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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War II , 第二次世界大戰
요약: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추축국과 프랑스·영국·미국·소련·중국의 연합국 간의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해결되지 않은 분쟁이 다시 폭발한 것으로 여러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이었다.
유럽 대륙 전역뿐만 아니라 태평양의 섬들, 중국과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세계의 바다를 무대로 전쟁이 전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소련의 세력이 동유럽 여러 나라까지 뻗치는 결과를 낳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세계의 지배력이 서유럽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000만~5,0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인 동시에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World War II)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습들
주요참전국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이상 추축국[樞軸國])과 프랑스·영국·미국·소련·중국(이상 연합국
제1차 세계대전이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둔 분쟁이 20년 동안의 불안한 잠복기를 거쳐 다시 폭발한 제2차 세계대전은 여러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이었다. 이 전쟁은 유럽 대륙 전역뿐만 아니라 태평양의 섬들, 중국과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세계의 바다를 무대로 전개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제2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지정학적 역사의 분수령으로서, 소련의 세력이 동유럽 여러 나라까지 뻗치는 결과를 낳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세계의 지배력이 서유럽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000만~5,0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인 동시에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국민의 굴욕감과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항, 바이마르 공화국을 괴롭힌 사회 혼란 및 정치 불안은 극렬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지향하는 나치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라인란트
1936년말 이미 에티오피아에서 침략행위에 들어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반코민테른 협정
1938년 3월 히틀러는 독일군을 보내 오스트리아폴란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련독일·소련 불가침조약영국과 프랑스
1939년 9월 무렵 연합국
1939년의 전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독일군 보병사단의 질적인 우세와 기갑사단수였다. 예를 들어 독일은 1939년 9월에 6개 기갑사단을 갖고 있었지만, 연합군은 탱크를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당시 기갑사단은 하나도 없었다. 독일 공군(Luftwaffe)도 1939년 당시 세계 최고였다. 독일 공군은 육군을 지원하기 위한 지상 협력군이었지만, 독일 공군의 항공기는 연합국이 보유하고 있는 거의 모든 유형의 항공기보다 뛰어났다.
1935~39년에 전투력을 재정비하는 동안, 독일 전투기 생산량은 꾸준히 늘어났다. 독일 해군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당시보다 훨씬 불리한 상태였다. 1939년 9월의 시점에서 연합국이 독일보다 훨씬 많은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도 | 전투기종 | 기타기종 |
1933 | 0 | 368 |
1934 | 840 | 1,128 |
1935 | 1,823 | 1,360 |
1936 | 2,530 | 2,582 |
1937 | 2,651 | 2,955 |
1938 | 3,350 | 1,885 |
1939 | 4,733 | 3,562 |
항공기 | 영국 | 프랑스 | 폴란드 |
폭격기 | 536 | 463 | 200 |
전투기 | 608 | 634 | 300 |
정찰기 | 96 | 444 | - |
연안방위대 | 216 | - | - |
해군항공대 | 204 | 194 | - |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독일이 재무장을 시작하면서 채택한 작전 개념인 고속 기갑전투가 첫선을 보인 무대였다(→ 색인:기갑사단)
전쟁이 일어나자, 폴란드 육군은 100만 명이라는 많은 수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 육군은 애처로울 만큼 시대에 뒤져 있었고, 탱크, 병력 수송용 장갑차, 대전차포, 대공포도 전혀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폴란드군 지도자들은 대부분 기병이 폴란드 육군의 중요한 자산이며 독일의 기계화 부대쯤은 충분히 공격할 수 있다는 2가지 믿음에 매달려 있었다. 또한 이들은 폴란드 공군보다 거의 10배나 강력하고 우수한 독일 공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다. 독일의 공격은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되었다.
9월 중순에 이미 폴란드의 방어체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부대는 뿔뿔이 흩어져,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고립된 부대는 저마다 닥치는 대로 분투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9월 17일 소련군이 서쪽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들어왔다. 바르샤바의 폴란드인들은 공포의 폭격과 집중포화를 견디며 9월 28일까지 독일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독일군은 민간인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비오듯 포탄을 퍼부어, 바르샤바 시의 상당 부분을 폐허로 만들었다. 폴란드 육군 중 마지막까지 남은 상당수의 병력이 10월 5일까지 독일군에 저항했다.
독일군은 총 70만 명을 포로로 잡았고, 폴란드 병사 약 8만 명이 국경을 넘어 중립국으로 탈출했다. 폴란드 전체 사상자(사망자·부상자·실종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독일군은 약 4만 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어 독일군과 소련군이 폴란드에 진군했고 이들은 폴란드를 분할점령했다(→ 색인:폴란드 전투).
독일과 맺은 협정으로 짧은 기간에 쉽게 이익을 얻은 소련은 1939년 10월 10일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서구 열강은 소련이 맛본 굴욕을 공공연히 기뻐했다. 핀란드가 초기에 거둔 승리로 히틀러의 야욕은 더욱 드높아졌고 또 서구 민주주의국가들은 소련의 군사적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 전략가들은 지난 번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모든 것을 분쇄시킬 만한 맹렬한 공격을 퍼부은 끝에, 1940년 3월 마침내 핀란드를 굴복시켰다. 핀란드는 이 전투에서 약 7만 명, 소련은 2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폴란드에서 거둔 성공과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 실패로 대담해진 히틀러는 다른 나라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940년 5월 10일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히틀러의 신속한 공격으로 영국 원정군의 유럽 철수에 이용할 수 있는 항구는 케르크(프랑스) 하나만 남았고, 영국 내각은 마침내 구출 가능한 병력을 최대한 구출하기로 결정했다.
영국 해군부는 병력 철수에 도움이 될 만한 온갖 종류의 소형 선박을 끌어모았다. 영국군과 함께 다른 연합군도 독일군이 됭케르크마저 점령해버리기 전에 병력을 해안으로 철수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철수는 5월 26일에 시작되었고, 철수 작전이 끝난 6월 4일까지 19만 8,000명의 영국군과 14만 명의 프랑스군 및 벨기에군이 구조되었다.
중장비는 사실상 모조리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구조된 병사들은 영국의 경우 대부분 전투 경험이 많은 병사들로, 연합국 전력에 귀중한 보탬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프랑스가 붕괴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을 보고, 이탈리아도 비교전정책(非交戰政策)을 버려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독일과 맺은 협력 관계에서 확고한 이익을 얻으려면, 독일이 혼자 힘으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을 무찌르기 전에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알프스 국경에 약 30개 사단을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상태로 배치한 이탈리아는 프랑스 남동부에 대한 공격을 6월 20일까지 늦추었지만, 이 공격은 프랑스 방위군의 저항에 부딪쳐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독일군은 1940년 6월 14일 파리에 입성했고, 프랑스 서쪽 및 동쪽 변경을 따라 남쪽으로 더욱 깊숙이 진격해 2일 뒤에는 론 강 유역에 이르렀다.
6월 16일 밤 프랑스의 휴전 요청이 히틀러에게 전달되었다. 휴전 조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독일군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1940년 6월 22일 마침내 프랑스와 독일의 휴전협정이 르통데에서 조인되었다. 르통데는 1918년에도 휴전협정이 조인된 곳이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휴전협정은 6월 24일에 조인되었다. 이 두 휴전협정은 6월 25일 아침부터 효력을 발생했다.
6월 22일의 휴전협정에 따라 프랑스는 두 지역으로 나누어지고, 그중 한 지역은 독일군이 점령하는 대신 다른 한 지역에서는 프랑스가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점령 지역은 프랑스 북부지역 전체였다. 비점령지역인 남동부 지역은 프랑스 영토의 2/5에 불과했고, 정부는 비시에 있었다. 이탈리아는 매우 관대한 조건으로 프랑스와 휴전을 맺었다. 이탈리아가 주장한 프랑스 영토는 이탈리아군이 6월 20일부터 점령하고 있었던 국경 주변의 좁은 지역이었다.
1940년 6월 프랑스의 붕괴는 영국 해군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막강한 프랑스 해군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탈리아 해군도 영국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군함들이 독일 수중에 들어가면 해군력의 균형이 추축국 쪽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에, 독일이 프랑스 군함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전략적으로 영국에 엄청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 군함이 '해상 감시와 기뢰 제거 작업'에만 사용될 것이라는 프랑스 정부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1940년 7월 3일 영국군은 영국이 통제하고 있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모든 프랑스 군함을 압류했다.
