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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김씨족보 원문보기 글쓴이: 죽산
濯纓先生年譜 上
탁영선생<휘일손>연보 상(2/2)
<原文: 濯纓先生年譜 金大有 著 高宗11[1874] 국립중앙도서관 일산古2511-10-25, 參考譯文: 增補濯纓先生年譜 2006.9.30. 感慕齋宗中, 解釋 : 2008. 8. 15. 金順大, 編輯 :金乙泰>
三年庚戌{先生二十七歲}
○ 1490년 경술 (성종 21년) 선생 27세
春正月在烏蠻館{卽今玉河館}
<1490년> 봄 1월 : 연경(燕京) 오만관(烏蠻館 : 지금의 옥하관)에 머물다.
二月癸丑還自 京師甲寅復 命入對丕顯閣
<1490년> 3월 계축(3월 1일) : 연경으로부터 귀국, 갑인일(3월 2일)에 비현각(丕顯閣)에서 임금을 뵙고 복명(復命)하다.
先生之留館玉河也 帝所賜賚盡買經籍有何旺者持古畵十四幅請售遂脫所穿衣及 帝賚絹子以換之比還裝爲短屛獻諸東窓公公時乞養爲咸陽郡守提以上郡先生序之{序見文集二卷}
선생이 중국에서 유한 곳은 옥하관이었다. 선생은 황제가 하사한 물건으로 몽땅 경적(經籍)을 사들였다. 그리고 하왕(何旺)이란 사람이 고화(古畵) 14폭을 가지고 와서 사기를 청함에 마침내 떨어진 옷과 황제가 하사한 명주옷을 벗어주고 고화와 바꾸었다. 귀국 후 그 고화로 작은 병풍을 만들어 동창공에게 드렸다.
공은 당시 걸양하여 함양군수를 하고 있었는데, 상군(上郡)으로 일으켰다. 성생은 서문을 지었었다. (문집 2권 참조)
三月丁巳有 旨賜駱山園辭不 允
<1490년> 3月 정사(5일) : 낙산(駱山)의 원정(園亭)을 하사하는 교지가 있어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東窓公己酉春以弘文館應敎懇乞養 上不許特命度支買城東山亭一區以 賜令奉親來居之至是將赴天嶺上疏請還 賜第上復以賜先生辭之不 允時先生夫人金氏歸寧于木川便道上京因留以待先生之還遂與入居焉
동창공이 을유년(1465년) 봄 홍문관 응교로 있다가 귀양(歸養)하기를 간곡히 주청하였으나 주상은 허락하지 않고 도지부(度支部;戶曹)에 명하여 성동(城東)에 있는 한 구역을 매입 하사하고 모친을 모시고 여기에 와서 살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이 집에서 거처해 왔는데, 함양에 부임하게 되므로 상소하여 하사받은 집의 반환을 주청하였다.
주상은 이 집을 다시 선생에게 하사하였다. 선생은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당시 선생 부인 김씨는 목천(木川)의 친정에 있다가 빠른 길로 상경하여 선생의 귀국을 기다리면서 머물고(留) 있었으므로 같이 입거(入居)하게 되었다.
○園在駱山下靈泉洞卽崔寧城恒之故居頗有巖泉花木之勝一間茅亭臨于泉上曰梨花亭姜仁齋希顔所名而書者也舊無記先生始作文以記之
이 별장(園)은 낙산 밑 영천동(靈泉洞)에 있었는데, 녕성군(寧城君) 최항(崔恒 : 세조 때의 영의정)의 옛집이었다. 바위와 샘과 화목이 있어 경관이 좋았고 샘 위에는 이화정(梨花亭)이라는 한간의 초가 정자가 있었는데, 인재(引齋) 강희안(姜希顔)이 이름 짓고 쓴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내력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선생이 비로소 작문하여 기록하였다.
庚申除通善朗承政院注書兼檢閱三疏乞還收新 命不 允
<1490년 3月> 경신일(8일) : 통선랑, 승정원(承政院)[20] 주서 겸 예문관 검열에 제수됨에 세 번씩이나 소를 올려 명을 거두어줄 것을 주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20]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임금의 비서실). 관직은 都承旨, 左(右)承旨, 左(右)副承旨, 同副承旨, 注書, 政注書 등이었다.
先生力陳才學淺薄不敢掌史且言故事翰注之職未有兼帶者誠以記史重任決非一人所可兼故也乞 賜鐫改三辭不許
선생은 힘을 다하여 주청하기를, “재학(才學)이 천박하여 사관직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전례를 보더라도 한림(검열)과 주서직을 겸직한 예가 없고 기사직(記史職)은 참으로 중요한 직임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다른 일과 결코 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쪽 직임을 깎아주소서.” 하고 세 번씩이나 고쳐 주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乙丑始肅謝入侍 慶筵奏請立 魯山君後復進疏辭並不 允
<1490년 3月> 을축일(13일)에 비로소 정중히 사례하고 경연에 입시하여 노산군(魯山君) 후사(後嗣)를 세울 것을 주청하고 다시 사임 소를 올렸으나 모두 윤허되지 않다.
是日 上御朝講講春秋左氏傳先生以史官入侍奏言繼絶世聖王之盛典也當初 魯山幼弱不克負荷而已非得罪於 宗社也 今其孤魂無托以 祖宗在天之靈見之則是一樣子孫豈可恝然安心不爲之悶傷乎古者大夫之無後者亦令祀之况旣爲人君而孑然無依非 聖朝之累乎武王伐紂封其子祿父以續殷祀周公放蔡叔而復封子胡紂之惡通于天人蔡宿罪關宗社猶且如是我
이날 아침 강(講)에 주상이 나왔는데, 강은 춘추자시전(春秋左氏傳)에 관한 것이었다. 선생은 사관으로서 입시하여 주청하기를, “끊어진 세계를 이어주는 것은 어진 임금이 행하는 매우 훌륭한 전례(典禮)입니다. 당초 노산은 유약(幼弱)하여 맡겨진 책무를 이기지 못하였을 뿐 종사(宗社)에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의 고혼(孤魂)은 의탁할 곳이 없이 떠도는지라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靈)이 이 모양의 자손을 본다면 어찌 근심이 없고 마음이 편하겠으며 상심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는 대부의 무후에도 영을 내려 제사를 지내주게 했는데 하물며 이전에 임금이었던 분이 의지할 데 없이 고독해서는 어찌 성조(聖朝)의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 무왕(武王)은 은(殷)나라 토왕(討王)을 정벌하였으나 그의 아들에게 봉록을 주어 아비를 이어 은의 선대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주공(周公)은 채숙(蔡叔)을 추방하고 그의 아들 호(胡)를 봉해 주었습니다. 토왕(討王)의 악행은 하늘과 사람에 미쳤으며 채국의 죄 또한 종사와 유관하여 이와 같았습니다.
世宗嘗曰恭順公芳蕃昭悼公芳碩俱以懿戚不幸無嗣 命以廣平大君璵爲恭順公後錦城大君諭爲昭悼公後立廟奉祀此皆仁之至義之盡也古人有言欲法堯舜當法祖宗臣於此事則曰欲法武周當法 世宗 殿下以爲如何今 魯山夫人宋氏尙存若使之立後以奉其祀則殿下至德繼三 聖而國脉延長矣
우리나라 세종(世宗)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공순공(恭順公) 방번(蕃芳)과 소도공(昭悼公) 방석(芳碩)은 모두 가까운 친척인데 불행하게도 후사가 없다.’ 하시면서 명하여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를 공순공 후,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를 소도공 후사로 정하고 사당을 세워 봉사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모두 인(仁)의 지극함이요 의(義)의 극진함이었습니다. 고인의 말에 요순(堯舜)의 법은 따르려 애써야 하나 조종(祖宗)의 법은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에 관련하여 신은 ‘무왕과 주공의 법은 따르려 애써야 하나 세종대왕의 법은 반드시 따라야한다.’ 고 말하고자 합니다. 전하, 어찌 되었든 지금 노산(魯山) 부인 송씨(宋氏)는 아직 생존해 있는데 만약 후사를 세워 봉사케 한다면 이는 곧 전하의 지극한 덕(德)이 삼성(三聖)에 이어지고 나라의 명맥이 연장이 되는 것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上曰此誠美事然 祖宗朝事不可輕議仍 命權專宋玹壽家籍沒家産臧獲並還給宋氏資其生奉 魯山祀講畢復進袖疏力辭 上手批甚渥眷注益隆遂不敢復辭
이에 주상은 “이는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그러나 조종조(祖宗朝)의 일이라 가벼이 논의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 곧 해당 부서에 명하여 몰수된 송현수(宋玹壽 : 魯山 夫人의 아버지)의 가산과 노비를 송씨에게 환급하여 그의 생계와 노산군 봉사(奉祀)의 자산으로 삼게 하라 명하였다. 강(講)이 끝난 다음 다시 나아가 힘을 다하여 직접 상소하였으나 주상은 친히 비답하시되 심히 두터운 은총을 쏟음이 큰지라 마침내 다시 감히 아뢸 수가 없었다.
盖 上深知先生有史才雖差臺憲劇務必兼史職先生屢疏辭免而終不 允誠曠世恩遇也故先生之處翰史前後凡六年矣其記事也時政得失人臣忠奸直筆無諱動法春秋君子稱良史而小人多不悅焉
대체로 주상은 선생이 사기(史記)에 대한 재주가 있음을 익히 알고 있어서 사간원(司諫院)[21]과 사헌부(司憲府)[22]의 매우 바쁜 직책에 보임되어 있어도 사관직은 반드시 겸임하도록 했다. 그래서 선생이 누차 사면의 소를 올렸으나 끝내 윤허되지 않곤 했다. 참으로 세상에 드문 대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선생이 한림(翰林)과 사관직에 근무한 것은 전후 무릇 6년간이나 되었으며 근간의 기사(記事)는 시정(市政)의 득실, 인신(人臣)의 충간(忠奸)을 직필하는데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본받아 거리낌 없이 행하였다. 이에 군자들은 양리(良吏)라 칭송하였으나 소인배들은 매우 좋아하지 않았다.
[21]사간원(司諫院) : 조선시대 간쟁(諫爭), 논박(論駁)을 맡은 관청. 여러 관청에서 각 도에 명령을 내릴 때는 먼저 사간원에서 논의하였다. 諫言을 듣는 것은 임금의 의무 비슷하게 되어 있었다. 관원은 大司諫, 司諫, 獻納, 正言 등과 書吏가 있었다.
[22]사헌부(司憲府) : 고려. 조선시대를 통하여 시정을 비판하고 모든 관리를 규찰하여 억울한 것을 바로잡아 주는 관청. 지금의 감찰 사무를 맡아보던 곳이다. 憲府, 柏府, 靈臺, 烏臺, 御史臺, 監察司라고도 불렀다. 직제는 大司憲, 執義 1명, 掌令 2명, 持平 2명, 監察 13명이고 書吏가 13명이었다.
至 中宗丙子 上以 魯山 立後事延議羣臣 經筵官蔡忱奇遵等皆言立後以祀實合先王繼絶之義而大臣鄭光弼柳洵以爲世祖朝事不可輕改遂以議不一而罷只令官給祭需韓山郡守李若氷又疏請臺諫請拿罷職事竟不行
그 후 병자년(중종 11년)에 이르러 노산군(魯山君) 후사 세우는 문제를 여러 신하와 논의 하였다. 경연관 채침(蔡忱), 기준(奇遵) 등은 모두 수사를 세워 봉사하게 함은 선왕(先王)의 끊어진 대를 잇는 대의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대신 정광필(鄭光弼)과 유순(柳洵)은 조조조(世祖朝)의 일이라 가벼이 고칠 것이 아니라 하여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입후 문제는 파론(罷論)되고 다만 제수를 관급(官給)할 것을 명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한산(韓山)군수 이약빙(李若氷)이 또 소청을 올렸다. 이에 대간(臺諫)에서 그를 체포하고 파직할 것을 주청함에 이르러 필경 일이 성사되지 못하였다.
丙寅入直史館修史草錄金先生弔義帝文
<1490년 3月> 병인일(14일) : 사관(史館)에 입직하여 사초(史草)를 닦으면서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조의제문」을 수록하다.
初景泰壬申 文宗升遐 世子幼冲嗣位元年癸酉冬 首陽大君{世宗第二子光廟潛邸時}有靖難之志權擥韓明澮謀殺顧 命大臣皇甫仁金宗瑞及鄭苯安平大君瑢{世宗第三子}趙克寬李穰許詡等乙亥夏 大君受禪尊 上爲上王
임신년(1452년, 문종 2년) 문종이 승하하고 세자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그 원년, 즉 계유년 겨울에 수양대군(세종의 2자)이 정난(靖難)의 뜻이 있어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과 모의 고명대신(顧命大臣 : 임금의 임종에 유언으로 후사를 부탁받은 대신)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및 정분(鄭苯),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 세종3子), 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 허후(許詡) 등을 살해했다. 을해년(단종 3년, 세조 원년) 여름 수양대군은 왕위를 선양(禪讓)받고 단종(端宗)은 상왕(上王)이 되었다.
丙子夏成三問朴彭年河緯地李塏柳誠源兪應孚等謀復 上王事覽死之於是降 上王爲 魯山君出居寧越 上王有子規詞二篇國人聞者莫不流涕
병자년(1456년, 세조 2년) 여름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이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때에 상왕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에 출거(出居)하게 되었다. 노산군은 「자규사(子規詞」두 편을 지었는데, 이를 본 나라 안 사람치고 눈물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天順丁丑錦城大君瑜{世宗第六子}與順興府使李甫欽謀復 魯山事又覺皆死府院君宋玹壽寧陽尉鄭悰等幷被殺
1457년 정축(세조3년)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 세종 6자)가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노산군(魯山君) 복위를 모의하다가 일이 또 발각되어 모두 죽었다. 이때 부원군 송현수(宋玹壽), 녕양위 정종(鄭悰) 등도 아울러 피살되었다.
