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이후의 태국 역사는 1976년 발생한 유혈 쿠테타를 통해 군사정권이 다시금 출현하면서 민주주의가 불안정을 보인 시기이다. 1973년의 민주화 혁명을 통해, 그 이전 시기의 군부정권 통치자들이 물러난 바 있었다.
태국의 1980년대는 대부분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1920년생) 장군이 총리로서 집권한 시기였다. 당시의 쁘렘 띠나술라논은 민주적 성향을 지닌 실력자로서, 의회정치를 회복시킨 시기였다. 이후 태국은 1991-1992년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민주체제를 유지했다.
2001-2006년 사이에는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 총리가 이끈 대중정당 "타이락타이 당"(Thai Rak Thai party: TRT)이 집권하여,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의 여파를 극복하고, 태국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이 시기의 태국 정치가 태국을 되돌아올 수 없는 한 시대로 변화시켰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2006년 TRT가 부패했다며 극우 보수파 "옐로우셔츠"(PAD: 노란셔츠) 시위대가 시위를 벌인 이후, 9월에는 "2006년 태국 군사쿠테타"가 발생하여 이 정권은 실각했다. 이후 2007년에 새롭게 민간정부 체제로 복원됐지만, 연이은 선거에서 2차례나 친-탁신계 정부가 들어섰다. 옐로우셔츠 시위대는 또다시 시위에 나서 "2008년 방콕국제공항 점거농성 테러"를 벌였고, 이후 사법부가 여당에 대한 해산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정계개편을 통해, 군부 및 극우 보수파 시위대의 지지를 등에 업은 보수 "민주당"의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총리의 연립정부가 등장했다.
이러한 부자연스런 정계개편은 결국 친-탁신파 지지층인 "레드셔츠"(UDD) 시위대의 불만을 자아냈고, 농촌 빈곤층과 도시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이들 민주화 시위대는 2009년 4월의 수도권 소요에 이어, 2010년 3-5월 사이에 방콕에서 국회해산 및 즉각적인 총선실시를 요구하며 대규모 가두 점거농성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시위는 정부군의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통해 90명 사망에 2,000명 정도의 부상자들을 남기고 5월 19일 강제진압됐다. 이후 태국 정부는 비상사태 선포를 지속하며 한편으로는 공안정국을 이어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화합 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1. 혁 명
1973년 10월의 사건은 태국 정치에 있어서 하나의 혁명으로 귀결되었다. 이것은 학생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도시 중산층이 군사정권에 항거한 최초의 사건이었고,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데 있어서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국왕의 명시적 축복을 얻어내기도 했다. 군사정권의 지도자들은 하야한 후,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사진) 1940년 독재자 피분송캄 시대에 건립된 "민주기념탑"의 모습. 이 건축물은 짜끄리 왕조의 절대왕정을 전복시켜 입헌군주제로 이행한 "1932년 혁명"이라 불리는 군사 쿠테타를 기념하는 구조물이다. 하지만 "민주"라는 명칭과는 역설적으로, 무솔리니의 추종자였던 피분송캄이 자신을 우상화하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장소는 이후 1973, 1976, 1992, 2010년에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들이 벌어진 상징적 장소이기도 하다. 태국의 정치발전사가 지닌 역설적 구조와 유사한 운명을 지닌 장소처럼 느껴진다. ☞ 확대사진 바로가기
하지만 태국은 아직 이렇게 확실하고도 새롭게 창출된 민주주의를 기능적으로 원활하게 이행시킬만큼, 그 정치적 계층을 성장시켜 놓고 있지는 못했다. 1975년 1월의 총선거는 안정적인 다수당을 배출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1976년 4월에 새로운 총선이 열렸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베테랑 정치인인 세니 빠못(Seni Pramoj, เสนีย์ ปราโมช: 1905-1997)과 그의 아우 끅릿 빠못(Kukrit Pramoj, คึกฤทธิ์ ปราโมช: 1911-1995)이 연속적으로 총리직을 계승했지만, 응집력 있는 개혁 프로그램들을 수행하진 못했다. 1974년 석유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불경기와 인플래이션이 발생했고, 이는 정부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일이었다.
