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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 또는 김일(金一)
한국과 일본에 걸쳐 활약한 박치기왕
히키치 다쓰야(引地達也)
『세카이(世界)』 2007.2
한국인 전(前)프로레슬러 오키 긴타로(본명 김일)씨가 2006년 10월 26일 서울시내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77세. 김일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역도산(力道山)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스승으로 받들고 한국에 용기를 주며 활약했다. 그는 만년의 병상에서 부드러운 시선으로 필자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말해주었다.
1. 영웅
한국의 영웅 중 영웅이었다. 일본에서 역도산이 활약한지 약 20년 뒤, 김일은 한국에서 나라의 부흥과 성장의 상징이 되었다. 박 대통령이 ‘나보다 더 유명하고 꿈이 있는 사람’이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정신을 심어주었다’며 높이 평가했고 김일은 그 기대에 부응했다.
부유한 집이나 혹은 만화대여점에 놓여 있던 흑백텔레비전 앞에서 김일의 경기를 보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환성을 지르던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김일은 시합 전반에 상대에게 얻어맞지만 후반에는 반드시 역전하는 명배우였다. 역전극에는 박치기가 등장했고, 결정적인 기술도 역시 박치기. 한 쪽 다리로 바닥을 힘껏 구르는 박치기, 로프 위에서 뛰어내리며 구사하는 박치기. 텔레비전 앞의 구경꾼은 그 때마다 ‘박치기, 박치기’하며 소리를 질렀다. 역도산이 가라테(空手)의 수도치기를 반복할 때에 일본인이 느꼈던 것과 똑같은 카타르시스. 김일의 모습은 지금도 한국의 중장년층에게는 부흥의 증거이자 ‘가난해도 마음은 풍요로웠던 시대’의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영웅은 일본과 한국에서 막대한 돈을 벌었을 테지만 만년에는 모든 재산을 잃고 그를 존경하던 의사의 선처로 병원에서 지내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사람들에게 속고, 복잡했던 여성관계로 인한 지출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나자 물욕과 작별이라도 한 듯 넉넉하고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지냈다. 그리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2. 길을 떠나다
한국 최남단에 위치한 전라남도 고흥군. 窩舅?잔잔한 바다에 떠있는 거금도(居金島)에 우뚝 솟은 해발 592미터의 적대봉(績臺峰) 기슭마을에서 태어났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있던 1928년 2월 4일 아버지 김정수(金正守)와 어머니 선처자(宣處子)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 수출용 김 양식을 주업으로 삼아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생활을 했다. 17세 되던 해에 해방을 맞았다.
1948년 10월, 김일은 ‘여순반란사건’에 휘말린다. 남측의 단독선거에 반대해 제주도의 민중들이 ‘제주도봉기’를 일으키자 진압에 나선 제14연대 소속 군인 약 천 명이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켜 순천까지 점거했다. 반란군은 일주일 만에 한국군에 진압되는데, 그 후 치안당국은 철저한 ‘빨갱이 색출’을 시작한다. 반란군에는 김일의 동급생 여덟 명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반란을 일으킨 뒤 김일의 집에 들러 어머니 선처자가 차려 준 식사를 한 다음 어디론가 떠났다. 그 일 때문에 김일은 광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다. ‘너는 왜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했나?’ ‘노동당이 뭔지 저는 모릅니다,’ 아무 진전 없는 심문이 계속되었으나 격분한 검사의 모자가 바닥에 떨어지고 김일은 그것을 주워 검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검사는 옆에 있던 조사관에게 김일을 석방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1950년대 들어 가업을 도우면서 씨름대회에 나가 우승하곤 하던 김일은 드디어 일본잡지를 통해 역도산의 활약을 알게 된다. 여수항은 일본에서 여러 척의 화물선이 들어오던 곳으로 선원의 상륙과 동시에 많은 일본잡지가 흘러들어왔다. 부산에서는 나가사키(長崎)에서 방송되는 일본의 프로레슬링 중계를 수신할 수 있어 역도산의 분투는 ‘동포’의 활약으로 소문이 났다. 김일은 나중에 한국 최초의 세계복싱챔피언이 된 여수의 김기수에게 역도산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결심을 밝히고 ‘우리 서로 강해져 일본에서 만나자’고 약속한다.
