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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상황화 스크랩 게리콜윈의 무슬림 내부자운동 지지자들에게 드리는 질문 10가지 (6,7)
하늘사랑 추천 0 조회 6 08.09.21 15: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게리콜윈의 무슬림 내부자 운동 지지자들에게

드리는 정중한 질문 10가지 (6,7)

 

6. 여러분은 C5 접근만이 많은 수의 (일반적 현상으로) 무슬림들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라는 인상을 확언 혹은 주지하게 될 때, 그와 동시에 내부자가 회심하지 않은 무슬림들과 차이가 없기 때문에 내부자 운동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주장과 서로 상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더 나아가서 C5 사역을 하고 있는 두 주요 종족들의 현장에서 얻은 믿을 만한 보고와 최근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숫자에 대해서 정말 의구심을 일으킨다. 논쟁의 여지가 덜 있는 C4 사역이 더 많은 열매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C5 사역이 있는 일부 지역에서는 실제로 많은 수의 개종자들이 옛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거나 혹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싶어서 C1 공동체로 합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실용주의적인 태도의 모호함에도 숫자로서 성공을 주장하면서 정확한 숫자를 말할 수 없고 더구나 숫자에 대한 다른 보고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역을 칭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유숲 형제

죤 트라비스는 C1-C5 분류를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전략적 단계를 묘사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C5를 유일한 전략이라고 보지 않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주의 인도를 따라가고 있다. 우리 중의 어떤 사람들은 샤하다를 말하기도하고 어떤 이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모스크에서 기도하지만 일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개인적인 선택이다. 바깥에서 그들을 C4 또는 C5로 분류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구별을 짓지 않는다.

우리를 연합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주 예수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다. 우리를 우리 공동체에서 몰아내고자 하거나 적어도 우리를 이단자로 낙인 찍어서 공동체로부터 격리시키려 하는 호전적인 무슬림들이 있고 또한 호전적인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격리를 도와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곳인 공동체 안에 남아 있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 공동체들 안에서 진정한 제자와 이름뿐인 기독교인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으나, 내부자 운동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제자들은 평범한 무슬림인 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 예수에 대해 증거하는 자로, 또 자마아트(믿음의 공동체)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거나 말씀을 공부하는 자로 드러난다. 그들은 침례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그들이 하는 기도가 응답 받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 부탁을 하기 위해 이들을 찾아온다. 바로 이들이 질투심이 가득한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다.

숫자 때문에 기뻐하기는 해도, 나는 내부자 운동이 숫자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수긍한다. 내부자 운동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주와 구주 되심을 믿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열매 안에서 보존하고 자라도록 은혜를 허락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일부 마을에서의 예수 운동에 대해 듣고 확인하려고 그곳에 갈 때, 내가 찾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그들 사이에 이적을 행하셨는지를 묻는다.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진정 예수 운동을 그 마을에서 시작하신 것이라는 신호로 여긴다.

 

릭 브라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이끄신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다양한 성향과 경험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믿음의 표현들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일부 무슬림들은 C5에 이끌리고 일부는 C4에 또는 C3에 이끌린다. C5로 오는 많은 사람들이 C4로 또는 C3로 옮길 수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일부 C3로부터 C5로 간 성숙한 MBB(무슬림 배경의 신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이전의 어느 때보다 더 그들의 정체성과 선교에 편안함을 느낀다. 따라서 이 모든 믿음의 표현들은 옳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며 계속해서 그분의 뜻을 찾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집단으로 하여금 표현이 변하도록 이끄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부자 운동이 단지 몇 군데에서만 관심을 받아왔지만 메시아적 무슬림은 전세계에 존재한다. C5와 C4 신자들 사이의 구별이 유동적인 것처럼 C6과 C5 신자들을 구별하는 것도 유동적이다. 이 범주들은 티머씨 테넌트의 글에서  표현된 것처럼 분명하게 분리되거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드베리가 주목한 것처럼 그들은 유동적인 스펙트럼 안에 있고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표현된다.

메시아적 무슬림이 되는 것의 조건은 많은 무슬림들이 기꺼이 그것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선택사항으로 안다면 많은 무슬림들이 성경을 읽고 믿는 자들과 연합하는 위험을 감수하고자 할 것이다.  무슬림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이 자신들의 문화를 포기하고 가족과 공동체에서 추방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개종자”들이 된다거나 추방당할 것이 두려워서 복음서를 읽는 것이나 듣는 것을 거부하게 될 것이며, 혹은 자신들이 말씀을 믿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성경읽기를 멈추게 되는 것이다. 메시아적 무슬림들의 선택은 이러한 두려움을 제거하고 열린 마음과 가슴으로 복음서를 듣고자 문을 여는 것이다.

