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신
(고전 7장)
2006.07.30.
요즘 우리나라도 일인 가구가 300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한 사람만 사는 가구가 이렇게 많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일인 가구가 많이 늘어나는 것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는 데는 몇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이혼이 많아져서 홀로 된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돌아온 싱글’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이혼율이 높아지면서 혼자 사는 가구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혼자 된 가구가 홀로 된 전체 가구의 10% 정도 된다고 합니다. 둘째는 홀로 사는 노인 인구가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사별하여서 홀로 된 후에는 자녀들과 같이 살기도 원하지 않고 또는 재혼하여서 살기도 어중간하여서 그냥 홀로 사는 노인들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세 번 째로 일인 가구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된 요인 중 하나는 결혼하지 않고 살려는 젊은 세대가 많아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전과는 달리 결혼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문제로 생각하는 젊은 세대는 결혼하여서 이리 저리 매여서 살기보다는 혼자서 자유를 누리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가족이라는 것에 매여서 사는 것보다 자아 성취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생활을 택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프랑스나 노르웨이나 미국 같은 경우는 원래 혼자 사는 사람들의 비율이 우리나라 보다 훨씬 높다고 합니다. 프랑스 파리나 노르웨이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혼자 사는 가구라고 할만큼 혼자 사는 가구가 보편화된 상태라고 합니다. 프랑스는 독신자 비율이 지난 30년 동안 배로 늘었는데 매년 12만 건에 이르는 이혼이 큰 이유라고 합니다. 노르웨이는 이혼 가정이 많고 또 자녀의 수도 적기 때문에 일정한 나이가 되면 싱글로 살아가는 노인이 많아지며,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서 혼자 사는 젊은이들도 많다고 합니다. 미국은 혼자 사는 가구가 전체 가구의 26%(2000년 인구조사보고서)라고 합니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이렇게 혼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가끔은 외로울 때가 있기는 하지만 구속 받는 곳이 없어 자유롭고 시간이나 경제적으로나 여유를 누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요즈음은 2-30대뿐 아니라 전 연령층으로 확산되어가는 추세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은 독신 생활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기독신자가 혼자 사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독신도 하나의 생활의 형태로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독신으로 사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말할까요?
교회사를 통해서 본 독신
초대 교회와 중세 교회는 독신으로 사는 것을 영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교부들이 성적 쾌락은 경건생활을 방해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중세까지 독신으로 사는 것을 영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독신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정신이 중세 교회에까지 강하게 흘렀습니다. 그러므로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일종의 영적 엘리트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에는 이것이 바뀌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교회는 결혼이 하나님이 인류에 대해 정하신 창조의 계획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즉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 창조 질서를 따르는 삶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현재까지 개신교회에서 주도적인 흐름이 되었습니다. 독신은 특별한 삶이거나 또는 문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택하는 삶으로 생각했습니다. 결혼하여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중세까지는 독신을 경건하게 사는 데 더 낳은 삶이라고 생각했고, 종교개혁 때부터는 결혼하여 사는 것을 창조에 부합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물론 성경은 결혼과 독신에 대하여 어느 하나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다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여자인 하와를 창조하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든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타락 이전의 일이요, 타락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타락 후라고 할지라도 독처하는 것은 더욱 좋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타락 후에도 창조의 말씀을 따라서 결혼을 하는 하여서 한 몸을 이루고 서로 신의를 지키며 함께 서로에게 소속되어서 살아가는 것은 창조 세계를 위하여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을수록 이러한 질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독신을 죄라고 하든지 또는 가서는 안 될 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결혼이 창조 질서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모든 사람이 결혼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신 생활도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어미의 태로부터 고자 된 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마19:12)고 했습니다. 고자라는 말은 우리가 ‘내시, 환관’이라고 부르는 거세된 남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타고난 고자도 있고,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도 있다고 했습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되었다는 것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혼자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자 된 삶을 신자의 삶의 한 형태로 제시하는 강력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을 섬기는 일에 매진하기 위하여 고자 되어 사는 것을 말하며, 또 아무나 고자 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 난 자라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19:11).
그리고 사도 바울도 독신으로 사는 것을 비교적 강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고전7:6)라고 했고, 처녀 딸에 대하여 말하면서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38)라고 했고, 사별한 과부에게는 시집가거든 주안에서만 시집가라고 하면서 그래도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분요하고 걸리는 것 없이 주님만을 섬기기 위하여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상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창조 때에 혼자 사는 것보다는 결혼하여 사는 것이 좋도록 지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결혼하여 사는 것이 좋지만, 그러나 걸리는 데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혼자 사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은 독신으로 사는 것도 잘 못이 아니며, 더욱 좋은 일일 수 있으며, 삶의 한 방식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결혼하여 사는 것은 창조 때에 내신 일반적인 원리이지만, 이것을 초월해서 하나님 앞에서 더 헌신된 삶을 위하여서 독신을 택해도 좋다고 합니다.