申叔舟獨啓言去年李塏等以 魯 山爲言今瑜亦欲挾 魯山倡亂 魯山君不可安居鄭麟趾權擥韓明澮等繼言 魯山得罪 宗社若不置法則圖富貴者藉以搆辭不可宥也請處 魯山以絶民望
신숙주(申叔舟)가 홀로 아뢰기를, “지난해 이개(李塏) 등이 노산(魯山)을 위한 언동을 하더니 이제 유(瑜) 역시 이에 끼이고자 하니 노산은 난(亂)을 불러일으키는 유인(誘因)이 되는지라 노산을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해다. 이에 정인지(鄭麟趾),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이 이어서 말하기를, “노산은 종사에 죄를 지었는데, 만약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부귀를 도모하려는 자들이 이를 빙자하여 마을 꾸며댈 것이니 죄 사함은 불가하다. 노산을 처단하여 민망(民望)을 단절케 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禁府都事王邦衍至寧越踧踖 不敢入羅將頓足立促有一貢生常侍 上王者請自當之時 上王年纔十七貢生未及出門九竅流血而斃侍女從人爭投東江浮屍滿江
드디어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영월에 이르렀는데,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발을 구르며 나장(羅將 : 의금부의 하급관리)들만 재촉하였다. 이때 상왕에게 늘 시중드는 한 유생이 나와서 칭하기를 스스로 당하시게 해달라고 했다. 이때 상왕의 연세는 겨우 17이었다. 유생이 문을 나가기도 전에 상왕은 아홉 구명에서 피를 흘리시며 돌아가셨다. 시녀와 중인들은 다투어 동강(東江)에 몸을 던지니 그 시신이 강에 가득하였다.
是日大雷雨烈風拔木黑霧漫空經夜不散邑宰及從人莫敢收歛郡戶長嚴興道往來哭泣潛收棺歛葬于郡北五里冬乙旨
이날 큰 뇌우와 열풍이 일어나 나무가 뽑히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퍼져 밤이 지나도록 흩어지지 않았다. 읍장(邑宰)과 종인들은 감히 수렴(收殮)하려 들지 않았다. 이에 군호장(郡戶長 : 아전의 우두머리) 엄흥도(嚴興道)가 와서 슬피 울면서 몰래 관(棺)을 거두어 군북 5리에 있는 동을지(冬乙旨)에 장사 지냈다.
未幾又有 昭陵之變朝廷命堀而沉之江興道不忍佯若堀去而還掩之邑人哀痛祭之吉凶禍福必就祀有驗當是時雖村婦街童不知君臣之義目不覩凶變之事者莫不憤鬱激昻以爲鄭麟趾奸賊輩忍行凶逆逼令吾君不終不自知言之出於口而發於聲也
그 후 얼마 안 되어 교지가 내려 소릉(昭陵)의 변이 생겼다. 즉 조정에서는 능을 파서 강물에 던지라 명하였다. 엄흥도(嚴興道)는 묘를 팠다가 도로 묻은 것처럼 가장한데 대하여 참지 못했다. 읍 사람들은 애통해하면서 제(祭)를 지냈다. 길흉화복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인가? 제사에 영검이 나타났다.
이때를 당하여 시골 아낙네와 길거리의 아이들이 비록 군신간의 도리를 모르지만 차마 보지 못할 흉변을 보고는 울분을 터트리지 않은 자 없었으며 “정인지(鄭麟趾) 간적배들이 차마 하지 못할 흉악한 짓을 우리의 착하신 임금을 거스르고 핍박했다.”고 하고 자기도 알지 못하는 말을 저절로 내뱉으며 소리 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其時史官記曰 魯山在寧越聞錦城大君瑜宋玹壽等誅自縊而卒以禮葬之此孤䑕輩奸僞之筆也後之修實錄者亦皆從諛也
그 당시 사관이 기록하기를, “노산은 영월에 있으면서 금성대군 유(瑜)와 송현수(宋玹壽) 등이 형벌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하여 세상을 마침에 예로서 장사지냈다.”고 했다. 이는 여우와 쥐새끼 같은 무리들의 간사한 허위의 사필(史筆)이었는데 후에 실록을 편수한 자 역시 모두 아첨을 좇았다.
辛丑秋先生見元子虛于酒泉山中子虛爲先生道其事甚祥佔翁以進士丁丑冬在密陽聞其變作弔義帝文所以寓忠憤也至是先生在館草史記其事實如右因錄佔翁文以爲後世扶節義之一髮云
신축(1481년) 가을 선생이 주천(酒泉) 산중에서 원(元)자허(子虛)공을 만났을 때 원(元)공은 선생에게 그때의 사실을 매우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점옹(佔翁)이 아직 진사로 있을 때인 1467년 정축(세조 3년) 겨울 밀양에 있으면서 노산의 변고를 듣고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그 까닭은 충분을 (義帝事에) 빗대어 은연중에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선생은 사관(史館)에서 사기(史記)를 기초(起草)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기록하고[1] 점옹의 글을 실었는데, 이는 후세 사람들에게 절의(節義)를 복돋우는 데 털끝만큼의 도움이라도 주기 위한 것이라 했다.
[1]어떻게 위에 언급한 사실들을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이를 빗댄 조의제문 하나로 사화가 일어났는데 사실을 기록하기란 불가능하였으리라 짐작된다.
夏四月丁亥入直政院
<1490년> 여름 4월 정해(5일) : 정원(政院;승정원)에 입직(入直)하다.
己丑六臣傳成
<1490년 4월> 기축일(7일) : 『육신전(六臣傳)』을 완성하다.
秋江嘗作六臣傳先生以其掇拾傳聞頗多錯誤每相與恨其未得祥眞至是先生取考史館及本院日記參以本藁改撰爲傳不示人藏于家以待後之紬史者
추강(秋江;남효온)은 일찍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었다. 거기에 수집, 수록된 전문(傳聞) 중에는 꽤 많은 착오가 있었는데, 매양 바탕에 한을 깔고 있어서 선생은 상세한 진상을 얻을 수가 없었다.
이에 선생은 사관(史館)과 『승정원 일기』를 조사하고 원래의 초고를 참작하여 고쳐지었다. 그리고 이 전(傳)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기 위하여 집에다 갈무리하고 후세의 자세한 역사가 되도록 기다리기로 했다.
丙申直翰苑以親疾拜章徑出癸卯至咸陽戊申陪母夫人還雲溪
<1490년 4월> 병신일(14일) : 한원(翰苑:예문관)에 입직 중 모부인의 병환으로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린 후 곧바로 출발, 함양에 가다. 무신일(26일)에 모부인을 모시고 운계에 귀환하다.
先生方直宿翰苑聞母夫人病報卽呈辭疏而出星夜抵郡越二日舘吏奉 批敎及蔘料騎驛而至傳 旨略曰聞爾親病太劇甚念特遣舘吏賚藥料以去爾須急歸護養斯速上來以副予渴望
선생이 한원(翰苑)에 숙직하고 있는 동안에 모부인의 병보(病報)를 듣고 즉시 사직의 소를 올리고 출발하여 별이 총총한 밤중에 함양군에 당도하였다. 이틀이 지난 후 예문관 관리(館吏)가 비교(批敎:사직소에 대한 임금의 비답과 교지)와 삼료(蔘料)를 받들고 역마를 달려 도착했는데, 교지의 대강은 다음과 같았다. “듣컨대 너의 친병(親病)이 매우 극심하다 하니 심히 염려되어 특별히 관리를 파견, 약료(藥料)를 내린다. 모름지기 급히 가서 호양(護養)하고 곧 속히 올라와 나를 보좌해 주기를 갈망하노라.”
大夫人嘗患風每發奄奄數日少退晏然如平常先生至則病已瘳而思歸故廬曰吾鄕村老婦專城之養非素分也卽還雲溪
대부인(大夫人)은 전부터 풍환(風患)을 앓고 있었는데 ,매양 발병하면 위독해지고 며칠이 지나면 차츰 나아져 평상과 같이 편안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선생이 도착하니 이미 병이 나아 고향집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말씀하시기를, “우리 시골 늙은이들은 지방 수령의 봉양이 분에 맞지 않는다. 곧 운계(雲溪)에 돌아가자.”고 하였다.
辛亥寒暄來訪約觀伽倻山
<1490년 4월> 신해일(29일) : 한훤(寒喧)이 내방하여 가야산 관광을 약속하다.
寒暄金大猷號名宏弼隱居好學與先生爲道義交居於玄風聞先生之還來訪因約遊伽倻
한훤당(寒喧堂)은 김대유(金大猷)의 호이고 이름은 굉필(宏弼)인데, 은거하면서 학문을 즐겨했다. 선생과는 도의(道義)의 교유(交遊)를 하는 사이인데, 현풍(玄風)에 살면서 선생이 귀향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내방하여 가야산 유람을 약속한 것이다.
甲寅爲靈山父老作申澹生祠堂記
<1490년 5월> 갑인일(5월3일) : 영산(靈山:지금의 창녕 영산면) 부로(父老)들의 부탁으로 신담(申澹) 생사당기(生祠堂記)를 짓다.
澹字淸卿好讀書善吟詩監靈有善政及歸父老畵其像立生祠請先生以記之{記見文集三卷}
신담(申澹)의 자는 청경(淸卿)인데, 독서를 좋아하고 시 읊기를 잘했다. 영산현감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고 떠나게 되었는데, 현의 부로들이 그의 초상을 그려 생사당을 세우고 당기(堂記)를 선생에 청하였던 것이다. {기문은 문집 3권 및 『속동문선』 14권 참조}
五月甲子如草溪謁巡相鄭佸因從行
<1490년> 5월 갑자(13일) : 초계(草溪)에 가서 순상(巡相) 정괄(鄭佸)을 뵙고 종행(從行)하다.
鄭公字慶會有氣節識治體常從佔翁遊先生於公爲姻戚且素相善至是公爲道伯按部向右道以書邀致先生馳謁於草溪從行數日
정공(鄭公)의 자는 경회(慶會)인데, 기절이 있고 세상 다스리는 방법(治體)에 밝았으며 항상 점옹(佔翁)과 종유(從遊)했다. 선생은 공에게 인척이 되고 또 평소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지금에 이르러 공은 도백(道伯)으로서 그의 순시 일행이 우도(右道)를 향하면서 선생에게 서신을 보내어 도중에서 만나기를 초청해 왔다.
선생은 말을 달려 초계(草溪)에서 공을 뵈고 며칠 동안 종행(從行)하였다.
戊辰至陜川登梅月樓庚午還雲溪
<1490년 5월> 무진일(17일) : 합천에 도착, 매월누(梅月樓)에 오르고 경오일(19일) 운계에 돌아오다.
郡守金永錘搆新樓於客館之東北時適成未有名稱鄭公命名以梅月先生有記{記見文集三卷}
군수 김영추(金永錘)가 객관의 동북에 새 누각을 세웠는데, 마침 완성되었으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정공(鄭公)이 매월누(梅月樓)라 명명하고 선생은 누기(樓記)를 지었다. (기문은 문집 3권 참조)
辛未除通德郞弘文館著作兼 經筵說經仍帶注書檢閱有 旨促召辭不就
<1490년 5월> 신미일(20일) : 통덕랑 홍문관 저작 겸 경연 설경에 전직인 주서와 검열직을 겸직하도록 제수하고 독촉하는 교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를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다.
丙子如冶城偕寒暄遊伽倻因留講學于釣賢堂
<1490년 5월> 병자일(25일) : 한훤과 함께 야성(冶城)에 가서 가야산을 유람하고 조현당(釣賢堂)에 머물면서 강학하다.
方太和宋懼甫李浩源安時叔河應期亦來遊遂與共住講春秋有講說將下山老僧螺和尙隱於浮屠者也作堂記以掲之{記見文集三卷}
방태화, 송구보, 이호원, 안시숙, 하응기 등도 와서 같이 놀았다. 그리고 함께 머물면서 춘추에 대한 강을 했으며 나중에 하산하여 부도(浮屠)에 은거 중인 노승 라화상(螺和尙)의 강설도 있었다.
선생은 당기(堂記)를 지어 게시하였다. (문집 3권 참조)
秋七月丙辰陞弘文館博士兼 經筵司經春秋館記事官 世子侍講院說書仍帶注書檢閱辭不 允
<1490년> 가을 7월 병진(6일) : 홍문관 박사 겸 경연의 사경, 춘추관 기사관, 세자시강원[25] 설서에 승직하고 이전의 주서, 검열직은 그대로 겸하도록 하는 교지가 내려 고사하였는데 윤허되지 않았다.
[25]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 태조 초에 설치한 세자관속(世子官屬)을 후에 개칭한 것으로 왕세자를 모시고 經書, 史籍, 道義를 가르치는 임무를 맏은 관청, 관직은 師, 傳, 貳師, 左(右)賓客, 左(右)副賓客, 贊善, 輔德, 進善, 弼善, 文學, 司書, 說書, 諮議 등이 있었다.
乙丑有 旨促召乞還新舊職名不 允庚午又承 召己卯始拜 命 翌日又 力辭
<1490년 7월> 을축일(15일) : 부름을 재촉(促召)하는 교지가 내려 신구직(新舊職)을 거두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경오일(20일)에 부름의 명을 받아 기묘일(29일)에 비로소 배명하고 다음날(30일) 또 힘껏 고사하다.
八月癸未有 旨遞注書說書陞朝奉大夫弘文館副修撰知製 敎兼 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仍帶檢閱如故再辭不 允就職
<1490년> 8월 계미(3일) : 교지가 내려 주서와 설서직이 경질되고 조봉대부(朝奉大夫),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왕의 교서 등을 초안하여 올리는 관직) 겸 경연의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으로 승직되고 예문관 검열직은 그대로 가지게 되다. 이에 전과 같이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아 직임에 나아가다.
自是知製 敎及 經筵春秋館兼啣終 上之世雖遞玉堂而拜他官幷依舊兼帶皆特 旨也人莫不榮之
선생 이후 지제교(知製敎)와 경연(經筵), 춘추관의 직함을 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종의 치세에 비록 옥당(玉堂:홍문관의 실무직)에서 다른 직책을 배수하더라도 종전 직책을 아울러 겸대(兼帶)하였는데, 이는 모두 임금의 특별한 배려에 의한 것으로서 신하된 사람으로 이 이상의 영예가 있을 수 없었다.
九月庚申偕秋江遊三角山訪雪岑僧金悅卿
<1490년> 9월 경신(11일) : 추강과 함께 삼각산에 있는 설잠(雪岑)스님 김열경(金悅卿)을 방문하다.
悅卿名時習號東峰又號梅月堂高麗名臣台鉉之後五歲能詩 世宗朝以神童 召試以詩乙亥讀書山寺聞 魯山遜位卽閉戶大哭焚其書陷厠而逃落髮爲僧遍遊名山放浪形骸之外爲人豪邁英發簡卛勁直傷時憤俗佯狂自晦
열경(悅卿)의 이름은 시습(時習)[24]이요 호는 동봉(東峰) 또는 매월당(梅月堂)인데 고려 명신 김태현(金台鉉)의 후손이다. 5세 때 시에 능하여 신동으로 이름나서 세종대왕 앞에 불려가 시작(詩作) 시험을 받은 바 있다.
