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공손자 소산청주곽노권 공적
갑오년의 새해 벽두에 지난 여러 해 동안 벌렸던 사업이 1차적으로 올봄이 가기 전에 완성되리라는 기대에 벅찬 감정을 주체할 수 없고 이 사업에 물심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람과 사업에 직간접으로 동참한 여러 사람들의 수고
를 회상해 봅니다. 이 사업은 곧 청주 경암 곽한소 선생의 영인본 유집 10책의 한글번역사업입니다.
경암 선생의 방후손인 소생이 이 사업의 말석에 앉아 교정 일을 도우면서 능력과 앎이 부족하고 경륜이 일천함에 안타까웠고 생기느니 한탄과 탄식만이라 혹여나 대역사에 누를 끼치지는 않았는지 민망할 뿐입니다. 이제 이 사업의 대미를 마무리 지으면서 번역사업을 계획하여 주관한 경암 곽한소 선생의 손자 노권에 대한 한줄 칭찬과 격려의 글을 외람되이 쓰려합니다.
사람은 내일의 희망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지만 오늘이 있기까지는 堪耐(감내)하기 힘든 지난 세월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고 이러한 힘든 세월의 짐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승화시킨 여러 인물 중에 족형 노권이 돋보입니다.
족형은 그 名이 魯權이고, 字는 仁舒(인서)며 號가 素山이고 청주가 관행입니다. 소산은 한미반도체그룹의 회장이시며 吾門의 대종회 회장입니다. 소산은 1938년 戊寅年에 아버지 휘 海根公과 어머니 扶安林氏 사이에 태어났으며 幼年부터 할아버지의 遺志와 아버지의 敎訓으로 崇祖愛族의 誠과 意志를 키워왔고 長成하여서는 숱한 逆境을 극복하면서 마침내 반도체산업에 투신하여 큰 企業을 일으켜 基盤을 확립하고 四海와 교역하기에 이르자 傳統文化 보존과 爲先事業에 獻身(헌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소산은 위선사업의 동량으로 우뚝서다.
사람이 날 때 하늘이 네 가지 덕(孝悌忠信)을 내렸는데 네 덕의 으뜸이 효(孝)인 것입니다. 효는 사람이 지켜야할 근본(根本)이지만 이를 실행하기란 매우 어려운 지경일 것입니다. 족형 소산은 청주곽씨 천이백년사에 우뚝한 거효(巨孝)를 행하였으니 그 공적을 만세(晩歲)에 전하여 후손에게 상량(上樑)으로 삼고자합니다.
소산은 신사년(2001) 8월에 선조 공조참판(工曹參判) 치년(致秊)공이 함창현감 재직 시 함창고을 백성들이 공의 선정을 높이고 기리기 위하여 세웠던 선정비(善政碑)가 경북 상주 함창 도로변에 버려져 방치되어 있어 함창지역 종친들이 안타까워할 때 소산께서 사비를 투척하여 선정비를 복원한 뒤 비주인의 혼령(魂靈)을 위로하였던 선행은 뭇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렸던 미담(美談)이었습니다.
