스탈린의 ‘훈령’은 북한 주둔 소련군의 대북한정책의 최고 지침이자 정책 규범이 되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소련이 초기, 적어도 모스크바 회담 이후 반탁운동으로 한반도가 분열되고 우익세력들이 격렬하게 반소반공노선을 들고 나오기 전까지는 소비에트 권력(사회주의 정권) 수립이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소련은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세력의 합작을 추진하였다. 조만식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당 등 좌파세력의 연합을 적극 추진하였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정권의 책임자로 조만식을 염두에 두기도 했었다.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한반도 분할 점령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국가이다. 소련은 대략 2,500만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이 기간 세계 전체 희생자의 절반에 이르는 수치이다. 전범국가인 독일이 600〜700만명, 같은 전범국가인 일본이 300만명 내외이고, 연합국이었던 미국이 40만명 내외, 영국이 50만명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소련의 인명 피해가 얼마나 막심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소련을 제외하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중국의 경우도 1,200만명 내외여서 소련에는 미치지 못한다. 인명 피해는 다른 물적 피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련이 전쟁 중에 입은 피해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주1)
소련이 이처럼 막대한 인명과 물질적 피해를 입고도 세계최고의 공업국가, 고도로 발전한 산업국가였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1930년대 ‘스탈린 혁명’으로 불리는 급속한 공업화, 산업 발전이었다. 모든 국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모든 가용가능한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지만 특히 소련의 경우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인력의 동원이 중요했다. 스탈린이 주창한 이른바 ‘사회주의 모국 수호 전쟁’에 모든 인민이 총동원되었고, 산업·공업에서 뒤지는 부분을 인간의 노동력으로 대체하며 독일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소련은 유럽전선에서 정말이지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기에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침공, 일본과의 전쟁을 무엇보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도 상황은 비슷했다. 물질적으로 압도적인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일본 또한 소련과 싸울 여력이 없었다. 일본으로서는 태평양에서 미국과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중국전선에서 최소한이라도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련과의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조건이 맞아떨어졌던 소련과 일본은 1941년 4월 13일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소련(러시아)과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계속해서 충돌했고, 여력이 된다면 언제든 전쟁을 할 수 있는 앙숙관계였다.
전쟁의 균형추가 연합국 측의 승리로 확실히 기울기 시작하면서 소련과 일본은 조만간 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하면서부터 소련을 참전시켜 일본을 패배시키고자 했다. 1942년 6월 하와이에서 거리 멀지 않은 북태평양에 위치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이 승리한 이후 전세는 바뀌었고, 1943년 중반부터는 일본이 전세를 뒤집기 어렵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944년 6월의 사이판 전투, 1945년 1월의 레이테 섬 전투, 1945년 4월의 오키나와 전투를 거치면서 일본의 패배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트루먼이 회고록에 밝힌 바에 의하면 미국은 소련의 참전이 없다면 1946년 11월 이전까지는 대일전의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미국은 소련에 계속해 대일전 참전을 요구했다. 미국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일본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소련의 참전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소련이 최초로 대일전 참전 의사를 밝힌 것은 1943년 10월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였다. 그해 11월의 테헤란회담에서 스탈린은 “히틀러 독일이 괴멸된 후 소련은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전쟁에서 연합군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관련된 정치적 문제들이 1944년 12월 14일 스탈린과 주소련 미국대사 해리만의 대담에서 드러났다. 스탈린은 남사할린과 쿠릴열도의 소련 반환,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포함한 요동반도 일부의 조차, 중국 중동철도와 남만주철도의 조차, 외몽고의 현상유지 등을 대일전 참전의 대가로 요구했던 것이다.(주2)
소련군 작전지도(1945.7)