1455년 을해(단종 3년, 세조 원년) 산사(山寺)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중 단종의 왕위 선양 소식을 듣고는 즉시 문을 닫고 대성통곡하며 그의 책을 불살라 측간에 처넣고 달아나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중이 되어 명산을 두루 유람하여 방랑했다. 외견상으로 그의 사람됨은 호탕하고 재기가 뛰어나며 대범하고 솔직하며 뜻이 굳고 곧았다. 당시의 세속에 대하여 슬퍼하고 분통해하며 거짓 미친 체하고 스스로 은둔하였다.
[24]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每値月夜歌離騒經歌罷痛哭好向樹題詩諷詠良久輒哭而削之或書于紙不示人投諸水火人莫測其心懷誠遯世節義之士也
달 밝은 밤을 만나면 매양 「이소경(離騷經)」[25]을 노래하고 노래가 파하면 통곡했다. 나무를 마주 대하고 제시(題詩)를 지어 읊조리기를 즐겨했는데, 한참 지나서는 문득 통곡하고 지워버리거나 간혹 종이에 써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고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버리곤 했다. 사람들은 그의 마음속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참으로 세상을 숨어사는 절의지사(節義之士)였다.
[25]이소경(離騷經) : 옛날 전국시대 초나라 충신 굴월(屈原)이 참소로 쫓겨난 몸으로 연군(戀君)의 정을 읊은 부(賦).
與先生深相契許交以志年至是聞雪岑(嘗久居麟蹄雪嶽故自號}在重興寺與秋江携酒往訪辟人鼎坐達夜談笑遂同登白雲臺至道峰凡五日而別
선생과는 <29세의> 나이 차이를 불고하고 허교(許交)하여 서로 깊이 맺은 사이였다. 이때 설잠(雪岑 : 일찍이 인제 설악에 오래 은거한 연유로 지은 자호)이 중흥사(重興寺 : 북한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추강과 더불어 술을 가지고 방문하였다. 사람들을 물리치고는 세 사람이 둘러앉아 밤새 담소하고 드디어는 함께 백운대(白雲台)에 등정하였으며 도봉(道峰)에 이르기까지 무려 5일동안 같이 지내고 헤어졌다.
三先生俱以卓節高行博學雄辯從遊物外其所談論必上下古今橫竪天人有可以傳世行後而泯不記錄抑爲其語多觸諱而然歟非後生所敢窺也
세 분은 다 같이 절조가 높고 행실이 고상하며 박학하고 웅변이었으며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에서 교유했다. 그 담론 속에는 필시 상하, 고금, 종형, 그리고 하늘과 사람에 관한 것이 있어 가히 세상에 전하여 후생들로 하여금 행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없애고 기록에 남기지 않았는데, 그 말씀 속에는 기휘(忌諱)하는 바에 저촉되는 것이 많아 그렇게 한 것인지 후생들이 감히 엿볼 바가 아니다.
丙子移拜成均館典籍兼中學敎授辭不 允
<1490년 9월> 병자일(27일) : 성균관 전적 겸 중학 교수로 이동 보직 명이 내려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閏月丁亥又辭翰苑兼啣不 允
<1490년> 윤9월 정해(8일) : 또다시 한원(翰苑)의 겸직을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十月丙辰除朝散大夫司憲府監察兼啣如故辭不 允戊午上疏論時弊七事
<1490년> 10월 병진(8일) : 조산대부 사헌부 감찰이 종전 직함에 추가하여 제수되어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 무오일(10일)에 시정(時政)의 폐단 7개 사항을 논하는 소를 올리다.
戊寅又辭檢閱因薦一蠹自代蒙 允己卯遞檢閱陞待敎再辭不 允拜 命
<1490년 10월> 무인일(30일) : 다시 검열직을 사임하고 대신 일두(一蠹)를 천거하여 윤허를 받다. 기묘일(11월1일)에 검열직이 경질되고 대교(待敎 : 검열의 상위직)로 승직됨에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배명하다.
先生聞一蠹釋褐曰代我掌史者此人也因薦以自代疏略曰新及第臣鄭汝昌道通天人學備體用性情也恬淡器質也端方持身淸苦遇物仁恕孝友忠信可以正俗敦厚謙讓可以化民學問之淵博議論之平正有經據可以備顧問識度之精明文辭之宏深有古風可以任制撰至若記言細史之才特其餘事末藝也
선생은 일두(一蠹, 정여창 1450~1504)가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 대신 국사를 관장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하고 자기 대신으로 추천하였는데, 그 소장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새로 급제한 신 정여창은 도가 천인에 통하고 학문은 체용(體用 : 原理와 運用)을 갖추었으며 성정(性情)은 욕심 없이 담담하고 기질(器質)은 단정하며 몸가짐은 청렴결백하여 곤궁을 견디고 모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어질고 너그러우며 효성과 우애가 있고 진실과 믿음이 있어 가히 풍속을 바르게 할 만하고 그의 도타운 겸양은 가히 백성을 교화(敎化)할 만하옵니다. 또한 깊고 넓은 학문과 공평무사한 논의는 모두 그의 경학(經學)에 바탕을 두고 있어 가히 고문(顧問)의 자격을 갖추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깊고 밝으며 문장의 어휘가 풍부하여 예스런 면모가 있어 가히 제찬(制撰 : 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대신 짓는 일)을 맡길 만하고 뿐만 아니라 말을 받아 기록하는 데 있어서는 세사(細史)를 다룰 재주가 뛰어납니다. 그 외의 일은 모두 하찮은 재주에 속합니다.
其實行聲華光映儒林况時望年輩俱在臣前伏願 殿下擢以代臣以彰 聖朝崇儒右文進賢退不肖之政 上深納其言陞先生爲待敎以一蠹爲檢閱
세상에 알려진 그의 행실의 평판은 온 유림에 빛나고 있고 시대적 인망(人望)과 연배(年輩) 모두 신보다 앞서있습니다. 전하,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 대신 이 사람을 뽑아 등용하소서. 그리하여 유학을 숭상하고 문신을 중히 여기며 어진 이가 진출하고 불초(不肖)는 물러가게 하는 정사를 펴시어 성조(聖朝)를 빛나게 하소서.”
이에 주상은 그 말을 깊이 납득하여 선생을 대교(待敎)로 승진시키고 일두(一蠹)를 검열로 보임시켰다.
十一月己丑以本職充陳賀使書狀官赴 京師
<1490년> 11월 기축(11일) : 본직을 가진 채 진하사(陳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명나라 서울에 가다.
四年辛亥{先生二十八歲}
○ 1491년 신해 (성종 22년) 선생 28세
春正月在烏蠻館
<1491년> 봄 1월 : 연경(燕京 : 지금의 북경) 오만관(烏蠻館)에 체재하다.
二月庚戌見禮部員外郞程愈得小學集說
<1491년> 2월 경술(4일) :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 정유(程愈)를 만나 『소학집설』를 얻다.
先生身居海外偏邦而志慕中華君子上自程朱下至金許常恨不同時而不相見又念賢士之在中國者思有以一見前旣到京求之而不能得今又朝 天力訪而卒未見將還因伴送劉鉞果得二人焉一則好道之程愈一則博學之周銓
선생은 몸은 비록 동방의 한쪽에 치우쳐 살고 있으나 뜻은 중화(中華)의 군자들, 즉 위로는 정주(程朱 : 程子와 朱子)로부터 아래로 김허(金履詳과 許衡 : 모두 元대의 유학자)에 이르기까지 흠모하면서 항상 이들과 동시대(同時代)가 아니라서 서로 만나보지 못함을 한탄하곤 했다. 또한 현재 중국에 있는 현사(賢士)들을 생각하고 한번 만나볼 생각이 있었는데, 전번에 왔을 때 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번에도 천자를 알현하기 위하여 힘들여 방문해 와서 끝내 못 보고 곧 귀국하는가 했는데 반송(伴送 : 호송관) 류월과(劉鉞果)가 두 사람을 만나게 했다. 그중 한사람은 도(道)를 좋아하는 정유(程愈)요 또 한 사람은 박학한 주전(周銓)이었다.
愈時官禮部員外郞先生往見求學質以俚語試其淺深愈以手撰小學集說及晦翁書一帖贈之先生以爲是范仲淹勸橫渠讀中庸不許談兵之意也臨別贈以詩文愈和詩作序以贐之有韓歐文章洛閩淵源之語
유(愈)는 당시 예부 원외랑(員外郞)이었는데, 선생이 가서 만나보고 그의 도의 깊이를 시험해 보기 위해 천근한 말로 구도(求道)의 질문을 하였다. 유는 자기가 지은 『소학집설(小學集說)』과 회옹(晦翁;朱子)서 한 첩을 선생에게 주었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이는 망중엄(茫仲淹;북송의 학자)이 횡거(橫渠;북송의 학자 張載)에게 『중용』을 읽을 것을 권하고 병학(兵學) 논하기를 허락하지 않은 것과 같은 뜻이라 생각했다. 이별함에 이르러 선생이 시문을 지어 증정하였더니 유는 이에 화답하는 시와 서를 지어 전별의 징표로 주었는데, 한구(韓歐;당나라 한유와 북송의 구양수)풍의 문장과 낙민학(洛閩學;程朱學)에 연원을 둔 어휘가 있었다.
又得順天府學士周銓博學善吟詩循循有古人風與語悅之解佣刀爲文以贈之銓以圖書及排律一篇酬焉銓道李翰林東陽文望高世欲介銓一見而歸期已迫未能也後每送人朝 京傳致不忘之意於二人盖先生好賢樂善之誠出於素性而所謂天下之善七斯友天下之善士者也
또 한 사람 순천부 학사 주전(周銓)은 박학하고 시 읊기를 즐겨하며 정연한 모습은 고인의 풍모가 있고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선생이 패도(佩刀 : 허리에 차는 칼)를 풀어주고 글을 지어 그에게 증정했더니 전은 도서와 배율(排律;한시의 한 체) 한편을 답례로 주었다. 전은 말하기를, 한림 이동양(李東陽)의 문망(文望)이 세상에 높다 했다. 선생은 전을 중개자로 하여 한 번 만나보고 싶었으나 귀국할 기한이 이미 촉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연경(燕京)에 가는 인편이 있을 때마다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두 사람에게 전하게 했다. 대체로 선생은 어질고 착한 이를 좋아하고 더불어 즐기기를 좋아했는데, 이런 정성은 천성에서 타고난 것이었으니 이른바 천하의 선사(善士)라면 그의 벗 또한 천하의 선사이렷다.
三月癸卯還自 京師復 命進小學集說 上命校書館印頒中外
<1491년> 3월 계묘(27일) : 연경(燕京)으로부터 귀국, 복명하고 『소학집설(小學集說)』을 진상하니 주상은 교서관(校書館)에 하명, 인쇄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하다.
先生以小學註疏無如集說爲文跋其端入對奏之 上覽而嘉之卽令刊布以先生有功斯文特 賜馬裝以褒之我東之有集說自此而始學者之所頼大矣哉
선생은 『소학주소(小學註疏)』(註를 달아 본문을 해설한 것)로서 이 집설과 같은 것이 없다고 발문을 지어 책 끝에 첨부, 주상에게 입대(入對)하여 아뢰었다. 주상은 이를 열람하고 기뻐하며 즉석에서 간포할 것을 명하고 선생에게는 이 공로를 기려 말안장을 특별히 하사하여 포상했다.
우리나라에 집설이 있게 된 것은 여기서 연유된 것으로서 『소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乙巳除司諫院正言兼啣如故辭不 允丙午就職上箚論事因請歸覲蒙 允
<1491년 3월> 을사일(29일) : 전 직함에 겸하여 사간원 정언이 추가로 제수됨에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병오일에 취임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정사를 논한 후 귀근(歸覲)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다.
先生旣拜 命曰官以正言爲名不可以不正言箚陳四事一曰勉 睿學言正心誠意之要二日正朝廷言親賢遠奸之術三曰輔養東官言擇宮官固國本之道四曰作成人才言興學校正風俗之方指正關失言甚剴切 上溫批稱善次第施行權奸甚憚之
선생은 정언직을 배명한 후 “관직 정언이란 이름을 가지고 부정언(不正言)을 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차자로 다음 네 가지 사항을 아뢰었다.
첫째, 임금의 면학(勉睿學)에 대해서는 정심 성의(誠意;대학의 修身)의 중요함을 말하였고
둘째, 조정을 바르게 함(正朝廷)에 대해서는 어진 이를 가까이 하고 간신배를 멀리 (親賢遠奸)하는 계책을 말하였으며
셋째, 동궁(東宮)의 양육을 돕는 일(輔養東宮)은 궁관을 가려 써서 국본(國本;세자)을 튼튼히 하는 길을 논하였고
넷째, 인재를 양성(作成人才)하는 일은 학교를 일으키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그 내용에서 바른 점과 빠지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한 말은 매우 적절했다. 주상은 따뜻이 비답(批答)하고 칭찬하며 차례대로 시행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권세 있는 간신배들은 심히 꺼려하였다.
夏四月戊申還雲溪
<1491년> 여름 4월 무신(3일) : 운계(雲溪)에 귀향하다
丁卯除奉列大夫弘文館修撰兼啣如故以親疾辭不 允又辭
<1491년 4월> 정묘일(22일) : 종전 직함에 겸하여 봉열대부(奉列大夫), 홍문관 수찬에 제수됨에 모친 병환을 이유로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는데, 또 사양하였다.
五月辛巳以北征都元帥從事官承 召在途連狀乞免至 京又力辭乙丑遷龍驤衛司正拜章徑歸
<1491년> 5월 신사(6일) :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 종사관(從事官)으로 부름이 있어 상경하는 도중에 면직을 청하는 글을 연이어 올리고 서울에 이르러 또 힘껏 고사하다.
기축일(14일)에 용양위(龍驤衛) 사정직(司正職)에 보직변경이 되어 삼가 받겠다는 글(拜章)을 올리고 곧 돌아오다.
野人冠慶源上 拜許琮爲北征都元帥往討之許公知先生長於兵略啓請爲從事官 上從之下 旨促召乘馹赴 京先生以爲軍旅大事不可坐以辭免行且上疏旣入 都力陳親病危劇之狀懇乞終養 上不得已遞付司正使之歸養遂謝 恩而還
야인(野人)들이 경원(慶源;함경북도 북단, 6진의 하나)을 침범함에 주상은 허종(許琮)을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로 임명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허공은 선생이 병략(兵略)에 정통함을 알고 종사관으로 주청하였는데, 주상이 수락하고 역마를 타고 속히 서울로 올라오라는 교지를 내렸다. 선생은 전쟁의 대사라 앉아서 사면만 청할 수가 없어서 상경하면서 또 소를 올리고 서울에 도착하여 친병(親病)이 극히 위독한 상태이니 마지막 봉양을 하게 해줄 것을 간곡히 걸청(乞請)하였다.
