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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풍을 맞으며 구름속을 거닐던 두타, 청옥 산행
○ 일 시 : 2009. 10. 17(토)
○ 위 치 : 강원도 삼척시
○ 산행구간 : 댓재 - 박달령 - 두타산 - 청옥산 - 망군대 - 고적대 - 사원터(팔각정) - 신선봉 - 관음사 - 주차장
○ 산행거리 : 약 24.3Km
○ 산행인원 : 33명(김세현, 도재호, 전제홍,손동기, 이호동, 신경호 나머지 영통구청산악회)
○ 산행시간 : 06:30-14:00(7시간 30분)
○ 산행난이도 : ★★★
○ 산행감상평 : ★★★
○ 산행추천시기 : 여름(계곡산행), 겨울(눈산행)
○ 날 씨 : 흐리고 비 다시 흐림(8℃ ~14℃) 강원도 삼척시날씨
○ 산행지도
짙어가는 낙엽을 시샘하는 비를 보면 수원 출발(02:00)
초저녁부터 장대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알록달록한 나무들의 자태를 시샘을 하는 듯이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면서 낙옆을 도로 아래로 떨어트리는 비가 야속하게 느껴진다. 배낭을 메고 출발장소까지 걸어서 가는 동안에 우산을 써지만 도로에 떨어졌다 튀어 올라온 빗물은 바지를 적신다. 이렇게 비가 오면 산행을 신청한 회원중 많은 사람이 빠지고는 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벌써 출발 장소에 도착을 하였다. 33명이라는 적지 않은 인원을 태운 버스는 비물을 가르며 수원을 빠져 나와 영동고속도로를 질주를 한다. 산악회 총무가 오늘 산행 일정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오늘은 4개 코스로 나누어 진행을 한다고 한다. 자신의 체력에 맞추어 코스를 선택하여 산행을 하는 맞춤형 등산이다. 우리가 가는 코스는 당초 댓재에서 두타산을 지나 청옥산을 거쳐서 연칠성령에서 무릉계곡 방향으로 내려가는 코스이나 연칠성령에서 고적대까지 조금 더 진행을 하기로 한다. 버스는 가뿐 숨을 돌리기 위해서 동해휴게소에서 잠시 멈춘다. 변하지 않은 풍경이 반갑기만 한 휴게소이다. 백두대간 종주를 할 때에 종종들리고 해서인지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버스는 댓재를 향하여 용틀임을 치면서 구비구비 고개길을 올라 간다.
백두대간 종주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댓재(06:30)
용을 쓰며 올라온 버스는 숨이 차는지 댓재에서 이내 멈추고 만다. 댓재에는 항시 바람이 거세게 분다. 영서지방에서 관동지방으로 부는 바람은 겨울에는 바람의 속도가 산천을 쓰러트릴 기세로 부는 곳이다. 댓재에 도착을 하니 백두대간 종주를 할 때에 겨울에 도착을 하였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 난다. 댓재에서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선두는 먼저 출발을 한다. 산신각을 좌측으로 놓고서 산행을 시작을 한다.
댓재에 대한 유래 등에 대하여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이 기고한 글을 소개를 한다.
"댓재라는 이름은 곧 큰 산줄기의 고개라는 의미로 일컬은 '대고개'라는 뜻의 말이라 생각된다. 대동여지도에는 이를 죽치(竹峙)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대고개․ 댓재를 뜻옮김한 표기다. 여기서서의 대는 곧 대들보․ 대보름 등과 같은 크다는 의미로서 竹의 훈을 빌려 표기한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댓재 서쪽 기슭 죽현천(竹峴천) 부근에 고대 죽령현(竹嶺縣) 터가 있었던 곳으로 표기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권35) 삼척군조에 의하면 죽령현은 고구려 시기에는 죽현현(竹峴縣)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이후 죽령현으로 개칭 되었다. 이에 의하면 댓재는 고대시절에는 竹峴-竹嶺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죽치(竹峙)로도 불렸고, 우리말 땅이름으로 댓재 로도 속칭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오늘 이전에 두타산 산행은 두번째인데 야간산행만 해서인지 낮에 산행을 하니 두타산 정상까지 등산로가 전혀 새로운 길처럼 보인다. 단풍은 어느새 막바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등산로는 낙엽으로 덮혀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운문가 잠시 벗겨지면 두타산 정상이 시야로 들어왔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해풍만이 반기는 두타산(08:19)
세 명이 선두로 산행을 하다가 한 명이 뒤로 쳐진다. 두타산 정상에 도착을 하니 그 뒤에서 따라 오던 한 명이 쳐진 일행을 따라 잡고 올라 온다. 두타산 정상에는 해풍만이 등산객을 맞이하고 있다. 바람을 피하여 두타산 정상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두타산성방향에서 올라온 다른 일행들을 만난다.