1945년 2월 러시아 크림반도 남단 흑해 연안의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미국에 대독전이 끝난 2〜2개월 후에는 대일전에 참전할 것을 약속했다. 소련의 참전 대가로 루즈벨트와 처칠은 “외몽고의 현상유지, 사할린 남부 및 그 부속도서의 반환, 소련의 우선권 보장하에 다롄항의 국제화, 소련의 해군기지로서 뤼순항 조차 부활, 중국과 공동으로 중동·남만철도 이용 재개, 쿠릴열도의 소련 할양” 등이었다. 다만 외몽고와 다롄항과 뤼순항, 그리고 철도에 대한 협정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전제가 제시되었다. 얄타회담에서는 한반도 문제는 제외되었는데, 한반도는 소련의 동북아 전략 구상에서 만주와 일본에 비해 부차적이었기에 미국 등 연합국과의 협의 처리하기로 방침을 정했던 것이다.(주3)
소련은 얄타회담 약 2개월 후인 1945년 4월 5일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폐기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대일전 참전을 공식화했다. 5월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후 소련군은 극동으로 대규모 부대 이동을 개시했다. 부대는 철도를 통해 비밀리에 이동했는데 3개월 만에 극동의 병력수가 118만5천명에서 174만7천명으로 증가했다. 6월 말 바실리옙스키 원수가 이끄는 장령그룹이 치타에 도착해 대일전 준비를 지휘하기 시작했고, 7월말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가 공식 설치되었다. 8월 5일에는 연해주집단군이 제1극동전선군으로, 극동전선군이 제2극동전선군으로 개칭되어 개전을 위한 준비를 마무리했다. 그 사이 일본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막기 위해 7월 13일과 28일 두 차례에 걸쳐 스탈린에 사절단을 보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주4)
뤼순을 점령한 소련 해군 병사들이 소련국기를 세우고 있다.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오랫동안 종용했으나 1945년 7월 16일 원자탄 실험이 성공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원폭을 일본에 투하함으로써 전쟁을 조기에 종결짓고, 전후 경쟁자로 부상할 소련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하고자 했다.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열린 회담 중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원폭실험이 성공했음을 밝히자 스탈린은 크게 화를 냈으나 이미 소련은 그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계획대로 8월 6일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되었고,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소련 또한 8월 8일 일본 정부를 향해 대일전 참전을 선언하였고, 8월 9일부터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향해 전투에 돌입하였다.
소련군의 8월 9일은 연합국에 참전 약속한 마지막 날짜에 해당했다. 스탈린은 8월 7일 오후 4시 30분 공격작전 지령에 서명했으며, 소련군은 준비 부족에도 불구하고 연합국과의 참전 일자를 준수하였다. 소련은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일본이 조기에 항복하기 전 참전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의 이권도 확보하고 연합국과의 약속도 지키려 했던 것이다. 미국의 원폭 투하와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본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고 8월 10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으며, 일본의 조기 항복은 결국 한반도의 군사적 분할로 이어졌다.
소련군은 ‘해방군’인가?
1945년 8월 9일 0시를 기해 소련군은 전장 4,000km가 넘는 전선에서 관동군을 주력으로 한 일본군을 상대로 전면공격을 개시하였다. 바실리옙스키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는 자바이칼 전선군, 제1, 2 극동전선군, 태평양함대, 아무르강 적기 소함대로 이루어졌다. 170만 명이 넘는 소련 극동군은 75만명에 불과한 일본 관동군을 수적으로 압도했다. 한반도를 담당한 것은 제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이었는데, 치스차코프 대장이 사령관이었다. 제25군은 애초에는 보조적인 역할에 한정되었으나 8월 10일부터 임무가 변경되어 전선의 주요 타격 방향에서 행동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의 소련군들. 1945년 8월 9일 0시 소련군의 대일전이 시작되자 군인들이 출동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9일과 10일 태평양 함대 소속 소련 공군이 일본 해군기지가 소재한 웅기, 나진, 청진에 맹폭을 가하면서 소련군의 한반도 진격이 시작되었다. 10일 오전 소련 제1극동전선군 소속 제25군 부대가 경흥을 점령하였다. 11일에는 태평양 함대 소속 정찰대원들이 별다른 작전 없이 웅기항에 상륙하였고, 그 이튿날 육전대 주력이 도착하여 25군 제393보병사단과 공동으로 이 지역을 장악하였다. 12~13일에는 일본군과의 소규모 전투가 벌인 후 나진을 접수하였다. 그러나 13~16일에 걸쳐 일본군이 거세게 저항하면서 청진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청진에서 4천명의 수비대를 배치해 저항했는데 소련군 제25군 393보병사단이 일본 나남 보병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16일 오후 육전대와 공동으로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17일 소련군은 나남을 점령하였으며, 일본군이 해로를 통해 본국으로 퇴각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19일에 어대진(漁大津), 21일에 원산에 해군을 상륙시켰다. 소련군의 군사작전은 주로 함경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서북지방의 진주는 다소 늦게 이루어졌다. 8월 24일 제25군 39보병사단 낙하부대가 평양과 함흥에 투하되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주5)
배 위에서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는 소련 해군 병사들(1945.8.9.)