이에 주상은 부득이 사정(司正)직에 직함을 붙여두고 귀양(歸養)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사은하고 곧 귀향하였다.
乙未以本職充校書館博士隸綱目校讐廳有 旨促召辭乙巳又承 召六月甲寅始拜 命
<1491년> 5월 을미(20일)에 본직으로 교서관 박사에 보직하고 강목 교수청(校讎廳)에 예속시키는 교지가 내리고 재촉하여 부름에 고사하였으나 을사일(30일)에 또 부름이 있어 6월 갑인(9일)에 비로소 배명하다.
朱子因資治通鑑作綱目綱倣春秋而兼掭羣史之長目倣左氏而稽合諸儒之粹後加更定未畢而沒大書分註或有矛盾 上極選文學之士設局校正
주자(朱子)는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거 강목(綱目)을 지었는데, 강(綱;大要)은 『춘추(春秋)』를 준거하고 겸하여 여러 사기의 장점을 채록하였으며, 목(目;細目)은 『좌씨전(左氏傳)』을 준거하였다. 그 후 여러 유학자의 빼어난 저작들을 고찰․ 규합하여 다시 정하였는데, 대서(大書;本文)와 분주(分註)에서 미완성된 것, 빠진 것들이 있고 간혹 모순된 점도 있었다. 주상은 문학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선발 설국(設局;임시기구를 설치하는 것)하여 교정하게 했다.
先生首被選 召時親癠已痊赴召入校讐廳論議之精明義理之嚴正出乎等夷紫陽筆意煥然益明諸名公皆折節相下考定之際必從先生之言聲譽傾朝奸黨側目
선생은 첫 번째로 선발되었는데, 이때 자당의 병환은 이미 나은 상태라 부름에 응하여 교수청(校讎廳)에 부임하였다.
선생은 논의가 맑고 밝으며 의리가 엄정함이 동배(同輩)들 가운데 우뚝 뛰어나 주자(紫陽)의 지은 뜻에(筆意)에 매우 환하게 밝았다. 여러 명공은 모두 절조(節操)를 꺾고 아랫 사람의 눈치만 보았다. 고찰하여 결정할 즈음에는 반드시 선생의 말에 좇으니 그 명성이 조정 안에 가득했다.
이에 간당(奸黨)들은 눈을 흘겼다.
秋八月庚午除兵曹佐郞兼啣如故仍校讐綱目辭不 允壬申拜 命
<1491년> 가을 8월 경오(17일) : 전직에 겸하여 병조좌랑이 제수되고 거듭 강목교수(綱目校讎) 직임에 임명함에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임신일 배명하다.
九月癸未訪趙伯符于白雲洞
<1491년> 9월 계미(10일) : 백운동의 조백부(趙伯符)를 방문하다.
伯符名之瑞能文學性鯁直有氣節同隸校讎廳甚相敬愛是日休沐與李仲鈞聯鑣往訪其僦居對飮于泉石之間盡日極歡而散
백부(伯符)의 이름은 지서(之瑞)인테, 문학에 능하고 성격이 강직하며 기절(氣節)이 있었다. 선생과는 교수청에 같이 예속되어 서로 깊이 경애하는 사이였다.
이날 휴일이어서 목욕하고 이중균(李仲鈞)과 더불어 그의 셋집을 방문하여 산수 좋은 곳에서 술을 마시며 종일 즐겁게 놀고 헤어졌다.
辛卯與僚友送西評事柳智翁于敦義門外
<1491년 9월> 신묘일(18일) : 동료들과 더불어 돈의문(敦義門) 밖에서 서평사(書評事) 유지옹(柳智翁)을 송별하다.
智翁名順汀晋州人善射啣長兵略有文武材先生素相善許以將相之器嘗爲北道評事甚稱其職至是又補西幕兩館及校讎諸僚設餞于西郭門外先生作序以送之{序見文集二卷}
지옹(智翁)의 이름은 순정(順汀)이고 진주인(晋州人)인데, 활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하고 병략(兵略)이 우수하여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었다. 선생은 평소 서로 좋아하고 장상(將相)의 그릇이라 믿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북도 평사(評事)를 하고 있을 때 그 직임을 매우 칭찬한 바 있는데, 이번에 또 서막(西幕; 평안도 兵營)에 보직된 것이었다. 이에 양관(홍문관 및 예문관) 및 교수청의 여러 료우(僚友)가 서대문 밖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선생은 여기서 서(序)를 지어 송별했다. (문집 2권 참조)
己亥除吏曹佐郞兼啣如故仍校讎綱目再辭不允壬寅拜
<1491년 9월> 기해일(26일) : 전직함에 겸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郞)이 제수되고 강목교수의 직임도 그대로 보임함에 재차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임인일에 배명하다.
命從銓卽洪瀚李宗準等薦也
이는 전 전랑(銓郞)[27] 홍한(洪瀚), 이종준(李宗準) 등의 천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27] 전랑(銓郞)이란 이조의 정낭(正郎)과 좌랑(佐郞)을 일컫는 말. 내외 관원을 추천, 전형하는데 가장 많은 권한이 있었다. 조선시대 관원의 등용은 이조(吏曹)에 속해 있었는데, 이조의 권력이 너무 커질 것을 참작하여 당시 가장 중시되던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 임명은 이조판서 아래에 있는 전랑이 좌우했다. 이런 이유로 이조정랑의 실권이 방대하여 이 자리에는 삼사 중에서 특히 명망이 높은 관원이 뽑혀 임명되었다. 전랑의 임면(任免)은 이조판서도 관여하지 못했고 전랑(銓郎)이 스스로 후임을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전랑법(銓郞法) 또는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이러고 하였다. 전랑직을 거치면 큰 과실이 없는 한 대개는 재상(宰相)까지 될 수 있는 요직이었다. 1575년(선조 8년) 동서분당을 초래한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대립도 이 전랑(銓郞)직을 둘러싸고 있어났다.
冬十月丁未校讐綱目成上箋進之陞奉正大夫仍帶銓郞
<1491년> 겨울 10월 정미(4일) : 강목교수(綱目校讎)가 완성되어 주상에게 보고하였다. 선생은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승진되고 전랑직은 그대로 가지다.
戊申除中訓大夫忠淸道都事兼春秋館記事官辭不 允
<1491년 10월> 무신일(5일) : 중훈대부(中訓大夫) 충청 도사(都事) 겸 춘추관 서기관이 제수되어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庚申夜有白虹貫月 上下敎求直言壬戌上疏請復 昭陵位號不 允
<1491년 10월> 경신일(17일) : 밤에 흰 무지개가 달을 관통하는 현상이 생겨 임금은 직언을 구하는 교지를 내렸다. 임술일(19일)에 소를 올려 소릉(昭陵) 복위를 주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先生嘗與秋江語及 昭陵事輒流涕曰 昭陵未復乃 國家之欠典臣民之鬱恨至是因求言上疏請復其略曰
선생은 언젠가 전에 추강과 이야기하던 중에 소릉(昭陵) 사건에 화제가 미치자 문득 눈물을 흘리며 소릉을 복위하지 않는다면 이는 국가의 흠전(欠典 : 典禮上의 결함)이요 백성들의 한 맺힘이 된다고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주상이 직언을 구하는지라 상소로 그 복위를 청하였는데 그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昭陵復位疏>
我 國家正如金甌無有虧缺而以臣觀之猶有一缺擧朝臣子戴天履地嬉嬉於綱常虧缺之中而不知何者是虧缺可勝歎哉自古帝王廟無獨主而惟我 文宗之廟則獨主綱常之虧缺典禮之虧缺未有大於此者矣
“우리 국가는 금단지(金甌 : 영토와 주권의 완전하고 견고함의 비유) 같이 반듯하고 이지러지거나 빠짐이 없사온데 다만 신이 보는 바로는 한 가지 결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강상(綱常 : 삼강과 오상)이 무너진 가운데서도 전 조정의 신하 되 사람들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서서 희희낙락 즐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무엇이 이지러지고 빠진 것인지 모르고 있으니 가히 통탄할 일입니다.
자고로 제왕의 묘(廟)에는 독주(獨主:홀로 있는 신주)가 없는 법이온데 유독 우리 문종묘에만 독주입니다. 이는 강상(綱常)의 결함이요 전례(典禮)의 결함으로서 이보다 더 큰 일이 없습니다.
光廟蘊濟世之略迫於羣情不得已受禪其廢 昭陵恐非 光廟本意也臣聞 文廟在東宮 昭陵已其殂不預 魯山之謀明矣若以母故則當時首謀諸人誅其子而原其女以其女無外事也宋玹壽 魯山之舅也而子琚姪瑛已蒙 先王之恩宥位諸朝矣然則 昭陵復不可宥乎
광묘(光廟;세조)는 세상을 구제할 지략을 감추어왔으나 뭇 사람의 마음(衆心)이 다그쳐와 부득이 보위(寶位)를 선양받게 되었고 소릉(昭陵)을 폐한 것도 광묘의 본의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신이 듣기로는 문묘(文廟)가 동궁일 때 소릉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여서 노산(魯山)의 모의로 참여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 노산의 어머니라는 연고가 그 까닭이라면 당시 수모자(首謀者) 여러 사람들의 자식은 벌을 받았으되 여식들은 바깥일에 무관하다 하여 죄를 용서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송현수(宋鉉壽)는 노산의 장인이온대 그의 아들 거(琚)와 조카 영(瑛) 등은 이미 선왕의 죄 사함의 은총을 입어 여러 왕조에 관직을 가졌습니다. 그러하온즉 어찌 소릉을 다시 죄 사(赦) 할 수 없겠습니까?
昔漢昭帝上官皇后父安謀逆伏誅而后以年幼不預謀得不廢追封其母敬夫人置園邑以祀之我 朝昭憲王妃父沈溫賜死籍其妻安氏爲官賤時有議罪人之女不可爲王妃 太宗曰惡是何言也 恭妃萬無動搖之理至 世宗朝大臣言 國后之母沒爲賤人於恩義不可特除賤案還給爵牒幷免其子女是私親之罪不及於未沒之后妃而后妃之恩偏覃於已坐之父母矣
옛날 중국 한나라 소제(昭帝)는 상관왕후(上官皇后)의 부친 안(安)이 복종을 거역하는 모의를 하다가 주살(誅殺)되었는데, 황후는 나이 어려 모의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폐위를 당하지 않았으며 그의 모친은 경부인(敬夫人)으로 추봉(追封)하고 원읍(園邑;묘 주위에 있는 묘지기의 마을)을 두어 향사(享祀)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아조의 소헌왕비(세종 비)의 부친 심온(沈溫)이 사사(賜死)되고 그의 처 송씨(宋氏)는 관천(官賤)으로 이적되었는데 당시 죄인의 여식으로 왕비(王妃) 됨은 불가하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오, 이 무슨 말인고! 공비(恭妃)는 동요할 이유가 만무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세종조에 이르러 대신들이 말하기를, ‘한 나라 왕후의 모친을 천인으로 지내게 함은 은의상(恩誼上) 불가하오니 천적(賤籍)을 특별히 제거하고 작첩(爵牒)을 환급함과 아울러 그들의 자녀들도 같이 면제하여야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친(私親)의 죄가 무관한 왕후, 왕비에게 미칠 수 없으며 왕후, 왕비의 은혜는 이미 죄를 입은 부모에게도 두루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臣伏念 昭陵生居壼位沒膺尊號未嘗有廢黜之命於 文宗之世而乃以母弟之故追毁其陵廟於旣薨十五年之後者則漢昭之原上 官 太宗之處 恭妃大不相類此豈非綱常典禮之虧缺者乎我 聖朝深仁厚澤可以六五帝四五王而其與措反不及於雜覇之漢臣竊痛之
신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소릉이 생전에 곤위(壼位)에 계실 때는 충심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문종의 치세에는 폐하여 내치라(廢黜)는 명이 있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지 15년이 지나서 어머니와 아우라는 연고로 해서 그 능묘(陵廟)를 추후에 훼손하였으니 이는 한나라 소제(昭帝)의 상관황후(上官皇后) 사죄(赦罪)와 공비(恭妃)에 대한 태종의 처리와는 크게 어긋나옵니다. 이 어찌 강상(綱常) 전례(典禮)의 결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조(聖朝)는 어지심이 깊고 은택이 두터워 가히 오제 삼왕과 비견되오나 정사의 처리는 오히려 한나라의 잡스런 패왕(覇王)에도 미치지 못하온 즉 신은 남몰래 통탄해 마지않습니다.
夫子有言三年無改於父之道可謂孝矣此謂爲人子者雖父道未善在所當改不忍遽改必待三年然後徐徐改正非謂父道雖未善終身勿改也觀於三年字可見聖人之意矣
성현의 말씀에 ‘3년을 두고 선친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효(孝)라 할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식 된 사람은 그 아비의 도에 옳지 않은 점, 마땅히 고쳐야 되고 급히 고쳐야 될 참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해도 반드시 3년을 기다린 연후에 서서히 개정하도록 하라는 것이며 선친의 도가 비록 옳지 않아도 종신토록 고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3년 동안 관망하라는 자구에 가히 성인의 깊은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
臣愚以爲 昭陵之廢不可謂盡善而今已歷三世閱三十七年則似不可委以三年無改之訓矣其在後嗣王繼述之道合有改正之義今之復位名正言順無可疑者臣願亟復 昭陵禁樵牧仍祔其主於 文廟一國幸甚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소릉(昭陵)의 폐위는 전적으로 옳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미 3세대를 지나면서 37년 동안을 보아왔은즉 ‘삼년무개(三年無改)’의 교훈에 미룰 수는 없습니다. 소릉이 있음으로써 뒤를 잇는 왕위 계승의 명분이 선다는 점에 개정의 뜻이 있습니다. 지금의 북위는 명분이 바르고 언론이 순탄할 것이며 아무도 의심쩍어하는 자 없을 것입니다.
신은 원하옵니다. 속히 소릉을 복위하시어 (묘역에서) 땔나무 베고 가축 방목하는 것을 금하여 주시고 신주를 문묘에 같이 모시게 하소서. 그러면 이는 나라의 큰 다행이 될 것입니다.”
