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공부 58회
8. 놀라운 기쁨 - “새로운 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And if the Spirit of God, who raised up Jesus from the dead, lives in you, he will make your dying bodies live again after you die, by means of this same Holy Spirit living within you.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킨 성령이 여러분 안에 살고 있으면, 여러분이 죽은 후에 여러분 안에 있는 바로 그 성령에 의해 죽을 몸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앞에서 했던 말들을 여기서 또 다시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되는 글에서 로마의 그리스도인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바울 사도의 진정을 느낄 수 있다. 로마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신과 위로를 확실하게 주고 싶은 간절함이 배어있는 말씀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죽을 몸조차도 부활할 것이고 결국 영화로운 생활에 들어갈 것이 확실합니다." 하는 메시지다.
9절부터 11절까지 세 번이나 계속하며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9)",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10)",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11)" 하고 조건아닌 조건을 제시한다.
이는 너희가 노력해서 하나님 안에 있어라 하는 명령은 아니다. 기독교는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하세요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얻었으니 안심하세요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한'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구원은 자력(自己努力)에 의한 것도 아니지만 절대 타력(他力)에 의한 것도 아니다. 절대 은혜에 의해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았고, 은혜로 살아가며, 은혜로 소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쓰카모토선생이 말한 '절대은혜주의'가 참으로 기독교의 진리다.
그런데 이 부분이 반복되고는 있지만 그 심도는 점점 깊어지고 있다. 이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며(9), 몸은 죽은 것이나 영이 살아있다(10), 11절은 이에서 더 나아가 놀라운 소망을 전해준다. 영뿐만 아니라 죽을 몸도 다시 살게 된다는 사실이다.
10절까지에서는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았다. 즉 육적 몸이 죄로 신음하여 죽게되고, 장차 죽을 운명을 피할 수 없으나 감사하게도 영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성결하게 되었고 영원히 살 것을 믿는다.
그런데 11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한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 하고 육체에도 소망을 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말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이다. 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을 짧은 한 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 살리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 육체, 즉 우리가 죽은 후에 다시 살게 될 몸은 현재의 내 육체가 아니다. 부활의 생활에 걸맞은 육체로 거듭난다. 변화하는 육체에 대하여 명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성경 곳곳에서 언뜻언뜻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조금 살펴보고자 한다.
1) 영광의 몸이다.
"그분이 오시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게 하실 것입니다.”(빌 3:20-21) 현재의 우리 몸이 천하나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2) 예수님의 몸과 같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장차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어 그분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요일 3:2)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된다고 하였다. 그 예수님의 몸은 어떠했을까. 예수님이 직접 설명한 곳이 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이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셨다. 살과 뼈가 있고, 또 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다는 표현도 있으니(마 28:9) 구체적인 몸이 있다. 영적인 존재는 아니다.
어떤 인터넷 블로그에서 우연히 보았는데 예수님의 몸과 같다는 말을 근거로 우리들이 모두 예수님처럼 33세 반의 남자로 부활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주장하고 있어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사람들은 부활의 몸이 궁금하므로 이런 저런 억측까지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그 몸의 형상은 어떠한가?
3)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이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고 하였다.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이라고만 있어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모습이라니 아름답고 멋진 모습임은 분명하다.
4) 부활한 세계의 생활은 다르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음이라.(계 21:4)” 죄의 결과인 사망이 없어지고, 슬픔, 아픔 그리고 고통도 없는 세상이다. 처음의 에덴동산이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전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보라, 내가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나지 아니하며 생각나지 아니하리라(사 65:17).”
이전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야나이하라 선생의 제자 니시무라 히데오씨의 글을 소개하며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랑하는 부인이 돌아가셨을 때 쓴 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그날 나의 세계는 완전히 변하였다. 「타다코(부인)가 가까이 있었던 때」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지나간 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하는 것을 그때처럼 통절하게 느껴 본 적이 없다. 「一期一會」란 이런 것이구나 깨달았다.”는 말씀이었다. 두 분은 모두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소망이 있었겠지만 이 세상에서처럼 아내와 남편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에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하였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옛날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나 지상에서의 수많은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더 이상의 비밀은 확실히 알 수 없다.
노평구 선생은 이 11절, 신자의 부활을 내세의 완성으로 설명하였다. 칼빈의 지적대로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만큼 현세에서 그것이 전적으로 완성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거룩하게 된다는 성화(聖化)의 문제에 대해 아래와 같이 경계하고 있다.
"성화가 잘못 다루어질 때, 우리가 기독교 역사상 흔히 볼 수 있는 것 같은 사람의 행위와 믿음을 반반으로 보는 카톨릭적인 인간주의나 행위주의에의 신앙타락이 발생된다.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려는 기독자의 금욕주의적인 현상 역시 이런 데서 싹트게 된다.
이 율법적인 행위주의가 잘못인 까닭은 인간의 열심히 구원을 추구하게 되므로 결국은 바리새 주의적인 위선에 떨어질 우려가 있다. 특히 이것이 동양 불교적인 혹은 도교적인 하나의 정신주의로 흐르게 될 때는, 여기 무(無)의 사상에 의한 죄의 부정이 싹트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도덕 폐기론적인 경향을 왕왕 보게 된다.
기독교는 루터의 신앙주의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저의 성령의 역사로서 내세의 완성을 바라보며 육을 제어, 극복하는 신앙생활, 신앙전투, 신앙 성전(聖戰)의 지상 생활이어야 하는 것이다."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의 몸은 죽을 몸이며, 연약하고 또한 악하다. 사망의 씨앗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영은 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 살아있지만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상태였다. 그런데 드디어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나는 구원받았지만 아직도 죄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다. 사탄은 이 죽을 몸의 지체들을 동원하여 나를 늘 넘어뜨리려 한다. 실제로도 항상 넘어진다.
“성령을 첫 열매로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우리 몸이 구원받기를 갈망한다.”(롬 8:23)는 말씀대로 나는 이렇게 약한 몸에서 벗어나 성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싶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삶이다.
사도 바울은 이 11절에서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고 우리의 소망이 불가능이 아님을 말씀한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변화될 것이며, 우리 몸이 땅 속에 묻히든지 또는 바다 밑에 수장되든지 또는 화장으로 한 줌의 재가 되었을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물이 자기에게 복종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그 몸이 영화롭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 부활의 소망이 우리들의 기쁨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받을 기업이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지금의 내 모습에 낙담하고 슬퍼하나 결국 예수님이 부활한 것처럼 우리도 영화롭게 나아오리라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몸까지도 연약함과 질병에서, 사탄에게 넘어지는 것에서 해방될 날을 바라보자.
이 부분을 공부하며 가족과 주변사람들과의 소중한 인연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고, 이생은 그림자같을지라도 나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때,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한 인연이다. 더구나 가족으로, 신앙의 동료로 만난 우리들은 더더욱 소중하다. 우리 모두가 영광의 그날까지 함께 서로를 북돋우며 힘차게 걸어갈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