이 ‘역도산을 동경해’ 밀항한 이야기는 김일 본인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다. 하지만 노동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한 다음에 역도산을 알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전술한 ‘빨갱이 의혹’ 때문에 고향에 남아 있을 수 없어 밀항했다는 추측도 설득력이 있다. 프로레슬링에 관한 정보는 무엇보다 재미를 우선시하는 만큼 진실이 왜곡되는 일도 흔하다. 김일의 밀항에 대해서도 김일 자신이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진실이 변질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여기서는 김일 자신의 말에 무게를 두고 싶다.
김일이 집을 떠난 것은 1956-57년경. 사실과 김일의 기억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날짜는 명확하지 않다. 손가방에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긴 김일은 어머니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만 남겼다. 국교가 없던 일본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은 밀항뿐이었다. 여수에서 일본행 화물선 선장에게 부탁해 선원으로 위장하고 시모노세키(下關)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한국 측에서 일본 쪽 수역에 일방적으로 그어놓은 이승만 라인과 일본에 있는 한반도 출신자의 취급, 그리고 대일(對日)청구권 문제 등 국교정상화를 위한 난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나라는 황폐해지고 따라서 부흥의 움직임이 한창이던 일본으로 건너가려는 밀항자가 줄을 이었다.
요코하마(橫浜)에서 경찰에 잡혀 구치소로 간 김일에 대한 처분은 좀처럼 내려지지 않았다. 취조관에게 ‘역도산의 제자가 되기 위해 왔다’고 말해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김일은 포기하지 않고 역도산에게 제자입문을 탄원하는 편지를 쓴다. ‘저는 한국에서 씨름을 한 사람입니다. 제자가 되고 싶어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제발 도와 주십시오.’ 받는 사람은 ‘도쿄 역도산’. 며칠 후 역도산의 수하가 찾아오고 김일은 풀려났다. 석방되도록 손을 쓴 사람은 자민당 부총재이자 일본프로레슬링 협회의 커미셔너였던 오노 반보쿠(大野伴睦)의 지시를 받은 비서 나카가와 이치로(中川一郞)였다.
오노는 역도산이 사망한 후에 일본프로레슬링 협회장에 취임한 전후(戰後) 최대의 픽서(fixer,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은밀히 중개, 조정함으로써 보수를 받는 인물-옮긴이)로 우익의 거물인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 동 협회부회장이자 도세이카이(東聲會)회장인 마치이 히사유키(町井久之)와 깊은 관계에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다마와 마치이는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교류가 있어 畸?로비정치가로 알려진 오노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고노 이치로(河野一郞) 등과 한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고다마는 일제 점령 하에 있던 한국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적이 있고 마치이는 재일한국인이었으므로 조선 출신인 역도산, 김일과의 관계가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일이 프로레슬링에 입문한 것은 1958-1959년. 역도산의 심부름을 하면서 합숙소 생활을 시작하면서 연습에도 돌입하게 된다. 역도산이 “현해탄을 건너 왔다면 무슨 일이 있든지 그저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드디어 김일에게 ‘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라는 링네임이 주어진다. 역도산은 “크게 되라는 의미의 오키(大木), 일본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힘센 소년 긴타로처럼 강해지라는 의미에서 긴타로(金太郞)”라고 다른 선수들에게 설명했다.
3. 스승의 죽음
김일은 ‘스승에게 자주 맞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조선 출신인 내가 다른 레슬러들에게 고초를 당하지 않도록 대신 때린 것이라 생각한다”며 스승의 애증으로 받아들였다. 골프 클럽 혹은 위스키 병 등 때리는 도구는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오키!’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예―ㅅ!’하고 대답과 함께 채찍 등 때릴 도구를 준비해 역도산에게 내밀었다. 질문에 대답을 할 때에 조금이라도 일본어 발음이 서투르면 ‘일본어도 못 한다’며 때렸다. 어느 날 유리재떨이로 머리를 맞았다. 재떨이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졌으나 김일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것을 본 역도산은 ‘지금부터 너는 박치기를 하라’며 레슬링에서 구사할 주 무기를 통고했다고 한다. “아파도 아픈 얼굴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웃는다.