上手批曰爾能言人之所不能言忠鯁可尙予亦不安於心者有年矣然玆事至重且大從當有酌量之道爾其勿辭往欽哉
이에 주상이 친히 비답하여 말하기를, “너는 다른 사람들이 능히 말할 수 없는 바를 능히 말하는구나. 충경(忠鯁 : 충성스럽고 강직함)함이 가상하다. 나 역시 여러 해 마음이 편치 못하였도다. 그러나 이 일은 지극히 중차대한 일인 만큼 마땅히 심사숙고하여 처리하는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이다. 너는 거기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하지 말고 돌아가서 기다려라.” 라고 하였다.
○先生每讀史至奸凶附勢忠良受害未嘗不激昻慷慨不啻若躬親當之其剛大之氣忠義之心直欲以一身任萬世綱常之重
선생은 사기를 읽을 때마다 간흉배들은 권세에 아부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들은 해를 입는 사실(史實)을 접하게 되며 이때는 미상불 격앙되고 강개(慷慨)할 뿐 아니라 마치 몸소 당한 것 같아 굳건한 의기(剛大之氣)와 충의심(忠義心)이 생기고 이 마음은 곧 그의 한 몸을 강상(綱常)이 만세에 존중되도록 하는데 바쳐야겠다는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昭陵被廢三十餘年秋江嘗一言請復僅及於諸條之末而奸黨毁誣幾陷不測朝野忌諱畏縮不敢復言先生獨慨然陳疏辭語尤極激切聞者感動 上優批嘉納而沮撓者多事寢不行
소릉(昭陵)이 폐함을 입은 지 30여년, 추강이 일찍이 말하기를 “복위에 대한 주청이 여러 조목의 끄트머리에 간신히 오르게 되더라도 간당(奸黨)들이 헐뜯고 무고하여 몇 번이나 함정에 빠뜨릴지 예측할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조야(朝野)에서 모두 기피하고 두려워 위축되어 감히 복위에 대하여 말을 꺼내지를 못했는데 선생 홀로 개연(慨然)히 진소(陳疏)하였던 것이다. 그 언사는 매우 극진하고 격력하며 간절하여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주상은 너그럽게 가납(嘉納)하는 비답(批答)을 하였는데 한편에서는 저지하기 위해 요란을 떠는 자가 많았다.
결국 사안은 잠잠해지고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甲子以言不見用自劾因辭職名不 允促令赴任越丁卯始拜 命之任公州甲戌又上疏辭不 允
<1491년 10월> 갑자일(21일) : 주청한 사안이 채용되지 않음을 보고 스스로 탄핵한 다음 모든 직명을 사면하여 줄 것을 주청하였는데, 윤허되지 않고 속히 부임하라 재촉하는 영이 내렸다. 정묘일(24일)이 지난 다음 비로소 배명하고 공주(충청도 감영 소재지)에 갔다. 갑술일(5월2일)에 또다시 사직을 상소했으나 윤허되지 않다.
十一月丙子以親疾又疏辭徑還雲溪蒙 允
<1491년> 11월 병자(4일) : 친질(親疾)로 또 사직 소를 올리고 곧바로 운계에 귀향하였는데, 윤허를 받다.
丁亥如金海謁納陵有會老堂記
<1491년 11월> 정해일(15일) : 김해에 가서 납릉(納陵)을 배알하고 「회로당기(會老堂記)」를 짓다.
故事父老常以冬至日行祀事用太牢旣徹鄕人公餕是日卽祭餕之日前縣令金係錦縣監白啓英引儀裵烱參軍宋叔亨及先生從兄進士伯堅俱以鄕正與鄕黨父老咸會于堂請先生以記之{記見文集三卷}
옛날부터 늘 행하여 오던 일로서 동지일에 부로(父老)들이 모여 능에 제사를 지내고 제사에 사용한 태뢰(太牢 : 소, 돼지, 양을 갖춘 제물)는 향리인들이 다 같이 나누어 먹었는데, 이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전 현령 김계금, 현감 백계영, 인의 배형, 참군 송숙형, 그리고 선생의 종형 진사 백견 등이 향정(좌수)으로서 향리 부로들과 함께 당에서 모임을 갖고 선생에게 당기(堂記)를 청함에 「회로당기(會老堂記)」를 지었다. (문집 3권 및 『속동문선』 14권 참조)
五年壬子{先生二十九歲}
○ 1492년 임자 (성종 23년) 선생 29세
春正月己丑往木川別墅
<1492년> 봄 1월 기축(18일) : 목천에 있는 별서 (別墅 : 일종의 별장)에 가다.
墅在縣東鵲城山下磻谷卽先生繼配夫人本宅之隣也先生嘗愛其溪山明媚營小墅于溪上置奴婢二口以爲往來休息之所至是又作精舍扁其額曰竹林復刻于石以寓慕仰朱子之意
별서(別墅)는 목천현(현 충남 천원군 목천면 일대) 동쪽 작성산(鵲城山) 밑 번곡, 즉 선생 계배부인 본댁 인근에 있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 산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계곡 위쪽에 작은 별서를 지어 노비 두 사람을 두고 왕래하면서 휴식소로 사용하여 왔는데, 이번에 또 정사(精舍)를 지어 편액에 ‘죽림(竹林)’이라 새기고 그 오른쪽에 주자를 우러러본다는 뜻으로 ‘우모(寓慕)’라 다시 새겼다.
二月壬子除修撰有 旨促召上疏辭不就
<1492년> 2월 임자(11일) : 홍문관 수찬에 제수하는 교지가 내리고 재촉하여 불렀으나 사양하는 소를 올리고 취임하지 않다.
癸亥歸雲溪覲母夫人己巳如密陽謁金先生講周易七日而還
<1492년 2월> 계해일(22일) : 운계에 귀향, 모부인을 뵙고 기사일(28일)에 밀양에 가서 김선생을 배알, 7일간 『주역』을 강한 다음 돌아오다.
辛未復有 旨促召又辭不就
<1492년 2월> 신미일(30일) : 다시 재촉하여 부르는 교지가 있었으나 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다.
三月庚辰復以吏曹佐郞承 召上疏請賜暇讀書
<1492년> 3월 경진(10일) : 다시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상소하여 사가독서를 청하다.
疏略曰臣幼年登仕學未知方事君而進言無倫不見啓沃之實處世而開口觸諱多積齮齕之怨旣修身之不能奚治人之暇論
상소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신은 어린 나이(23세)에 등과하여 벼슬하고 있사온데, 배움은 아직 임금을 섬기는 방법도 알지 못하고 진언(進言)은 물론 계옥(啓沃 : 사심없이 충성된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임금에게 사뢰는 것)의 실적도 볼 수 없으며 처세에서도 입을 열면 기휘(忌諱)하는 바를 범하여 시기하고 배척하는 원한을 많이 쌓아왔습니다. 수신(修身)도 다할 수 없는 몹이 어찌 치인(治人)을 한가하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古人所戒少年登科一不幸臣之謂也古者四十强仕所以待道成德立然後就仕今臣年未三十歷敭華要翰苑玉署史官銓郞世云淸選而臣皆兼之臣以何才能敢據非分之職偏荷無比之寵而不知止乎禍福無門惟人所召不有人殃必有天刑每一念至不寒亦慄惟 聖上保全之臣生逢明時嘗欲用力於學而仕宦無暇實違素志
고인(古人)이 훈계한 바에 의하면 ‘소년등과(少年登科)는 일불행(一不幸)’이라 했는데, 이는 신을 두고 이르는 말 같습니다. 옛말에 ‘40세는 되어야 벼슬살이에 힘쓸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신이 도(道)를 이루고 덕(德)을 세운 연후에 벼슬살이에 나아가기를 바라는 소이(所以)이옵니다. 지금 신이 나이 30 미만(29세)이온데, 화려한 요직인 한원(翰苑:예문관). 옥서(玉署:홍문관), 사관(史官)과 이조(吏曹)의 전랑(銓郞) 등을 거치면서 승진해 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청선(淸選)이라고 합니다. 신이 이런 직책을 모두 겸하고 있는데 신이 무슨 재능이 있어 이 분에 넘치는 직책들을 감히 차지하겠습니까? 비할 데 없이 과분한 은총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화복(禍福)은 무문(無門)이라 오직 사람이 부르는 바에 따를 뿐이며 사람의 재앙이 없으면 반드시 천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미칠 때마다 공연히 두려워집니다. 오직 성상(聖上)께서 보전하신 이 태평 세상에 신이 태어나 일찍이 학업에 힘쓰고자 하였으나 벼슬살이에 여가가 없어 실은 평소의 뜻을 어기고 있습니다.
伏乞 聖慈亟遞臣職退之田野給以十年之暇使得以讀書修道治心養性學優從仕轉禍爲福云云 上優批不許
엎드려 성상의 자애를 걸구하오니 속히 신의 직임을 교체하여 전야(田野)로 물러나게 하여주소서. 그리고 10년의 여가를 주시어 독서함으로써 수도(修道)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착한 천성을 기리고 학업의 발전을 얻은 다음 종사(從仕)하게 하시어 전화위복되게 하여주소서...”
이에 주상은 너그러이 비답하되 허락하지 않았다.
丙戌又承 召辛卯始拜 命壬辰復上疏請還賜第退居田里不 允
<1492년 3월> 병술일(16일) : 또 부름이 있어 신묘일(21일)에 비로소 배명하다.
임진일(22일)에 다시 상소하여 하사받은 저택을 반환하고 전리(田里)로 퇴거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夏四月乙卯復拜修撰兼啣如故辭不 允
<1492년> 여름 4월 을묘(15일) : 종전에 직함을 더하여 수찬(修撰)직이 다시 제수되어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다.
五月乙亥應製端午帖子十二章
<1492년> 5월 을해(6일) : 단오 첩자 12장을 응제(應製 : 왕명에 응하여 시문을 짓는 일)하다.
是日 上御仁政殿敎曰近見帖子多不致意自今聚文臣于闕中令能詩宰相第其高下居魁者論賞先生製進四殿帖子十二篇極其頒禱贊美之辭而繼以箴誡規諫之語命官科次遺意也擢爲第一賜綠錦貼裏一領以獎之
이날 주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와 교시하여 말하기를, “최근 많은 첩자(帖子:帖子詞)[28]들을 보았는데 내 뜻을 전하지 못하였다. 지금부터 문신들을 궐 안에 모이게 하라.” 라고 하고, 시에 능한 재상에게 영을 내려 고하(高下) 등급을 매기고 으뜸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게 하였다.
선생은 첩자(帖子) 열두 편을 지어 사전(四殿)에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칭송, 축도, 찬미하는 말이 극진하고 여기에 경계(箴誡)하고 바르게 간(諫)하는 말이 이어졌다. 명을 받은 재상은 선생의 글을 제 3위의 서열에 올렸다. 주상은 이를 살펴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고체시(古體詩)를 쓴 사람은 여기에 충성과 사랑의 마음을 끼쳐놓았다.”고 하고, 제 1위로 뽑아 안감을 갖춘 녹색 비단 옷감 한 벌을 포상으로 하사하였다.
[28] 帖子詞(첩자사) : 명절날 궁중 연회에서 한원(翰苑)의 선비들이 지은 사장(詞章)
秋七月癸未陞中直大夫弘文館副校理知製 敎兼 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藝文館奉敎再辭不 允
<1492년> 가을 7월 계미(15일) : 중직대부 홍문관 부교리, 지제교 겸 경연의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예문관 봉교로 승진되어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八月丁未隨 駕詣成均館行釋奠與百官儒生宴于下輦臺
<1492년> 8월 정미(9일) : 어가(御駕 : 임금이 타는 수레)를 수행, 성균관에 이르러 석전(釋奠 : 문묘에서 공자를 제사하는 의식)을 지내고 백관 및 유생과 함께 하련대(下輦台)에서 연회에 참석한다.
是日 上幸成均館親行釋莫於 先聖仍御下輦臺饗百官儒生宰樞文臣入侍殿內堂下文臣分坐庭下與宴儒生三千餘人環橋門觀者亡慮萬餘人上下皆揷花先是 命弘文館倣大射禮樂章新製樂章至是令工歌而侑之各司分掌設饌
이날 주상은 성균관에 거동하여 친히 선성(先聖)에 석전을 지내고 이어 하련대에 임하여 백관과 유생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재상급 문신들이 전내(殿內)에서 입시하고 당하관 문신들이 뜰 아래에 나누어 앉았으며 연회에 참석한 유생 3천여 인은 교문(橋門)을 둘러싸고 앉았다. 구경꾼들이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는데, 상하가 모두 꽃을 꽂았다.
이에 앞서 홍문관에 명하여 대사예악장(大射禮樂章)[29]을 본떠 새로 악장(樂章)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제 악공들로 하여금 그 노래를 부르게 하고 각 부서에서 맡아 준비한 음식들을 권하여 먹게 하였다.
[29]大射禮樂章(대사예악장) : 석전을 지낸 다음 임금이 활을 쏘는 예를 행할 때 부르던 악가(樂歌)
壬子拜成均館直講兼啣如故
<1492년 8월> 임자일(14일) : 종전 직함에 겸하여 성균관 직강(直講)이 제수되다.
九月己巳金先生訃音至爲文遙哭心喪如禮
<1492년> 9월 기사(1일) : 점필재 김선생의 부음이 다다라 글을 지어 요곡(遙哭 : 멀리서 곡함)하며 예에 따라 심상(心喪:제자가 스승의 상을 입는 것)을 행하다.
金先生以刑曹判書己酉致仕歸密陽至是卒年六十二先生方欲解官奔哭梅軒公喪未果
김선생은 1489년 기유(성종 20년) 형조판서직을 마지막으로 벼슬살이를 마치고 밀양에 돌아가 지금에 이르렀는데, 향년 62세로 별세하였다.
선생은 당장 관직을 풀고 달려가 곡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매헌공(梅軒公) 상을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甲申{十六日}哭梅軒公
<1492년 9월> 갑신일(16일) : 매헌공을 곡(哭)하다.
公以景泰乙亥十一月壬午{十一日}生成化壬寅文科壯元官至刑曹佐郞至是卒年三十八先生有送終文{祭文見文集四卷}
공은 1455년 을해(세조 1년) 11월 11일 출생하여 28세 때인 1482년 임인(성종 13년)에 문과에 장원한 후 관직에 종사, 형조좌랑까지 역임하고 지금에 이르러 38세로 졸하였다.
