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찻길 옆 나팔꽃
5
모처럼 날씨가 아침부터 화창했다. 엊그제 밤에 일어났던 일은 모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강일은 밥을 일찍 먹고 일터로 나갔다. 요즘 며칠간 열심히 일을 하였더니 실적이 제법 많아졌다.
그날 밤 일로 강일은 기분이 좋다. 수정엄마를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다가가서 말을 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나 둘씩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도록 해서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예전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는 것도 무엇 못지않게 그녀의 마음을 잡는 조건 중의 하나가 될 거이다.
강일은 일감이 늘어나자 여자 인부 2명을 고용했다. 한명만 더 있어도 일을 처리할 수는 있겠지만 어머니를 조금 쉬게 하기 위해서였다. 인부들은 야적장 안에서 고철이나 재활용품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이지만 때론 강일과 같이 트럭을 타고 나가 직접 수집을 해 오거나 나이 많은 분들이 모아 놓은 것을 사오기도 하는 일이었다.
야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강일에게 중학교 동창 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너 강일이 맞지? 나 영석인데”
“아!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내니?”
“그냥 그렇게 살지 뭐. 그런데 너 고물상 한다며?”
“응! 그렇게 됐다. 너는?”
“나? 조그만 가게 하나해. 그런데 너 일감 좀 소개해 줄까?”
“뭔데?”
“내가 이번에 아파트를 옮겼는데 입주를 하는 사람들이 새로 가구랑 물건들을 많이 들여오거든.”
“그렇지! 그래 그 것 좀 소개해 줄 수 없니?”
“그래서 전화했지. 내가 입주민 대표거든.”
“정말 잘 됐다. 내 술 한잔 살게.”
“술을 됐고, 나머지 쓰레기나 치워주라.”
“알았다. 그거야 뭐. 고맙다 친구야! 그런데 어느 아파튼데?”
“요즘 광고 많이 하지. ‘강 라인’ 이라고.”.
“음 알아. 너는 몇 호실이야?”
“101동 1007호다. 내일부터 입준데. 한 열흘은 걸릴걸.”
“알았다. 내일 가서 전화할게 고맙다 친구야!”
“고맙긴 내일 보자.”
뜻하지 않은 전화에 강일은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나머지 쓰레기를 치워 주어야 하지만 그래도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내일부턴 여자 인부 한명과 같이 그 아파트에 가서 살다시피 해야 할 것이다.
강일은 아줌마들을 불렀다. 어머니도 같이 오셨다.
“사장님! 왜 그래요?”
“내일부터 아파트 입주하는데 가야겠는데 김씨 아주머니 저하고 같이 갑시다. 괜찮죠?”
“그러지요. 얼마나 걸린대요?”
“열흘쯤은 해야 돼요. 그 다음에 조금씩 있는 건 그때 가서 보고요. 여긴 어머니하고 박씨 아주머니가 알아서 해 주세요.”
“알았다. 여기 걱정 말고 거기나 잘해라.”
“알았어요. 어머니!”
고철이나 재활용을 하다보면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쓰레기 소각장이나 터 메우기를 하는 장소에 대한 정보도 알아야 하고, 관계자들과의 유대관계도 필요한 것이었다.
강일은 내일 아침에 조금 일찍 야적장을 정리하고 아파트를 가기로 마음먹고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잠이 쉽사리 오지 않는다. 이젠 사업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씩 풀려 나가는 것 같았다. 요령도 조금은 생기고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먹어진다.
텔레비전을 끄고도 한참이나 몸을 뒤척인다. 시계는 열두시를 넘어가고 있다. 어느새 잠이 들었나 했더니 건너편 미라의 방에서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미라와 젊은 사내의 목소리다. 지난 번 주유소 사내를 집으로 끌어들인 이후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 요즘 조금 조용하다 하였더니 납자를 사귄 것인가? 아무튼 두 사람의 나지막한 말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강일은 소리 나지 않게 살며시 창문을 더 열고 베개를 바싹 당겨 창문 밑으로 다가 누워 귀를 기우렸다. 목소리가 작지만 워낙 가까운 거리라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누나! 오늘은 제법 찾는 사람들이 많데?”
