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우리의 큰댁인 청계당 자손 마산아재( 서운 황호일)의 여동생(몰랑몰 김선주의원의 부인)의 아들 김진휴씨의 글입니다.
우리 고향 비촌의 내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여기에 올려 봅니다.
비촌(飛村)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명당에 자리 잡은 비촌(飛村)은 1530년 경 창원 황씨 후헌(後憲)이 들어와서 500년 가까이 황씨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문중(門中) 기록에 의하면 경북 영주 지방에서 「병화불입지지(兵禍不入之地)」로 백운산(白雲山)의 백학동(白鶴洞)을 찾아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뒤로는 토치(兎峙 -일명 장꼭산)가 병풍처럼 길게 둘러 있고 앞으로는 수어천의 상류 청계천(淸溪川)이 흐르면서 적당한 높이의 안산(案山)을 바라보는 이 마을은 천혜의 평화촌(피난처)이다. 동남(東南)으로 협곡이 있어 대량 인마(人馬)의 통행이 어렵고 서북(西北)은 백운산의 험준한 산맥과 섬진강의 배수진으로 꽉 막혀 있어 전략적으로 피해갈 수 밖에 없는 지형인 것이다.
태풍도 비촌(飛村)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는 전설이 있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내천 때문에 바람은 항상 마을을 좀 벗어나 지나가는 이유에서이다. 겨울에는 온화하고 여름에는 청량하다. 사방으로 막혀 있는 듯 하지만 일단 비촌(飛村) 마을에 들어오면 의외로 넓은 공간을 발견하고 모두 놀란다. 하천 양편으로 적당한 높이로 논과 밭이 잘 정돈되어 있어 가을걷이가 충분하다.
그리고 어떤 홍수나 가뭄도 여기에서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내천과 계곡이 깊어 물이 잘 빠지고, 사시사철 수량이 풍부해서 봇물대기가 대단히 좋다. 남쪽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는 백학동(白鶴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지이산(智異山)의 청학동에 대해 백운산의 백학동으로 응수하고 있고 병화불입지지(兵禍不入之地)라고 전한다.
마을 이름을 비촌(飛村)이라고 한 것은 황죽리(黃竹里)에 황룡사(黃龍寺)라는 신라시대 고찰이 있었는데 이 절의 황룡이 비촌 근처에 있는 깊은 소(沼)로 날아들었다는 전설로 비촌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1974년 여천공단을 위한 용수댐이 조성됨으로써 부락 일부가 수몰되고, 일부는 산중턱으로 이전됨으로써 마을이 ‘날아갔다’고 해석을 한 사람도 있다. 여하튼 500년의 위토가 조국의 산업진흥에 공헌한 그 가치는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될 것이다.
군자(君子)와 의사(義士)의 터전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로, 고려가 멸망하고 그 왕족 후예들이 삼남으로 숨어들 때 황씨의 안내로 비촌으로 들어와 정착을 했다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王)씨를 전(全)씨, 전(田)씨 등으로 바꾸어 생존에 몸부림쳤다는 것은 야사(野史)에서 흔히 이야기 듣는다. 서운(棲雲)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최근까지도 솔봉(비촌 근처에 있음) 근처에 있는 왕(王)씨 능에 황씨들이 제사를 지내 주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이런 이야기를 종합할 때 황씨들은 고려 말기의 명문 귀족들로, 왕씨가(王氏家)를 모시고 천혜의 피란처인 백학동으로 들어왔고, 수백 년에 걸쳐 왕씨들은 동화되었거나 숫자가 줄면서 소멸되지 않았겠느냐 추측을 해 본다. 500년 동안 타성(他姓)을 배제한 단일 집성촌으로 존재해 왔다는 기나긴 역사와 왕씨가의 비촌 존재는 많은 문헌에서도 확인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하겠다.
