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자산서원과 정개청 (1) 김세곤(목포지방노동사무소장) 성현을 제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는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書院) 하나가 다섯 차례나 문을 닫고 또 다시 문을 열었다면 그것은 해외토픽감이다. 며칠 전에 한국은행 목포본부 이승희본부장과 남도 문화유산에 대하여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승희 본부장께서 나에게 함평의 자산 서원을 가보았는지를 물었다. 나는 목포에서 광주를 가는 국도변에 ‘자산서원(사액서원)’이라는 표시판은 보았으나 아직 가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더니 그 서원이 바로 조선시대의 당쟁의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날 밤에 인터넷에서 자산서원과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1529 중종 24년-1590 선조23)선생에 대하여 탐색을 하였다. 자료를 읽어 보니 너무나 흥미 있고 조선시대의 지방 사림과 중앙 정치의 당쟁의 역사가 서원에 얽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입춘 날에 자산서원을 간다. 목포에서 함평군 엄다면 제동마을 자산서원까지는 차로 40여분이 걸린다. 자산서원은 도로변에 안내 표지판이 잘 설치되어 있어 비교적 찾기가 쉬웠다. 목포에서 광주로 가는 국도변에 ‘ 자산서원 1.2km’라고 써진 표시판을 따라 함평 엄다면을 지나서 한참 가니 ‘곤재 정개청 선생 자산서원’이라는 표시판이 다시 나왔다. 거기에서 좁은 길을 차로 서원 입구까지 갈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입춘인데도 불구하고 날씨가 너무나 춥다. 온몸이 얼어붙고 칼바람이 분다. 서원 입구에는 대도문(大道門)이라는 현판이 있다. 그런데 문은 굳게 잠겨 있다. 지난번에 구례군 월곡 마을의 매천 황현 선생 사당을 갔을 때도 사당문이 잠겨 있었어도 옆문을 밀어보니 문이 열린 터라, 이번에도 오른쪽 문의 문고리를 밀치고 문을 밀어보니 서원 문이 열린다. 서원은 생각보다 꽤 크다. 왼쪽에는 자산서원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최근에 지은 것 같은 건물이 하나 있고 오른쪽에도 건물이 있으며, 바로 정면에는 사당으로 가는 계단과 문이 있다. 한편 오른편 한쪽 뜰에는 ‘자산서원 묘정비’ 라고 써진 비가 있다. 묘정비 뒤에 써진 글을 읽어보니 자사서원과 정개청 선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글씨는 금초 정광주 선생이 쓴 것인데 서체가 무척 인상적이다. 묘정비 옆에는 자산서원이 세워지고 다시 훼철된 역사가 써진 비가 하나 있다. 자산서원. 곤재 정개청과 그의 동생 정대청을 배향한 서원. 곤재 선생이 누구이기에 서원이 세워진 다음에 다섯 번씩이나 현판을 내리고 다시 현판을 세우는 수난을 맞았던 말인가. 곤재 정개청. 나주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학문을 배우지 못하다가 17세에야 화담 서경덕 선생 밑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보성 어느 절에서 중이 되어 역학과 천문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37세(1565년)에 함평 엄다면 제동마을에 정착하여 학생들을 가르친바 유생이 4백명에 이르렀다 한다. 한동안 당시의 영의정 박순의 제자가 되었다고도 하며, 곡성현감도 지냈다. 또한 왜국과의 전운이 감도는 1586년경에는 선조 임금에게 도원수감으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는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가 된다. 기축옥사라고도 불리는 정여립 사건은 동인이었던 전주의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고 지방세력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중앙 및 호남 지역 유학자등 1,000여명이 문초를 당한 사건이다. 어느 역사학자는 이 사건을 조선시대의 광주 5.18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호남지역의 동인 계열 유림들은 모조리 곤욕을 당하였던 것이다. 정개청도 이발등과 함께 모반에 가담하였다 하여 국문을 당하였고, 1590년 그의 나이 62세에 함경도 경원에서 유배중에 죽고 만다. 정개청이 나주 감옥에 갇힌 때는 봄인데도 서리가 심하게 내리고 대추만한 우박이 4일간이나 내려 함평 나주 지방 사람들이 하늘도 노(怒)하시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정개청은 정여립 사건의 조사책임자인 송강 정철과 소원한 관계였단다. 대사헌이었던 정철이 동인의 탄핵을 받아 1584년에 담양 창평에 내려와 4년간 은거 중 일 때 정개청은 곡성현감으로 있으면서도 찾아보지도 않았고 정철의 품행에 대하여 공박하는 등 서로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철이 정여립 사건의 감찰 책임자였으니 정개청의 수난은 예상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정개청을 따르던 제자 50여명이 죽고 20여명이 유배당하는 등 곤욕을 치른다.
그런데 정여립 사건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2년 뒤인 1591년에 세자 책봉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몰락하게 되고 정철은 유배당하게 된다. 어부지리로 동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정개청에 대한 신원 운동이 활발해졌고 마침내 광해군 8년(1616년)에 정개청은 역적의 누명을 벗고 함평군 엄다면에 서원이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다시 득세를 하게 되자 효종 8년(1657년)에 서인 송준길의 상소에 의거 서원이 철폐된다. 그 당시 동부승지였던 남인의 고산 윤선도는 서원의 복설을 상소하였으나 송시열등과의 논쟁에서 패배하여 오히려 파직을 당한다. 한편 1674년 숙종의 즉위와 함께 제2차 예송논쟁에서 이긴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당시 우의정인 남인의 허목(허목은 나주의 백호 임제의 외손자임)은 숙종 3년에 서원의 복설을 주청하였고 숙종이 윤허하니 2차 건립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숙종 5년에는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는다. (사액서원은 사설기관인 서원이 국가의 공인을 받아 현판과 노비 서적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음) 그러나 숙종 6년(1680년)에 남인이 경신대출척으로 물러나자 자산서원은 다시 문을 닫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이때 조정에서 곤재 정개청 선생의 추종 하였다하여 옥에 가둔 유생이 50명, 귀양 보낸 자가 20명, 금고된 자가 4백명에 달하였다 한다. 달이 차면 또 기울고 세상사는 또 반전 되는 것인가. 숙종 15년(1689년)에 기사환국(장희빈 소생의 세자(후에 경종) 책봉에 서인이 반대하여 서인이 축출되는 사건)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서원은 세 번째로 복원이 되고, 숙종 28년에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실정을 하자 세 번째로 훼철이 되고 영조 28년에 네 번째 복설 영조 38년에 네 번째 문을 닫고, 1789년 정조 13년에 다섯 번째 복설이 되는 등 중앙정치에서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 다시 말하면 서인과 남인의 정권 장악 여부에 따라 자산서원은 문을 닫고 다시 문을 여는 역사가 계속되었다. 정개청을 배향하는 서원의 철폐와 존립 문제를 두고 중앙의 정치가 남인과 서인의 대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이러니한 것이다. 이런 서원은 1868년 고종5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마침내 다섯 번째 철폐가 되었고 해방이후 1957년에 복설이 되었으며 1988년 이후 대대적 복원 공사가 이루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산서원의 철폐와 복설의 역사를 적고 있노라니 마치 조선 중기 이후의 붕당정치, 당쟁사를 적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학연과 지연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지는 붕당정치, 사색당파의 모습을 이글에서 보고 있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
출처: 국화처럼 향기롭게 원문보기 글쓴이: 김세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