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사람 : 이선우 2006. 6. 20 14:00 - 15:30 광주 지산동 선생님의 자택에서
... 저는 문학이나 영화와는 별로 가깝지 않습니다. 철학. 종교. 음악은 다소 흥미가 있습니다만.... 초등학교 시절 방학숙제인 일기쓰기도 끝나는 날 모아 쓰느라 고생했습니다. 무엇보다 날씨가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그 흔한 글짖기 대회같은데도 나가본 바가 없습니다. 그런 제가 인터뷰어(interviewer)가 됐습니다.
평생 궁금했던 이청준은 어떻게 광주 서중에 입학했을까? 라는 의문을 풀고 싶어서 였습니다. 요즘으로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회진이나 진목리에서 광주로 진학한 사람도 없었고 그럴려고 맘조차 먹지 않았습니다. 뱃길이 터진 목포나 여수로 가는 학생은 더러 있었습니다. 진목리는 더 산골이어서 나는 5년 회진, 진목리 가까이 있는 탱자섬에서 살면서도 진목리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당시 회진, 진목리는 한번 정착하면 죽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 혹은 유배지 같은 곳이었습니다. 외지인이 들어와 사는 것도 보지못했습니다, 동네에서 나쁜 짓을 해서 쫓겨나는 사람은 있었습니다만 희망을 갖고 출향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육지의 정확한 남쪽 끝(正南津)인 당시의 회진은 인정은 강물처럼 넘쳤지만 사람 살기에는 척박(瘠薄)하고 막걸리나 육자배기로 달래기에는 너무 피곤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새장속에 길들여진 새들처럼 아무도 천관산 넘에 미지의 세계로 떠나려하지 않은, 한마디로 ‘악마의 섬(Devil's Island)’이라고 불리는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에서 보이는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앨커트래즈 감옥' 같은 육지 속의 절해고도(絶海孤島)였습니다. - 이것은 순전히 피난시절 5년의 저 개인적인 추억임
80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초롱초롱한 기억으로 과거를 기꺼이 회상해주신 이종남 교장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어설픈 면담 글을 크게 탓하지 않는다면 이청준 님 공부를 더 하고 싶습니다.......
- 교장 선생님이 광주 서중을 들어가신 얘기...
“응..... 나는 대덕초등학교 다니다가 3학년 때 광주 서석 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됐어, 백부님이 광주에 계셨거든....
우리가 중학교 3학년 때 해방됐었어, 일본 사람들은 전부 동중학교 다녔고 한국 사람은 서중이었지, 그 때는 서중이 6년제 이였어, 그런대 나는 5년에 마쳤지.... ”
- 서석 국민학교에서도 서중을 들어가는 것은 힘들었을 텐데요 ?
“암,, 들어가기 힘든 학교였지.”
앨범을 넘기는 도중 교장선생님의 서중 성적표가 있어서 봤다. 평균 90점 106명 중에 32등이었다. 선생님은 멋쩍은 듯
“내 성적은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어........ ”
하셨지만 수재들이 모이는 그 학교에서 30등은 대단한 성적이었을 것이다.
“서중 5년 졸업하고 그때는 미군정에서 임명하는 초등학교 준교사 9급 4계단 발령을 받고 맨 처음 ‘덕도 국민학교’로 부임했제,,,, 1948년 6월 1일부로 거기 부임해 가지고 3개월 근무하다가 ‘대덕 동국민학교’로 발령 났어,,,9월 1일 자로...
그때는 학교가 없었어, 탱자섬 앞에 선자리에 가교실이 있었고, 회진 동각에서 공부하고 그랬제. 내가 대덕 동초등학교 초대 발령 교사야,
그전에는 지방 강사로 회진에는 ‘이건수’가 있었고, 선자동에는 ‘강진다’가 임시로 아이들을 수용하고 있었어. 그다음에 ‘이열’ 교장 선생님이 오셨지. ”
- 그러면 이청준은 어디로 다녔을까요?
“그러니까, 청준이는 선자동으로 다녔제. 그러다가 회진 어업조합 창고를 얻어 ‘대덕 동 초등학교’가 되고 거기로 다녔지”
- 그러면 교장선생님이 쭉 청준이를 데리고 6학년 까지 갔겠군요?
“그랬제,,,내가 부임하기전에는 ‘강진다’라는 강사가 청준이를 가르쳤지.”
- 이청준을 광주 서중에 입학시킨 사연
“그러니까,,, 청준이가 아주 영리했어, 나는 청준이가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고 생각혀 ...
또, 학교 다니기 전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해가지고 입학하기도 전에 당시의 소설 - 백가면, 순애보, 레미제라불 같은 것들을 집에서 독파를 해부렀어.
학교 다니면서도 아주 특출한 성적이었제.
한번 가르친 것은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었어, 기억력이 워낙 좋아 가지고. ”
[위 사진 설명 - 이종남 선생님 앨범에서 증명사진 만한 것을 얻어 확대한 것임, 앉아 계신 분이 선생님이시고 서 있는 학생 둘중 한 사람이 이청준 님일 것이다....
- 학교 성적도 좋았겠네요?
“학교 성적이사 일학년 부터 육학년 까지 쭉 일등이었제. 누가 이겨먹을 놈이 없었어,,, 참, 출중했지..
하도 아까와서 집안 간을 떠나서 나하고 고재출 교장 선생님하고 같이 청준이 집에 가서 그 숙모님 한테 사정을 했어. 숙모님 재력으로는 도저히 진학시킬 형편이 아니었거등.