선생의 송종(送終) 제문이 남아 있다.(문집 4권 및 『속동문선』19권 참조)
戊子除司諫院獻納兼啣如故以兄喪辭不 允給由辛卯再辭不 允
<1492년 9월> 무자일(20일) : 종전의 직함에 더하여 사간원 헌납(獻納)이 제수됨에 형의 장례를 이유로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말미가 주어졌다. 신묘일(23일)에 재차 사양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癸未就職與忘軒上劄劾李克墩成俊爭權分黨
<1492년 9월> 계미일(15일) : 사간원에 취임하여 망헌(忘軒)과 더불어 차자(箚子)를 올려 권세를 다투고 분당을 획책하는 이극돈(李克墩)과 성준(成俊)을 탄핵하다.
先是克墩爲兵判以俊爲北道兵使俊怒辟克墩子世經爲評事克墩亦怒墩俊俱以權奸互相傾軋附已者右之異已者斥之各分黨類
이에 앞서 이극돈이 병조판서를 하고 있을 때 성준을 북도 병사로 임명하였는데, 이에 성준이 노하여 극돈의 아들 이세경(李世經)을 그의 휘하 평사(評事)로 징용하여 극돈 역시 노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권세 있는 간신으로 서로 세력을 기울여 다투게 되었다. 자기편에 붙는 자는 후대하고 떨어져 나가는 자는 배척하여 제각기 당의 무리를 나누고 있었다.
忘軒時爲正言先生遂與上箚劾之以爲小人相攻將成牛李之黨請幷遠竄 上從之亟罷墩俊職削去仕版墩俊甚啣之
망헌(忘軒)은 당시 사간원 정언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이 사람과 더불어 차자를 올려 탄핵하기를 소인배들이 서로 공격하고 있어 그대로 두면 우이(牛李)의 당(黨)[30]과 같이 될 것이니 모두 먼 곳에 귀양 보내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주상은 이를 좇아 당장 극돈과 준을 파직하고 관직자 명부에서 빼버렸다.
극돈과 준은 크게 앙심을 품었다.
[30]우이(牛李)의 당(黨) : 당나라 우승유(牛僧儒)와 이종민(李宗閔) 두 사람의 당파 싸움.
丙申復拜副校理兼啣如故 賜暇湖當讀書
<1492년 9월> 병신일(28일) : 종전 직함에 겸하여 다시 부교리가 제수되고 사가호당독서(賜暇湖堂讀書)[31]를 하게 되다.
[31]사가호당독서(賜暇湖堂讀書) : 젊고 유망한 학사를 뽑아 휴가를 주어 홍문관 독서 장소인 호당에서 학문을 연구하게 한 제도.
讀書堂舊龍山廢寺在江北岸 上之十九年癸卯改搆爲堂以爲弘文館讀書之所至是命大提學魚世謙選先生及李宗準等十人 賜暇讀書盖復 世宗朝故事也時稱湖當學士每令節必 宣醖賜讌時人莫不榮之
독서당(讀書堂)은 한강 북쪽 기슭 구(舊) 용산 폐사(廢寺)에 있었는데, 성종 19년에 홍문관의 독서 장소로 쓰기 위하여 개축한 것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대제학 어세겸(魚世謙)에게 명하여 선생과 이종준(李宗準) 등 10인을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대체로 세종조의 고사(세종이 인재양성을 위하여 집현전 학사에게 사가독서하게 한 전례)를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서 당시 이들을 호당학사(湖堂學士)라 칭하였다. 명절 때마다 임금은 이들 학사에게 꼭 술을 내리고 잔치를 베풀어주어 당시 사람으로서는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冬十月癸卯在湖當聞秋江訃爲位哭之
<1492년> 겨울 10월 계묘(6일) : 호당(湖堂)에서 추강(秋江)의 부음(訃音)을 듣고 곡하다.
秋江以慈訓中進士不仕終於杏洲田舍先生哭之慟旣殯又以文往酹有少微晦彩奎宿隕精天喪斯文誰與講明之語
추강은 그의 모친의 훈계에 따라 진사만 하고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는데, 행주(杏洲)에 있는 그의 시골집에서 이제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선생은 통곡하고 애통해했다. 빈소가 마련된 뒤에 또 제문을 지어 가지고 가서 잔을 올렸다. 강신할 때 조그마하고 희미한 광채의 서쪽 별자리(奎宿) 하나가 깊은 하늘 속으로 떨어졌다. 사문(斯文)(유학자의 경칭)을 잃고 누구와 더불어 강명(講明)의 말을 나눌꼬!
壬子遣姊子趙如愚操文往祭金先生
<1492년 10월> 임자일(15일) : 누님의 아들 조여우(趙如愚)로 하여금 제문을 가지고 가서 김선생의 제를 지내게 하다.
佔翁葬期將近以方營梅軒公葬事也未能往會爲文遣如愚行奠禮有士失大經國無典刑鴒原方急鱣堂莫及之語{祭文見文集四卷}
점옹(佔翁)의 장기(葬期)가 곧 다가오는데 마침 매헌공 장사를 당장 해야 하므로 선생은 갈 수가 없어서 제문을 지어 여우(如愚)를 보내어 전례(奠禮)를 행하게 하였다.
그 제문에는 “선비들은 대경(大經 : 경서와 같은 큰 스승)을 잃었고 나라에 전형(典刑)[32]이 없어졌습니다. 형제의 일이 급하여 전당(鱣堂 : 講堂)에 나아가지 못하옵니다.”라는 말이 있다.(제문은 문집 4권 참조)
[32]전형(典刑) : 일정불변의 法典인데 여기서는 법전과 같은 훌륭한 사람 佔翁을 지칭.
十一月庚午窆梅軒公于龍仁之介谷
<1492년> 11월 경오(3일) : 매헌공(梅軒公)을 용인의 개곡(介谷)에 장사 지내다.
在外祖參議公兆西枕子之原先生有遣莫祭文{見文集四卷}刑曹判書蘇隱李封撰誌文先生篆其碣曰黃甲第一名及第靑春三十八浮生
장지는 개곡에 있는 외조 참의공 묘의 서쪽 베갯머리의 언덕이었다.
선생의 「유전제문(遺奠祭文)」이 남아있다.(문집 4권 및 「속동문선」19권 참조).
형조판서 소은(蘇隱) 이봉(李封)이 지문(誌文)을 짓고 선생이 전서(篆書)하였다. 비석에는 ‘황갑제일명급제청춘삼십팔부생’이라 했다.
癸酉鄭而信辛德優李浪翁來訪
<1492년 11월> 계유일(6일) : 정이신(鄭而信), 신덕우(辛德優), 이낭옹(李浪翁)이 내방하다.
而信誠謹字能文學篤忠孝德優名永僖號安亭倜儻有大節不喜科名
이신(而信)은 성근(誠謹)의 자(字)다. 그는 문학에 능하며 충효가 돈독하였다.
신덕우(辛德優)의 이름은 영희(永僖)요 호는 안정(安亭)인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대절(大節)이 있고 과거나 명예에 개의하지 않았다.
浪翁名黿號再思堂豪邁卓異文章行義爲世推重皆先生之神交也相與訪先生于服舍以佔翁及秋江梅軒之繼逝相對流涕深歎吾道之益孤朝野之不幸因語及佔翁諡議事先生曰非文正則文忠爲當諸公皆以爲確論未幾浪翁在太常果議文
忠以是被甲子之禍
이낭옹(李浪翁)의 이름은 원(黿)이요 호는 재사당(再思堂)인데, 성품이 호탕하고 인품과 재능이 유달리 뛰어나 세인들이 그의 문장과 행의를 추앙하고 존경하였다. 이분들은 모두 선생과 신교(神交)를 맺고 있었는데, 함께 복사(服舍;직장)로 선생을 방문하였다. 점옹과 추강 그리고 매헌공이 연이어 서거한 터라 서로 마주 대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심히 탄식하기를, “이는 우리 도(道)의 외로움을 더하는 일이요 조야(朝野)의 불행이다.”라고 하였다. 화제가 점옹의 시호를 의논하는 사안에 이르자 선생이 ‘문정(文正)’아니면 ‘문충(文忠)’이 적당하겠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기로 확론을 지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낭옹이 태상(太常 ; 太常寺 : 제사와 贈諡 일을 담당한 관청)에 있었는데 과연 ‘문충’으로 의결하였다. 이 일로 해서 낭옹은 뒤에 갑자사화에서 화를 입었다.
乙亥哭朴希仁有哀辭
<1492년 11월> 을해일(8일) : 박희인(朴希仁)을 곡하다.
希仁名增榮號訥齋先生之同庚也孝友有文學居喪滅性年才二十九先生哀惜之收其孤以誨之卽薰也後登薦科爲名臣{哀辭見文集四卷}
희인(希仁)의 이름은 증영(增榮)이요 호는 눌재(訥齋)인데, 선생과는 동갑이었다. 효성과 우애가 두텁고 문학을 쌓았는데 거상(居喪) 중에 지나친 슬픔으로 성명(性命)을 잃어 2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선생은 애석해하고 그의 아들을 거두었는데 선생의 감화로 가르침을 받은바 되어 후에 천거와 과거를 통하여 명신(名臣)이 되었다.
선생의 애사(哀詞)가 남아있다. (문집 4권 참조)
六年癸丑{先生三十歲}
○ 1493년 계축 (성종 24년) 선생 30세
春正月癸未陞弘文館校理辭不 允甲申又疏請解職歸覲丙戌特 命以頒論御史便道往省丁亥宿于龍仁館與鄭光弼論時事
<1493년> 봄 1월 계미(17일) : 홍문관 교리(校理)에 승진하는 발령을 받아 고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갑신일에 또 다시 소를 올려 해직과 귀근(歸覲)을 주청하였으나 병술일(20일)에 반유어사(頒諭御史)[33]의 특명을 받게 되어 가는 길에 고향에 귀성하다. 가는 도중 정해일(21일) 용인관(龍仁館)에 유숙하면서 정광필(鄭光弼)과 시사(時事)를 논하다.
[33]반유어사(頒諭御史) : 임금의 유시를 널리 반포하기 위해 파견되는 어사.
時與光弼幷受兩南頒論之 命同日辭朝共宿于龍仁客館之一室先生慷慨論時事語多激光弼止之日言不可若是先生舊然切責曰士勛{光弼字}亦爲卑下之論耶何忍作無氣節之腐儒耶士之幼學欲其壯行也立君之朝食君之祿而不能使吾君爲堯舜之君不能使吾民爲堯舜之民趨走承順苟充祿位卽一患失之鄙夫子欲我效之乎
이 때 광필(光弼)과 더불어 영 ∙ 호남에 반유(頒諭)의 명을 받아 조정에 고하고 가던중 용인 객관의 한 방에서 같이 유하면서 담론하였는데, 선생이 시사를 논하면서 강개하여 언사에 격렬한 바가 많았다. 그런데 광필이 저지하면서 언사가 그렇게 과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에 선생은 분연히 힐책하여 말하기를, “사훈(士勛 : 光弼의 字) 마저 비굴한 논리를 편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기절(氣節) 없는 썩은 선비가 되도록 참아야 한단 말인가! 선비가 어릴 적부터 학업을 닦는 것은 장년이 되어 실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임금의 조정에 들어와서 임금의 녹을 먹고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같이, 우리 백성을 요순시대의 백성같이 되게 하지 못하고 그저 분주히 뛰어다니며 잔심부름이나 하고 받들어 순종하면서 녹 먹는 자리나 채우고 있는 것은 곧 자기의 직위 잃을 것만을 걱정하는 소인배가 할 일이다. 임자는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본받게 하려는 것인가!
惟我 聖上仁孝恭儉聰明勇智好賢易色從諫如流慨然有意三代之治而今之公卿大夫百僚庶士學術汗下才識淺短未聞進一嘉謨以輔君德發一讜論以矯時弊雖聖人在上不能致熙隆之治
우리 성상은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검소하고 총명하며 용기와 지혜가 있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여색을 가벼이 여기며 간언(諫言) 좇기를 물 흐르듯이 하고 삼대(三代 : 夏, 殷, 周의 3王朝)의 정치에 관심을 두고 뜻을 펼쳐 일으키시는데 지금의 공경대부(公卿大夫)와 모든 관료와 뭇 선비들은 학문이 저급하고 재주와 식견이 천박하여 아직 임금의 덕치(德治)를 보필할 좋은 계책 하나 제대로 올렸다는 말을 못 들었으며 시정(時政)의 폐단을 교정할 직론(直論)을 한번 제대로 발의했다는 말을 못 들었다. 이래 가지고는 비록 성인(聖人)이 임금 자리에 있을지라도 빛나고 융성한 치세에는 이르지 못 할 것이다.
天使董越所譏爾國有君無臣者誠知言也况使子言得行世之干祿貪榮之類將以直己行道爲恠異趨權附勢爲通達或有淸議正論者必曰言不可若是驅一世而歸之諂佞之域蠅營狗苟惟富貴是圖末流之害必至於視朝著如市井視君父如路人士勛何其誤也
천자(天子)의 사신(使臣) 동월(董越)이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임금은 있으되 신하는 없다.’ 고했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한데도 임자 말대로 봉록을 구하고 영화를 탐하는 따위의 행세를 취할 수 있겠는가. 장차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도를 행해야 할 사람으로서 괴이하지 않은가. 권세에 쏠리고 세력에 부화하는 풍조가 온 세상에 퍼지면 혹 맑고 바른 논의가 있어도 반드시 말이 그와 같아서는 안 된다 하고 온 세상을 몰아세워 결국은 의혹과 아첨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 파리처럼 악착스럽게, 개처럼 닥치는 대로 부끄럼 없이 오직 자기의 부귀만을 도모할 것이며 그 말세적 풍조의 폐단은 조정의 반열(班列)을 시정(市井) 정도로 보고 임금과 어버이를 길 가는 사람 정도로 보게 되는 데까지 반드시 이르게 될 것이다.
古人所謂一言喪邦無乃近之耶又曰子之平生事業吾知之矣性行醇謹言論典重兼之以文學之贍裕見識之宏博可爲一代之偉人也國無道舍黙足以容身國有道才望足以取官而所欠者鯁直
고인(古人)이 말한 바 ‘나라를 잃어 없어진 다음에야 가까워지려 하는가?’ 라는 말을 사훈은 어찌하여 범하려 하는가? 임자의 평생사업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성품과 행실이 선량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언론이 법도에 맞고 점잖으며 여기에 겸하여 문학이 넉넉하고 견식이 매우 넓으니 가히 일대의 위인이 될 만하지 않은가. 나라에 도덕이 무너져 없을 때는 입을 다물고 침묵함으로써 용신(容身 : 세상에 겨우 몸 붙이고 살아가는 것)에 만족해하고 나라에 도덕이 행해지면 재주와 명망이 있는 사람은 벼슬을 가지는데 만족해한다 했는데 여기에 빠진 것은 강직(剛直)함일세.
