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
박태식 신부 / 신약학, 성공회 신부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2-24).
언젠가 운전 중에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다. 신호가 바뀌어 막 출발하려는 순간 반대편 차로에 있던 스쿠터 한 대가 쏜살같이 중앙선을 넘어 좌회전 해 골목 안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혼비백산하였고 차에 탄 가족들도 모두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십 년 간 안전운전에 힘써왔으며 그와 더불어 몸에 배인 동물적 감각의 운전 실력이 없었다면 큰 일 날 뻔했다. 물론 내 운전 실력을 자랑할 의도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피자배달 소년들은 도로의 무법자임이 분명하다, 헬멧도 안 쓰고 곡예운전을 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등등, 우리는 분노와 우려의 목소리를 동시에 내뱉었다.
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다가왔고 우리는 피자를 시켜먹기로 했다. 최근에 문을 연 곳이 마침 쌀로 만든 피자에 콜라와 너겟도 서비스로 준다기에 전화를 걸었더니 주문이 밀려 50분은 기다려야 한단다. 그래서 '우리는 쌀 피자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가족으로서 앞으로 이 피자집에 단골이 될 만반에 준비가 되어있으니 30분 안에 가져다 줄 수 있냐'는 정중한 부탁을 했고 주인으로부터 '그러시다면야 …' 하는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그리고 30분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독촉 전화를 했고 예의 피자집 주인에게서 배달 소년에게 특명을 내리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아마 그 소년은 곧바로 신호를 무시한 채 쏜살같이 중앙선을 넘어 좌회전 해 골목 안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분명 2중 잣대가 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서양 아가씨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해요. 식사를 같이 하면 꼭 자기가 계산을 하겠다고 나서요.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먹은 값을 각자 내는 게 보통이고 그게 공정한 방법 아닌가요?" 순간 속이 불편해진 나는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때는 참으로 이상해요 라고 할 게 아니라 참으로 감사합니다. 다음번에는 제게 베푸신 고귀한 은혜를 갚기 위해 제가 꼭 한 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로 날을 잡을까요? 라고 대답해야 옳지요." 사실 일단 공짜로 얻어먹었으면 고마워할 일이지 양 나라의 문화까지 비교하면서 거들먹거리다니. 그렇게 놓고 보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2중 잣대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기는 사람 사는 모습이 어디라고 다르겠는가.
나는 비참한 인간입니다
바오로는 1세기 그리스도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교사들 중 하나였다. 그는 지중해 권 도시들을 두루 다니며 가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했고 교회를 세웠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유대교에 맞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틀을 잡아나가기도 했다. 사실 당시의 통념으로 볼 때 바오로는 여러 모로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이스라엘 국외에 살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지만 유대교 정통 가문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 유학까지 갈 수 있었고, 태생 로마 시민이라 제국 내에서도 큰 혜택을 누렸으며, 좋은 교육을 수용할 수 있는 우수한 머리와 자신이 생각한 바를 논리적으로 펼칠 수 있는 필력의 소유자였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일 바오로가 유대교 율사의 길을 걸었더라도 당대 최고의 학파를 형성하고 남았을 인물이었다. 게다가 지치지 않는 열정까지 갖추고 있어 이방인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었다.
바오로에게 일생의 전환기는 예수님 체험에서 찾아왔다. 보통 이야기하는 바로 머리에 들은 것이 많을수록 가슴은 차진다는데 바오로는 그런 기준에서 예외적인 인물이다. 그는 듣고 배운 바를 글자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바오로는 적당한 선에서 거래를 하는 융통성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믿는 바를 실행함에 있어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고지식한 인물이었다. 아니,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념으로 앞 뒤가 꽉 막힌 사람이었다고 하는 게 옳을지 모르겠다. 그런 바오로의 개인적인 성향을 미루어볼 때 유대교 전통을 중시하는 유다계 그리스도인 유랑전도사들로부터 외면당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베드로를 모욕하고, 편지를 쓰면서도 베드로와 예루살렘 모교회의 인사들을 여지없이 깎아 내렸으니 하는 말이다(갈라 2,6; 1코린 9,5; 11,12-16). 유다계 유랑전도사들에게 바오로는 말이 동료 전도사지, 실제로는 눈에 가시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상황이 그 정도였으니 유랑전도사로서 바오로의 여정이 결코 쉽지 않았음은 불 보듯이 빤한 일이다. 바오로가 전도를 하고 지나간 뒤에는 그를 죽이려고 뒤쫓는 골수분자 유대인들이 있었고, 바오로가 세운 교회에 은근슬쩍 들어와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유대계 유랑전도사들도 곳곳에 있었다. 적은 내부에도, 외부에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편이 훨씬 낫겠습니다."(필립 1,23)라는 고백을 할 정도였다. 바오로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가 로마서에 이런 독백을 한 배경은 분명하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고 고돼서 종종 안일하게 포기하고픈 심정이 들었을 것이다. 그 정도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과연 바오로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오늘의 본문이 담겨있는 로마서는 바오로의 생애 말기에 쓴 편지다. 사실 편지라기보다는 그가 평생 바쳐온 복음의 신학이 담겨있는 신학서적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에는 그리스도 교회의 핵심 가르침들에 대한 설명과 당위성과 훌륭한 해석이 들어있다. 시시하게 개인사를 늘어놓을 개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 로마 7,22-24에서 바오로 영성의 심오한 경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의 법을 따르려 하지만 이를 가로막는 또 다른 법이 그의 몸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아마 죽는 순간까지 바오로는 이 다른 법 때문에 고통을 당했을 법하다.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일까? 그 굳건하던 나의 의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순간의 놀라웠던 감동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이러고도 내가 하느님의 사도라 불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죽음의 육체
1934년 히틀러의 나치(NAZI)당이 처음 정권을 잡았을 때 독일 경제는 최악이었고 국민들의 삶 역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1차 대전이 끝나 베르사유 체제로 들어가면서 불가능한 액수의 전쟁 배상금이 독일에 부과되었고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는 사상 초유의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정권을 잡은 나치당에서는 일방적으로 배상금의 지불 유예를 선언했고 패전 이후로 금지된 군대를 부활시켰으며 빈사 상태에 빠진 경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독일 중부에 30년 종교 전쟁을 마치게 한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진 곳으로 유명한 뮨스터 시와 가톨릭 도시 오스나브뤽 시를 잇는 시멘트로 된 1번 고속도로는 히틀러 시대에 건설되어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딱정벌레차로 유명한 폭스바겐 '비틀'도 히틀러 시대의 국민차였는데 이는 모든 가정에 차 한 대라는 모토로 독일의 경제가 다시 일어섰음을 알려주는 지표였다. 그렇게 잘 먹고 살게 해준 덕분에 독일 국민 대부분은 히틀러의 정책에 동조하고 말았다. 2차 대전의 참혹한 상처 뒤에는 독일 국민의 안일함이 있었던 것이다.
가톨릭과 개신교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 역시 너무나 당연하게 히틀러를 위해 기도했고 독일의 유럽 정복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해석했다.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나라를 미쳐 돌아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본회퍼 등 극소수의 종교인들만이 히틀러의 추악한 얼굴을 보아 반 나치 활동을 했으나 나머지는 히틀러가 던져준 달콤한 빵조각의 맛에 빠져 사리를 구별하지 못했다. 지금 글을 쓰는 내 몸에도 2중 잣대가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이 순간도 나를 괴롭힌다. 형제자매가 어이없는 폭력에 희생되는 오늘날 상황에서 나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나는 멸망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쉼 없이 나아가는 죽음의 육체를 갖고 있다. "과연 이 죽음의 육체에서 누가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 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