그리고 가문의 또 하나의 구전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왕씨와 황씨의 재산이 합쳐져 만석을 이루었다’는 대목을 우리는 어릴 적부터 들어왔기 때문이다. 황씨 만석이 아니라 황-왕 공유 만석이라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카르텔’, ‘주식’ 형의 재산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광양군이 발행한 군지(郡誌)를 보면 비촌 황씨는 많은 유림과 자선가 그리고 애국지사를 배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읍지(飛邑址)」가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도 언급하고 있다.
비촌은 특히 항일애국지사를 많이 배출했다. 1908년 을사(乙巳) 의병을 시작으로 광복 때까지 많은 의사(義士), 지사(志士)가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황순모(黃珣模 1873~1908), 황병학(黃炳學 1876~1931)으로 백운산을 중심으로 구례와 지리산을 넘나들었고, 그 후 병학(炳學 - 字 永文)은 만주로 이동하여 1920년대 남만(南滿)의 여러 항전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兄인 황병중(黃炳中)의 기록:고암집(鼓岩集)).
그 후 비촌 황씨의 항일운동은 우리 외증조부 병욱(炳郁)과 외조부 종현(宗玹)의 만주 망명생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자선가(慈善家), 지사(志士)로는 황하석(黃河錫), 황면기(黃勉基) 두 분이 대표 격인데 진사 황하석은 흉년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어, 이 행적을 기리는 적선비가 서 있다. 나는 항상 외가의 8대조 만인적덕(萬人積德) 할아버지 운고(雲皐) 하석(夏錫)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오고 있다.
많은 일화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빅터 유고」의 스토리를 꼭 닮은 이야기가 있다. 광양 비촌에 만인적덕인(萬人積德人)이 나왔다는 풍문을 확인하기 위해 서울 조정에서 특사를 파견했다고 한다.
특사가 과객으로 가장해 황씨 객사(客舍)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세수하라고 내놓은 ‘놋대야’를 훔쳐가다가 하인에게 들켰는데, 주인 하석(夏錫)에게 고(告)하니 ‘아마도 그 과객이 여비가 떨어진 모양이구나’ 하면서 노자로 엽전 한 꾸러미를 주어 보냈다는 이야기다.
이 특사가 기특하게 생각하고 한성에 돌아가서 「광양」에 만인적덕인 황하석이 났네’ 라는 방(房)을 남대문에 붙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황씨 일가의 중흥기는 역시 하석(夏錫)의 아버지이신 청계당(淸溪堂) 면기(勉基) 때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찍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였고 홍경래난에 의병을 소집하여 참전함으로써 공을 세웠다. 이 참전은 가문의 바탕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학문의 고을로 명성을 얻음으로써 청계공 가훈 10조(淸溪公 家訓 十條)를 제정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실행토록 하였다.
외증조부 소운(小雲) 병욱(炳郁)은 1860년 비촌에서 출생해서 한학(漢學) 위주로 면학에 힘쓰고, 구한말 박래(博來)의 신문화(新文化)에도 심취했다. 한양에도 자주 출입하시고, 서울의 운양 대감 그리고 김 대감댁을 출입처로 삼았으며, 진고개(지금의 명동)의 우당(尤堂 李會榮) 선생 댁을 자주 방문했던 것으로 전한다. 이런 어울림과 그 인연으로 후에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외증조부 소운(小雲)은 탁지부(度支部, 지금의 재무부) 산하 전라남도 주재 영광 세무관으로 재임하시고, 국고를 모아 선편(船便)으로 한양에 추진하는 임무를 수행하셨다. 상당한 민심을 얻어, 선치(善治)로 송덕비가 건립되었는데, 한사코 이를 반대하여 결국 그 비(碑)를 철거하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대단히 강직하고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로서 자손들이 꼼짝을 못했다고 한다.
특히 우리 외조부님은 아버님의 뜻을 철저하게 순종한 효자로 유명하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식솔을 이끌고 1910년 만주 북간도로 망명길을 떠나셨다. 한양의 선배들의 지도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