8월 10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인다고 연합국에 통보하였고, 15일 일본천왕 히로히토가 항복방송을 하였다. 같은 날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38선을 경계로 하는 미소 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을 담은 일반명령 제1호 초안을 스탈린에게 제안했고, 16일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였다. 소련은 만주와 쿠릴열도 등에서의 이권을 생각하고 한반도의 분할 점령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항복 선언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곧장 군부대들에 전투중지와 항복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스탈린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이 있을 때까지 전투행동을 계속 수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일본군이 완전히 항복하게 되는 20일까지 한반도 이북지역에서 소련군과의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소련의 대일전은 열흘 정도에 불과하였고 일본의 항복 선언이 신속히 이루어졌지만 전투는 예상보다 격렬했다. 일본군 전체 전사자는 83,737명에 달했고, 전쟁포로는 9월 3일 이후에 항복한 인원수 79,276명을 포함하여 640,276명에 이르렀다. 제25군 사령관 I. M. 치스차코프의 회고에 의하면, 제25군은 6천명의 장군 및 장교를 포함하여 총 17만 명의 일본군 포로를 잡았다. 소련군이 입은 인명 손실 역시 적지 않았다. 대일전에 참전한 3개의 전선군 즉, 자바이칼전선, 제1극동전선, 제2극동전선은 도합 3만 5천명 이상이 전사, 부상 혹은 질병 등의 피해를 입었다. 이 가운데 조선으로의 진격을 담당한 제25군이 입은 피해는 사망 1,446명을 포함하여 총 4,717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다. 이 가운데 한반도 전투과정에서 입은 소련 지상군과 해군의 사상자 총수는 1,963명이며, 이 중 전사자는 691명에 달하였다. 한반도 내 소련군 전사자 691명은 중국 내 전사자 9,272명에 비하면 적은 수이지만 전장 규모와 짧은 작전 기간을 감안할 때 일본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3년 동안 소련군의 총 전사자 수가 299명이었는데, 실질적으로 10일 남짓한 기간에 그 배 이상의 희생자가 난 것을 감안하면 비교적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것은 틀림없었다.(주6)
이 때문에 소련과 지금의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본의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전투를 벌인 유일한 군대가 소련군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러시아 학자 유리 바닌은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은 곧장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해방시켰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주7) 이러한 주장은 일면 타당한 측면이 있지만, 일본의 항복은 1941년 12월 이후 진행된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온 결과물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태평양 전쟁을 통해 일본군의 전쟁 수행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에서 소련군의 참전이 일본군 지도부의 마지막 전의를 상실시킨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일본은 미국이나 소련 단독의 힘이 아니라 두 세력의 유기적인 결합 때문에 항복했던 것이다.(주8)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 소련의 참전 목적은 대일전을 통해 일본군국주의를 분쇄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것이었다. 소련군이 한반도 해방에 적극적인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대일전 참전의 부수적인 결과물이었다. 미국은 소련에 사전 예고도 없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조기항복을 받아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무산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고, 소련 또한 원폭 공격을 받은 일본이 미국에 조기 항복할까봐 부족한 준비상황에서도 참전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었던 것처럼 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 또한 조선의 해방을 목적으로 대일전을 벌인 ‘해방군’은 아니었다.