“네가 도와줘서 그런 거다.”
“그렇기는 하지. 영자 누나가 뿔났더라. 자기 안 챙겨준다고.”
“영자 개 웃기는 애다. 욕심이 너무 많아. 다 관리도 못하면서.”
“그 누나 매일 2차가지?”
“자세히는 몰라도 그런 거 같더라.”
“누난 그런 거 안 해서 내가 좋다. 가게 일만 하면 되지 2차 자꾸 가기 시작하면 나중에 소문나서 가게 오래 못 있게 된다.”
“계집애가 빛이 많더라.”
“누나는 빛 없나?”
“나야 별로...나 씻고 올게.”
“그래. 먼저 다녀 와.”
여자가 부엌으로 나가는지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사내는 텔레비전을 켰다. 자그마한 텔레비전 소리에 간간히 부엌에서 샤워를 하는지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밤이 깊은 탓인지 골목엔 왕래하는 사람의 기척도 없고, 간혹 배달꾼들의 오토바이 소리가 적막을 깨우고 있다. 7〜8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금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엔 사내가 밖으로 나가는지 헛기침을 한다. 잠시 후 미라의 흥에 겨운 목소리가 창문을 통해 들려온다.
‘미친 년! 뭐가 저리 좋을까?’ 강일은 그녀에게 마음속으로 옥을 퍼부었다. 그래도 가슴이 아팠다. 한때는 서로가 좋은 감정을 가졌던 사이가 아니던가?
2〜3분이 지나자 사내가 문소리와 함께 방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일은 더욱더 귀를 창문틀에 갔다대었다. 밤공기라서 작은 소리도 낮보다는 더 또렷하게 들리는 것이다.
“나 누나 좋아 해!”
드디어 사내가 가뿐 숨소리와 함께 미라에게 속삭인다.
“나도 너 좋아. 앞으로 나 많이 도와 줘.”
“알아 걱정 마! 누나 너무 좋다.”
“아이 간지럽다. 살살 만져라. 아이...”
두 남녀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강일은 숨을 죽이고 있는 자신의 숨소리까지 귀에 크게 들리는 듯 했다.
“누나 아〜으 응.”
순간 멀리서 철거덕 거리며 야간열차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객차는 대부분 낮이나 이른 저녁에 운행을 한다. 그러나 화물열차는 정해진 시간이 없이 밤중에도 축을 흔들면서 기찻길 옆 동네 사람들 밤잠을 설치게 한다. 그래도 오래 살다보면 그러한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습관처럼 지내버리기 마련이어서 다행이다.
“아야! 살살.”
미라의 신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기차가 가까이 다가오는지 집이 흔들거리며 덜컥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밤에 다니는 건 분명 화물열차지만 기찻길 옆에 살다보면 덜컥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여객열차인지 화물차인지를 알 수가 있다.
기차소리가 멀어져 갔을 즈음 건너편 방의 소리는 잘 들을 수 없었다. 아마도 자신들도 기차소리를 의식하여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또다시 방문 소리가 나고 텔레비전이 켜졌다.
강일은 더 이상 건너편 방을 의식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어머니가 깰세라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건너편 수정이네를 바라다보았다. 두 모녀는 지금쯤 이층에서 꿈나라에 가 있겠지!
갑갑한 마음을 달래려고 골목이라도 좀 걷고 싶었지만 내일 일을 위하여 억지로 잠자리에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미친년! XX 같은 년!’ 강일의 입에선 미라에 대한 분노의 욕이 튀어나왔다.