프랑스 해군은 저항하는 시늉만 했다.
프랑스 점령으로 히틀러는 이제 유일하게 남은 적인 영국 쪽으로 병력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영국해협의 보호를 받고 있어서 막강한 독일 육군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1940년 7월 16일 히틀러는 영국 침공 계획을 마련하고 필요하다면 그 계획을 실행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영국의 막대한 해군력을 고려하면, 독일이 전투 지역에서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어야만 육해공군이 합동으로 영국을 침공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 독일 공군의 총수는 8월 2일에 '독수리의 날'이라는 훈령을 내리고, 공중에서 몇 차례 강력한 공습을 가하여 영국 공군력을 파괴함으로써 영국 상륙 작전의 길을 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공중전은 영국군의 승리로 끝나 히틀러는 영국 침공을 무기한 연기했다. 영국 공군
독일의 막강한 힘을 영국에게 과시하고 미국이 유럽에 개입하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히틀러는 다시 한번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거쳐 루마니아그리스 침공에 실패한 뒤, 히틀러는 헝가리·루마니아·슬로바키아를 추축국
불가리아는 1941년 3월에 추축국에 가담했다. 4월에 독일은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했다. 1941년 4월 6일 동시에 전개된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공격은 독일이 그때까지 치른 전투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4월 22일 그리스 육군이 항복했고 5월 11일까지 독일군은 그리스 본토 전역과 크레타 섬을 제외한 에게 해의 그리스 섬들을 모조리 점령했다. 그리스에 주둔해 있던 영국군 5만 명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탱크를 비롯한 중장비를 모조리 내버린 채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황급히 철수했다.
그리스 전투에서는 22만 명의 그리스군과 2만 명의 영국 및 영연방군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발칸 지역 전투에서 독일군은 통틀어서 2,500명의 사망자와 6,000명의 부상자 및 3,000명의 실종자를 냈다. 그리스 왕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정부는 그들의 군대가 무너지자 망명길에 올랐다. 점령국 처리문제는 추축국들의 뜻에 맡겨졌다. 유고슬라비아
즉 1941년 4월 10일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
발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영국 지상군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북아프리카에서 거둔 최초의 대승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영국에 선전포고했을 때, 키레나이카웨이벌
영국군은 병력면에서는 수가 훨씬 적었지만, 이탈리아군이 탱크 120대를 보유한 데 비해 275대의 탱크를 갖고 있었다. 3일 만에 영국군은 4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그리스 정부가 이집트 주둔 영국군을 그리스로 파견하겠다는 처칠로멜
이 기계화 사단은 이탈리아군을 돕기 위해 되도록 빨리 아프리카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로멜은 아프리카에 도착해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크게 줄어든 웨이벌 경의 영국 병력에 맞서 그는 순식간에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색인:북아프리카 작전).
웨이벌 경이 그전에 북아프리카에서 거두었던 멋진 성공은 독일군에 대항하여 발칸 전선을 형성하겠다는 처칠의 집요한 구상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그리스 때문에 키레나이카를 잃은데다 그런 희생을 치르면서 도와준 그리스마저 아무런 소득 없이 독일군에 빼앗기자, 처칠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1941년 여름에 웨이벌 경을 해임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웨이벌 경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서 거두었던 승리는 수에즈 운하를 남쪽에서 위협하는 요소와 케냐를 북쪽에서 위협하는 요소를 한꺼번에 제거한 중요한 것이었다.
이탈리아가 독일편에 가담하여 참전하고 프랑스 함락이 임박한 1940년 6월 10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영국은 지불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미국에 의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1940년 12월까지 영국은 끌어모을 수 있는 달러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전쟁물자를 미국에 주문했다. 처칠은 1940년 12월 루스벨트에게 무기 대여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군수 물자와 식료품 및 의류를 민주주의 국가(특히 영국)에 제공해달라고 제의했다. 루스벨트는 동의했고, 미국 의회는 1941년에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무기대여법은 어떤 나라의 방위가 미국 안보에 긴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그 나라 정부에 방어 물자와 역무 및 정보를 넘겨줄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도 대통령의 재량에 맡겼다.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이 법률 덕분에 루스벨트는 '폭력과 맞서 싸우는 세력'에 물질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정책을 사실상 자유롭게 추진할 수 있었다. 의회는 원조 자금도 너그럽게 인정하여, 1941년 11월까지 총액이 거의 13조 달러에 이르렀다(→ 무기대여정책)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영국 해군의 주요관심사는 우선 영국을 침략에서 지키는 것이었고, 영국에 반드시 필요한 식량 및 원료 공급로를 지키는 동시에 추축국의 교역로를 봉쇄하기 위해 해상 교역로 지배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전함과 항공모함 및 순양함과 그밖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 해군의 역할은 독일 해안을 지키고 독일의 해상수송을 보호하는 한편, 연합국의 해상수송을 공격하고 지상 및 공중 작전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소박한 목표는 우세한 지상군에 바탕을 둔 유럽 대륙의 강대국이라는 독일의 지위와 어울리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해군의 주요무기는 U-보트라는 잠수함이었다. 독일 해군은 잠수함으로 연합국 선박을 공격했고, 수상함대도 연합국의 해상 교역을 좀더 적극적으로 방해하게 되었다.
다음 세대에는 독일과 미국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것으로 히틀러는 내다보았으며, 이 전쟁에서는 영국이 독일의 동맹국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히틀러의 일정표에 따르면, 독일이 소련의 유럽 지역을 점령하는 시기는 대략 1943~45년으로 잡혀 있었다. 히틀러는 그 전에 우선 유대인 말살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대규모 동방 원정에 대비하여 독일의 후방을 안전하게 하고 전략적 방패를 마련하기 위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단기간의 국지전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국지전은 프랑스 침공이 될 것이다.
이러한 유럽 계획이 완전히 실현될 때까지는 세계전쟁을 피해야만 했다. 독일 제국이 유럽 대륙을 지배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독일은 경제적 기반과 넓은 영토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세계의 해양 강국에 맞서게 될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수적인 선행 조건이었다.
1941년 6월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개시했다.
독일은 300만 명으로 이루어진 150개 사단을 이 원정에 할당했다. 이 가운데에는 기갑사단도 19개나 포함되어 있었고, 원정군은 탱크 3,000여 대와 각종 야포 7,000문 및 항공기 2,5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최강의 침략군이었다. 소련은 독일보다 2~3배나 많은 탱크와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소련 항공기는 대부분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이었다. 그러나 소련 탱크는 독일 탱크와 거의 대등했다. 히틀러가 승리할 가능성을 줄인 더 큰 장애물은 스탈린이 깊숙한 후방에서 동원할 수 있는 예비 병력을 독일 정보부가 과소 평가한 것이었다.
그결과 독일군이 처음 만난 소련군을 뛰어난 기술로 분쇄하고 나자, 다시 새로운 부대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초기에 승리를 거둔 뒤 어느 쪽으로 진격할 것인가를 놓고 히틀러와 그의 참모들이 논란을 벌이면서 8월의 대부분을 허송했기 때문에, 정보부의 계산 착오가 낳은 결과는 훨씬 더 확대되었다. 독일의 계산에는 순전히 정치적인 요인도 작용했지만, 이 정치적 계산도 군사적 계산 못지 않게 잘못된 것이었다. 독일은 그들이 침략한 지 3~6개월 안에 소련 정권이 국내의 지지를 얻지 못해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다(→ 색인:동부전선).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영국의 상황은 당장 유리하게 바뀌었다.
그때까지 영국인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이 보기에 영국의 장래는 절망적이었다. 영국정부는 프랑스가 함락된 뒤에도 히틀러의 평화 제의를 거부하고 계속 싸우리라고 결정했지만, 미국이나 소련이 구원하러 오지 않을 경우 이 결정은 서서히 자멸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었다. 그런데 영국을 구해준 것은 엉뚱하게도 히틀러였다. 영국이 견디기 어려운 중압을 느끼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히틀러는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소련을 공격한 것이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루스벨트는 소련을 돕기로 결심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 대중의 의혹 때문에 소련도 미국의 무기 대여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선언을 1941년 11월까지 미루었다.