‘다른 사람의 두 배 연습했다’는 증거가 그의 양쪽 귀에 남아 있다. 경단처럼 둥글게 뭉쳐버린 귀. 귓구멍을 거의 막고 있는 살덩어리는 링 바닥에 누워서 구사하는 기술을 훈련하는 것이 얼마나 참혹했나를 짐작하게 한다. 경기력이 향상되었으나 역도산이 명령한 기술은 박치기. 박치기가 김일의 대명사가 되고, 점차 김일을 경계하는 레슬러가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박치기는 스스로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김일이 입문한지 일 년 뒤에 일본프로레슬링에 들어온 것이 쟈이언트 바바(馬場)와 안토니오 이노키(猪木). 이노키와는 합숙소의 같은 방에 배정되어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평생 친분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역도산은 바바와 이노키, 오키를 신예 3인방으로 부르며 경쟁시켰다.
1963년 여름, 역도산의 지시로 김일은 미국 전역에 걸친 원정길에 나섰다. 미국 수행(修行)은 분명 레슬러로서의 출세를 의미했다. 하지만 그 해 12월 원정지에서 아는 기자를 통해 ‘역도산이 칼을 맞았다’는 정보를 듣게 된다. 역도산은 같은 달 8일 아카사카(赤坂)의 나이트클럽 ‘뉴 라틴 쿼터’에서 다이니혼코교(大日本興業)의 조직원과 싸움이 붙어 상대에게 복부를 찔리고 그 때문에 결국 15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것은 김일에게 커다란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2006년 3월 4일 일본에서 공개된 한국영화 「역도산」에서는 김일이 칼에 찔려 누워있는 역도산의 병실을 황급히 찾아오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 때 역도산은 한국어로 ‘긴타로, 우리 고향 이야기다’ 라며 말을 꺼낸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야욕을 품은 일본에게 침략을 당했는데도 ‘조선인’들은 웃고 있었던 데 분개했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성공하자. 성공하면 웃을 수 있다. 아니 웃고 싶으면 성공해야 한다. 일본에서 가장 크게 웃는 사람이 되자. 그때까지는 웃지도 울지도 않겠다고.” 그리고 울먹이는 표정의 김일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그러니까 긴타로, 남들 앞에서는 쓸데없이 울지 마라.’
영화의 클라이막스이긴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2004년 3월 4일 한국에서 영화가 개봉되던 날 김일은 내게 분통을 터뜨렸다. 자신은 미국 원정 중이었고 역도산이 찔렸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결국 은사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고. 이 영화는 역도산을 조선민족의 영웅으로 표현고자 한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김일은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오히려 역도산으로부터 들은 한국어는 한 마디뿐이라고 설명했다. 동료 선수들끼리 이야기를 ご㈃?중 ‘기쿄(桔梗)’라는 말을 듣고 그 의미를 몰랐던 김일이 화장실에서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였다. “선생님, 기쿄가 뭡니까?” “멍청한 녀석, 도라지를 말하는 거잖아.”
더욱이 김일이 분개한 것은 역도산이 사망한 후에도 한동안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일 인데, 그것이 원인이 되어 김일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고 말았다. 역도산 사후의 일본프로레슬링은 도요노보리(豊登), 요시노사토(芳の里), 요시무라 미치아키(吉村道明), 엔도 다카키치(遠藤孝吉)의 합의체제로 운영되었고 사장에는 도요노보리가 취임했다. 김일은 이들 운영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듬해인 1964년 1월 귀국했고 도요노보리를 비롯한 운영진은 그의 무단귀국을 비난한데 이어, 같은 해 9월에 김일이 미국에 가 있던 중에 일본프로레슬링이 한국원정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또다시 무단 귀국함으로써 일본프로레슬링에서 제명당한다.