시계를 보니 여섯시가 가까웠다. 강일은 간방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러지 머리가 매우 무거웠다.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창문을 닫으며 건너편을 바라다보았다. 미라의 창문은 닫혀있다.
밖으로 나왔다. 5월로 접어든 날씨라 벌써 밖은 훤하다. 부지런한 사람들을 벌써부터 일터로 나가고 있다. 미라의집 앞을 지나가며 길바닥에다 침을 탁 내뱉었다.
철길을 건너 맞은편 철길가로 다가갔다. 이곳 어느 집에선가 철길 밑에다 작은 화분들을 두고 해마다 봉숭아와 작은 꽃들을 가꾸고 있었다. 그 주변의 철로 아래에선 지난해 떨어진 씨앗에서 나팔 꽃 새싹이 움츠리며 자라 나오고 있었다. 초봄엔 몇 군데 밖에 싹이 나오지 않을 것 같더니 그래도 제법 많은 숫자의 봉숭아 싹이 자갈을 헤치고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어쩌면 그 세력이 제법 많아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슨 철망 밑을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발길을 돌리다 건너편 미라의 방을 쳐다보았다. 창문이 모두 닫혀있다.
다시 건널목을 거쳐 지나 야적장으로 향했다. 이젠 마음속에서 미라를 지워버려야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처음부터 순결을 바라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젠 도저히 그녀를 마음에 둘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침 공기가 상쾌했다. 복잡한 마음을 지워 버리려고 부지런히 고철을 분류하였다. 아래쪽에서 여객열차가 올라오고 있다. 아마도 다른 지역의 통학생과 직장인들을 태워가게 될 것이다.
아침밥을 먹고 김씨 아줌마를 태우고 친구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차를 몰고 갔다. 한꺼번에 많은 집들이 이주를 하는 바람에 아파트 단지는 마치 전쟁터와 같아 보였다. 쓸모가 있는 가구인데도 버리고 와서는 새 가구를 넣는다고 난리 법석이고, 베란다를 고치는 집, 도배를 다시 하는 집들로 여기저기서 쓰레기가 생겨나고 있었다.
강일은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일을 시작했다. 공사로 인한 잔재 물은 공사업자가 치운 것으로 하고, 강일은 개인 집들이 가구를 들이거나 물건을 사오는 것들에 대한 사후처리 맡기로 하였다. 버릴 것도 많지만 강일이 필요한 것들도 많았다.
3일을 계속하고 나니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힘들게 일을 하였더니 매우 피곤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얻는 것이 많으니 일하는 보람은 있었다.
거울을 쳐다보니 머리가 많이 길었다. 할 일도 없고 해서 머리를 깎기로 마음을 먹고 수정이네 미장원을 들어섰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 두 사람이 파마를 하고 있었다.
“손님이 계시네. 나중에 다시 올까요?”
“이발하시게요?”
“예! 너무 많이 길었죠?”
“그리 길지는 않아요. 조금 기다려야겠어요.”
“시간 많은 데요 뭘. 수정이 우리 집에 가서 놀래?”
“성가셔요. 그냥 두셔도 되요.”
“제가 심심해서 그래요. 가자 수정아!”
“엄마! 아저씨 집에 놀다올게.”
“아저씨 힘들게 하면 안 돼.”
“알았어. 엄마!”
“나중에 올게요.”
“그러세요.”
강일은 수정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왔다. 수정은 보면 볼수록 귀엽다. 강일은 이런 딸이라도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수정을 앉혀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저씨 과자 사올게 잠깐만 놀고 있어.”
“예!”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는 쌀집 아주머니 댁을 가셨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쌀집 아주머니는 강일의 집에서 서너 집 떨어진 곳에 부부가 사시는데 어머니와 친구로 서로가 자주 오가시는 편이다. 비는 세차게 내리다가 가늘게 내리기도 하고 봄비가 마치 여름 철 같이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마트를 가려고 건널목을 넘어서니 폐 간판이 달린 집에서는 오십대의 남녀들이 모여 고스톱을 치는지 머리를 맞대고 앉아있다.