두타산 정상에서 우측 세시방향으로 내려가면 두타산성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 11시 방향은 백두대간이 이어지는 등산로이다. 두타(頭駝) 불교용어의 사전적 정의에 의하며 " 1. 번뇌의 티끌을 떨어 없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불도를 닦는 일. 2 산과 들로 다니면서 온갖 괴로움을 무릅쓰고 불도를 닦는 일. 또는 그런 중. "라고 정의 하고 있다.
두타산정상에서 우측 남쪽으로 있는 두타산성은 "조선 시대 산성으로 현재 두타산 중턱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남아 있음. 1414년(태종 14)에 축성된 것으로 천연적인 산의 험준함을 이용해 부분적으로 성 쌓기를 함." 이라고 나와 있다.
두타산 산행기에 대한 조선시대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 쓴 미수기언에 제37권 원집에 나와 있는 두타산행기를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고전국역서에 나와 있는 것을 소개한다.
두타산기(頭陁山記)
6월에 두타산에 갔다. 삼화사(三花寺)는 두타산의 오래된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폐사되어 연대를 알 수 없고, 우거진 가시덩굴 속에 무너진 옛날 탑(塔)과 철불(鐵佛)만이 남아 있다. 산속으로 들어가니 계곡 위로는 모두 우거진 소나무와 큰 바위들인데, 바위 너설이 긴 여울에 임하여 마주 보면서 층대(層臺)를 이루었다. 이것을 ‘범바위[虎巖]’라고 한다. 층대를 따라 서쪽으로 바위 벼랑에 올라가면 ‘사자목[獅子項]’이라는 곳이다. 계곡 위에 작은 고개를 오르면 바위 벼랑 밑에 맑은 물과 흰 돌이 있는데, 그 반석(盤石)을 ‘마당바위[石場]’라고 하며 바위로된 계곡이 확 트였고, 돌 위로는 물이 흐르는데 맑고 얕아서 건널 수가 있으며, 석양이 비끼면 소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마당바위를 어떤 이는 ‘산중 사람들이 바가지를 버렸던 바위이다.’라고 한다.
북쪽 벼랑에 있는 석대(石臺)를 ‘반학대(伴鶴臺)’라 하고 이것을 지나면 산이 모두 암석인데, 쭈뼛한 바위가 깎아 세운 듯하며, 앞에 있는 미륵봉(彌勒峯)은 더욱 기묘하다. 마당바위를 지나 서북으로 올라가면 중대사(中臺寺)가 있는데, 지난해 산불로 인하여 타 버린 것을 중[山僧]이 삼화사로 옮겨다 지었다. 삼화사는 제일 아래에 있고 중대사는 산 중턱에 있는데, 그곳은 계곡과 암석이 엇갈리는 길로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다. 그 앞의 계곡을 ‘무릉계(武陵溪)’라 한다. 산중 수석(水石)의 이름은 모두 옛 부사(府使)였던 김효원(金孝元)이 지은 것으로, 김 부사의 덕화가 지금까지 전하며, 부 안에는 김 부사의 사당이 있다.
북쪽 폭포는 중대사 뒤에 있는데, 바위 너설로 된 골짜기가 몹시 험하게 가파르고, 그 아래는 바위가 평탄하여 차츰 내려갈수록 험한 바위는 없어져 올라가 놀 만하며, 계곡에는 물도 흐르고 있다. 바위 너설 위로 1백 보쯤 가서 중대사를 지나가면 바위 벼랑을 더위잡고 기어오르게 되는데, 두 발을 함께 디디고 갈 수가 없다. 학소대(鶴巢臺)에 와서 쉬었는데, 이곳에 이르니 산세(山勢)가 더욱 가파르고 쭈뼛하여, 해가 높이 솟아 올랐는데도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이끼 낀 바위에 걸터앉아 폭포를 구경하였다. 폭포가 흐르는 바위를 ‘천주암(濺珠巖)’이라 하고, 그 앞산 봉우리에 옛날에는 학(鶴)의 둥지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학이 오지 않은 지 60년이 되었다고 한다.
