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당파의 이해 - 완결
맺는 말
조선조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전말을 이 블러그에 올려야겠다고 작심했을 즈음, 기실 나는 ‘유배생활’ 중이었다.
돌이켜보면, 바람이나 쐴 겸 모처에 잠시 다녀오라는 인사권자의 당부(?)가 있던 순간에, 그리고 임지(任地)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황량한 겨울바다를 내다볼 때도, 또한 임지에 도착하여 세찬 바닷바람 맞으며 ‘지상의 방 한 칸’을 찾아 헤맬 때까지도, 내 머리 속에는 줄곧 이런 소리가 이명(耳鳴)처럼 울렸었다.
그래, 이건 유배(流配)다….
이 글은, 그 유배지의 사무실 뒤 전망 좋은 흡연장에서 드넓은 호수 쪽으로 담배연기를 후후 뿜어내다가 '불현듯' 어떤 영감(?)에 사로잡히면서 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남루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되, ‘눈 맛’ 하나 만큼은 몇 해 전 들렀던 해월루(海月樓-다산초당)에 비할 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문득 정약용을 떠올렸던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옛날이야기 풀어가듯 가볍게 써보리라 작정했었다.
하지만 영조 대에 이르러서부터 과부하(?)가 걸려 - 마감시간에 에 쫓기듯 - 사건 나열에 급급해버린 점, 전반부에 비해 영․정조 대 이야기가 지나치게 장황해진 점 등은 못내 아쉬운 대목으로 남는다.(추후 전반부에 대한 보완작업을 통해 이 같은 불균형을 바로잡아볼 요량이다)
모두 17개의 카테고리로, 2008년 3월 17일 시작하여 7월 9일에 온점을 찍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내 유배기간과 괘를 같이 하는 글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정약용의 〈목민심서〉, 윤선도의 〈고산유고〉, 정철의 〈사미인곡〉 등과 마찬가지로 이 글 또한 유배지에서 쓰여 졌으니 ‘유배문학’이라고 불러야 할까나….^ ^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 글은 남의 원단(原緞)을 몰래 가져와 자르고, 잇고, 오리고, 붙이고, 덧대고, 꿰맨 ‘누비문학’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자신의 원단이 ‘손을 탔다’며 분개하고 계실 몇몇 분들에게는 심심한 사죄의 인사를 올린다.
아울러, 모쪼록 누추한 방까지 찾아와 글 같지도 않은 글 읽어주시느라 시력 깨나 버리셨을 모든 방문객 제위께도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다.
아! ‘세월여류(歲月如流)’라고 했던가. 이 글을 마무리 짓고 나니, 내 유배생활도 얼추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