저 집에는 평소에도 지나 다니다보면 거의 매일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다.
판돈이 많이 걸린 것은 아니겠지만 항상 사람들이 모여 저러고들 있는 것을 보면 정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 길목은 예전에는 그래도 집집마다 길가라고 가게들이 문을 열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절반쯤은 가게 문을 아예 닫게 되었고, 남아 있는 가계들도 장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였다.
길가에는 붉은 색 차량이 세워져 있는데 이놈의 차는 누가 갖다 버렸는지 벌써 일 년 가까이 주차 장소가부족한 동네에 방치되어 있는데 시청에서 경고문을 두 장이나 부쳐 놓았지만 견인해 가지도 않고 동네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강일은 집에 돌아가면 시청홈페이지에다 건의하여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렇듯 이 곳 주변 사람들의 삶은 흥미를 잃은 듯이 그럭저럭 맥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닌 가 생각되어졌다.
.
수정이 먹을 만한 과자와 음료수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수정은 방구석에 비스듬히 놓여있는 기타에 관심을 가지고 손으로 선을 퉁기며 놀고 있었다.
“수정아! 여기 과자 사왔다. 어서 먹어라.”
“고맙습니다.”
어째 말하는 것도 이렇게 귀여울까. 강일은 생각했다. 만약에 수정엄마와 자신이 결합할 수 있으면 당연히 수정인 자신의 아이가 되는 것이다. 창문 가까이 다가가 미장원을 내려다보았다. 커튼이 쳐져 있어 안은 보이지 아니하고 가운데 부분이 조금 열려져 있어 수정엄마의 몸놀림이 보인다.
“아저씬 수정이가 좋은데 수정인 아저씨가 어때?”
“수정이도 아저씨 좋아요.”
“그래? 고맙다. 아이 구! 예쁘기도 해라. 어찌 이리도 예쁠까.”
“아저씨는 과자 왜 안 먹어요?”
“응! 어른들은 과자보다 다른 걸 좋아한단다.”
“아저씨! 저게 뭐야?”
“아! 저거. 저건 기타라고 하는 건데 노래를 부를 때 사용하는 거야.”
“어떻게 하는 건데요?”
“아저씨가 한번 해 볼게. 잘 봐!”
강일은 기타를 들고 의자에 앉아 유행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십 세를 전후해서 동네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다니며 기타도 치고 노래를 부르며 놀던 일이 생각이 났다.
수정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좋아한다. 그러한 너무나 깜찍해서 깨물어 주고 싶었다. 강일은 그의 볼에다 입을 맞추었다. 수정도 따라서 강일의 얼굴에다 입을 맞춘다.
강일이 텔레비전을 켜고 비스듬히 누워있자 수정이 따라서 눕는다. 그리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 강일은 쌔근거리며 자는 모습을 보며 텔레비전을 껐다.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강일도 어느새 잠이 들었었다.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수정엄마가 현관문을 반쯤 연채로 강일을 부르고 있었다.
“강일씨!”
“아! 수정 어머니! 깜빡 잠이 들었네요. 수정이도 자고 있어요.”
“그래요? 애는 남의 집에 와서 잠을 다자고.”
“괜찮아요. 편한가 봐요. 데리고 갈까요?”
“그래 주세요. 그리고 이발도 하시고요.”
“그럼 먼저 가세요. 제가 안고 갈게요.”
“고마워요. 그럼 오세요.”
강일은 수정을 안고 내려가서 미장원의 소파에다 눕혔다. 곁에는 파마를 만 사십대의 아주머니 한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깎아 드릴까요?
”알아서 해 주세요. 크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더 부담스러워요.”
“전 그저 머리에 신경 안 쓴다는 이야기입니다.”
“알았어요. 제가 알아 할게요.”
