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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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강화도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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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871년 6월 1일 ~ 1871년 6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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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871년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의 전쟁.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조선에 대해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했다. 1871년 4월 덕진진과 광성보를 점령한 미국 함대는 조선에 심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교섭에 응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과 달리, 대원군의 결사항전을 본 미국은 결국 함대를 이끌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후 조선의 쇄국정책과 배외의식은 더욱 견고해졌다.
배경
조선과 미국은 1855(철종 6), 1865(고종 2), 1866년에 미국 배가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 영일연해, 선천군에 표류함으로써 3차례의 접촉이 있었는데,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1866년 7월 평양경내의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전개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하고, 청국정부에 사건의 조사를 의뢰했다. 또한 1866년에는 병인양요
미국 국무부는 조선과의 통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군함을 거느리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871년 조선측과의 교섭책임을 주청 특명전권공사 F. F. 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
조선정부는 남양부사로부터 이러한 급보를 전해 듣고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이창회(李昌會)를 강화판관에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 서울에 있는 각 영(營)으로부터 군대를 차출하고 대포·화약·군량미를 수송했다. 그해 4월 14일 조선정부에서 한학역관(漢學譯官)을 파견하자 로는 미관(微官)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상대하지 않고 고관(高官)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덕진진 공조루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사적 제2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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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사적 제2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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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로저스는 해군 중령 블레익으로 하여금 소선 4척과 포함 2척을 거느리고 염하(鹽河) 일대를 측량하게 했는데, 이들이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津)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는 포격을 가했고,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했다. 그결과 미국측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해 4월 15일 대원군
로는 무단공격의 책임은 조선에 있고 3, 4일 내에 협상하지 않으면 미국은 자유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해 4월 23일 로저스는 공격작전을 지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물류도를 출발하여 초지진에 상륙했으며 이튿날 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공격·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왔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륙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결과
이 격전에서 조선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등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劉禮俊) 등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로 퇴각할 것이라 생각해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이러한 조선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기하던 미국측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미국측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 조선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또한 대규모 군사행동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 외의 일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해 5월 15일 조선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되었을 경우에는 구조·보호해달라고 요청한 후, 다음날 전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했고 배외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덕진진 경고비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사적 제2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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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충비 신미양요 때 미국에 맞서 싸운 어재연, 어재순 장군의 업적을 기린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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