미국은 루스벨트의 선언이 이루어진 직후에 항공기와 탱크를 비롯한 보급품을 소련에 인도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기습 공격에 소련은 완전히 허를 찔렸고, 독일군은 초기에는 순조로운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고립된 소련군은 프랑스군과는 달리 완강하게 버티며 싸웠고, 독일군이 물밀듯이 휩쓸고 지나간 지 한참 뒤에도 주요도로를 계속 봉쇄함으로써 독일군을 견제했다.
후퇴하는 소련군이 채택한 초토화 정책도 독일군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진격에 직면하면 재빨리 농작물을 불태우고 다리를 파괴하고 공장을 비우면서 후퇴했다. 소련인들은 서쪽 끝에 있는 철강공장과 군수품공장의 생산 설비를 모조리 제거하여 철도를 통해 동부로 운반했고, 동부에서 다시 조립하여 강철과 군수품을 생산했다. 소련인들은 또한 철도 차량을 대부분 파괴하거나 철수시켰다. 또한 소련의 철도 궤도는 독일의 궤도와는 서로 간격이 달랐기 때문에 독일군은 소련의 철도망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7월 중순까지 독일군은 640km를 진격하여, 모스크바
독일군은 오랫동안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지만, 곧 초겨울 날씨와 소련군의 반격에 부딪혀 공세를 잠시 늦출 수밖에 없었다. 10월과 11월에는 겨울옷을 아직 지급받지 못한 독일군의 상당수가 동상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얼어붙을 듯한 추위는 독일군의 기계화된 수송 기관과 탱크, 야포 및 항공기를 마비시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련군은 두툼한 옷을 입었고, 겨울에는 독일군보다 훨씬 효율적인 전투력을 과시했다.
이 무렵 독일군 사상자 수는 이미 프랑스 전투와 발칸 전투에서 생긴 사상자 수를 훨씬 뛰어넘었다. 11월까지 독일군은 약 73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침략군은 장군에서 병졸에 이르기까지 나폴레옹의 비참한 모스크바 철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긴급 상황에서 히틀러는 지역에 따라 잠시 물러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걸음도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그의 결정으로 독일군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중국에서 아무 소득도 없이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에 싫증난 일본
네덜란드령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1940년말까지 일본 전략가들은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도 일본이 상대할 적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1년이 되자, 영국·네덜란드·미국도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연합 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은 태평양 확전(擴戰)의 주된 상대국으로 예측한 미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1년 12월 7~8일에 하와이 진주만과 필리핀에 있는 미국의 군사시설을 공격했다.
야마모토의 계획에 따라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 타격대는 미국 정찰대에 포착되지 않은 채 하와이 북쪽 440km 지점에 이르렀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이 항공모함에서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雷擊機) 및 약간의 전투기로 이루어진 360여 대의 항공기가 새벽 공기를 뚫고 2패로 나뉘어 날아올랐다.
이 항공기들은 진주만
그러나 일본의 공격은 1가지 중요한 점에서 실패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당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은 바다에 나가 있어서 피해를 면했고, 이 항공모함들은 그후 미국 해군의 초기 태평양 방위체제에서 핵심이 되었다. 진주만 해안에 있는 군사시설과 유류 저장 설비도 피해를 면했다. 일본이 예고 없이 감행한 진주만 기습공격은 미국국민을 단결시켰고, 미국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말끔히 없앴다. 12월 8일 미국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반대한 의원은 단 1명뿐이었다.
진주만을 공격한 바로 그날, 타이완[臺灣]에 기지를 둔 일본 폭격기들은 필리핀
2일 뒤, 일본은 다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전투기를 더 많이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역시 필리핀에 있는 카비테 해군기지도 파괴했다. 그러나 미국 아시아 함대의 일부는 11월에 이미 남쪽으로 내려갔고, 살아남은 주요함정과 폭격기는 보호해 줄 전투기가 없어서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후 2주간 더 남쪽에 있는 안전한 기지로 철수했다. 필리핀에는 지상군 이외에 전투기 몇 대와 잠수함 30여 척, 그리고 몇 척의 소형 선박이 필리핀을 방어하기 위해 남았다.
마닐라는 1942년 1월 2일 일본군에 함락되었지만, 그때 이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휘하의 미군과 필리핀군은 바타안 반도(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마닐라와 마주보고 있는 반도)와 코레히도르 섬
이들은 처음에는 바타안 반도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했지만, 일본은 그후 8주간 계속 병력을 증강했다. 맥아더는 3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로 전속 명령을 받고 떠나면서, 바타안 방어를 조너선 M. 웨인라이트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양쪽의 전사자는 각각 5,000명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일본 폭격기들은 1941년 12월 8일에 이미 홍콩에 있는 영국 공군력을 파괴했고, 영국과 캐나다 수비대는 크리스마스에 광둥 반도[廣東半島]에서 건너온 일본 지상군의 공격을 받고 항복했다. 일본군은 남쪽의 말레이 반도로 진격하는 동안 측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12월 9일에 방콕을 점령했고 12월 16일에는 미얀마(버마) 남쪽 끝에 있는 빅토리아 곶을 점령했다.
12월 8일부터 일본군은 여느 때처럼 공습과 함께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여, 소규모의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인도군을 압도했다.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와 순양함 리펄스호는 일본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싱가포르
일본은 순식간에 필리핀을 점령했고, 동남아시아와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을 점령했다.
1942년 2월 25일 일본군에 점령되지 않은 곳은 자바 섬뿐이었다. 연합군은 자바 섬을 침략하는 일본 함대를 차단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2월 27일 자바 해에서 벌어진 7시간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전함 5척을 잃었고, 일본군은 구축함 1척만 약간의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3월 9일 자바 섬에 주둔해 있던 연합군 2만 명이 항복했다. 그 직후 태평양 지역에는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전략 지시를 받는 미국·영국 통합 참모부가 설치되었다. 맥아더
그의 주요임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을 잇는 병참선을 지키고, 일본군을 태평양 안에 가두어놓고, 북아메리카 방위를 지원하고, 육해공군 합동 작전에 따른 대규모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당초 계획은 자바 섬 점령으로 실현되었지만, 미국 태평양 함대는 1942년 2월 1일에 마셜 제도를 공격했고 2월 23일에는 웨이크 제도를 공격했으며, 3월 1일에는 마커스 섬을 공격했다.
이와 함께 2월 23일에는 라바울을 폭격했고, 오스트레일리아에 기지를 세워 남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병참선을 확립했다. 그러자 일본은 계획을 확대하여,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이어진 연합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인들은 누벨칼레도니, 피지 제도 및 사모아 섬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뉴기니 동부도 차지하여 포트모르즈비에 비행기지를 만들면 오스트레일리아를 위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은 북태평양의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고 알류샨 열도
1942년 4월 18일에 미군 폭격기 16대가 도쿄
그러나 미군 전투기들도 일본군의 소형 항공모함 쇼호호와 순양함 1척을 침몰시켰다. 이튿날 일본 전투기들은 미국 항공모함 렉싱턴호를 격침하고 항공모함 요크타운호에 손상을 주었지만, 일본군의 대형 항공모함 쇼카쿠호는 심한 손상을 입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전투에서 너무 많은 항공기를 잃었기 때문에 포트모르즈비 점령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일본군은 싸움에 결말을 내기 위해 대형 항공모함 4척과 소형 항공모함 3척, 수상비행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2척, 전함 11척, 순양함 15척, 구축함 44척, 잠수함 15척, 그리고 잡다한 소형 함정들을 집결시켰다. 미국 태평양함대는 대형 항공모함 3척과 순양함 8척, 구축함 18척, 잠수함 19척만 갖고 있었지만, 함대를 지원해줄 항공기를 115대가량 보유하고 있었다. 6월 3일 미드웨이 섬
그래도 일본군은 6월 4일 새벽에 항공기를 보내어 미드웨이 섬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의 대형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침하고, 대형 순양함도 1척 침몰시켰다. 6월 4~5일 밤에 일본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이미 손상을 입었던 미국 항공모함 요크타운호는 6월 6일에 어뢰를 맞고 침몰했지만, 미드웨이 섬은 안전했다. 일본은 미드웨이에서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과 가장 우수한 해군 조종사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연합국이 미드웨이에서 거둔 승리의 중요한 측면이었다. 그후 일본과 연합국의 해군력은 사실상 대등해졌다. 일본은 전략의 주도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누벨칼레도니와 피지 제도 및 사모아 섬의 침략 계획을 취소했다.