강일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자신의 머리를 만질 때마다 야릇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가 미장원이 아니고 두 사람이 따로 있는 공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잠이 오려고 했다. 자다가 잠을 깬 탓도 있겠지만 그녀의 손길이 너무나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겨주는 순간에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강일의 등을 살짝 건드렸다. 강일은 순간 황홀감을 느꼈다. 이대로 그녀에게 안기거나 자신이 와락 여인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이젠 강일을 제외한 손님은 아무도 없다. 머리를 말려주고 있는 여인에게 강일이 말을 건넸다.
“저..수정 어머니!”
“왜 그러세요?”
강일은 입안에서 말이 맴돌면서 쉽사리 밖으로 튀어나오질 못했다.
“저 한 테 하실 말씀이라도...”
“혹시 나중에 시간 좀 되시면.”
“무얼 하시려는지?”
“저녁때 손님 없으면 같이 식사라도 하고 싶어서요.”
“아 그 것 때문에...좋아요. 저번에 도움 주신 것도 있고 해서 그러면 제가 저녁 살게요.”
“아니 그러면 안 되고. 일단 가는 걸로는 해요.”
“시간을 어떻게?”
“제가 나중에 보고 전화를 드릴게요. 수정이 데리고 오세요.”
“그러세요. 여섯시 넘어서요.”
“고마워요.”
강일은 이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왔다. 기분이 매우 좋았다. 콧노래를 부르고 있으려니 어머니가 돌아 오셨다. 뭐가 그리 좋으냐는 말씀에 그저 웃음만 지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저녁 밖에서 먹고 올 거야.”
“왜? 누가 사 준다던.”
“응! 친구랑.”
강일은 6시가 가까이 되어서 양복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비가 아직도 조금씩 내리고 있어 우산을 쓰고 미장원을 힐끗 쳐다보니 손님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약속장소를 횟집으로 정할까 했지만 비도 오고 수정이 때문에 아무래도 불고기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예전에 친구들과 갔었던 곳으로 갔다.
식당에는 아직 손님들이 별로 없었다. 2층의 작은 방을 정하고 수정이네로 전화를 걸어 장소를 이야기 하였다.
강일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았다. 머리는 조금 전에 깎아서 가지런하고 옷매무새도 그런대로 괜찮아 보여 혼자 히죽 웃었다. 10여분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수정과 그녀가 얼굴을 나타냈다.
“수정아! 어서 와라. 수정 어머니 안쪽으로 안으세요.”
“오늘 식사는 제가 대접 할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래도...”
“안 돼요. 정 그러시면 다음에 커피 한잔 받아주세요.”
“그거야 별거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미안해서.”
“미안 할 거 하나도 없어요. 전 수정이 보면 기분이 좋아요. 앉으세요.”
“예! 수정아! 이리로 앉아라.”
“엄마 뭐 먹을 거야?”
“수정인 뭐 먹고 싶은데?”
“고기.”
“그래! 이 아저씨가 고기 시켜 놓았다. 많이 먹어.”
“예! 아저씨!”
종업원이 야채와 반찬을 가져다 상위에다 놓았다. 강일은 상의를 벗어 옷걸이에다 걸고 수정엄마에게도 상의를 벗으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몸매가 드러나는 것을 우려해서인지 벗지 않겠다고 하였다.
불판이 달구어 질 즈음 종업원이 등심을 가져왔다. 강일은 재빨리 자신이 집게와 가위를 들고 고기를 구울 채비를 한다.
“제가 할게요.”
“아닙니다. 잘 못하면 옷 버립니다. 제한테 맡기세요.”
불판위에는 고기가 지글거리며 익어가고 있고 수정은 먹고 싶은지 동그란 눈망울을 굴리며 쳐다보고 있다. 드디어 고기가 알맞게 익었다. 강일은 고기를 가위로 잘라 수정엄마에게 주고 다시 조그만 조각을 수정에게 준다.