爾假使位居宰輔雖見君上誤信奸讒僇辱忠賢必不能牵裾攀檻碎首泣血以回天意以斥奸凶官職雖全身軀雖保百世之下烏能免張禹胡廣之譏乎士勛他日當記吾言之不謬也
그대가 가령 재상(宰相)의 자리에 있어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할 때 임금이 간사한 말을 잘못 믿어 충성(忠誠) 서럽고 어진 이를 욕되게 함을 본다 해도 그대는 반드시 죽음을 무릅쓰고 피눈물을 흘리며 매달려 임금의 마음을 돌려 간흉(奸凶)을 내치게 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관직이 온전하고 몸뚱이가 백세에 보전된다 해도 어찌 장우(張禹) 호광(胡廣)의 꾸짖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사훈(士勛)은 훗날 내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達一宵竟不相契後光弼在廢朝歷遍三司出入兩館而以謹黙得免戊申之禍及己卯變起光弼時爲首相泣涕力救不能得中夜繞床歎曰季雲料我如見眞異人也
이날 밤 일경(一更 : 8시 전후)에 이르러 마침내 돌아서고 말았다. 그 후 광필은 폐조(廢朝 : 燕山朝)에서 삼사(三司)를 두루 거치고 양관(兩館)을 출입하였는데, 근신하고 침묵함으로써 무오, 갑자의 양 사화에서 화를 면했다. 기묘사화 때는 광필이 영의정이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힘을 다하여 조광조(趙光祖) 등을 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야심한 밤 옥중에서 광필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계운(季雲)은 나의 앞일을 마치 본 것 같이 헤아렸다. 참으로 이인(異人)이다.”라고 했다.
二月丙辰至雲溪省母夫人
<1493년> 2월 병진(21일) : 운계(雲溪)에 이르러 모부인을 뵙다.
歷覲雖有 上命而王事不可停滯才留三日復行
모부인을 뵙는 일이 비록 주상의 명에 의한 것이었지만 왕사(王事)가 정체해서는 안 되었으므로 겨우 3일 머문 다음 다시 행차하였다.
三月己巳至密陽爲文祭金先生之墓{祭文見文集四卷}
<1493년> 3월 기사(4일) : 밀양에 도착해서는 제문을 지어 김 점필재선생 묘에 제사를 지내다.(제문은 문집 4권 참조)
壬申至金海館於臨錦堂有記{記見文集三卷}
<1493년 3월> 임신일(7일) : 김해관(金海館)에 도착, 임금당(臨錦堂)에서 당기(堂記)를 짓다.(문집 3권 참조)
甲戌省先墓於儲福山
<1493년 3월> 갑술일(9일) : 저복산(儲福山)의 선조 묘를 성묘하다.
丁亥過河東訪一蠹于蟾津幽居講大學衍義
<1493년 3월> 정해일(22일) : 하동을 지나다가 섬진의 은거 처에 있는 일두(一蠹)를 방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講)하다.
一蠹嘗愛岳陽洞之勝築室蟾津之口時以說書辭歸種竹蒔梅講誦吟哢若將老焉先生造其廬留一日講修齊治平之要
일두(一蠹)는 일찍이 악양동(岳陽洞)의 절경을 사랑하여 섬진(蟾津)어귀에 집을 지었다. 이때 그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설서(說書)직을 사임하고 돌아와 죽(竹)을 심고 매화(梅花)를 모종 내머 상송(講誦 : 뜻을 새기며 읽는 것)하고 시를 읊으며 아주 벼슬을 마칠 것 같았다.
선생은 이곳에 도착하여 하루를 유(留)하며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근본을 강하였다.
夏四月癸卯自昌寧復還雲溪
<1493년> 여름 4월 계묘(9일) : 창녕(昌寧)에서 다시 운계(雲溪)에 돌아오다.
五月庚辰至聞慶頒論畢直向京城
<1493년> 5월 경진(17일) : 문경(聞慶)에 이르러 반유(頒諭) 임무를 마치고 바로 서울로 향하다.
甲申復 命入對便殿條陳民隱因論時政乙酉拜司憲府持平兼啣如故辭不 允
<1493년 5월> 갑신일(21일) : 편전에서 주상을 뵙고 복명한 다음 백성들의 민생고에 대하여 조목조목 아뢰고 거기에 관련된 시정을 논하다. 을유일(22일)에 전 직함에 겸하여 사헌부 지평(持平)이 제수되어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先生是行也雖非按廉而周行一道凡守宰之廉貪生民之利病明探詳覈條列冊子入對奏之因言治國之要在於安民安民之策在於任賢遠佞任賢遠佞之道在於誠正格致誠正格致之方在於講學
선생의 이번 행차는 비록 감찰하는 임무는 아니었지만 한 도(道)를 두루 여행하면서 여러 지방장관들의 청렴과 탐욕, 민생에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등을 분명하게 살펴보고 자세하게 조사하여 조목조목 열거한 책자를 만들어 주상에게 입대(入對)하여 보고하였다. 인하여 말씀 올리기를, “치국의 요체는 안민에 있고 안민의 계책은 어진 이를 임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함(任賢遠佞)에 있으며 임현원녕(任賢遠佞)의 길은 성정격치(誠正格致 : 聖意, 正心, 格物, 致知 :大學의 修身)에 있고 성정격치의 방법은 강학(講學)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上虗懷聽納先生又以當世之急務君上之心術內而官掖外而朝廷以至間巷風俗凡有關於政敎者一一敷奏盡言不諱披肝瀝膽極其忠鯁左右莫不竦然 上亦改容待之其退也 上目送之願謂近臣曰此人也謨猷宏濶言論正大眞宰相材也卽拜持平遂上疏復申前奏 上手批褒寵特加一資
주상은 허심탄회하게 듣고 받아들였다. 선생은 또 당세(當世)의 급선무는 안으로는 궁중(宮中), 밖으로는 조정에서 항간에 이르기까지 풍속에 대한 임금의 심술(心術)이라 하고 정치와 교육에 관련된 여러 실례를 일일이 모두 사뢰었다. 가슴속의 진심을 모두 털어놓는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충성스럽고 강직함이 극진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송연(竦然)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주상 역시 안색을 고치고 선생이 퇴장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멀리 물러간 뒤에 곁에 있는 신하들을 둘러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지략이 깊고 원대하며 언론이 정대하다. 참으로 재상의 재목이로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즉시 지평(持平)직을 제수하였다.
선생은 먼저 사뢴 내용을 소장으로 다시 품신하였고 주상은 친히 비답하고 포상하며 총애하여 특별히 작위를 한 품계 올려주었다.
己丑復拜通訓大夫弘文館校理兼啣如故
<1493년 5월> 기축일(26일) : 다시 이전 직함에 겸하여 통훈대부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다.
秋七月戊戌有 旨以本職守藝文官應敎 賜暇讀書堂
<1493년> 가을 7월 무술(6일) : 본직으로 예문관 응교를 맡고 사가독서 하도록 교지가 내리다.
大提學洪貴達請選玉堂學士年少有才名者分畨 賜暇輪次讀書從之先生與申用漑姜渾李希舜又被選讀書于湖堂有五絃琴六絃琴琴架書案書架短檠等銘{銘文並見文集四卷}
대재학 홍귀달(洪貴達)이 옥당(玉堂:홍문관) 학사 중 연소하고 재명(才名)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번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도록 주청하여 시행되었는데, 선생은 신용개(申用漑), 강혼(姜渾), 이희순(李希舜)과 함께 피선되어 호당에서 독서하였다. 이때에 쓰던 오현금(五絃琴), 육현금(六絃琴), 거문고걸이(琴架), 책상(書案), 책장(書架), 짧은 등잔걸이(短檠) 등에 명문(銘文)을 지어 남겼다. (문집 4권 및 속동문선 11권, 18권 참조)
丁巳祗受 宣醞上箋謝 恩
∙<1493년 7월> 정사일(25일) : 하사주(下賜酒)를 받고 전문(箋文:길흉의 일이 있을 때 임금께 아뢰던 四六體의 글)을 올려 사은(謝恩)하다.
上遣中使 宣醞仍下 手書曰爾等文學皆他日大用之才也宜益勉學業以副予育英之樂特送酒示意其一歡遂共上箋謝
주상은 중사(中使:내시)를 보내어 술을 내리면서 손수 쓴 글을 함께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너희 문학사들은 모두 이 다음에 크게 쓰일 재사(才士)들인 만큼 마땅히 학업에 더욱 힘써서 나의 육영(育英)하는 즐거움에 부응하라. 특별히 술을 보내어 뜻을 표하는 것도 그 즐거움의 하나로다.” 이에 일동은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했다.
堂舊有 內賜水晶盞無盤至是造銅質鍍黃金爲盤先生銘之{銘見文集四卷}任熙載入分書字凸盤心書 內賜讀書堂五字姜士浩箋字凹
호당(湖堂)에는 전부터 하사된 수정잔(水晶盞)이 있었는데 소반이 없었다. 이제 와서 동(銅) 바탕에 황금 도금을 하여 소반을 만들었는데, 소반 가운데(盤心)와 사주(四周)에 명문을 새겼다. 명문은 선생이 짓고 임희재(任熙載)가 반심(盤心)에 ‘내사독서당(內賜讀書堂)’ 이라는 다섯 자를 팔분서체(八分書體)로 써서 양각하고 그 주위의 명문은 강사호(姜士浩)가 전자체(篆字體)로 써서 음각하였다. (명문은 문집 4권 참조)
八月戊子賡 御製四十八詠詩跋其端以進
<1493년> 8월 무자(26일) : 어제(御製) 48영(詠;詩)에 화답하는 시를 짓고 그 끝에 발문(跋文)을 지어 올리다.
時有雷震人於闕庭 上下敎求言尋下 御製四十八詠於湖堂使之賡進詩卽匪懈堂舊詠 上用其題次其韻所以詠四十八種花卉竹石鳥獸煙雲也先生旣賡其詩繼以跋文以寓陳戒{詩見文集一卷跋文見文集二卷}
당시 대궐 뜰에 있던 사람에게 벼락이 떨어진 사건이 있었다. 주상은 교지를 내려 간언을 구했다. 그리고 임금이 지은 시 48영에 대하여 호당에 하문하고 화답 시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시는 전에 비해당(匪懈堂 ; 안평대군)이 읊은 시의 제목을 취하고 그 운(韻)을 따서 주상이 지은 것으로써 화훼(花卉), 죽석(竹石), 조수(鳥獸), 연운(煙雲) 등의 48종을 읊었기 때문에 48영이 된 것이다. 선생은 그 시가(詩歌)에 화답하는 시를 짓고 그 끝에 발문(跋文)을 지어 이었는데 거기에는 빗대어 표현한 경계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는 문집 4권, 발문은 문집 2권 참조)
上手自批評極其稱嘗曰此人擧筆不忘規諫看他胸襟包得許大也○先生遭遇聖明知無不言至於尋常詞賦必進規諷以寓陳善閉邪勉德納忠之義觀於此跋文可見其大略矣
주상은 친히 스스로를 비평하고 극진히 칭상(稱賞)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붓을 잡았다 하면 규간(規諫 : 옳은 도리로 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남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포용하고 이해하며 허락함이 크도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참으로 뜻 맞는 임금에게 쓰임을 당한(遭遇) 분이었다. 주상은 예사로운 사부(詞賦)에까지도, 선을 베풀고 사악(邪惡)을 막으며 덕을 닦는데 힘쓰고 충신의 의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을 빗대어 표현한, 올바르면서도 완곡한 간언을 반드시 올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발문을 보면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九月己卯龍仁爲文祭梅軒公小祥
<1493년> 9월 기묘(?) : 용인(龍仁)에 가서 제문을 지어 매헌공(梅軒公) 소상(小祥)을 지내다. <※1492년 9월 갑신일(16일) 졸임>
先生於二兄三妹友愛隆至而尤篤於仲氏及其沒也哀號欲殊今讀其祭文二篇悽惋惻怛之情溢於辭表人此之昌黎之祭十二郞文云{祭文見文集四卷}
선생은 두 형과 세 누이에 대한 우애가 지극히 두터웠는데, 그중에서도 중씨(仲氏)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 선생은 슬프게 울부짖으며 오직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그 제문 두 편을 읽으면 참으로 슬프고 애절하며 측은하고 통한(痛恨)스러운 정이 문면에 넘쳐흐른다.
사람들은 이 제문을 중국의 문장가 한창려(韓昌黎)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에 비견된다고들 하였다.(문집 4권, 속동문선 19권 참조)
庚申著秋懷賦以見志
<1493년> 경신일(29일) : 선생은 「추회부(秋懷賦)」를 지어 뜻을 보이다.
先生在書堂每遇月明夜靜飮酒數杯後輒進琴歌此賦而和之悲彈慷慨令人下淚靜庵曰先生此賦不獨文章品格曠絶千古其志也慷慨激昻其氣也魁偉倜儻寫出來自家平生心迹云{賦見文集一卷}
선생은 독서당(讀書堂)에서 달 밝고 고요한 밤을 만날 때면 몇 잔의 술을 마신 후 문득 거문고를 잡고 부(賦)를 노래하며 슬프게 타고 강개(慷慨)하곤 했는데,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훗날 정암(靜菴)이 말하기를, “선생의 이 부(賦)는 문장의 품격이 천고(千古)에 드물 뿐 아니라 그 품은 뜻이 강개하면서도 격앙하고 그 기개가 웅장하면서도 분방함이 출가 이후의 평생의 심적(心迹)을 토로한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고 했다. (문집 1권 및 속동문선 2권 참조)
冬十月己酉茂豊副正摠來訪論琴曲
<1493년> 겨울 10월 기유(?) : 무풍부정(茂豊副正) 이총(李摠)이 내방, 거문고 곡(曲)에 대하여 논하다.
茂豊 太宗大王曾孫字百源詩文絶俗音律冠世與秀泉副正貞恩齊名早遊佔畢門與先生結爲神交
무풍(茂豊)은 태종대왕의 증손으로 자는 백원(百源)이다. 시문에 뛰어나고 음률에서는 당세의 으뜸으로 수천부정(秀泉副正) 이정은(李貞恩)과 그 명성을 나란히 했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문하에서 교유했는데, 선생과는 신교(神交)를 맺은 사이였다.