소련군의 북한지역 점령과 북한 정책
한반도에 대한 진격작전을 전개한 소련군 제25군 선발대가 21일 함흥에 진주했다. 24일 비행기로 함흥에 도착한 치스차코프는 시내로 들어가 도청간부들과 행정권 접수 교섭을 개시했다. 25일 일본헌병과 경찰이 치안을 유지하고 행정사무는 종전대로 도지사와 그 부하직원이 집행하며, 치안을 어지럽히는 자는 엄벌에 처하고 공장과 사업장, 광산 등은 조업을 계속하며, 물자의 도외반출을 금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이날 오후 함경남도 공산주의자협의회의 송성관, 최기모, 임충석, 김인학과 건국준비위원회 함경남도지부의 도용호, 최명학 등 6명이 치스차코프를 방문, 조선민족함경남도집행위원회를 결성한 사실을 알리며 행정권을 비롯한 일체의 권한을 이 위원회로 이양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치스차코프는 일본측과의 합의를 취소하고, 도용호를 위원장으로 하는 집행위원회가 앞으로 함남의 치안과 행정 일체를 장악할 것임을 통고하고, 경찰의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이후 집행위원회는 공산주의자협의회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각각 11명씩을 선출해 22명으로 지도부를 구성하고 함경남도 임시인민위원회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주9)
1945년 8월 24일 함흥에 도착한 치스차코프_사령관
8월 24일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공수되었으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8월 26일 오후 평양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을 마중 나온 라닌 중좌의 권유에 따라 비행장에 모인 조선인들에게 짤막한 연설을 했다. “친애하는 동지들, 볼셰비키 당과 소련 정부가 일본 침략지들로부터 해방시키라고 우리를 이곳에 보냈습니다. 우리는 정복자가 아니라 해방자로서 이곳 당신들에게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질서를 당신들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당신들 인민은 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당신들의 손으로 권력을 장악하십시오. 그리고 당신들의 미래를 건설하십시오. 우리는 당분간 당신들을 보호할 것이며 당신들의 새 생활 건설을 도울 것입니다.”(주10)
연설을 끝내고 숙소인 평양시내 철도호텔에 도착한 치스차코프는 일본군 평양수비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 중장을 불렀다. 치스차코프는 다케시타에게 일본군 무장해제 절차 등을 통보하였다. 이 자리에는 평남 건준위원장이었던 조만식도 함께 했다. 이어 치스차코프는 후루카와 가네히데 평안남도 지사를 만나 행정권 이양 절차를 통보했는데, 후에 조선여성동맹 위원장을 지내는 박정애가 통역을 맡았다. 그날 밤 치스차코프는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및 건준 관계자들을 함께 만났다. 이 자리에는 건준 평남위원회 위원장 조만식과 공산주의자 현준혁 등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던 좌우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조만식은 치스차코프 대장에게 “소련군은 해방군인가, 아니면 점령군인가”라고 물었고, 이에 치스차코프는 “나는 순수군인이니 정치적인 문제는 정치전문가인 레베데프 소장이 오면 그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했다.
치스차코프 소련군 25군 사령관과 후루카와 가네히데 평남지사. 뒤쪽에 통역을 맡은 박정애의 모습이 보인다.(1945.8.26.)
평남건준 및 단체 대표들과 만난 치스차코프는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사위원회 위원들을 불러들여야 되겠다고 판단했다. 28일 레베데프가 평양에 도착하자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29일 소련군 지도부는 건준측과 공산당측 대표들을 소집해서 건준과 공산당이 1대 1로 합작해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할 것을 요구했고, 양측이 이를 수용하자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했다.(주11)
함흥과 평양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군의 초기 점령정책은 좌우세력의 연합에 기초하여 한국인에 의한 행정권 접수를 받아들이는 방향에서 이뤄졌다. 이 같은 방식은 소련군이 진주하는 지역마다 차례차례 적용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 집행위원회, 자치위원회 등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하던 명칭들도 점차 인민정치위원회, 인민위원회 등으로 통일되어 갔다. 평안북도에서는 민족주의계열의 이유필이 주도하는 평안북도자치위원회를 공산당과의 합작에 기초한 평안북도임시인민위원회로 개조, 이 조직에 행정권을 이양했다. 황해도에서는 소련군 장교들이 개입해 건국준비위원회 황해도지부를 황해도인민위원회로 개조시켜 행정권을 넘겨주었다.(주12)
소련의 대북한 점령정책은 스탈린의 ‘훈령’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9월 20일 스탈린은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리옙스키,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그리고 25군 군사회의 앞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훈령’을 보냈다.