“수정아! 고기 먹어.”
“야! 맛있겠다.”
“꼭꼭 잘 씹어서 먹어라.”
“응! 엄마!”
“강일씨도 드세요. 천천히 굽고요.”
“알았어요. 고기 탑니다. 빨리 드세요.”
강일은 두 모녀가 고기를 먹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가까이서 여인을 보니 다소 통통한 몸매가 건강하고 탐스러워 보인다. 옷이라도 고급스럽게 입고 치장이라도 하고 나서면 매우 아름다워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일은 수정에게 고기를 챙겨주기에 바빴다. 조그만 입으로 오물오물 고기를 씹어 넘기는 것이 귀엽다.
“미장원은 조금 늦어도 괜찮아요?”
“지금 이 시간 이후론 손님이 없어요. 그래서 아예 불을 끄고 왔어요.”
“그러면 천천히 드셔도 되겠네요.”
“그럴게요.”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비는 어느새 그쳤고 강일이 수정을 업었다.
수정엄마는 만류하였지만 수정이 업혀가길 원했다. 세 사람은 식당 골목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강일은 그냥 집으로 가는 것이 아쉬웠다.
“수정아! 아이스크림 먹으려 갈래?”
“아이스크림? 아이 좋아라! 나 아이스트림 먹을 거야 엄마!”
“앤 방금 밥 먹었는데 아이스크림은?”
“놔두세요. 시내 한번 나오기 힘들잖아요.”
“그래도...”
“따라 오세요. 저 앞에 있어요.”
강일이 앞장서 아이스크림 집으로 들어섰다. 여학생들이 여럿 모여 앉아 있고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수정은 입가에 온통 크림을 묻혀가며 먹고 있고 강일과 수정엄마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강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이런 말해도 괜찮을 런지 모르겠네...”
“무슨 말씀인데요?”
“혼자 수정이 키우기가 힘이 드실 것 같아서...”
“아 예! 이젠 어느 정도 괜찮아요. 처음엔 막막했었는데.
“그러세요. 전 그냥 걱정이 되어서.”
“이젠 수정이가 많이 커서 수월해요. 걱정 해 주어서 고마워요.”
“예! 전 거저...”
강일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무언가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 데 막상 이야기를 하려니 수정엄마의 말에 압도되어 버리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 온 강일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은 재혼이란 걸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말인 것일까? 만약에 재혼의 의사가 생긴다면 강일의 구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불구라고 아니면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탐탁하게 여기지 않을지도 모를 것이라는 마음도 들었다.
잠을 자려해도 잠이 쉽게 오지 않는다.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라도 눈치를 채고 있는 것인지.
창문을 열고 건너편을 바라다보았다. 아직은 잠이 들지 않았는지 그녀의 방에선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전화라도 해 볼까. 그러나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다.
강일은 눈을 감은 채 식당에서의 모습들을 떠 올렸다. 예쁜 수정에게 자신이 고기를 잘라 입에 넣어 주던 일과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서 자신도 그들의 한 가족이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던 일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다소 겸연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내식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고기를 상치에 싸서 한입 가득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수정엄마의 통통하고 뽀얀 얼굴을 힐긋 힐긋 훔쳐보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던 시간이 오래 동안 지속되기를 바랐었다.
식당을 나오며 수정을 왼팔로 안고 오른 손으로 문을 열며 수정엄마의 허리를 감싸며 나오던 순간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강일에게 전해지며 가슴속을 방망이질 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질문에 대한 답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무어라고 이야기를 이어 갈 수가 없었던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이 사랑한다고 하여야 옳았을까? 그러니까 결혼이라도 하자고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건너편에서 미라가 돌아오는지 방문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남자가 같이 외지를 않는지 조금 있으려니까 부엌에서 샤워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텔레비전 소리가 한동안 들려왔다. 미라는 주로 낮에 잠을 많이 자기 때문에 밤일을 마치고 오면 통상적으로 두세 시까지는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와서 강일의 수면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불평을 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가난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문제이지 그녀가 밤늦게 까지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나무랄 수 없기 때문이다.