일본이 서방 연합국에 대항하여 전쟁에 참여한 것은 중국에 영향을 주었다. 1941년 12월 9일 장제스
이것은 군사적 의도보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선전포고였다. 이어서 중국의 3개 야전군은 미얀마 국경으로 몰려갔다. 미얀마스틸웰
미국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모들은 1940년 11월 이래 '유럽 우선원칙'을 바탕으로 전략계획을 수립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상대로 동시에 참전하게 된다면, 유럽에서 공세를 펴고 있는 동안 태평양에서는 방어작전만 수행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참전으로 미국의 비교전(非交戰) 입장은 끝났다. 루스벨트와 처칠 및 그 참모들은 1941년 12월 22일 워싱턴에서 '아르카디아'라는 이름의 3주간 회담을 열었다. 여기서 미국측은 유럽 우선원칙의 유지를 재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2가지 계획안을 제시했다. '슬레지해머'라는 암호명을 가진 첫번째 시안은 영국이 프랑스에 상륙하기로 결정할 경우 영국의 공격력을 증강하기 위한 계획안이었고, '슈퍼짐내스트'라는 암호명을 가진 2번째 안은 영국이 리비아
한편 처칠은 소련의 용기를 북돋아줄 만한 일을 찾기에 골몰하고 었었다. 1942년 7월 17일에 이미 그는 독일군이 북극해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 때문에 러시아 북부로 보급품을 보내는 것을 당분간 중지해야겠다고 스탈린에게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43년 이전에는 유럽에 제2전선이 형성되지 않으리라고 스탈린에게 알리는 것은 더욱 난처한 일이었다.
1942년 내내 스탈린은 유럽 제2전선을 형성하라고 계속 압력을 넣었고, 다른 연합국의 공산당과 친소주의자들도 스탈린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미국의 육군 참모총장 조지 C. 마셜
1942년 7월 내내 계속된 제1차 엘알라메인 전투로멜
7월말에 이르자, 로멜은 이제 오킨렉이 아니라 자신이 수세에 몰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942년 7월 2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뉴브리튼 섬과 뉴아일랜드 섬, 솔로몬 제도 및 뉴기니 섬 동부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3단계의 제한공격을 명령했다(→ 색인:태평양전쟁)
미국의 태평양 방면 전략은 해군과 해병대를 이용하여 고리처럼 늘어서 있는 섬들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일본을 향해 진격하는 한편, 그보다 적은 규모의 지상군은 아시아 본토에서 중국군 및 영국군과 합동작전을 편다는 것이었다(→ 색인:동부솔로몬제도 전투). 1943년 1월 5일 과달카날
진지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 일본군은 2월초에 대담한 구축함 돌파 작전으로 1만 2,000명의 병력을 넘는 사상자를 냈다. 과달카날 전투
파푸아 섬에서 일본군은 1만 2,000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고, 350명이 포로로 잡혔다. 연합군 쪽에서는 3,500명이 전사하고 5,500명이 부상했다. 연합군 공군은 일본군 보급로를 차단하고 연합군의 보급품과 증원군을 수송함으로써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달카날 섬을 잃은 일본은 그때부터 수세에 몰리게 되고, 전망은 점점 어두워졌다. 라바울의 거점에서 뉴기니에 있는 라에살라마우아 진지로 증원군을 파견하려는 일본군의 마지막 노력은 바로 하나의 재앙이었다. 1943년 3월 2~4일에 벌어진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일본군은 구축함 4척과 수송선 8척을 잃었으며, 7,000명의 병력 가운데 목적지에 도달한 것은 1,000명뿐이었다.
몇 주일 뒤 연합군은 뉴기니에 있는 진지를 보수했고, 일본군은 공중에서 공격하는 것 말고는 연합군의 활동을 방해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4월말이 되기 전에 일본 해군은 또다시 재난을 당했다. 3월말에 라바울에 기지를 둔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파견된 야마모토
한편 북태평양에서 미국은 알류샨 열도
이것은 일본이 알래스카에 있는 미국군 기지를 넘보지 못하게 하고, 일본인들로 하여금 미국이 알류샨 열도를 통해 일본 본토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오판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1942년 8월에 미국은 알류샨 열도의 에이댁 섬에 병력을 상륙시킨 뒤, 다음달에는 에이댁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이 키스카 섬과 애투 섬에 대한 공습을 개시하는 한편, 해군은 일본군이 수비대를 증원하지 못하도록 섬을 봉쇄했다.
마지막으로 미국군은 키스카 섬을 우회하여 1943년 5월 11일에 애투 섬을 침공했다. 3주일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애투 섬을 지키고 있었던 일본군 2,300명은 거의 전멸했다. 그후 일본군은 키스카 섬에서도 철수했다. 알류샨 열도에 기지를 얻은 연합군은 쿠릴 열도를 폭격하기가 더 수월해졌다.
이집트에서는 처칠이 오킨렉의 후임으로 임명한 버너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몇 주일 동안 준비작업을 거친 뒤, 1942년 10월 23~24일 밤에 엘라메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엘알라메인 전투)
10월 중순까지 제8군은 23만 명의 병력과 대포를 장착한 탱크 1,230대가 작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의 병력은 8만 명에 불과했고 비교적 상태가 좋은 탱크는 210대뿐이었다. 공중 지원에서도 항공기 1,500대를 보유한 영국군은 350대밖에 보유하지 못한 적군에 비해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연합군이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추축국의 보급로를 항공기와 잠수함으로 공격했기 때문에, 로멜의 군대는 연료와 탄약 및 식량을 충분히 보급받지 못했다. 그리고 로멜 자신은 오스트리아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로멜이 아프리카로 돌아가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10월 25일 저녁 전선에 도착했을 때, 수비군이 사용할 수 있는 장갑차량은 이미 절반이 파괴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튿날 독일군은 서쪽으로 깊숙이 침투하려는 영국군 기갑부대를 대전차포로 공격하여 맹공을 저지했다. 그러나 1주일 뒤, 로멜은 더이상 몽고메리에게 저항할 힘을 잃고 영국군의 공격을 받으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튀니지로 서서히 쫓겨 들어갔고, 1943년 5월 마침내 항복했다(→ 북아프리카 작전).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도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막대한 병력 손실과 과로 및 다가오는 겨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미 사기가 떨어진 독일군은 붉은 군대
땅은 첫서리로 단단해져 있었지만, 아직 눈으로 길이 막히지는 않을 무렵이었다. 소련군의 반격은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바로 맞은편에 있는 25만 명의 독일군 2개 야전군을 포위하는 협공 작전의 형태를 취했다. 대세를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었던 1943년 1월초에 히틀러는 카프카스에서 병력을 빼내지 않으면 스탈린그라드 근처에 포위되어 있는 독일군은 더 큰 재난을 당하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독일군은 마침내 소련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독일로서는 전체적으로 우울한 시기였지만, 1가지 밝은 요소는 1942년에 U-보트
이에 독일은 U-탱커를 개발했다. U-보트를 개조한 대형 U-탱커는 먼 바다에서 작전을 펴고 있는 U-보트에 연료와 어뢰를 비롯한 보급품을 공급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연합국이 호송 선단을 밀착 경호하는 호위함
1943년 3월은 U-보트가 행운의 절정에 이른 달이었다. U-보트는 240척으로 늘어났고, 3월 1개월 동안 60만t이 넘는 선박을 격침했다. 최대 규모의 호송선단 공방전에서, 20척의 U-보트는 상대편 선박 77척 가운데 21척을 격침시키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반면에 U-보트의 손실은 1척뿐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연합국이 5가지의 대응책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연합국은 '지원부대' 운용을 다시 도입했고, 항공모함을 차츰 호위함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장거리 항공기가 바다에서 호송 선단을 엄호하기 시작했고, 함정들은 U-보트가 포착할 수 없는 초단파 레이더를 장착했으며, U-보트의 통로를 정기적으로 공습하기 시작했다(1943년 4~5월에 U-보트는 56척이 파괴되었음). -보트는 1943년 4월에 32만 7,943t을 격침했고, 5월에는 26만 4,852t을 격침했으나, 6월에는 9만 5,753t밖에 격침하지 못했다. 그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U-보트가 매달 거둔 전과는 1943년 7월과 9월과 1944년 3월을 제외하고는 10만t을 넘지 못했다.