1. 북조선 영토에 소비에트 및 여타의 소비에트 권력기관을 수창설하거나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 것.
2. 모든 반일민주정당 및 조직들의 광범위한 연합을 기반으로 북조선에 부르주아민주주의 권력수립을 방조할 것.
3. 이와 관련하여 붉은군대가 장악한 지역에서 반일민주조직과 정당의 설립을 방해하지 말고 그들의 사업을 도울 것.
4. 지역주민들에게 다음을 해설할 것.
a. 붉은군대는 일본침략자들을 괴멸시킬 목적으로 북조선에 들어왔으며, 조선에 소비에트질서를 도입하거나 조선영토를 획득할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
b. 북조선 공민의 사유 및 공공 재산은 소비에트 군 권력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
5. 지역주민들의 평화적인 노동을 계속하고, 산업, 상업, 공공 및 여타 기업들의 정상 작업을 보장하며, 소비에트 군 권력의 요구 및 지시를 수행하고,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군 권력에 공조할 것 등을 지역주민들에게 호소할 것.
6. 북조선 주둔군에 규율을 엄격히 준수하며, 주민들을 모욕하지 말고 예의있게 행동하도록 명령할 것. 종교의식‧예식의 수행을 방해하지 말고, 사원과 다른 종교기관들을 침해하지 말 것.
7. 북조선 민정사업의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가 실행할 것.(주13)
이 스탈린의 ‘훈령’은 북한 주둔 소련군의 대북한정책의 최고 지침이자 정책 규범이 되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소련이 초기, 적어도 모스크바 회담 이후 반탁운동으로 한반도가 분열되고 우익세력들이 격렬하게 반소반공노선을 들고 나오기 전까지는 소비에트 권력(사회주의 정권) 수립이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소련은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세력의 합작을 추진하였다. 조만식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당 등 좌파세력의 연합을 적극 추진하였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정권의 책임자로 조만식을 염두에 두기도 했었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입성한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조만식 선생을 만나서 북조선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하루 전 평양에 들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킨 소련군 특수부대장 라닌 중좌의 모습도 보인다.(가운데)
한편, 이 스탈린의 훈령에서 제2항의 “부르주아민주주의 권력 수립 방조”를 두고 일각에서는 북한에서의 단독정권 수립을 지시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주14)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여러 면에서 타당하지 않다. 우선 당시 상황은 미소관계가 소련이 분단정권 수립을 추구할 정도로 악화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좌파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만 한정해서 단독정권을 추진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식민지피압박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지원하는 것을 대외정책으로 추진했던 소련의 입장에서 해방된 지 한 달밖에 안 된 한반도의 분단을 획책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이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권력 수립 노선’은 좌우 연합을 통해 ‘친소’적인 성격의 권력기관을 수립하여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이북지역에서 친소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차원의 정부 수립 과정에서 자신에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려는 복안이었던 것이다.(주15) 당시 공산주의자들도 박헌영의 ‘8월 테제’를 통해 이 같은 ‘부르주아민주주의 노선’을 실천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입장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입성한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조만식 선생을 만나서 북조선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하루 전 평양에 들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킨 소련군 특수부대장 라닌 중좌의 모습도 보인다.(가운데)
한편, 이 스탈린의 훈령에서 제2항의 “부르주아민주주의 권력 수립 방조”를 두고 일각에서는 북한에서의 단독정권 수립을 지시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주14)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여러 면에서 타당하지 않다. 우선 당시 상황은 미소관계가 소련이 분단정권 수립을 추구할 정도로 악화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좌파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만 한정해서 단독정권을 추진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식민지피압박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지원하는 것을 대외정책으로 추진했던 소련의 입장에서 해방된 지 한 달밖에 안 된 한반도의 분단을 획책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이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권력 수립 노선’은 좌우 연합을 통해 ‘친소’적인 성격의 권력기관을 수립하여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이북지역에서 친소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차원의 정부 수립 과정에서 자신에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려는 복안이었던 것이다.(주15) 당시 공산주의자들도 박헌영의 ‘8월 테제’를 통해 이 같은 ‘부르주아민주주의 노선’을 실천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입장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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