강일은 그저 없는 사람들의 애환이려니 생각하고 넘겨 버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미란인들 피곤한데도 쉽게 잠이 들지 않는 것을 왜 힘들어 하지 않겠는가?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니 얼굴이 푸석하다. 간밤에 제대로 잠을 못잔 탓일 것이다. 다행히 어제 저녁 비가 그쳐 아파트로 다시 나가기로 하였다.
집을 나서 건널목을 건너는 지점에서 문씨를 만났다. 강일은 다소 겸연쩍었지만 아는 체를 하였더니 뒤에서 불러 세운다.
“저기! 김씨! 거기 어디가?”
“아파트 공사장에 물건 가지러 가요.”
“요즘 애기 엄마와 잘 되어 가는 거여?”
“무슨 말씀인지?...”
“에이 숨길 거 없어. 내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애기 엄마도 젊은 사람이 고생하잖아. 잘 해 보라고.”
“아저씨 무슨 오해를 하시나 보는데요.”
“왜 그래? 난 척 보면 다 안다니까.”
“글쎄요. 어떻게 보셨는지. 그런데 우린 아무 일도 없어요.”
“나가 저 번에 그랬다고 그러지 말고. 나도 외로워서 그런 거여. 혼자 사는 사람들끼리는 통할까 싶어서 그래봤어. 내가 싫다는 젊은 여자한테 흑심이 있는 건 아녀. 술이 취해서 그렇지.”
“그 건 좋고요. 그런데.”
“알아 아직은 아니어도 가만히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해봐.”
“예! 알았어요. 그럴게요.”
“그럼 잘 해봐. 갈 게.”
“예! 잘 가세요.”
강일은 다소 황당했다. 아니 저 양반이 어떻게 자신이 수정엄마와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전번에 그 일로 자신이 수정엄마를 좋아 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하는 것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을 한단 말인가?
강일은 아파트에서 일을 하는 하루 내내 수정엄마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강일의 머리가 복잡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언가 확실하게 해 보고 마음 정리를 해도 해야 할 일이다.
수집소에다 고철과 재활용품을 내려놓고 은수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간이 있으면 소주라도 한잔 하자고 제의하였다. 마침 은수아버지는 일을 나가지 않고 있어서 흔쾌히 승낙을 하였고, 굴다리 근처 삼겹살집으로 나왔다.
“왜 보자고 했니? 요즘 너 보기 힘이 들던 데.”
“내가 왜요. 형님이 바쁜가 보이 더 구만.”
“내사 한 달 절반을 논다 아이가. 시간은 많은 사람이다.”
“저도 밤에는 맨 날 집에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고?”
“별일 아닙니다. 그냥 한번 만나고 싶어서.”
“아니다. 뭐가 있지?”
“소주 한잔 하면서 이야기 합시다.”
“그럼 그렇지!”
삼겹살이 익어 가는 소리가 잠시 동안의 적막을 깨운다. 소주잔이 벌써 서너 번 오갔다. 강일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형님 저요. 사실 결혼을 해야겠는데. 어머니 고생하사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더 있어봐야 뾰쪽한 수도 안 생기겠고.”
“잘 생각했다. 임마야 내가 뭐라더노? 그런데 구했나?”
“아니요. 그래서인데...”
“수정엄마 어때?”
“그게 어디 제 맘대로 됩니까?”
“이야기는 해 봤나?”
“아직...”
“이야기를 해 봐라. 아니면 안아 버리든지. 책임진다 하면 될 거 아니가.”
“형님 그거 어디 쉬워요.”
“자식 안 될 건 또 뭐있어. 외로운 사람끼리.”
“에이 안 그래요. 그게.”