줄사다리를 딛고 몇 층을 올라가 지조산(指祖山)에서 구경을 하였다. 이 산의 암석이 끝나는 곳에 옆으로 석굴이 있으며 석굴 속에는 마의 노인(麻衣老人)이 쓰던 토상(土床)이 있고, 남으로는 옛 성(城)이 보인다. 북쪽 산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길이 끊겨 올라갈 수 없고, 동쪽 기슭의 바위 봉우리는 깊은 못이 있는 곳까지 와서 멈추었다. 동북쪽의 다음 봉우리는 동으로 뻗었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와 바위 기슭이 되었는데, 흑악(黑嶽)의 북쪽 벼랑과 마주 대하고 있고, 그 속에서 계곡 물이 나온다. 또 서쪽으로 세 개의 바위 봉우리가 못 위에 있는 바위 봉우리와 함께 솟았는데, 가장 서쪽에 있는 것이 제일 높다. 그 위에는 우묵하게 들어간 바위가 있는데, 이끼는 오래되었어도 물은 맑으며, 한 자 남짓한 노송(老松)이 있다. 그리고 모든 봉우리를 세 발자국만 옮기면 올라갈 수 있으나 아슬아슬하여 굽어볼 수도 없고 나란히 설 수도 없으며, 그 한가운데의 봉우리는 바위가 세 겹으로 포개져서 한 발만 디디면 흔들린다. 그래서 이름을 ‘흔들바위’라 한다. 그 밑에는 깊은 물이다. 항아리같이 생긴 넓은 바위가 구렁 전체를 차지하였고 그 가운데는 물이 고여 있는데, 깊고 검어 속을 볼 수가 없으며 날이 가물 때는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그 물줄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면 옛날 상원암(上院庵)의 황폐한 터가 있다. 어떤 이는 이를,
“고려 때 이승휴(李承休)의 산장이었다.”한다. 구경을 마치고 내려와서 옛 마당바위의 저녁 경치를 더 보태 기록하고 학소대의 아침 경치도 덧붙여 기록한다.
6월 3일에 미수는 쓴다.
[주D-001]6월 : 연보에 ‘신축년(1661, 현종2) 두타산에 유람하고 기를 지었다.’고 나온다.
두타산에 대한 산행기를 이 보다 자세하게 기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두타산에 대한 자료를 찾던중 새로운 사실을 몇가지 알게 되었다.
첫 번째로는 두타산과 청옥산의 지명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옛문헌에 의하면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두타산은 청옥산이고 청옥산은 두타산이라는 것이다. 일제시대의 토지조사에 의한 잘못된 기록을 아직까지 수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씁쓸하게 하는 사실이다.
운무로 가득한 두타산은 등산객의 방문을 달갑지 않게 생각을 하는지 주변의 경관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고 있다.
[두타산 정상석]
[두타산 정상에서]
[두타산 정상에서]
[두타산 정상에서]
늘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청옥산(09:45)
두타산에서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서 백두대간 길을 따라서 이동을 한다. 정상에서 좌측으로 성황당에 걸려 있는 오색천처럼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표시기를 지나면서 아래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등산로 좌우로 나무가 있어 주변 경치를 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할 수 없는 구간이 이어진다. 등산로는 박달령까지 완만하게 이어진다. 박달령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용추폭포 방향으로 내려 가는 길이다. 박달령을 지나면서 좌측으로 돌아가면서 오르막이 청옥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잠시후 청옥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해신과 산신의 신령스러움을 간직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역사의 슬픔속에 바뀌어버린 처지를 감추기 위함인지 청옥산에 정상에는 운무로 가득한 날들이 많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청옥산의 안개비만 등산객을 맞이하고 주변을 경치를 운무로 짓누르고 있으며 바람만이 청옥산임을 알려주고 있다.
청옥산 정상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학동을 지나서 용추폭포 아래로 곧장 떨어지는 등산로이다. 고적대로 가기 위하여 청옥산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잠시후 연칠령에 도착을 한다. 연칠성령에 대한 유래를 살펴 보며 "하장면(삼척)과 삼화동(동해)을 이어주던 고개, 험준한 산세여서 난출령(難出領)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정상부를 “망경대“라 하고 인조원년 명재상 택당 ”이식”이 중봉산 단교암으로 은퇴하였을 때 이곳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며 망경 한 곳이라 한다. 다른 일설은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 이어지는 고개로 보기도 하고, 사원터에서 하장면 방향으로 늘어선 일곱 개의 봉우리에서 온 말로 보기도 한다."
전하는 유래가 어떤것이 맞는 것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 이어지는 고개로 옛 사람들은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 교통이 발달하여 쉽게 무릉계곡까지 다다를수 있지만 그 옛날에는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야 이보다 더 높은 산들을 생각하지 못하였으니 하늘로 이어지는 길이하고 보지 않았을까 한다.
연칠성령에서 망군대 방향으로 다시 올라가기 시작을 한다. 암릉구간이 이어지고 망군대에 도착을 한다.
[청옥산]
[청옥산]
[청옥산]
[연칠성령]
[연칠성령]
[연칠성령]
[연칠성령]
도도하게 오릇한 고적대(10:42)
망군대를 지나면서 암릉구간이 계속 이어진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어 여간 애를 먹는 구간이다. 바람도 매섭게 불고 바닥은 얼어 있어 산행하기에 쉽지 않는 곳이다. 잠시후 로프를 타고 올라서면 도도하게 오릇히 정상을 지키고 있는 고적대 정상에 도착을 한다. 맑은 날에는 청옥과 두타가 한 눈에 들어올만 장소이지만 여기 또한 쉽게 사람에게 경치를 보여 주지 않는다.
