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05.23
지난 주에 우리는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성도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은혜와 평강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 가를 생각했습니다. 이재록이라는 이단자와 그 추종자들을 보면서 거기서 은혜와 평강이 없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모르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려고 야단법석을 떨었고 신비하다는 것과 육신의 복에 홀려서 제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건강과 복과 천당을 얻기 위하여 신기한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성질을 가지고 신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와 평강이 있는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더 구할 것도 얻으려 할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알고 평강을 아는 사람은 평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하나님도 보았고 구세주도 보았고 그분의 은혜 안에 살고 있는 성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평안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도 보았고 그의 아들 구세주도 보았고 또 은혜를 입은 백성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모자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보려고 할 필요도 없고 구주 예수님도 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았고 또 구주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보려고 야단을 하지 않아도 되고, 천사를 보려고 법석을 떨지 않아도 되며, 복을 받으려고 발광을 하지 않아도 되며 또 오래 살려고 야단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평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주에 양범영 집사님 모친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렀습니다만 저는 병원에 갔을 때 ‘다 잊어버리고 평안하게 갈 준비를 하십시오’라고 했더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주님의 품안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양집사님의 모친은 아픔 속에서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고통을 견디다가 갔습니다. 짧은 생애였지만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마치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제가 이런 예를 드는 것은 주님을 믿는 신자는 살려고 야단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개중에는 ‘두고 보자. 자기는 어떻게 하는가 두고 보자’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모르기는 하지만 주님이 저도 살려고 바둥거리지 않고 평안히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기다리도록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사람들은 자기가 은혜 받은 것을 알기 때문에 평안이 있습니다. 더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평안이 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주어지지 않았는데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런 평안이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자기에게 와 있다는 것을 되새기십시오. 그럴 때마다 그 평안이 여러분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8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는 은혜와 평강이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는 곧장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첫째는’이라고 하면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첫째는’이라고 한 것은 둘째, 셋째 감사할 것이 줄줄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선 먼저’라는 뜻입니다. 다른 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말할 것이 감사할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다른 것을 말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할 것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먼저 내가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로마 교회에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이 감사의 내용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로마에 있는 신자들의 믿음이 전파된다는 것을 먼저 말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왜 사도가 이 사실을 먼저 말하고 싶어할까요? 이것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신자들은 바울 자신이 전도를 하여서 생긴 교인들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왔다가 사도들이 성령으로 설교하는 것을 듣고 행하는 기적을 보았던 사람들이 복음을 알고 돌아가서는 전하기 시작하여서 생긴 신자들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역시 고난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8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에게도 고난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심하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이 고난에서 견딜 수 있겠는가라는 염려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도는 로마에 있는 신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들을 격려하고 고난을 믿음으로 잘 견디도록 용기를 돋우어 주기 위하여 그들의 믿음이 퍼지고 있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에 복음이 들어가서 성도가 생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요 로마 제국의 권력의 중심지입니다. 그리고 당시 문명과 문화의 첨단을 걷는 곳입니다. 이곳도 물론 복음을 전하여야 할 곳이지만 자기는 그곳에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이미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신자들이 있고 상당한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바울을 위해서도 보호자가 되었고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로마 교회의 상황을 바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그 믿음을 듣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도들 앞서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렇게 시작하신 하나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면서 사도는 로마에 있는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확신을 주고 용기를 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먼저 믿음의 전파를 이야기하는 이유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내어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분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받은 것도 하나님이 일하셔서 되어진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운이 좋아서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똑똑해서 복음을 깨달아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진리로 믿어진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요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것도 여러분을 하나님에게서 끊어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을 두려하지 마십시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믿음이 어떻게 온 세상에 전파되었던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하였던 것이 아닙니다. 전화나 휴대폰이나 TV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왕래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알려지고 전해졌던 것입니다. 16장의 기록을 보면 믿음의 소식은 아주 구체적이었고 그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주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었던 가도 자세하게 알려졌음이 틀림없습니다. 막연하게 떠돌다가 뻥튀기처럼 부풀려진 소문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들이 생생하게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 전해진 범위를 보십시오. ‘온 세상’에 전파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온 세상’이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서 ‘온 세상’이란 로마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믿음의 소문은 제국 내의 모든 성도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도 그 소식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고 또 편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란 그 자체가 전파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문을 내려고 해서 소문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유인물을 만들어 돌리고 방송을 내어서 소문이 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가 소문을 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 교회는 어떤 소문이 나고 있는지 두렵습니다. 아마 기존 교회와 다른 점이 많아서 이상하더라는 소문도 많이 난 것 같습니다. 