역도산은 1963년 1월 일본 측에 공개하지 않기로 하고 한국을 방문, 국민들로부터 환대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 역도산의 후계자로서 김일의 귀국을 추진한 것이 바로 중앙정보부이다. 1964년 도쿄에서 김일과 접촉, 같은 해 극비리에 입국한 김일은 중앙정보부 차장 일행과 회담한 뒤 1965년 6월, 금의환향한다. 그 무렵 때마침 난항을 거듭하던 일한 국교정상화가 체결되었다. 식민지지배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일본 측이 대일(對日)청구권자금으로 3억 달러를 무상제공하며, 유상재정차관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1억 달러를 한국에 지불하기로 결정했으나 사죄가 없는 보상만으로 교섭이 종결된데 대해 한국여론은 반발했다.
학생들은 ‘6ㆍ3사태’라 불리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국가는 혼란에 빠졌다. 박정희정권은 김일의 귀국을 혼란의 완충재로 이용할 속셈이었다. 미국에서 세계챔피언 벨트를 획득, 한국전쟁과 남북대립으로 황폐해진 국내에서 민중은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해 줄 영예라며 환영해, 박 정권의 의도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항공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김일의 모습을 중계한 한국방송국 아나운서의 말투에서 당시의 떠들썩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세계레슬링 챔피언 김일 선수가 7년 만에 귀국했습니다. 이 날 김포공항에는 수 만의 환영인파가 몰렸고 그들이 외치는 환성은 6월의 창공에 힘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신장 185센티미터, 몸무게 130킬로그램. 역도산의 문하생으로 입문해 선배의 빨래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수련을 쌓은 김일선수는 결국 세계 정상에 올랐고 이렇게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월간조선 2005년 10월호)
김일이 귀국하기 전부터 한국에도 프로레슬링은 존재했다. 부산에서 수신되는 일본 텔레비전방송을 통한 역도산의 활약에 감동받아 프로레슬링을 시작한 사람이 아마추어레슬링 출신의 장영철. 그를 에이스로 천규덕, 박송남 같은 선수가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김일은 귀국한지 2개월 뒤인 1965년 8월 11일에 한국 내의 단체를 통합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극동헤비급 챔피언을 내건 토너먼트대회에서 처음으로 경기를 펼쳤다. 한국 선수와 일본의 요시노사토, 요시무라 미치아키 등이 출전했다. 한국에서 70연승을 자랑하던 장영철이 2회전에서 패하고, 결승에서는 김일이 요시노사타를 물리치고 우승해 링 위에 올라온 김종필과 악수를 나누었다. 박 정권의 핵심인물이자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에서 중책을 맡은 공화당의 의장이었던 김종필과 악수를 나눔으로써 한국프로레슬링의 맹주가 명실 공히 장영철에서 김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의 초대부장을 역임하고 박 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일한국교정상화 교섭에서 가장 큰 난관이었던 재산ㆍ청구권문제에서는 1962년에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과 극비메모를 주고받으며 최종합의를 이끌었다. 1967년 대통령선거에서 박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자 후임대통령을 노리며 고다마 요시오 등과 극비리에 회담을 추진해 박 대통령과 일시적으로 반목하기도 했지만 그 후에도 국무총리에 중임되었다.
김종필과의 악수는 김일이 정권을 후원자로 얻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1967년 4월 29일 서울에서 미국 선수 마크 루인을 꺾고 역도산, 도요노보리에 이어 동양인으로써 세 번째 WWA 세계헤비급챔피언이 되자 박 대통령은 링 위의 김일에게 축하전화를 걸었다. 김일은 박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귀국할 때마다 청와대에 초대되어 육영수 여사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김일을 대해 “작은 한국인이 거구의 외국인들을 쓰러뜨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정신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레슬링에는 반칙이 많아 어린이들에게 교육상 좋지 않다”고 말을 해, 그 말을 들은 뒤부터 김일은 반칙을 하지 않고 한국에서 ‘정의로운 영웅’의 이미지를 정착시켰다.
박 대통령은 1969년에 2억 원을 투자해 ‘김일후원회’를 설립했고 회장에는 박종규 청와대경호실장이 취임했다. 한국프로레슬링협회도 정부가 지원하는 재단법인으로 운영되어 1972년에는 산하조직으로 ‘김일체육관’이 서울시내 중심부에 착공, 후진양성을 위한 환경이 마련된다.