병술년(2006) 2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고려말 두문동 충신이신 추공(樞公)의 신도비(神道碑)를 건립하기로 문중과 뜻을 모아 독자적으로 억만금(億萬金)을 출원하니 여러 종친들이 품이라도 낸다며 구름같이 몰려와 도우니 삽시간에 땅을 갈고 돌을 다듬고 글자를 새겨 늦가을 11월에 비를 제막하니 고려충신상당군시문량청주곽추선생신도비(고려충신상당군시문량청주곽추선생신도비)가 상당사 경내에 우뚝하게 건립되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병술년 같은 해 9월에는 충청남도 연기군 고정리 국사봉 아래 선영(先塋)이 세종시 건설사업으로 훼손(毁損)될 위기에 처해지자 선산 일대가 천혜(天惠)의 경관(景觀)이니 신도시의 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보존시키기 위하여 관계기관에 누차 나들락 하여 노력한 결과 소산의 정성에 감화(感化)받은 정부의 책임자도 흔쾌히 승낙하게 됨에 따라 330년간 가꾸고 보존해온 선조의 유택(幽宅)이 훼철(毁撤)되지 않게 한 일은 지극정성이면 귀신도 탄복(歎服)한다는 말을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소산의 효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청곽이 고려 벌족(閥族)으로 고려조에서는 명신(名臣)과 거경(巨卿)이 섬을 이루고 있었음을 늘 자랑으로 여겨오던 소산께서는 황금돼지의 해인 정해년(2007)에 고려대전 정궁(高麗大殿正宮)이 낙성이 되자마자 선대의 문성공(文成公,4세) 순현공(順顯公,6세) 진정공(眞靜公,7세) 연담공(蓮潭公,11세) 장원공(壯元公,13세) 상당군(上黨君문량공,15세)등 6현의 위패봉헌(位牌奉獻) 헌성금(獻誠金)을 전액 부담하니 어찌 조상의 혼(魂)인들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족형(族兄) 소산은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청곽이 천이백년을 지켜온 성(姓)씨
임에도 시조 할아버지가 처음 자리를 잡은 터에 “곽 아무개가 살다”라는 표식(標式) 하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족형 노권(魯權)은 무자년(2008) 정기총회장에서 홀연(忽然)히 세거공원(世居公園)을 자력(資力)으로 조성하겠다하고는 현장에 자리 펴고 손수 석공예(石工藝)에 이름난 석장(石匠)을 물색하고 색(色)바래고 금간 돌을 골라내고 비에 새길 글자 하나에서 수만자(數萬字)를 바로 잡아가며 공원내에 청주곽씨세거지비·상당가전비·영모정기비·경암공곽한소영세불망비 등 4개의 비석을 심는 거업(巨業)을 이룩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경사(慶事)서럽고 자랑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묘년(2011) 초여름에는 오문의 사당 상당사가 쇄락하고 선현의 영정이 훼손되어 이를 보수하고 훼손된 영정을 복원하는데 필요한 거액의 비용을 사적으로 투입하여 여름장마가 오기 전에 완료하여 사당을 보전하는 열성은 타의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청주 명암동 상당산성 능선에 위치한 충북문화재인 고려국 대문호 연담 휘예(預)공의 산소진입로 개설을 위해 3여 년간 관련 관청과 요로에 발품을 쏟아 계묘년(2013) 추계제향일에 대로가 개통되게 하였습니다.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소산의 문중 사랑은 어찌 열거한 것만이 있을 것입니까! 전국의 소종중을 방문할 때에는 선영에 참배하고 혹 개선개조가 필요한 종업(宗業)이 있을 시에는 필요경비를 주저치 않고 제공하여 종중의 난제를 해결한 것이 헬 수없이 많았습니다. 족형 소산은 오문의 위선사업에 솔선하고 실천하는 동량임을 자랑하는 바입니다.
◈금탑산업훈장이 위국사업의 표징이 되다.
소산은 1980년 대한민국 최초로 반도체 제조장비를 개발한 이후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수십 종의 반도체 제조장비를 국산화하였으며 세계 최초로 반도체
제조장비의 개발 및 상용화한 업적으로 2013년 10월 16일에 대한민국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서훈하였습니다. 이 훈장은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으로서 국가와 국민이 수여하는 가장 영예로운 제1등급 훈장입니다.
소산은 1980년 한미반도체를 설립하여 당시 제품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던 때에 대량생산용 반도체 제조장비의 국산화로 수입대체는 물론 국내 반도체산업의 초기 경쟁력을 확보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후 소산은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수많은 양산용 반도체 제조장비를 국산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출액의 80%를 수출하는 세계적인 반도체장비기업으로 성장시켜 국가산업발전과 세계반도체 산업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최고경영자로서의 소산은 고용확대, 장학사업 추진, 투명경영 및 모범납세자 표창 등 대한민국의 모범이 되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기업으로 널리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공적이 인정되어 1985년 산업포장 수훈한 이후 1991년 석탑산업훈
장, 1997년 동탑산업훈장, 2006년 은탑산업훈장 수훈과 2010년도에는 1억불수출의 탑을 수상하였고 중소기업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는 등 꾸준한 기업경영과 우수 자본재 개발에 대한 공헌이 인정되어 대한민국 최고의 영예로운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한 것입니다. 이는 소산 노권 형의 개인의 영광을 넘어서 한미반도체의 영광이며, 또한 자랑스러운 청주곽문의 찬란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선조고 유집의 국역사업으로 가문의 정체성을 확립하다.