1944년말에 U-보트는 잠수함 환기장치를 장착하여 물 속에서도 전지를 재충전하는 데 필요한 산소를 공급받게 되었고, 그 결과 '잠수할 수 있는' 어뢰정에서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거의 완전한 잠수함으로 바뀌었다. 같은 시기에 잠수시간이 더 길고 잠항 속도가 더 빠른 새로운 양식의 U-보트가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개량은 때가 너무 늦었다.
선단을 보호하기 위한 연합국의 호위함과 항공기는 독일을 이미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색인:스노클)
1942년초에 영국 공군의 폭격기 사령부는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전략적 공습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공장과 철도역, 조선소, 다리와 댐, 그리고 도시를 노린 이 공습에는 독일의 군수 산업 시설을 파괴하려는 의도와 함께 민간인의 가옥을 파괴함으로써 전쟁을 계속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 새로운 계획의 특징은 특정 목표물이 아니라 도시의 중심부를 야간 공습의 표적으로 삼는 지역 단위의 폭격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연합국은 1942년 3월에 이미 소이탄을 투하하여 불을 지르는 독일 방식을 이용하여 독일의 몇몇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색인:전략적 폭격, 집중 폭격). 5월 30~31일 밤에는 1,000개가 넘는 폭탄을 쾰른에 퍼부어, 건물 밀집 지역의 1/3이 쑥대밭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야간 전투기 부대가 방어전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런 작전은 폭격기 사령부에도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게 되었다. 1944년 3월 연합군 폭격기 부대의 1일평균작전 능력은 1942년의 500대에서 974대로 늘어나 있었다.
전쟁의 형세가 바뀌기 시작했는데도, 독일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인도적인 점령 정책을 계속 수행했다.
이 해결책은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물리적으로 멸종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색인:대량학살)
독일이 '최종적 해결'을 도입한 시기는 소련 원정을 준비하던 때와 같은 무렵이었다. 히틀러는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
따라서 독일이 1941년에 소련을 침공하자, 살인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기동대가 소련 점령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손에 죽은 유대인 수는 1941년말까지 약 140만 명에 이르렀다. 한편 1941년에는 유럽 중부와 서부의 유대인을 비슷한 방법으로 말살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졌다. 그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폴란드 동부의 강제수용소로 보낸 다음, 거기서 집단으로 학살하거나 죽을 때까지 노예 노동자로 혹사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1942년 5월부터 1944년 9월까지 4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링카 같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학살당했다. '최종적 해결' 과정에서 약 570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제국 안에 있는 유대인들을 멸종시킬 예정이었고 한편으로 슬라브족(주로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을 값싼 노동원으로 이용해야 할 '하등인간'으로 간주했다. 폴란드는 이 목적을 위한 연습장이 되었다. 1939년에 폴란드를 점령하자마자, 히틀러는 친위대에 명령을 내려 많은 폴란드 지식인을 죽이게 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통틀어 300만 명의 폴란드인(300만 명의 폴란드계 유대인 이외에)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히틀러는 소련 점령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슬라브족과 발트인을 독일의 지배에 무조건 복종시키고 경제적으로 착취할 작정이었다. 1941년 7월 독일군이 우크라이나
독일인의 잔학성에 대항하여 지하저항운동이 일어났다.
1944년에 이르자 소련·폴란드·유고슬라비아·프랑스·그리스 저항운동조직은 상당히 크게 성장하여, 전선에서 시급히 요구되는 많은 독일군 사단 병력들을 후방에 묶어두고 있었다. 독일 점령당국은 저항운동을 뿌리뽑으려고 했지만, 저항운동에 대한 앙갚음으로 민간인에게 무차별보복을 자행함으로써 저항운동을 근절하려는 시도는 타오르는 불길에 오히려 부채질을 했을 뿐이었다. 널리 인정되고 있는 바와 같이, 1944년까지 독일이 점령한 유럽 국가 사람들이 대부분 독일인에게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
1943년 9월말에 우크라이나의 독일군은 이미 드네프르 강까지 밀려나 있었다. 독일군은 사상 최대의 탱크전이었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2,900대의 탱크와 7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한편 미국 항공기들은 8월 17~18일에 웨와크(뉴기니 섬의 라에 서쪽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의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여, 200대가 넘는 항공기를 파괴했다.
히틀러는 임박한 연합군의 유럽 재진입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전략적으로 그에게 가장 불리한 점은 독일군 점령지역이 프랑스 서해안에서 그리스 동해안까지 너무 길게 뻗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합군의 다음 공격 지점이 어디인지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연합군의 가장 큰 전략적 이점은 선택할 수 있는 목표물의 범위가 넓다는 점과 우세한 해군력을 이용하여 독일군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점이었다.
추축국은 튀니지에서 병력을 구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1943년 한여름에 시칠리아 섬에 배치할 수 있었던 병력은 온갖 잡다한 병과의 이탈리아군 10개 사단과 독일군 2개 기갑부대뿐이었다. 한편 연합군은 약 50만 명의 병력을 시칠리아
이무렵 지중해 일대에서 연합국의 공군력은 추축국보다 훨씬 우세했기 때문에(독일과 이탈리아는 약 1,500대의 항공기를 갖고 있었지만, 연합국의 비행기는 4,000대가 넘었음) 추축국의 폭격기는 6월에 시칠리아 섬에서 이탈리아 중북부의 기지로 철수했다. 7월 10일 연합국 병력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주로 시칠리아인들이 지키고 있던 해안방어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시칠리아인들은 고향 땅이 독일군을 위한 전쟁터로 바뀐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을 애써 막으려 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섬에 상륙한 지 3일 만에 섬의 남동부를 평정했다. 추축국이 아프리카에서 잇따라 재난을 당한 뒤, 이탈리아의 대다수 지도자들은 연합국과 강화조약을 맺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은 이탈리아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들은 서둘러 행동을 취했다.
1943년 7월 24~25일 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대평의회는 무솔리니 탄핵안을 다수의 찬성으로 의결했고, 무솔리니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7월 25일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추축국은 약 16만 5,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 가운데 독일군은 3만 명 정도였다.
연합국이 시칠리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무솔리니
시칠리아를 확보한 연합군은 다음에 공격할 방향을 고르기 시작했지만, 선택의 폭이 너무 넓었다. 이탈리아의 '발가락'인 칼라브리아
초기의 저항은 사실상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험준한 지형이 대군의 병력 배치를 방해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천천히 진격했다. 연합군이 '발가락'에 상륙한 날, 이탈리아 정부는 연합국이 항복 조건으로 제시한 비밀조항에 동의했다. 이탈리아는 되도록 빨리 독일에 대항한 전쟁에 참여하여 그 정도에 따라 관대한 대우를 받기로 양해되었다. 항복이 발표된 것은 9월 8일이었다.
서방 연합국과 소련의 관계는 아직도 미묘했다.