역도산이 가라테 수도로 외국인레슬러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며 패전의 좌절감을 해소한 일본 민중의 모습을 ‘부흥의 증거’라고 한다면,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중위로 패전을 맞이해 일본의 ‘좌절감’을 잘 아는 박 대통령이 김일에게 역도산의 역할을 기대했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군사독재정권으로 민주화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는 한편, 눈부신 경제발전을 추진했던 박 정권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분분하지만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수상의 소득배증정책에 의한 고도경제성장노선을 모방해 수출확대를 지향한 박 정권에게 국제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은 불가결한 것이었다. 김일의 국제적인 활약과 외국인 레슬러를 때려눕히는 모습이 고도성장의 상징이 된 것은 민중의 욕구와 정부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결과일 것이다.
4. 혼란
1960∼1970년대에 열광적인 인기를 누린 한국의 프로레슬링은 왜 쇠퇴한 것일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흔히 말하는 ‘오쿠마 겐지(大熊元司) 린치사건’이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김일의 개선으로 이미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을 하고 있던 ‘국내파’의 스타 장영철은 김일의 뒷전으로 물러서도록 압박을 받게 된다. 전술한 토너먼트전에서 장영철은 2회전에서 패하고 한국무대에 처음 등장한 김일이 우승을 했는데 국내파 레슬러가 김일이 이끌고 들어온 일본선수보다도 대우받지 못한데 대한 불만이 쌓인 상태였다.
사건은 11월 28일 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일어났다. 그 날은 ‘5개국 대항 프로레슬링대회’라는 이름을 내건 토너먼트전. 1회전에서 장영철은 일본의 최약체 레슬러였던 오쿠마와 대전하기로 되어 있어 대진표의 변경을 요구했으나, 결국 그 요구를 거부당한 채 시합이 시작되었다. 시합 중에 장영철이 열세에 몰리자 오쿠마가 관절꺾기로 항복시키려 한 순간 링 밖에 있던 국내파레슬러가 링 위로 난입, 오쿠마를 때리고 차는 등 뭇매를 퍼부은데 대해 장영철의 제자였던 레슬러 세 명이 폭행용의자로 경찰에 검거당했다. 이들의 취조과정에서 장영철이 ‘레슬링은 쇼’라는 발언을 했다는 매스컴의 대대적인 보도가 나왔다. ‘프로레슬링은 사기’라는 이미지가 퍼져 오늘날 프로레슬링의 쇠퇴로까지 이어진다. 사건을 전한 1965년 11월 30일자 동아일보는 ‘토착과 외래…주도권쟁탈전’, ‘프로레슬링대회의 난투극’, ‘프로의 “양식”은 외면, 관중을 우롱’이라는 헤드라인으로 장식되고, 기사는 ‘이 날의 저질스러운 광경은 무엇보다 선량한 관중을 우롱한 처사였다’고 엄하게 결론을 맺었다.
이 무렵, 동아일보는 민주주의의 회복을 호소하며 박 정권과 대립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박 정권을 등에 업은 프로레슬링에도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오히려 ‘쇼’라는 데에 가치를 부여해 육체를 서로 부딪치는 연출 외에 이야기성을 가미해 팬을 확보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상황이 달라 관객은 프로레슬링을 외면한 채 돌아오지 않았다.
사건 후 불화가 계속되던 김일과 장영철이 화해한 것은 2006년 2월. 장영철이 입원한 김해의 병원을 김일이 방문했다. 치매가 심해지고 있던 장영철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재회를 약속했지만 장영철은 8월 8일 타계했다.