소산은 무인년(戊寅年)에 빈한한 가정의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책임의식이 높아 어떤 일이라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엄격(嚴格)하여 스스로 근신(謹愼)하였으며 윗사람을 의(義)와 이(理)로 섬겼으며 조상의 유덕(遺德)을 항상 가까이에 두고 내일을 다짐하였다고 합니다.
소년 소산은 집안 가득한 할아버지 문집 속에 분명 상계(上界)의 비밀이 있을 것이고 가문(家門)의 영광(榮光)이 있을 것이라고 청년(靑年) 때에서 장년(長年)이 되어서까지 그 신념(信念)을 흉중(胸中)에 품은 채 갖은 역경(逆境)을 극복(克服)하면서 가세(家勢)를 반듯하게 확립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이 조상(祖上)이 돌보아 주심이라 여기면서 전통문화(傳統文化) 보존과 위선봉사(爲先奉仕)에 더더욱 헌신(獻身)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합니다.
소산은 갑술년(1994)에 할아버지 경암공(敬菴公)의 친필문집(親筆文集)을 영인본(影印本)으로 출간하여 사계(史界)와 학계(學界)에 국학자료(國學資料)로 헌증(獻贈)하였으며 청주곽씨대종회 회장으로서의 책무(責務)도 솔선하여 많은 종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소산의 할아버지의 名은 漢昭이며 字가 允道이고, 호가 敬菴이다. 경암공은 면암 최익현선생의 문하생으로 乙巳條約 이후 의병장이신 스승을 도와 倡義하였고 왜국 대마도에 억류 중에 절식으로 殉國하자 스스의 襄禮(양례)를 도왔으며 스승의 文章과 詩를 수집하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勉菴文集을 간행하여 지금의 독립기념관에 보존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경암공은 선조의 문집을 刪定(산정)하고 世譜의 誤謬를 바로 잡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나 60여책의 遺稿만을 남기고 46세로 夭折(요절)하게 되었습니다.
소산의 先考의 名은 海根이요 호가 肯堂으며 긍당공은 해방 전후 혼란기에도 부친의 유고를 완전하게 보전하였는바 경암공의 손자 魯權이 이를 정리 수습하여 敬菴全集을 간행해서 반질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소산은 할아버지유집의 영인본 발행에 이어 정해년인 2007년도부터 한문문집을 한글로의 번역사업을 착수하여 2014년 늦은 봄까지 모두 5집으로 인간된 국역경암전집을 사계와 전국의 국공립도서관, 대학도서관 등에 배포하여 국학의 자료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소산의 이러한 효행이 알려지자 무자년인 2008년 2월에는 한국성씨총연합회(韓國姓氏總聯合會)가 소산에게 충효대상(忠孝大賞) 수상자(受賞者)로 선정하여 표창(表彰)한 다음 그 공을 국내의 모든 문중과 단체에 알렸던 일도 있었습니다.
족제(族弟)가 생각건대 족형(族兄) 소산께서는 참으로 큰 뜻을 펴고 의리(義理)에 충실한 이 시대가 낳은 산업계와 우리 문중의 거두(巨頭)입니다. 대(代)와 세(世)를 이어온 선대의 선비가풍은 삶(生)과 사업(事業)의 바탕이었으며 가난했던 집안환경에서 아낌과 절약을 체득(體得)하였고 나눔의 지혜(智慧)를 실천하게 하였습니다.
소산께서 기업경영(企業經營)에 일신(一身)을 맡겼을 때에도 기업이윤(企業利潤)을 사회에 환원(還元)하고 나 아닌 타인에게 감동을 주는 봉사정신(奉仕精神)은 선조께서 물려주신 덕업(德業)과 가풍(家風)에서 기인(起因)된 것이라 단정합니다.
족형 소산의 덕업(德業)이 만대(萬代)에 까지 회자(膾炙)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西紀 2014年 壬午年 暮春節 3月 日
淸州郭氏三嘉派 宗孫 族弟 魯然 삼가지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