“그럼 내가 이야기 해 줄까?”
“그럴까요.”
“아니다. 그런 건 당사자끼리 해야 맞는 거다. 자 한잔 먹고 당장 오늘저녁에 찾아가라.”
은수아버지는 강일에게 연거푸 술잔을 권했다. 말이야 쉬워 보이지만 과연 강일이 그러한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인지 모를 일 이었다.
강일은 비틀 거리며 철둑길을 걷고 있었다. 오늘따라 저녁시간이 오래 되지 않았는데도 길가엔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인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또 이대로 용기 없이 집으로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강일은 철조망을 붙들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에라! 안 되면 그만이고 저질러 보자.’ 강일은 수정엄마의 핸드폰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강일씨! 이 시간에 웬일로?”
“수정 어머니!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밤이 늦었는데 내일 하면 안 될까요?”
“꼭 오늘 말씀드려야 해요. 여기 굴다리 옆 꽃집 근처인데요. 미안해요. 여기서 기다릴 게요.”
“...일단 알겠어요.”
강일은 근처 시멘트 거치대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여분이 지나자 그녀가 얼굴을 나타냈다. 강일은 그녀를 옆에 앉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였으나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저 무슨 일인데요?”
“사실은...저어 제가. 있는 대로 말씀 드릴게요. 저 수정 어머니 좋아합니다.”
“강일씨! 그건...”
“저 수정 어머니, 아니 명희씨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만나자고 전화했습니다. 용기가 안나 술도 한 잔 했어요.”
“강일씨! 전 아시다시피 우리 수정이도 있고요.”
“다 아는 거 아닙니까? 저도 처지가 이렇고. 뭐 서로가 숨길 것 있습니까? 제가 연애하자는 것 아닙니다. 저 아시다시피 수정이 좋아하고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이 수정이 잘 키우고...”
“잠깐만요. 그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저도 강일씨 사람 좋은 줄 알지만 그건 아직은.”
“수정 어머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전 전혀 재혼 할 생각은 안 해요. 그리고 제가 강일씨 보다 나이도 더 하고요,”
“나이 차이가 무슨 문제가 됩니까? 서로 간 마음이 문제지.”
“어째든 미안해요. 더 이상은 이야기 안 했으면 좋겠어요. 서로 감정이 좋을 때 그대로 유지하는 게 좋겠어요.”
“사실대로 이야기 해 주세요. 저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 어머니, 그렇지 않으면 진짜 다른 이유라도.”
“지금은 다른 이유보단 우리 애와 단둘이 살고 싶어요. 진심이에요.”
“꼭 그렇다면 할 수 없겠지만, 생각이 바뀌면 언제라도 저 한 테 기회를 주세요. 저 정말 수정이 잘 키우고 싶어요.”
“말씀이라도 고마워요. 그럼 저 가볼게요.”
“건널목까지만 같이 가세요. 밤에 보는 사람도 없어요.”
“그럼 건널목 까지만요.”
둘은 서로가 말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철둑을 걸어가고 있었다. 강일은 힐긋 그녀를 곁눈질 해 보았지만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다소곳한 표정이다. 한참 만에 강일이 입을 열었다.
“오늘 제가 어려운 말 꺼냈다고 다른 오해는 마십시오. 전 단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우리 수정일 그렇게 생각해 주시고.”
“저는 어째든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 주시되, 아니면 친구처럼 좋게 지냈으면 해요. 제가 나이가 적지만.”
“그럴 게요.”
달이 동네 뒷산을 넘어가며 훤히 산 능선을 비추고 있었다. 강일은 헤어지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차분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따스한 마음을 가진 여인인 것 같았다. 그녀가 먼저 가고 난 후 강일은 기찻길 옆 철조망 아래를 살펴보았다. 달빛에도 비가 온 탓으로 나팔꽃이 제법 커서 이제 줄기가 뻗어 오르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