'어떻게 시험만 보게 합시다. '
내가 뭔 생각을 했냐하면, 일단 합격만 되며는 아무리 곤란해도 치마끈을 졸라 매고서라도 끝을 맺을 것 같아서 교장선생님 하고 내가 데리고 광주에 올라가서 서중학교에 응시를 시켰제...
그전에 국민학교 연합고사가 있었제, 장흥군. 거기서 청준이가 2등인가를 했어. 그래가지고 서중 입학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제. "
서중의 강봉우 교장 조회 훈화 일화 [오른쪽 사진 - 청준님 광주 서중 시절]
그리고 서중학교 댕길 때는 ‘호남 학술 경시대회’에서도 일등을 해서 전 교생이 모인 조회시간에 교장이 청준이를 불러내어 다른 학생들에게
"《이청준이를 봐라, 저기 장흥군 진목리 산골에서 자란 이런 수재가 있다. 너그들은 도시에서 태어나가지고 왜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냐? 청준이를 본 받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어.”
-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교장선생님은 흐믓하셨겠네요?
“그랬제... 하 하 하...”
지금도 그때가 생각나시는지 노안(老顔)에 웃음이 가득하다.
- 그럼 이청준 맏형도 기억이 나시겠네요?
“회진 어업조합(지금의 수협)에다녔을 것이어.... 이종백이라고 문학을 좋아하고 노래도 잘 하셨제, 무슨 노래 경연대회에서 장흥군에서 일등을 해서 전국대회에도 나갔을 걸.....
공부에 미친 사람이라고들 했었어. 참, 아까운 분인데 일찍 가셨어.
청준이 아버님은 기억이 없어. 종백씨도 아림아림해.. 그 밑에 종덕이고......... ”
- 선생님 그러시면 이청준이 말고 교직에 계신 동안에 청준 이만한 특출한 기억나는 학생은 누가 있을까요?
“청준이 말고는 없어..........”
- 이청준을 졸업 후에 만나신 기억은?
“여러 번 만났제, 내가 대덕 초등학교에서 94년 8월 31일 정년퇴임할 때 청준이가 이걸 가지고 왔었어...”
여러 개의 훈장과 표창장이 진열된 장식장에 있는 필통 같은 나무 상자를 꺼내서 보여 주신다. 동양화를 그린 합죽선이다.
“여기 봐,,, 청준이가 부탁을 해서 그림을 받은 것이어.... ”
선생님은 흐믓하고 자랑스런 표정으로 합죽선을 펴신다. 한번도 사용하지는 않은 듯 지금도 새것 그대로이다.
“그 후에도 광주에 오면 연락하고 밥도 사고 그랬어.............”
*
인생에서 스승은 뭣일까? 이청준이 만일 이종남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어떠했을까?.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 그저 지개나 지고 농사만 짖지는 않았을 테지만 오늘의 이청준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한때 나는 수석(壽石)에 빠진 적이 있다. 시간 있을 때는 벌교 제석산이나 남한강으로 탐석 여행을 간다. 언듯 보면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전문가는 그 중에서 작품이 될 만한 것을 고른다. 그 돌을 잘 씻고 어울리는 좌대를 만들어 얹으면 高價의 작품으로 재탄생된다. 돌이야 원래 그대로 변함이 있을 리 없다.
어린 이청준의 재능을 일찍 알아본 이종남 선생님은 교사로서 전문가이심에 틀림이 없다.
스승이란 인생의 등대 같은 것인가? 앞길을 열어주는 개척자.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 같은 것인가?
*
- 이청준 님이 다행히 교장선생님을 만나서 오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도 보람이 있으시겠습니다.
“지가 워낙 머리가 좋고 노력하고 고생했응게 그랬제... 그렇지만 진학 안했으면 지금쯤 거기서(회진) 면장이나... 허 허 허.....
....... [사진은 청준 님의 광주일고 재학시]
집안으로는 동생 되제, 서중 후배 돼제, 초등학교 제자도 돼제... 이렇게 세 가지 인연이 있다고 내가 그랬제”
*
.........(前略) .......그럴 때면 으레 저 초등학교 졸업 무렵 내게 애써 중학교 진학을 주선하신 옛 은사님들 까지 애꿎게 원망스러워질 때가 허다할 지경인 것이다. 그분들의 권고나 주선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쯤 남쪽 고향마을에서 남루하나마 건강하고 경험 많은 농사꾼으로, 혹은 작은 배의 선주겸 선장 정도로, 모든 것이 비슷비슷하고 일사분란하기만한 이 도시에서의 글쓰기 흉내질 보다는 훨씬 더 정직하고 당당한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게 아닌가, 아니면 그 십여리 등하교 길을 오가며 자주 보고 만나 부러워하던 과수원집 주인이나 우편배달부 정도만 되어 있더라도!............(後略)..........
첫댓글 이 글은 이선우님의 홈피에서 우연히 보게되어 회진 카페에 게재 하게 되었는데 이선우님께 소중한 자료 감사 드리고 회원님들께 이 글을 소개해 드림니다
형님 좋은 글 밤늦게 잘 읽고 갑니다.
아주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
흥상이는내친구지만 참좋은사람알찬사람이다 곳곳마다너손길안가는데가없네너를친구로둔우리가행복하단생각이드네...
깊은 감회에 젖인 밤이네 . . 회진에 이종덕선생님 수재시며 독보적인 이건수선생님 예뿌고 자상하신 이종남선생님 그분들의 표정이 떠 오름니다 . 일찍 깨우치신 우리고장의 명사였지오 . 김동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