미국과 영국은 보급품 호송과 프랑스 조기 침공을 요구하는 소련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자신들의 전쟁 목적과 스탈린의 목적이 정치적으로 다른 것에 당황하고 있었다. 가장 오래 지속된 의견 차이는 폴란드
1943년초 소련 정부는 논쟁 대상이 되어 있는 국경지방 출신의 폴란드인을 소련 시민으로 간주하여 붉은 군대에 징집하겠다고 발표했다. 4월 25일 소련 정부는 런던의 폴란드인 단체와 관계를 단절했고, 그후 모스크바는 전쟁이 끝난 뒤에 폴란드를 다스릴 괴뢰정부를 세우기 시작했다. 폴란드를 둘러싼 갈등 이외에 서방연합국과 소련은 아직도 독일에 점령되어 있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의견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스탈린을 자극하면서까지 전쟁 목적을 세부적인 사항에 일일이 적용하겠다고 고집하기보다는, 소련을 독일과 계속 싸우게 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독일의 전략은 모두 히틀러의 뜻에 따라 결정되고 있었는데, 1942년말부터 독일의 전략은 동부전선에 대한 소련의 공격과 남부 및 서부 전선에 대한 영·미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어, 아직도 독일이 지배하고 있는 넓은 지역(유럽의 대부분 지역과 북아프리카의 일부)의 방위를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그런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에서는 연합국이 꽁무니를 뺄 것이라고 생각했고, 서방 자본주의와 소련 공산주의의 '부자연스러운' 결합은 연합국이 승리를 얻기 전에 깨지리라고 기대했지만, 이런 막연한 기대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히틀러는 "독일은 세계의 강대국이 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말에 따라 일부러 독일 국민의 몰락을 주도하기로 결심했다. 히틀러의 융통성 없는 명령으로 인해 모든 군대는 전술적으로 전혀 가망이 없는 진지를 굳게 지키면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말아야 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항복할 수 없었다.
히틀러가 현위치 고수 전략을 쉽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장군들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독일 장군들은 지휘권을 잃거나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감히 히틀러의 말에 반대할 수 없었다. 과거에 독일군을 승리로 이끈 유능한 지휘관들이 1943~44년에 대부분 제거되었으며, 그결과 여러 사령관이 빈번히 교체되었고 사령부에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의심받은 사람들은 모두 침묵을 강요당했다.
1943년부터 히틀러는 동부전선의 독일군 병력을 빼내어 서부전선을 강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대부분의 서양 역사가들은 아직도 정치적 관점에서는 이 전략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1944년초에는 대규모 영·미 연합군의 서유럽 침공이 임박한 것처럼 보였고, 이 침공의 위험을 생각하면 동유럽의 점령지를 일부 잃어버리는 것은 덜 심각하게 여겼을 게 분명하다. 히틀러는 연합군이 1944년 6월에 프랑스 북부를 침공하기 시작한 뒤 서부전선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했고, 그후 2개월 동안 독일군이 연합군의 교두보를 노르망디로 제한하려고 분투하는 동안, 히틀러는 소련의 여름 공세(1944. 6~)로 동부전선에 있는 독일 중앙 집단군의 전멸을 감수했다.
그후 몇 주일 만에 붉은 군대는 비수 강과 동프로이센 국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부전선도 몇 주일 만에 허물어졌고, 연합군은 독일의 서쪽 국경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자 아직도 자신의 주요원칙을 고집하고 있던 히틀러는 남아 있는 병력을 모두 서부전선에 집결시켜, 영·미 연합군을 몰아내려고 했다. 나중에 벌지 전투
1943년 10월 첫주가 끝날 무렵, 붉은 군대는 드네프르 강 우안에 몇 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11월초에 붉은 군대
핀란드인들은 이제 1939~40년보다 더 나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핀란드
유럽의 연합군은 로마
기습을 당한 독일군은 처음에는 거의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계속 진격하지 않고 지체하는 바람에 독일군은 대열을 정비하여 반격에 나설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었고, 이때문에 연합군의 공격 효과가 전반적으로 약해졌다. 독일 육군 수뇌부는 오래 전부터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를 침공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연합군이 정확히 어디를 공격할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서방 연합국은 프랑스 북부 침공을 오랫동안 논의하여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을 세우고, 작전 개시일을 5월로 잡았다가 다시 연기했다.
이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가장 유명한 D-데이 1944년 6월 6일에 15만 6,000명의 병력이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함으로써 마침내 시작되었다. D-데이 아침 9시까지 연합군은 해안 방어선을 거의 다 돌파했지만, D-데이에 함락할 계획이었던 캉은 7월 9일까지 연합군의 맹공을 견뎌냈다. 캉은 연합군 진격의 중심점이었다. 독일군은 6월 6일에 이미 캉에 1개 기갑사단을 배치했고, 이튿날에는 2번째 기갑사단이 합류했다.
독일군 예비병력 대부분이 캉에서 벌어진 격전에 투입되었고 전선의 서쪽 끝부분에 있는 독일군도 미국군에 완강히 저항했다. 그런데도 연합군은 독일군 예비병력의 이동을 결정적으로 견제해준 공군력 덕분에 빠른 속도로 진격할 수 있었다. 연합군의 항공기는 동쪽으로 연결된 센 강의 다리와 남쪽으로 연결된 루아르 강의 다리를 거의 다 파괴했다. 그래서 독일군 예비 병력이 노르망디 전투 지역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게다가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 소사가 끊임없이 행군을 방해했기 때문에 그들의 도착은 한없이 늦어졌고, 소수의 병력이 간헐적으로 도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예비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던 곳에서도 독일군 내부의 망설임과 의견 충돌로 이동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히틀러는 연합군의 상륙지점은 정확히 예언했지만, D-데이 이후 연합군은 더 큰 규모의 2번째 침공을 센 강 동쪽에서 시도할 거라고 오판한 나머지 센 강의 서쪽으로 예비 병력을 이동하는 것을 좀처럼 허락하려 들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이미 노르망디에서 싸우고 있는 독일군이 너무 늦기 전에 새로운 방어선으로 질서 있게 후퇴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연합군의 진격으로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7월 17일에 연합군 항공기의 공격으로 자동차가 박살났고, 그 차에 타고 있던 로멜
로멜까지도 여기에 연루되었다(그러나 로멜 자신은 히틀러 암살에 반대했음). 마침내 이들은 히틀러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장차 새로운 정권이 수립될 베를린에서 육군 예비 병력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1944년 7월 20일 저항 조직에서 가장 행동적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나치의 반응은 야만적이었다. 직접 연루된 200명의 음모자 이외에 암살 계획과 약간의 관계를 갖고 있거나 전혀 관계가 없는 5,000명이 처형되었다. 로멜은 10월 14일에 자살했다. 그후 몇 주일 동안 독일군 고위사령부는 공포로 가득 차 활동이 마비되었다(→ 7월암살음모사건)
한편 연합군은 속속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있었다.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는 히틀러의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명령만 아니었다면, 독일군은 센 강까지 후퇴하여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연합군이 그토록 빨리 프랑스를 해방할 수 있었던 것은 히틀러가 어리석었기 때문이었다. 노르망디 전투에 투입된 독일의 많은 기갑부대와 보병 사단은 히틀러의 '후퇴 불가' 명령 때문에 그곳에 묶여 있다가 결국에는 궤멸했고, 대다수는 연합군이 쳐 놓은 덫에 걸려 꼼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뿔뿔이 흩어진 부대는 더이상 저항할 능력이 없었고, 영국군과 미국군의 기계화 부대는(주로 걸어서) 후퇴하는 일부 독일군을 곧 따라잡았다. 20만 명이 넘는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포로로 잡혔고, 1,200대의 독일 탱크가 전투중 파괴되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서 무서운 기세로 진격하여 9월초에 독일 국경에 접근했을 때, 그들이 독일 심장부로 계속 진격하는 데 장애가 될 만한 조직적 저항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독일 진격은 중지되었다. 9월초에 미국군과 영국군의 탱크는 독일보다 20배나 많았고 항공기는 25배 많았으며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을 거의 궤멸시켰으므로 그 여세로 루르 강 유역이나 자를란트 가운데 하나는 독일군한테서 쉽게 빼앗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1944년 11월까지도 여전히 이 두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9월에 연합군의 움직임이 느려진 이유는 최고 정책 입안자들 중 1944년 8월에 독일군이 그처럼 완전히 무너지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독일군이 완전히 무너진 틈을 이용해 독일 내부로 재빨리 쳐들어갈 정신적·물질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수비군을 집결할 시간적 여유를 얻었고, 이것은 독일에 점령된 유럽이나 전후 유럽의 정치 상황에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전략 폭격은 1944년초에 최대의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공군은 양적·질적으로 뚜렷한 향상을 보였다. 1944년 5월 유럽에 있는 미국 전략 공군 사령관 칼 스파츠는 독일의 종합 석유 생산 단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은 독일의 전쟁 수행 노력에 점점 더 많은 지장을 주게 되었다. 한편 전투기 생산이 줄어들고 노련한 조종사가 대부분 전사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의 저항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줄었다. 영국 공군
그러나 그후 몇 개월 동안 영국 공군은 철저한 대비에 중점을 두었고, 나중에는 주로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을 지원했다. 그러면서도 영국 공군은 독일 석유 생산 단지에 대한 미국군의 공격에 가담했으며, 대서양 전투
소련이 유럽 중부 및 남동부를 향해 진격해왔기 때문에 서방 연합군이 '해방된' 동유럽 국가들의 운명에 대해 스탈린과 합의해야 할 필요성은 훨씬 더 절박해졌다(→ 연합국)
그리고 루스벨트는 6월에 이 제안에 찬성했다.