역도산의 사망 후 이노키와 바바 등 스타 선수가 새로운 단체를 설립했으나 김일은 역도산이 만든 일본프로레슬링에 남아 있었다. 일본프로레슬링이 완전히 붕괴되자 전일본(全日本), 신일본(新日本), 국제(國際) 등 각 단체의 링에 올랐고 한국에서도 시합을 하는 ‘철새’가 되어 역도산이 만든 인터내셔널 헤비급 벨트를 30차례 방어했다. 김일은 역도산을 그리고 한국을 등에 지고 있었다. 거기다 일본 내에서의 대진 시나리오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격노하는 타입이기도 했다. 후배인 그레이트 고지카(小鹿)에 따르면 ‘순간열탕기’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시합 절차도 공이 울리자마자 잊어버리기 때문에 선수가 김일과의 대전을 싫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박치기는 몹시 아팠다고 하며, 그것이 그와 대전하기를 꺼려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1975년 10월 30일, 몇 차례나 대전을 요청해 실현된 구라마에국기관(藏前國技館)에서 열린 바바전에서도 절차를 잊었는지 단 6분 만에 바바의 목감아돌리기 기술에 걸려 김일은 패했다. 지금 비디오를 봐도 그 시합은 예정조화적인 움직임이 전혀 없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약하던 맹호(猛虎)는 박치기로 자신의 몸을 좀먹고, 나아가 한국에서 든든한 배경이었던 박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활동무대를 잃게 된다.
5. 정권교체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은 ‘안가(安家)’라고 불리는 권력중추의 비밀회합용 시설에서 회식을 하던 중 한국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에게 사살되었다. 민주화를 원하는 시민들은 박 대통령에 의한 군사독재는 종식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었으나 12월에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주모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듬해인 1980년 5월에는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대규모의 학생시위가 일어나자 군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또한 민주화운동의 중심인물인 야당지도자 김대중과 김일의 후원자였던 김종필씨 등 유력정치가를 일제히 체포했다. 광주에서는 민중의 궐기를 군부가 무력진압하고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전두환이 위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그 무렵, 김일은 ‘제주도와 마산대회가 한국에서의 마지막 경기’라고 설명했다. 김일은 그야말로 박 대통령과 함께 민중들 앞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1981년에도 시합을 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죽음, 전두환 신군부의 대두와 대통령취임으로 김일의 레슬링경기에 대한 열정은 식고 말았을 것이다.
전두환은 소장 시절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진언한 일이 있었다. “각하 레슬링은 쇼일 뿐인데 뭘 보고 그러십니까?” 그 진언대로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김일후원회를 해산시키고 김일체육관도 문화체육관으로 개편했다. 김일은 “도장(道場)에는 내 사재도 투입했는데 모두 뺏기고 말았다”고 말한다.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군부정권에 대한 불만을 해소시키려 했으나 그것은 프로레슬링이 아니었다. 1982년에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1986년에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등으로 프로레슬링은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김일은 한국의 링을 떠난 후 일본에서 국제프로레슬링 등에 출전하지만 역도산이 만든 인터내셔널 헤비급 벨트가 1981년 4월에 프로레슬링 단체에 의해 반납 권고를 받았고 그 해 11월 전일본프로레슬링 이치하라(市原)대회가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경기 직후에 왼쪽다리의 정맥부전으로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 박치기 후유증에 의한 경추손상에 시달리게 된다.
1990년경에는 강원도 속초에서 수 척의 배를 소유하고 참치나 미역 등 일본수출용 수산물 수출업을 하기도 했으나 반(半)사기성 거래에 속아 ‘다투어봐야 소용없다’며 포기, 전 재산을 잃고 부인이 백혈병으로 입원해 있던 국립의료원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그 무렵 오른쪽 눈의 시력도 약해지고 있었다.
그 후 후쿠오카(福岡)에 있는 지인의 배려로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등지의 병원에서 입원생활을 하던 중 부인의 부고를 듣는다. 후쿠오카 병원의 6인 병실 한쪽에서 치료를 받던 영웅을 알아본 한국인 승려의 주선으로 서울 을지병원의 박준영 이사장이 1994년 그를 을지병원으로 데려왔다. 박 이사장은 김종필 등에게 ‘김일을 위한 모임’을 제의, 김일의 자택마련자금으로 3억 원 이상을 모금해 기증했으나 김일은 그 돈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투에서 솜을 빼내 동네 아이들에게 사탕을 사 주었으며, 박 대통령의 ‘원하는 것이 있느냐?’는 물음에 고향에 전기를 연결해 달라고 답한 김일은 언제나 서민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병실에서 팬들의 면회에 계속 응한 일을 두고 박 이사장은 ‘무리하지 않았더라면 더 살 수도 있었다’고 말하지만 팬과 만나는 일이 김일에게는 기쁨이었다고 생각한다.