家在西湖是夜月明携琴相訪彈後殿曲其音甚哀切先生曰此非治世之音也樂音之所由生在於人心之感於物也故哀心感者其聲噍而殺樂心感者其聲嘽而緩喜之感也發而散怒之感也粗而厲敬者直廉愛者和柔且夫聲音之道與政通治世之音安而樂其政和亂世之音怨而怒其政乖亡國之音哀而思其民困故聞其樂而知其政審其音而知其心今聞是曲也哀而促抗而犯官微而商厲中含殺伐之音抑其始制曲者其有憂患憤怒乎
집이 서호(西湖)에 있는데, 이날 밤 달이 밝아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후전곡(後殿曲)을 탔다. 그런데 그 곡의 음률이 심히 애절하여 선생이 말하기를, “이 곡은 태평한 세상의 음이 아니다. 악(樂)은 음(音)에서 비롯되며 그 근본은 만물에 대하는 사람 마음의 느낌에 있다. 그런고로 슬프게 느낄 때는 그 소리가 느긋하지 못하고 낮아지며(噍殺) 즐겁게 느낄 때에는 가락이 화평하고 한가로우며(嘽緩) 기쁘게 느낄 때는 그 소리가 높아져서 흩어지고(發散) 분노를 느낄 때는 거칠고 사나우며(粗厲) 경건할 때는 진지하고 분별이 있으며 애정을 느낄 때는 그 소리가 온화하고 유순하다(和柔). 또 대체로 성음의 도는 정치와 통한다. 치세(治世)의 음은 편안하고 즐거우니 이는 그 정치가 화평한 때문이며 난세(亂世)의 음은 원망과 분노가 차 있으니 이는 그 정치가 도리에 어그러진 까닭이다. 망국의 음은 슬프고 시름에 잠겨있으니 이는 그 백성이 곤궁한 까닭이다. 그런고로 그 악(樂)을 들으면 그 정치를 알 수 있고 그 음을 살피면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곡을 들어보니 애절하여 거부감을 느끼게 하고 변조(變調)의 궁음(宮音 : 5음의 제1음)은 희미하고 상음(商音 : 5음의 제2음)은 사나우니 그중에 살벌함이 들어 있다. 생각건대 이 곡을 만든 사람은 우환과 분노를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라고 하였다.
百源曰此卽 先王所作其音本乎樂易長於和平豈有如君之所論耶先生曰此必作於危亂之時矣乃取六絃琴彈一闋百源曰吾學此曲久矣不自知哀噍抗厲至於如是也先生推琴曰吾聞姦聲感人而逆氣應之切恐他日有樂極哀生之應也百源曰然先生因愀然不者久之
백원(百源)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선왕께서 작곡한 것으로 그 음의 근본은 쾌활하고 온화하며 화평함을 북돋우는데 어찌 그대의 소론(所論)과 같은 사실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위난한 때에 작곡했을 것이다.”라고 하고, 육현금(六絃琴)을 취하여 한 곡 타 보였다. 백원이 말하기를, “나는 이 곡을 배운지 오래되었으나 이 곡이 이렇게까지 애절하고 소리가 죽어간다던가 심히 반항적이라던가 하는 사실을 내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선생은 거문고를 밀쳐놓으며 말하기를, “내가 들은 바로는 간사한 음악은 사람을 감동시키나 그 거스르는 기운은 큰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여 훗날 즐거움이 지극해지면 슬픔이 생기는 반응이 일어난다고 했다.” 고 하였다. 백원은 그러하겠다고 수긍했다.
선생은 이 일로 해서 근심스럽고 두려운 기색을 띠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十一月丁亥擬別如賦送姜士浩歸覲晋州
<1493년> 11월 정해(?) : 「의별지부(擬別知賦)」를 지어 진주에 귀성하는 강사호(姜士浩)를 송별하다.
十二月庚戌以聚散說贈李師聖{希舜}歸覲南原
<1493년> 12월 경술(?) : 남원으로 귀성하는 이사성(李師聖 ; 希舜)에게 「취산(聚散)」이란 글을 지어 기쁘게 해주다.
七年甲寅{先生三十一歲}
○1494년 갑인(성종 25년) 선생 31세
春正月戊午除議政府檢詳兼啣如故辭不就
<1494년> 봄 1월 무오(28일) : 종전 직함에 겸하여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다.
二月癸未復拜獻納應 旨上疏論天灾時變
<1493년> 2월 계미(24일) : 다시 사간원 헌납(獻納)을 배수(拜受), 교지에 응하여 천재시변(天災時變)을 논하는 소장을 올리다.
時有彗星見于箕尾分 上减膳撤樂下 旨求直言先生疏劾宰執以下十餘人請施屛裔之典 上手批獎論直聲震於朝廷奸黨屛息
당시 혜성이 나타나 기성(箕星) 별자리에서 그 꼬리가 갈라진 기현상이 나타났다. 주상은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풍악을 거두며 직언(直言)을 구하는 교지를 내렸다.
선생은 소를 올려 정권을 쥐고 있는 재상 이하 10여 인을 탄핵하고 변방으로 내치는 법(屛裔之典)을 시행하도록 주청하였다. 이에 주상은 친히 비답하였는데, 직성(直聲)에 대한 권장의 유시가 온 조정을 진동시켰으며 간당(奸黨)들은 숨을 죽이고 가슴을 조였다.
三月壬子移拜兵曹正郞兼啣如故
<1493년> 3월 임자(23일) : 전직함에 겸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옮겨 제수되다.
夏四月癸酉以歸覲辭蒙 允遂與夫人俱還雲溪
<1493년> 여름 4월 계유(15일) : 귀근(歸覲)을 위해 사직, 윤허를 받고 드디어 부인과 함께 운계(雲溪)에 귀향하다.
五月庚寅復拜弘文館校理知製 敎守藝文館應敎文臣兼宣 傳官再辭不 允
<1493년> 5월 경인(3일) : 다시 홍문관 교리, 지제교, 수예문관(守藝文館) 응교 등의 문신겸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어 재차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다.
六月甲子又承 召壬申拜 命庚寅辭不 允
<1493년> 6월 갑자(7일) : 또 임금의 부름을 받아 임신일(15일)에 배명하고 경인일(7월4일)에 사직을 주청했으나 허락되지 않다.
秋七月己亥遷禦侮將軍忠武衛副司直知製敎兼 世子侍講院文學春秋館記注官辭不 允癸丑謝 恩
<1493년> 가을 7월 기해(13일) : 어모장군 충무위의 부사직, 지제교 겸 세자시강원 문학, 춘추관 기주관으로 이직 명을 받아 고사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계축일(27일)에 사은(謝恩)하다.
甲寅進講 東宮乙卯以親疾辭拜章徑歸
<1493년 7월> 갑인일(28일) : 동궁에 진강(進講)하고 을묘일(29일)에 친질(親疾)로 인하여 사직서를 내고 곧바로 귀향하다.
時趙伯符爲輔德許獻之[琛}爲弼善廢主日事遊戱無意學問但畏 上訓嚴强御書筵宮官雖盡心陳講聽之邈邈伯符天性鯁直每常進講投冊於前曰邸下不力學至此當啓達於 上廢主甚苦之視如仇讐
당시 조백부(趙伯符;之瑞)가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하고 허헌지(許獻之;琛)가 필선(弼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세자였던 폐주(연산군)는 매일같이 하는 일이 그저 유희나 즐기고 학문에는 뜻이 없었으며 다만 주상의 훈계와 배움에 힘쓸 것을 타이르는 어서(御書)에 대해서만 두려워하였다. 연궁관(筵宮官 : 시강원의 관원)이 비록 온 마음을 다해 강(講)을 베풀어도 그저 귀 밖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백부(伯符)는 천성이 아주 강직하여 매번 진강(進講)할 때마다 책을 앞에 던지며 말하기를, “저하, 학업에 힘쓰지 않음이 이 지경에 이르면 마땅히 주상에게 고해 올려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폐주는 매우 고민스러워했으며 그는 마치 원수같이 보았다.
獻之不然柔辭婉語從容開導廢主甚許之是日先生與宮僚因進講入侍仰見壁上大書曰趙之瑞大小人也許琛大聖人也先生素知廢主之爲人嘗上疏請輔養東宮至是見壁書大驚懼翌日辭還鄕里謂友人曰 聖上萬歲之後必有焚坑之變矣
그러나 헌지(獻之)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부드럽고 순한 말로 조용히 개도(開導)했는데 이에 폐주는 그에게 매우 너그러웠다. 이날 선생은 궁료(宮僚)와 더불어 강(講)에 나가 입시했는데 벽 위를 보니 ‘조지서(趙之瑞)는 대소인(大小人)이고 허침(許琛)은 대성인(大聖人)이다.’ 라고 크게 써 붙여놓았다.
선생은 전부터 폐주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으며 일찍이 동궁의 보양(輔養)을 청하는 소를 올린 바도 있었는데 오늘 여기서 벽서를 보고는 크게 놀라고 염려되었다.
다음 날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가서 우인들에게 말하기를, “주상이 돌아가신 다음에 반드시 분갱(焚坑)의 변(變)[34]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34]焚書坑儒(분서갱유)란 학문과 사상이 탄압당하는 일, 즉 진시황이 詩書六經을 불태우고 유학자 460명을 생매장한 일.
八月辛未復除校理兼文學再辭不就
<1493년> 8월 신미(15일) : 다시 교리(校理) 겸 문학(文學)에 제수되었으나 재차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다.
九月丙申除吏曹正郞知製 敎兼承文院校理 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乘馹赴 召庚戌拜 命癸丑辭不 允
<1493년> 9월 병신(11일) : 이조정랑, 지제교 겸 승문원 교리,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이 제수되고 역마를 타고 속히 부임하라는 영이 내려 경술일(25일)에 일단 배명하고 계축일(28일)에 사임코자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冬十月癸未送李仲雍赴燕求道有感舊遊賦幷序
<1493년> 겨울 10월 계미(28일) : 구도차(求道次) 연경(燕京)에 가는 이중옹(李仲雍)을 송별하면서 「감구유부(感舊遊賦)」와 서(序)를 짓다.
仲雍名穆號寒齋少從佔畢學能文有志節未弱冠中進士嘗欲壯觀中華以求道隨賀正使赴 京先生作賦若序以送之{賦見文集一卷序見文集二卷}
중옹(仲雍)의 이름은 목(穆)이요 호는 한재(寒齋)인데 어릴 적부터 점필재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문학에 능하고 지절(志節)이 있으며 약관(20세) 전에 진사에 올랐다. 일찍부터 중국을 한 번 둘러보고자 했는데 이번에 하정사(賀正使)를 수행하여 연경(燕京)에 가게 된 것이다. 선생은 부(賦)와 서(序)를 지어 송별했다.(문집 1, 2권, 속동문선 2권 및 16권 참조)
十一月甲辰有 旨以本職兼兩館應敎 經筵侍講史館編修春坊弼善三辭不 允戊申拜命
<1493년> 11월 갑진(19일) : 본직으로는 양관(홍문∙예문)의 응교(應敎)를 겸하고 거기에 경연의 시강관(侍講官), 사관(史館)의 편수관, 춘방(春坊 : 세자시강원)의 필선이 제수되어 세 차례나 고사했으나 윤허되지 않아 무신일(23일)에 배명하다.
十二月庚申進講大學衍義講畢 宣御醞
<1493년> 12월 경신일(5일) : 경연에 진강(進講)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에 관하여 강하고 하사주를 받다
先生久帶 經筵每當入直必取所講書與僚員質疑論難務歸明快終夕徹夜從頭至尾無有關疑不效他人只讀付標冊面取具目前之疏忽挨過嘗曰伊川先生每當進講必宿齋預戒潛思存誠糞以感動上意此可爲講臣之法
선생은 경연에서의 직책을 오래 가졌는데, 매번 당직 때마다 강할 서적을 가지고 동료 관원들과 질의하고 토론을 밤새 철야로 하더라도 명쾌한 해답이 나와야 일을 마쳤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한 군데 미흡하거나 의문스러운 점이 있을 수 없었다. 단지 읽기만 하고 책장에 표를 붙여두기만 하는 다른 사람들을 본받지 않았다. 선생은 눈앞의 이런 소홀한 처사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이천(伊川) 선생(송나라 程頣 : 程子)은 매번 진강할 때마다 반드시 서재에서 자면서 미리 재계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사색하고 정성을 다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이것이 정녕 강을 맡은 신하의 모범이다.”라고 하였다.
是日承 命入侍夜對 上特取其掠功諸書文義最難曉處使先生進講先生從容開讀敷演推明論說無礙左右歎服 上大加稱嘗命賜酒進爵夜分而退
이날 밤 명을 받들어 주상을 모시고 대좌하였는데, 주상은 특히 여러 서적에서 발췌한 것을 가지고 글의 뜻이 가장 어려운 대목에 대해 선생으로 하여금 강하게 하였다. 선생은 조용히 풀어서 읽은 다음 자세히 뜻을 풀이하고 추리하여 밝히며 논설(論說)하였는데 막힘이 없었다.
좌우의 모든 사람이 탄복하고 주상은 크게 칭찬하며 술을 내리게 했고 선생 또한 임금에게 잔을 올렸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물러 나왔다.
丙寅有特 旨以編修官直史館辭不 允 庚午又辭不 允
<1493년 12월> 병인일(11일) : 편수관(編修官)으로서 사관(史館)에 당직하라는 특별교지를 받아 고사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아 경오일(15일)에 또 고사하였는데,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時 上有疾不豫先生度時事將變力辭不許
당시 주상은 질환(疾患)이 있어 앞일을 예측할 수 없었고 시사(時事)가 장차 변고가 있으리라 내다보고 극력 사양하였는데 허락되지 않았다.
己卯{二十四日}遭 成宗大王昇遐服喪如禮
<1493년 12월 > 기묘{24일} : 성종대왕의 승하(昇遐)를 당하여 예에 따라 복상(服喪)하다.
先生在史局記時政李克墩時爲全羅監司不進香載妓而行先生直書于策克墩聞之使人請削去先生不從曰孔子作春秋而亂臣賊子懼余學孔子者也此頭可斷此策不可改克墩不敢復言而甚啣之有中傷之意焉
선생은 사국(史局)에 있으면서 시정(時政)을 기록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전라감사를 하던 이극돈(李克墩)이 분향은 올리지 않고 기생을 태우고 행락(行樂)한 사실을 곧이곧대로 기록하였다.
이 사실을 극돈이 듣고 사람을 시켜 삭제하여 주도록 청을 넣어왔으나 선생은 이에 불응하여 말하기를, “공자는 『춘추(春秋)』를 지어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불효 불충하는 자들을 두렵게 했는데, 나는 이러한 공자를 배운 사람이다. 이 일은 내 머리를 자를 수 있을지언정 이 책을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극돈은 감히 두 번 다시 말을 하지 못하고 심히 원망하며 중상할 뜻을 품었다.
<탁영선생연보 상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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