히틀러는 아직도 연합군을 격퇴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한다는 원칙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1944년말 히틀러는 2번째 '총동원'의 결과 새로 얻은 병력을 모두 서부전선에 집결시켰다. 그는 10월 18일에 독일을 방어하기 위해 '국토방위군'을 편성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여, 16~60세의 건장한 남자를 모두 징집했다. 11월 중순에 서부전선의 연합군 6개 야전군은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 프랑스 제1군과 미국 제7군은 알자스의 라인 강 연안에 이르렀지만, 전선의 다른 지역에서는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
한편 독일은 프랑스에서 간신히 돌아온 병력 이외에 서둘러 이동시킨 예비 병력과 새로 조직한 병력으로 수비를 계속 강화하고 있었다. 독일은 연합국보다 물자가 훨씬 부족했지만, 독일군의 전선강화는 이제 연합군보다 더 빨리 이루어지고 있었다. 1944년 12월 중순 독일군은 대규모 반격을 개시하여 연합군을 놀라게 했다. 독일군은 이 공격을 위해 24개 사단을 끌어모은 다음, 숲이 우거진 아르덴 구릉 지대를 지나 미국군 보병만이 배치되어 있는 가장 취약한 지점으로 이 병력을 수송할 계획을 세웠다.
능숙하고 은밀하게 준비된 이 작전은 1944년 12월 16일에 시작되었다. 이 날은 안개가 끼고 비가 내려, 연합군 항공기가 공중에서 작전을 방해해도 그 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고 독일군은 판단했다. 120km의 전선을 따라 쐐기 모양의 대형을 갖춘 독일군은 8개 기갑사단을 앞세우고 연합군을 기습했다.
다른 부대보다 더 깊이 뚫고 들어온 제5기갑군은 지베와 디낭에 있는 뫼즈 강 도하 지점에서 32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의 분견대는 바스토뉴를 비롯한 아르덴 구릉 지대의 좁은 통로에 갇혀 측면에서 포위 공격을 받으면서도 굳세게 버텼다. 이어서 흔히 벌지 전투
그러나 이때쯤에는 연합군도 이미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날씨가 맑아지자, 5,000대나 되는 연합군 항공기가 독일군과 그들의 보급망을 폭격하거나 기총 소사를 퍼부었다. 연합군 진영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부대는 퇴로를 차단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 돌출부가 잘리지 않으려면 서둘러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 선봉 부대는 1945년 1월 8~16일에 퇴각했다. 이 공격은 연합군에게 작전 차질과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독일군은 이 공격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붓느라 좀더 오래 항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은 12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미국군 사상자수는 7만 5,000명에 이르렀다.
1944년말에 독일군은 아직도 폴란드의 서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며,동부 전선은 1939년 개전 당시의 국경보다 동쪽으로 320km 떨어진 지점에 형성되어 있었다(→ 독일사)
그러나 소련군은 발칸 반도 동부 지역에서 위로 올라와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를 통해 서서히 독일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독일은 측면에서 접근하는 소련군을 막기 위해 이쪽으로 병력을 돌렸기 때문에, 주요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이제 독일의 상황을 파악하여, 그 근본적 약점을 이용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소련군에게 보낼 군수품은 보급기지의 철도 종점에 충분히 쌓여 있었다. 이무렵에는 미국이 소련에 공급하는 트럭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소련군은 훨씬 더 많은 보병 여단을 트럭으로 실어나를 수 있었고, 탱크 생산도 계속 늘어났기 때문에 기갑군단과 기동군단의 수를 늘려 성공적인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12월말이 되기 전에 독일 육군 정보부는 소련군의 225개 보병사단과 22개 기갑군단이 발트 해와 카르파티아 산맥 사이의 전선에 집결하여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었다는 불길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 보고서를 받고도, "이건 칭기즈 칸 이후 최대의 속임수야! 이런 쓰레기 같은 보고서를 만든 책임자가 누구지?"하고 외치면서 믿으려 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서부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르덴 반격을 기꺼이 중지했다면,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다. 소련군은 1945년 1월 12일에 공격을 시작했다. 5일 뒤 붉은 군대는 바르샤바를 점령했고, 공격을 시작한 지 1주일 뒤에는 640km 너비로 전개하여 160km나 밀고 들어온 지점에서 독일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 위기에 부딪히자, 히틀러는 서부전선에서 공격을 계속하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러나 그는 그에 반대하는 조언을 무시하고, 부다페스트를 구하기 위해 폴란드가 아닌 헝가리로 제6기갑군을 보냈다. 따라서 소련군은 2주일이 넘도록 폴란드를 통해 계속 진격할 수 있었다. 1945년 2월 13일 소련군은 부다페스트를 점령했다.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루스벨트와 스탈린, 처칠은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만났다.
이 회담은 주로 폴란드 문제에 대한 처리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서방연합국 지도자들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는 소련 점령 당국이 이미 폴란드 임시정부로 승인했던 이른바 루블린 위원회를 핵심으로 하여 폴란드 통일국가의 임시정부를 구성하며 자유선거는 보류한다는 데에 동의했다. 이들은 또한 소련이 1939년에 점령한 폴란드 동부지역 대신 서부 국경 너머의 지역을 폴란드에 떼어준다는 데 합의했다.
서방 연합국 지도자들은 '해방된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적 요소'와 '자유선거'로 '국민의 뜻에 따른 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지지한다는 선언 이외에 스탈린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독일에 대해 독일 영토를 점령지역으로 분할한다는 계획을 재확인했지만, 프랑스에 점령지역을 제공하기 위해 미국 점령지역을 줄이기로 했다.
세 지도자는 패배한 독일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필수품을 공급하기로 약속하고, 군비 생산에 이용될 수 있는 독일의 모든 산업을 '제거하거나 통제하며', 주요한 전범들을 재판에 회부하고, 독일이 배상금을 얼마나 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약속했다.
지상군이 독일에 대한 마지막 공격 태세를 갖추기 전에 서방 연합군은 공중 폭격을 강화했다.
이 공습은 드레스덴
3월 23~24일 밤 몽고메리
이제 독일 군인과 민간인의 가장 큰 소망은 영국군과 미국군이 되도록 빨리 동쪽으로 진격함으로써, 소련군이 오기 전에 베를린에 도착하여 되도록 많은 독일 영토를 점령해주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자폭 수단으로 공격을 저지하려는 속셈을 드러냈지만, 독일인들 가운데 이같은 의도를 돕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월 19일에 히틀러는 "군은 우리나라 주민을 고려하지 말고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고 선언한 훈령을 내렸다. 독일의 지역 행정관들은 연합군의 진로를 '사막'으로 만들기 위해 '비축되어 있는 모든 식량과 의류'뿐 아니라 '모든 산업 설비와 주요발전소, 상수도 시설 및 가스 공장'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일 군수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 단호한 명령에 반대하자, 히틀러는 "전쟁에 지면 독일 민족도 멸망할 거요. 그러니 국민이 계속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소"하고 받아넘겼다. 이런 냉혹함에 놀란 슈페어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을 버렸다. 슈페어는 히틀러 몰래 군부 및 산업계의 지도자들을 찾아가서, 히틀러의 포고령을 실행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4월 25일에 이미 연합군은 베를린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고, 고립과 절망에 빠진 히틀러는 4월 28~29일 밤 정부인 에바 브라운
당시 소련군은 그의 벙커에서 8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진격해 있었다. 두 사람의 시체는 정원에서 급히 화장되었다. 히틀러 후임자의 '전략'은 조건부 항복이었고, 소련군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쪽으로 도망치고 있는 독일 민간인과 군인을 되도록 많이 구출하는 것이었다. 항복이 이루어지는 동안, 거의 200만 명에 이르는 독일군이 영국군과 미국군의 통제구역으로 옮겨졌다(→ 동부전선).