따라서 결혼과 독신 중에 어느 것이 더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 다 신자의 당당하고 자연스런 삶의 한 형태로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은 나쁘다고 할 성질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보통 교회에서는 혼자 사는 사람을 문제시하는 경향이 있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고정 관념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도 건전한 생활의 한 형태이고 독신도 건전한 생활의 한 형태일 수가 있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중세까지의 전통처럼 독신이 낫다거나, 종교개혁 이후의 경향처럼 결혼이 낫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지만, 독신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좋은 삶의 한 형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독신을 위한 가이드
그런데 독신으로 사는 것을 위하여서 몇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독신은 주님께 헌신 된 삶을 살기 위해서 독신을 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주님과 바울의 강조점입니다. 이점이 요즈음 사람들 독신을 추구하는 이유와 확연이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독신을 추구하는 이유는 자기의 자유와 자아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하고 나면 남편에게 자녀에게 매여야 하고 이런 저런 일거리에 매여야 하니까 이런 것을 감당하기 싫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감당할 능력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결혼해서 그런 힘든 삶을 살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 살면 시간도 자기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여행도 하고 그야말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싱글 모임에 가면 서로 통하는 데가 있으니 눈치 보지 않아서 좋고, 함께 등산도 하고, 놀이도 하면서 사귈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러니 구차하게 결혼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재혼하여 사는 것 보다는 혼자 있기를 좋아 합니다. 혼자 있으면서 친구를 정해 놓고 함께 사귀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렇게 하면 가족들과 문제 생기지 않고, 또 뒤도 깨끗해서 좋으니 결혼이라는 절차를 가질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지요. 하지만 이런 현대인들의 생각에는 철저한 이기주의가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독신 이유 중 주된 요인은 주께 헌신입니다. 철저히 헌신하면서 살려니 가족이 짐이 되고 방해가 되기 때문에 차라리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외국의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서도 독신으로 산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예를 들면 C.S. 루이스나 존 스타트나 미국에서 개혁주의 신학에 철저하게 헌신하면서 지금도 80이 훨씬 넘은 나이로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William Young 박사 같은 사람들이 독신자들입니다. Young 같은 사람은 학문과 결혼하였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만큼 학문에 헌신하여 그것에 전념하기 위하여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시대에는 임박한 환란을 내다보고 있으니 얼마 남지 않은 날에 주께만 헌신하면서 살도록 권면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헌신적인 정신이 어느 정도만 있으면 오늘날 신자가 다 주를 섬기면서 혼자 사는 삶을 택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결혼하여 사는 것도 역시 주를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남편을 주를 섬기듯이 섬기라든지’,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런 일들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가르침도 됩니다. 가정을 이루고 남편과 아내를 섬기며,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것 역시 주를 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도 역시 하나님 사랑을 더 많이 배울 수 있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참으로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체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 생활은 인간이 하나님과 세계에 대하여 가장 소중한 자세와 마음을 체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의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참으로 사람 되는 것은 자기를 추구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람이 되는 것은 자기를 바치는 데 있습니다. 자기를 바치는 사람의 정신이 건전하고, 이런 사람의 육체도 건강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쁨과 성숙과 자람이 있습니다. 평생 살아도 어른으로 어린 아이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자기만을 생각하면서 살기 때문에 어른으로의 삶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어른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평생 살아도 어린 아이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바치는 고통을 통해서 성숙한 사람은 어른으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으로서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느 면에서는 사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독신은 독신 생활이 가능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삶이 형태입니다. 정신적으로 결혼 생활에서 흥미를 별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이 결혼하여 함께 사는 것보다는 홀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 되는 사람이라면 독신 생활을 택하는 것을 고려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물론 혼자 사는 외로움, 우울해지는 것, 성적 유혹, 경제적인 어려움, 자기중심적이 될 위험성, 노후의 외로움 등을 잘 고려해야 할 것이지만, 그래도 혼자 사는 것이 자기 성질에 맞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독신 생활을 택할 수 있습니다.
또 성적 욕구에 별로 지배되지 않는 사람이면 독신을 생각해 볼만합니다. 바울도 성적인 욕구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고 했다. 성적 욕구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욕구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혼하여 정상적인 성 생활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성적 욕구를 그렇게 크게 느끼지 않는 경우에는 독신생활을 고려해 보는 것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궁극적으로 성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면 성령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적으로 욕구가 없거나 적다고 해서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받은 대로 감사하면서 삶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사람들은 성적인 욕구를 따라서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욕구가 강하면 좋고 덜하면 좋지 않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성적 욕구는 천차만별입니다. 이런 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인간이 좋고 나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각자 받은 그대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적으로 무관심한 것도 그대로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자극하는 타락성에 둘러싸여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극은 낙원을 잃어버린 타락한 인간이 가지는 환상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극이 진실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들은 헛된 환상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극적인 타락성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서 신자는 독신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서 편견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든지, 별난 사람으로 생각한다든지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각자에게 주신 삶의 한 형태로서 존중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