나는 C5가 유일한 접근법이라거나 심지어 이상적인 접근이 아니라는 게리의 말에 동의한다. 어떤 가족이나 무슬림 공동체에서는 C4나 C3 상태에 대하여 인내를 보이기 한다. 그래서 그것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적절한 선택일 수 있다. 많은 이란인들에게 메시아적인 무슬림은 매력적인 것이 아닌데, 이유는 그들은 무슬림 정체성에 관심이 없고 다른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아주 피상적인 무슬림들이 많은 아(亞)사하라국가에서 무슬림 정체성은 희박하다. 결과적으로 개종에 관련해서 많은 자유와 용인이 존재한다. 그리고 많은 무슬림들이 매년 C3 형태의 그리스도인 정체성으로 개종을 한다고 한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융화될 수 있는 성숙한 공동체가 없다면 C4와 C5가 너무 복잡해서 다루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중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무슬림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죽음이나 추방으로 이어지는 공동체에서는 C4나 C3도 어떻게 하든 확고한 교회개척운동을 일으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개혁신학을 믿는 나에게 “무슬림 전도에서 어떤 것이 효과적이고 그렇지 않은가?”라든가 “이것이 교회역사에서 적절한 전례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들은 중요한 것이 못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공동체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와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에 동참하고 있는가, 아니면 저항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일 것이다.

우리가 모든 상황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전통적인 접근 대신에 우리 자신과 각 상황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을 우리의 주된 관심사로 만든다면 좀 더 잘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자의 한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공동체의 계획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전통적인 교회의 모델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보다는 교회론적 전통의 우상을 따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라고 기록된 바와 같으시며,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마 16:18), 그것을 하시도록 하고, 그의 왕국 안에 있는 모든 교회에 대하여 홀로 주가 되시도록 하자.

 

죤 트라비스

내부자 운동의 주창자들이 이것이 무슬림들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길이다 라고 하는 인상을 주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무슬림들은 C1-C6 스펙트럼에 걸쳐서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 안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게리의 질문 두 번째 부분에 관련하여 먼저 우리가 그들의 믿지 않는 가족과 이웃들과 대조적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발하는 예수를 따르는 내부 무슬림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많은 무슬림들이 예수를 따르는지를 계산하기 위해서 “조사연구원”들이 무슬림 공동체를 들쑤시고 다니는 것은 매우 어렵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무슬림이 무슬림 공동체를 떠나서 멤버십 통계를 기록하는 크리스천 조직체나 국가교회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러한 계산을 하는 것이 보다 쉽거나 덜 위험할 것이다.

그러나 내부자 운동은 무슬림 자신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기 때문에 통계가 어렵고 새로운 신자들에게는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이 된다. 더 나아가 내부 신자들의 숫자를 “계산”하는 시도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것으로 비치게 되고, 얼마간 조사하고 숫자를 세고, 우리가 그것을 판단 할 권리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다.

 

케빈 히긴스

이 글에서 어떤 주창자를 언급하는지 잘 알지 못하겠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결코 내부자 운동이 상대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주장한 적도 없고, “C5”가 유일한 희망이라든지, 다른 생동적인 대안이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했는지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내 입장이 아니다.

 

레베카 루이스

모든 무슬림 종족그룹이 동일한 범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주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랍 문화와 이슬람에서 분리되어 있는 상당한 무슬림 종족집단들이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를 향한 교회개척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알제리계의 베르베르족은 아랍과 이슬람의 통제를 거부하고 있고 아랍을 거부하며 자신들의 상용어로 프랑스어를 채택하고 있다. 북 이라크의 쿠르드족, 이란인, 그리고 중앙아시아 종족들 역시 아랍 이슬람 통제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한 문화 가운데서 C5 종족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지역의 무슬림 배경의 신자들은 종종 강력한 C5 운동을 거부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신자가 되기 전부터 소수이거나 자신들의 문화로부터 거리를 둔 사람들이다).