민주 정부가 추진한 일 중, 가장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것은 태국 영토에서의 미군철수 주장이었다. 하지만 시골지역에서는 "태국공산당"이 이끄는 무장반군의 활동이 점차 활성화되고 있었고, 도시 지식인 및 학생들까지 우호적 성향을 갖도록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1975년에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가 공산화됐다. 이웃국가들이 공산화되면서, 국민들은 공산화의 공포로 공황상태가 되었다. 공산정권은 600년 역사를 지닌 라오스의 군주제를 종식시키면서 태국의 국경선에 출현했고, 캄보디아와 라오스 난민들이 태국 영토 안으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태국을 우경화시켰고, 태국 보수파는 1976년 선거에서 이전의 1975년 선거보다 선전했다.
2. 군사정권으로의 회귀
1976년 말 경이 되면, 온건한 중산층들의 여론이 "탐마삿 대학"(Thammasat University)을 근거지로 하는 학생운동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군부와 우파는 학생들의 자유주의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공격하고, "부락 스카우트"(Village Scouts, 빌리지 스카우트)"나 "붉은 들소"(Red Gaurs) 같은 민병대를 이용해서 많은 학생들을 살해했다. 1976년 10월 사건이 발생한 계기는 타넘 낏띠카쫀(Thanom Kittikachorn: 1911-2004) 전 총리가 수계승이 되어 왕실사찰인 "왓 보원"(Wat Bovorn)으로 귀국한 일 때문이었다.
1973년부터 시민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공장 노동자들과 고용주 사이의 대치도 더욱 격렬해졌다. 지식인 계층과 노동자 계급에서는 사회주의와 좌파 이념들이 인기를 얻었다. 정치적 분위기는 더욱 더 긴장감을 띠게 되었다. 나콘빠톰(Nakhon Pathom)에서는 공장주에게 저항했던 노동자들이 목이 매달린 채 발견되기도 했다. 극단적 반공주의 운동인 매카시즘(McCarthyism)의 태국식 버전이 광범위하게 번져나갔다. 누구든 시위만 하면 공산주의 가담자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1976년 10월 4일, 탐마삿대학의 학생들은 2명의 운동가가 폭력적으로 사망한 데 대해 항의하는 의미로, 2명을 교수형에 처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극중에서 목이 매달린 사람 중 1명은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왕세자와 많이 닮았다고 선전됐다. 10월 5일, 영자지 <방콕포스트>(Bangkok Post)와 태국어 일간 <다오 사얌>(Dao Sayam) 지는 이 퍼포먼스에 대해 약간 과장된 사진을 실은 후, 학생들이 "왕실모독죄"(lese majeste: 불경죄,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암시를 했다.
우파 및 사막 순타라웻(Samak Sundaravej: 1935-2009) 같은 이들로 상징되는 극우 보수파들이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학생운동을 억눌러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들은 학생들을 공격하여 10월 6일에 이 사태는 절정에 다다랐다. 군부가 민병대들을 부추겼고, 그 결과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수백명의 학생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살해됐다. 경찰과 민병대들은 여학생들의 가슴을 풀어헤쳐 수치심을 안겼고, 살아있든 사망했든 가리지 않고 강간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46명이 사망하고 167명이 부상했으며, 2천명이 체포되었다고 했지만, 정확한 숫자는 알 길이 없다. 이 사건 직후 이 학살에 대한 책임을 사법적으로 추궁하지 않는다는 사면령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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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P통신"의 사진기자 닐 울비치(Neal Ulevich)는 이 유명한 사진을 통해 "풀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전 수년간 베트남에 머물며 종군 사진기자를 하다, 방콕으로 막 근거지를 옮긴 시점에서 이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탐마삿대학의 학살 당일 촬영된 이 사진에서, 한 남자가 목이 매달린 채 사망한 좌파 여대생의 시체에 대해, 다시금 철제의자로 가격하고 있다. 그의 공격적 행위보다도 주변에서 구경하며 웃음을 띤 군중들에게서 더욱 큰 충격을 받게 된다. |
이날 밤 군부는 쿠테타를 일으켜 "민주당"(Democrat Party)이 주도하던 연립정권을 실각시켰다. 군부는 극우파이자 전직 법관이었던 타닌 끄라이위시안(Tanin Kraivixien: 1927년생)을 총리로 임명한 후, 대학과 언론, 공무원 사회를 정화시키는 작업에 돌입했다. 수천 명의 학생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여타 좌익들이 방콕에서 피신하여, 라오스에 안전한 기지를 확보하고 북부 및 북동부 지방에서 활동하던 공산 반군에 합류했다. 탐마삿대학 총장이자 존경받는 경제학자였던 뿌워이 응파꼰(Puey Ungpakorn, ป๋วย อึ๊งภากรณ์, 黃培謙: 1916-1999) 박사와 같은 이들은 해외로 망명을 떠나기도 했다.