6. 꿈
1995년에 도쿄돔, 2000년 3월 25일에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각각 김일의 은퇴식이 거행되었다. 서울에서는 링 위에서 신한국프로레슬링협회 대표를 역임한 문하 2기생이자 애제자인 에이스 이왕표에게 손수 가운을 증정함으로써 후계자를 지명했다. 김일이 이룬 역도산방식의 스파르타훈련을 견디고 김일의 일본원정에 동행했으며, 김일이 일본을 떠난 후에도 일본 링에서 ‘쟈가 리’라는 링네임으로 활약하는 이왕표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김일은 영원한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다. 한편 김일도 장남 김기환을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
1978년 3월, 김일은 도쿄 시부야(澁谷)의 도장에서 군복무중이던 아들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동국대학교에 다니다 육군에 입대했던 기환이 부대에 아무런 신고도 없이 행방불명 된지 며칠 후 들판에서 부패된 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부패가 심해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군 내부에는 상세한 자료는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1980년에서 1995년 5월까지 15년 5개월 동안 군복무 중에 자살한 사람이 3,263 명, 폭행치사 등 387명 등 총 8,951명이며, 연평균577명이다(한홍구, 『한국현대사』). 남과 북의 대립이 고조되던 1970년대에는 가혹한 훈련으로 이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라는 ‘밀실’에서 사망했다고 하며 기환도 그렇게 희생되었다.
사망 3개월 전인 2006년 7월 26일. 김일은 변호사를 불러 유서를 썼다. 자신이 구축한 한국프로레슬링의 후계자로 이왕표를 지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왕표에게는 꿈이 있다. 그것은 김일의 꿈이기도 했다. 그 꿈을 지금은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한국 프로레슬링의 중국 진출이다. 포화상태에 있는 일본시장, 회복하기 어려운 한국시장이 아닌 미지의 중국을 목표로 삼는다. 만년의 김일이 입에 올리곤 하던 생각을 이왕표가 구체화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생각은 어느 면에서는 역도산의 프로레슬링의 ‘대동아공영권’ 구상과도 이어져 있는 듯하다.
7. 최후
김일의 용태가 악화된 것은 24일 오후 8시 경. 자서전 출판을 상의하기 위해 찾아온 일본의 출판 관계자들과 담소를 나눈 뒤였다. 약 한 달 전부터 식욕이 없던 김일은 그 날만은 병실에서 식사를 하고, 12월의 일본방문을 약속했다. 그 직후에 왼쪽 엉덩이부터 다리에 걸쳐 통증을 호소, 25일 새벽에는 눈의 초점이 흐려지며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김일은 가족과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았다. 가족 대신에 1996년부터 신변을 돌봐준 사람이 사실상의 부인인 이인순씨였다. 김일의 여성관계를 정리하고 그를 만나러 오는 여러 여성을 상대했다. 다른 여성과 둘이서 외출할 때에도 옆에서 지켜보았다. 김일이 여성의 손을 잡아도 간섭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놔두었다. 이씨는 ‘이상한 여자죠?’라며 웃는다.
숨을 거둔 10월 26일은 1979년에 박 대통령이 사살당한 날이며 1909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암살당한 날. 그리고 2006년 10월 26일은 서울 중심부에 있는 경복궁에서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다음날인 27일 병원에서의 장례식을 마친 김일의 시신은 일본 풍습을 따르겠다는 유언에 따라 서울교외의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 유골은 고향인 거금도로 운반되어 부인,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적대봉이 바라보이는 언덕 중간에 안치되었다.
히키치 다쓰야(引地達也). 1971년생. 1998년 교도(共同)통신 입사. 현재 서울지국 기자. 본지 2004년 3월호에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일본어 가이드를 맡고(ソウル・西大門刑務所の日本語ガイドを務めて」를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