너무나 한 쪽에 치우쳐 있으며 심지어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전화를 해서 물어 오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바른 깨달음이 있구나 하는 인식도 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소문도 있고 긍정적인 소문도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기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시각에서 보는 것이요 긍정적인 시각은 그래도 기존 교회에서 깨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진 시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는 시각은 우리가 감수해야 할 고난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시각은 우리가 더욱 진리 위에 서 있도록 격려하는 채찍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진리를 알고 진리 위에 서 있도록 정신을 차리십시오.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인물들의 헌신과 사랑과 수고를 보십시오. 이들 모두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믿음이 헌신과 사랑과 수고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도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로서 소문이 퍼지도록 주님 앞에 서 있도록 합시다. 아무튼 우리 교회를 주위의 뭇 시선들이 보고 있음은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의 어떤 행동은 단순한 행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로 소문이 날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로 소문이 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서로를 사랑하고 생각해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주님 사랑과 서로 간의 사랑이 별개가 아닙니다. 양자는 곧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라는 소문이 전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일로써 다른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 감사는 무엇에 대한 감사입니까? ‘너희 모든 사람들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됨에 대한 감사입니다. 제가 왜 이 점을 꼬집느냐 하면 요즈음의 교회가 감사한다는 것이 하도 외적인 것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의 교회는 장로, 권사 세우고 교회당 헌당식 하는 것으로 감사가 치우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식을 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이런 의식이 마치 하나의 통과 의례인 것처럼 반드시 행해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장로가 되면 1500-2000만원씩 헌금을 낸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매관매직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장립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을 더 북돋우고 있습니다. 그저 되었으면 그 때부터 봉사면 되지 왜 장립식이 필요합니까? 그리고 큰 건물 짓고 기공식, 헌당식 등을 꼭 시행해야 합니까? 이런 것을 시행하면서 그것으로 거창하게 의식을 행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안 해도 그뿐입니다. 이런 일들에 예배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봉사하고 사용하면 될 것들입니다.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두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이 전해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관심이 두어져야 합니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가 믿음이 전해지도록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사실 요즈음 욕먹는 목사, 돈 떼먹고 달아나는 장로, 욕먹는 권사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누구는 돈에 관심뿐이더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백성 됨을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에 있는 현상들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 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은 믿음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전파되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전파될 때 그것이 천국백성 됨을 증거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이것만이 진정한 감사거리입니다. 적은 소수의 사람이라도 믿음이 전파되는 것이 진정한 감사거리요 그 외의 것은 그냥 지나가도 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이제 사도가 누구에게 감사하는 지를 생각해 봅시다. 누구에게 합니까? ‘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 ‘내 하나님’이라는 말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하나님에 대한 친밀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친밀하게 의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이렇게 친밀하게 믿고 의뢰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막연한 어떤 신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신이여 도와주소서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평소부터 하나님을 친밀하게 가까이 하고 살았다는 말이요 인격적으로 의지하면서 살아 계시는 분으로 섬겨왔다는 말입니다. 감사는 이런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막연한 신 관념에서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막연한 신 관념 속에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다들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의뢰고 계시지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성도들의 믿음이 전파되도록 하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죄성이 가득 찬 인간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믿음이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때문이요 그가 성도들 속에서 구원 사역을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현상이지 인간의 현상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는 성도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내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보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늘 가까이 모시고 있기 때문에 빛이나 형체나 소리를 듣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의뢰하는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종교성을 가진 인간들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도와 같이 하나님을 섬겨야 옳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꼭 빠뜨리지 않고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입니다. 8절에서 남은 것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현대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말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것을 덧붙이겠습니까?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우리의 중보자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에게 나아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지 그를 통하지 않고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룩하다고 인정을 받는 것도 영광스럽게 된 것도 그 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하는 구절을 덧붙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 없는 행위는 전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정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인정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으며 그에게 기도하며 소원을 빌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은 하나의 우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상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믿는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성에 의한 신입니다. 따라서 우상에 불과한 신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예수 밖에서는 올바른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만 자기를 찾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믿는다고 하는 어떤 사람들은 죄 사함까지는 예수의 공로로 하지만 성화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은 인간이 이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천국을 완성하고 구원을 완성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신자에게 거룩과 영화라는 것은 예수님이 이룬 것을 얻은 줄 알라는 것이지 자기가 이루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섬기는 사도의 신앙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로마 성도들의 믿음이 여러분의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믿음만이 전파되는 여기에 기독교의 생명이 있으며 교회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믿음만이 우리의 진정한 감사거리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