 

 

 

7. 당신은 C4 접근의 성경적인 지지들이 C5에서 제시하는 것과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C5가 C1에 대한 유일한 대안인 것 같아 보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여기 이 질문은 정말 되풀이하는 것이지만 되풀이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필 퍄샬이 이 중요한 점을 가장 잘 요약했다고 본다. 내가 느끼는 좌절감 중 하나는 내부자 운동이 C4가 하는 것과 같이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동일한 논거를 사용하면서 그것이 자신들에게서 원래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데에 있다. C4 선교사인 우리는 30년 동안 항상 무슬림 배경의 신자들이 자신들의 문화, 직업, 가족과 사회 범주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주장했었다. 우리의 강력한 입장은 우리 생각에 신학적이거나 혹은 윤리적인 타협이라는 것을 피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무엇이 타협하게 하는 지에 관해서 다른 쪽으로 나와야 한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죤 트라비스는 최근 위에 언급된 편집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매우 유익한 제안을 한바 있다: “정의에 따르면 C3와 C4 예수중심 공동체는 자신의 출생공동체 내에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시도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부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는 “문화적 내부자(C3나 C4를 위해서)”나 C5를 묘사하기 위해서 ‘종교적이고’ 혹은 ‘사회-종교적인’ 내부자와 같은 보다 나은 용어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이든 ‘외부자’가 부정적이고 뭔가 분리된 듯한 감으로 들리고, 많은 경우 자신의 공동체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무슬림 배경의 크리스천의 현실은 반영하지 않기에 우리가 새로운 용어들을 찾는 시간이 된 것 같다.

 

유숲 형제

이것은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한 이슈가 되지 않는다.

 

케빈 히긴스

여기서 콜윈이 누구를 언급하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이것은 공허한 메아리 논법처럼 점점 들리는 것 같다.

 

릭 브라운

성경적인 논쟁은 C4나 C5 그 둘의 요점들을 지지해주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비판가들이 C4에 관한 논쟁은 따르면서 왜 C5는 그렇게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하늘의 천사들이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많은 무슬림들을 인해서 기뻐한다면 왜 그들은 같이 기뻐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만 현실은 예수의 제자들이 무슬림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C4’나 ‘C5’ 용어는 단순히 스펙트럼의 준거점을 표현하는 것이고, 스펙트럼 자체가 일직선의 개념보다는 다차원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하게 구분하는 것은 다른 종족들을 취급하기 위해서 사실들을 왜곡하는 것이다. 나는 C3나 C2 크리스천과 신앙과 행동면에서 전혀 다르지 않으면서 자신들을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이라고 주장하는 메시아적 무슬림들을 만났었다. 그들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용어는 그들이 속해있거나 존경하지 않는 전통적인 종족그룹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C5 신자들인가? 또한 자신들을 무슬림이라고 인식하고 문화적으로 종교적인 무슬림과 같이 행동하고, 그렇지만 샤하다(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메시아적인 무슬림들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들을 C4로 만드는 것인가? 그리고 내가 수년 동안 알아온 사람들인데 샤하다를 하는지 않는지를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들은 챠트 어디에 있는 사람들인가? 샤하다를 말하는 사람에 관하여는 샤하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폭넓은 견해가 있는데 이것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결코 물어보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고 성경이나 꾸란을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많은 무슬림들에게 그들이 메시아적이든 세속적이든 샤하다를 말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소속을 확증하는 사회적인 의식이다. 축배를 들 때 영국에서 “하나님께서 여왕을 구원하신다”라는 말을 하나님과 구원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혹은 기도의 효과를 믿든 믿지 않든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가 메시아적 무슬림 공동체의 일원을 바라 본다고 할 때에, 대가족과 같이 다양한 입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나에게는 무슬림 종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묘사하기 위한 “메시아적인 무슬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선호한다.

비판가들은 힌두종족들 가운데 “교회 없는 기독교”와 무슬림 가운데 일어나는 C5 운동을 혼돈하고 있다.  신앙의 공동체와 한 부분을 이루고 있지 않은 메시아적인 무슬림들은 C5에 가깝다기 보다는 C6에 가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이 바람직한 상황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무슬림들은 가족과 공동체 중심이다. 그 결과로 메시아적인 무슬림들은 신앙의 가족과 믿음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교회(그들의 용어로 하면, 움마)와 한 부분이 되기를 또한 원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크리스천이 메시아적인 무슬림들을 “이단자”나 “위선자”로 거부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일치를 위배하고 불신과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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