[고적대]
[고적대]
[고적대]
[고적대]
[운무 가득한 경치]
사랑채의 아늑함을 간직한 신선봉과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관음암(13:33)
고적대에서 다시 백두간길을 따라 철쭉지대를 따라서 진행을 하다 좌측 뱍두대간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내려선다.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경사로가 이어진다. 뒤에서 따라 오던 일행 한 명이 넘어져서 가벼운찰과상을 입는다. 내리막이 끝나는 지점에 사원터가 흉물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다. 등산객뿐만 아니라 후손과 자연을 위해서도 정비를 했으며 하는 생각이 든다.
사원터를 지나면서 계곡을 따라 등산로가 이어진다. 장마철이나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계곡물로 산행이 어려운 구간이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철계단이 있는 곳이 나온다. 철계단을 건너서 올라가면 신선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두타산과 청옥산이 안채이며 신선봉은 사랑채처럼 아늑한 자태를 지니고 있는 산이다. 신선봉까지 올라서고 다시 철계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내려오니 뒤에서 내려오던 일행 한 명이 잠시 쉬고 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는 계단과 바위를 타고 계속 이어진다. 잠시후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은 무릉계곡으로 곧장 내려 가는 길이고 좌측은 관음암으로 가는 길이다. 관음암으로 가는 입구에는 하늘문이라고 적혀 있는 가파른 철계단이 있다.
가파른 철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설악에 있는 울산바위를 오르는 것처럼 뒤로 넘어질 것처럼 철계단이 이어지고 철계단이 끝나면 관음암 가는 길은 하늘길을 가는 것처럼 산정상 아래로 구비구비 돌아가는 등산로를 따라 가며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산행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관음암에 다다르면 하늘을 건너는 구름다리가 짧게 펼쳐진다. 관음암은 삼화사의 기도도량이다. 무릉계곡과 삼화사는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만 두타산에서 새롭게 두 번째로 알게 된 것은 천은사라는 절이다. 천은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대하여 적어 놓은 책을 담음과 같이 소개를 함다.
답사여행의 길잡이3 동해․설악(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
천은사
천은사(天恩寺)는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저술한 곳이다. 두타 하면 무릉계곡과 청옥산으로 이어지는 등산길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만 두타의 동쪽 계곡에 있는 천은사는 잘 알지 못한다. 진입로가 비포장인 데다 험하고 외진 곳에 있기 때문에 드나듦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로면 내미로리, 때묻지 않은 울창한 숲 속에 구슬 같은 물이 완만한 폭포를 이루며 흐르는 계곡에 폭 파묻혀힌 천은사는 그 내력 또한 자못 깊고 복잡하다.
신라 경덕왕 17년(738) 두타의 세 신선이 백련(白蓮)을 가지고 와서 창건했다는 백련대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뒤 흥덕왕 4년(839)에 범일국사가 극락보전을 건립함으로써 사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고려 충렬왕때 이승휴가 이를 중수하고 간장암(看臧庵)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대장경을 다 잃었다는 뜻이다. 또한 조선 선조 때에는 청허 서산대사가 절을 중건하고 서남쪽에 보이는 산빛이 검푸르다 하여 흑악사(黑岳寺)라 하였다. 다시 1899년 이성계 4대조의 묘인 목조롱을 미로면 활기리에 만들면서 이 절을 원당 사찰로 삼고 ‘하늘의 은혜를 입었다’ 하여 천은사(天恩寺)라 불렀다. 한국전쟁 때 큰 불을 만나 완전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는데 1984년 다시 일어섰다.
‘미로’라는 지명의 ‘미’자는 미수 허목이 삼척 부사로 재임하면서 자신의 호를 따서 눈썹 미(眉)자를 썼는데 영조 14년(1738) 허목의 반대편 정파 사람이 부임하자 아닐 미(未)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삼화사도 우너래의 위치는 이곳이 아니라 시멘트 공장으로 인하여 이곳으로 이전 되었다는 내용도 자세하게 나오고 있다.
[관음암 가는 구름다리]
두타산과 청옥산을 뒤로하고 주차장으로(14:00
관음암을 지나서 내리막이 이어진다. 이번 산행에서 신선암과 관음암을 새롭게 탐방을 할 수 있었으며 천은사라는 유서깊은 사찰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청옥산과 두타산의 이름이 바뀌어 불리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릉계곡 구간을 지나면서 옛 풍류객들이 도포를 벗어 던지고 탁족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을 하면서 주차장으로 내려온다.
봄볕에 그을리고 있는 두타의 모습은 어떠한가를 상상하면 천은사에서 두타산과 청옥산을 바라보면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하는 온갖 잡다한 생각이 들면서 두타산과 청옥산을 마음에 가두면서 산행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