유럽 북서부에 주둔해 있는 독일군의 항복문서는 5월 4일에 몽고메리의 사령부에서 조인되었다. 전체 독일군을 포함하는 항복문서는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 대표만이 아니라 소련 대표도 참석한 가운데 좀더 엄숙하게 격식을 갖추어 조인되었다. 1945년 5월 8일 자정을 기해 유럽에서의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을 맺었다.
미국의 필리핀 전투가 마지막 단계에 이름과 동시에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주력이 되어 일본군한테서 보르네오 섬을 탈환하는 작전이 펼쳐졌다.
그후 일본군 수비대가 궤멸됨에 따라 일본은 보르네오 남부의 석유를 공급받지 못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유능하지만 성격이 맞지 않아 마찰을 자주 일으키는 스틸웰의 소환을 요구했고, 이 요구는 1944년 10월에 받아들여졌다. 그후 동남아시아의 연합군 사령부가 일부 개편되었다. 1945년 5월초에 인도군 1개 사단이 미얀마 양곤에 상륙했지만, 마침 우기에 접어들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그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양곤의 점령으로 미얀마 탈환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필리핀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미국군은 마지막 목표인 일본 본토로 직접 진격하기 위해 중대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공중폭격은 일본을 침공하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일본 침공은 일본의 주요섬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九州] 상륙으로 시작될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다.
미국군은 마리아나 제도에 확고한 기반을 잡았기 때문에, 장거리 폭격기 B-29(→ 이오 섬)
일본군은 이오지마를 지키기로 작정했다. 태평양의 다른 섬에서도 그랬듯이, 일본군은 자연동굴과 바위 투성이의 험준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 섬에 지하 방호시설을 만들었다. 이 섬을 지키는 일본군의 수는 2만 명이 넘었다(→ 이오지마 전투).
미국군은 실제로 섬에 상륙하기 전에 해군 함포와 로켓포, 그리고 네이팜
그러나 그결과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완벽한 방호시설이 일본군을 보호해주었기 때문에, 재래식 폭탄이나 포탄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일본군에게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미국 해병대가 1945년 2월 19일에 이오지마에 상륙했지만,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동안 공중에서 가미카제의 공격으로 수많은 연합군 함정이 파손되었다. 미국군은 2월 23일에 이오지마의 스리바치 산[拉鉢山]에 성조기를 세웠지만, 이 섬을 완전히 확보한 것은 3월 16일이었다.
이오지마는 미국 해병대 6,000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일본군 수비대는 거의 전멸했다. 그러나 그후 5개월 동안, 2,000대가 넘는 B-29 폭격기가 이 섬에 착륙할 수 있었다. 한편 미국군은 마리아나 제도의 기지에서 일본을 폭격하는 새로운 전술을 찾아냈다. 대낮에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면 산업 중심지에 별로 많은 피해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밤에 낮은 고도에서 네이팜 소이탄을 투하하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여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연합군의 항복요구에 대해 일본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이 문제를 결정지었다. 1945년 8월 6일, 1941년부터 미국에서 은밀히 개발해온 원자폭탄이 혼슈[本州] 남단의 히로시마
히로시마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도쿄에서는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관리들은 대부분 나가사키가 공격받을 때까지 연합군의 새로운 무기가 지닌 위력을 올바로 평가하지 못했다. 한편 8월 8일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런 사태 발전은 일본정부에서 지난 봄부터 강화협상을 주장해온 집단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8월 10일 일본정부는 국왕이 누리고 있는 최고통치자의 지위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연합국이 제시한 항복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연합국은 국왕의 지위에 관한 일본측의 요구는 인정했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시에는 국왕도 복종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일본은 8월 14일에 이 단서를 받아들였고, 트루먼은 맥아더
제2차 세계대전의 사상자 통계는 정확하지 않다. 군인 사망자와 부상자, 포로 및 실종자에 대한 공식 숫자 가운데 어느 정도 자신 있게 인용할 수 있는 것은 미국과 영연방 국가들의 통계뿐이다. 이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전체 사망자의 수는 3,500만~6,000만 명으로 다양하게 추산된다. 다치거나 영원히 불구가 된 사람들의 숫자는 감히 계산해보려고 나선 사람도 거의 없었다. 통계 숫자의 대부분이 아무리 부정확하다 해도, 그 숫자들이 갖는 주요의미는 분명하다. 인구 비례로 따져볼 때, 가장 심한 손실을 입은 곳은 동유럽이었다. 폴란드는 인구의 20%를 잃었고,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은 약 10%를 잃었다. 약 570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의 강제수용소와 죽음의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폴란드 출신이었다. 독일도 그에 못지 않은 손실을 입었는데, 대다수는 동부전선에서 희생되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독일군의 점령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지만, 인명 손실은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때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전투와 폭격으로 죽은 수백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 이외에,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은 중국인이 수백만 명에 이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인명 손실과 물질적 비용을 통계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다. 독일의 경제적 착취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시행되었고, 그것이 불러일으킨 게릴라 저항은 그 자체가 파괴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독일의 보복을 초래했다. 독일은 특히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및 소련 일부 지역에서 파괴적인 보복행위를 자행했다. 관련 국가들의 정부가 전쟁에 쏟아부은 돈은 1,000조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이 숫자가 전쟁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불행과 고통 및 혼란, 경제 질서의 붕괴와 재산 손실을 나타낼 수는 없다.
국가 | 군인 | 민간인 | 총사망자 추계3)각주1) | ||
전사·부상사· 수용소사망자1)각주2) | 부상자 | 포로 및 행방불명2)각주3) | 사망자 | ||
연합국 | |||||
그리스 | 88,300 | - | - | 325,000 | 413,000 |
네덜란드 | 7,900 | 2,860 | - | 200,000 | 208,000 |
노르웨이 | 3,000 | - | - | 7,000 | 10,000 |
덴마크 | 1,800 | - | - | 2,000 | 4,000 |
미국 | 292,131 | 671,801 | 139,709 | 6,000 | 298,000 |
벨기에 | 12,000 | - | - | 76,000 | 88,000 |
브라질 | 943 | 4,222 | - | - | 1,000 |
소련 | 11,000,000 | - | - | 7,000,000 | 18,000,000 |
영연방 | 373,372 | 475,047 | 251,724 | 92,673 | 466,000 |
남아프리카 공화국 | 6,840 | 14,363 | 16,430 | - | 7,000 |
뉴질랜드 | 10,033 | 19,314 | 10,582 | - | 10,000 |
식민지 | 6,877 | 6,972 | 22,323 | - | 7,000 |
영국 | 264,443 | 277,077 | 213,919 | 92,673 | 357,000 |
오스트레일리아 | 23,365 | 39,803 | 32,393 | - | 24,000 |
인도 | 24,338 | 64,354 | 91,243 | - | - |
캐나다 | 37,476 | 53,174 | 10,888 | - | 38,000 |
유고슬라비아 | 305,000 | 425,000 | - | 1,200,000 | 1,505,000 |
중국 | 1,310,224 | 1,752,951 | 115,248 | - | - |
체코슬로바키아 | 10,000 | - | - | 215,000 | 225,000 |
폴란드 | 123,178 | 236,606 | 420,760 | 5,675,000 | 5,800,000 |
프랑스 | 213,324 | 400,000 | - | 350,000 | 563,000 |
필리핀 | 27,000 | - | - | 91,000 | 118,000 |
추축국 | |||||
독일 | 3,500,000 | 5,000,000 | 3,400,000 | 780,000 | 4,200,000 |
루마니아 | 300,000 | - | 100,000 | 200,000 | 500,000 |
불가리아 | 10,000 | - | - | 10,000 | 20,000 |
이탈리아 | 242,232 | 66,000 | 350,000 | 152,941 | 395,000 |
일본 | 1,300,000 | 4,000,000 | 810,000 | 672,000 | 1,972,000 |
핀란드 | 82,000 | 50,000 | - | 2,000 | 84,000 |
헝가리 | 200,000 | - | 170,000 | 290,000 | 490,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