타닌의 경제정책 때문은 아니었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이 충격을 받으면서 경제도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민주적 실험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정권이 안정적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1977년 10월 군부 내 또다른 파벌이 쿠테타를 일으켜, 타닌 정권을 붕괴시키고 끄리양삭 처마난(Kriangsak Chomanand) 대장을 총리로 선임했다. 1978년, 정부는 태국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고, "함께 번영하는 국가를 건설할 것"을 표명했다.(주1) 이러한 조치에는 주거, 가족 재결합, 안전 문제 등이 포괄된 것이었다.
이 무렵, 태국군은 "베트남 군대의 캄보디아 침공" 상황과 씨름해야만 했다. 난민들이 태국 영토로 밀려 들어왔고, 베트남 군대 및 정권에서 쫒겨난 크메르루즈(Khmer Rouge) 반군 양측 모두가 주기적으로 태국 영토를 침범하여, 국경을 따라가며 분쟁을 유발시켰다.
1979년 베이징을 방문한 태국 정부는 덩샤오핑 주석으로부터 중국이 더 이상 태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대신 태국 정부는 캄보디아에서 도망쳐온 크메르루즈 반군들에게 안전한 기지를 제공키로 했다.
한편 패배한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범죄들이 드러나면서, 태국 대중들에 대한 공산주의의 호소력도 가파르게 떨어졌다. 끄리양삭 총리의 지도력은 신뢰를 받지 못했고, 경제적 문제들이 발생하자 1980년 2월 압력에 못이겨 사임했다. 끄리양삭 총리의 후임자는 "왕립 태국육군" 사령관(참모총장)이었던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대장으로, 그는 첨렴하다는 평판을 가진 강력한 왕당파(국왕 충성파)였다.
베트남의 침입
1979-1988년 사이에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있으면서, 종종 태국 영토를 침범하곤 했다. 그들은 분명 난민촌들에 숨어 있을 반군 게릴라들을 찾아내려 한 것이었다. 당시 이러한 난민촌들에는 라오스계나 베트남계 난민들 역시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경지대에서는 우발적 충돌들이 끝ㄶ이지 않았다.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 군대는 1985-1988년 사이에, 크메르루즈 반군 소탕을 위해 정기적으로 태국 영토 내의 난민촌들을 기습하곤 했다. 이 기지들이 중국과 더불어 크메르루즈에게는 가장 큰 지지기반이었다.
3. 쿠테타와 총선
1980년대의 많은 부분은 푸미폰 국왕과 쁘렘 총리의 관리 하에서 민주화가 진전된 시기였다. 두 사람 모두 입헌적 통치를 선호했고, 폭력적인 군부의 개입이 종식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했다.
3.1. 쁘렘 띠나술라논 시대
1981년, "영 턱스"(Young Turks: 개구쟁이)라고 알려진 군부 내 소장파 그룹이 쿠테타를 일으켜 방콕을 장악했다. 그들은 국회를 해산하고 사회적 변화를 약속했다. 하지만 쁘렘 총리가 왕실과 함께 코랏(Khorat: 나콘 라차시마)으로 이동하자 그들의 지위가 흔들렸다. 푸미폰 국왕은 쁘렘에 대한 지지를 확실하게 천명했고, 왕실 친화적인 제1 군구 사령관 아팃 깜랑껙(Arthit Kamlangek) 장군이 지휘하는 왕당파 부대가 무혈 반격을 통해 간신히 방콕을 탈환했다. 이 사건을 통해 국왕의 권위는 더욱 강화됐고,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쁘렘 총리의 지위도 강화됐다. 그리하여 양측은 타협을 하게 되었다.
사면령이 내려지면서 공산반군의 활동도 끝이 났고 전직 학생운동 출신 게릴라들도 방콕으로 돌아왔다. 1982년 12월, 태국 왕립육군 사령관 아팃 깜랑렉 대장은 방콕에서 거행된 행사를 통해 "태국 공산당" 깃발을 전달받았다. 이 자리에서 공산반군들과 그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정부에 반납하고 충성을 서약했다.(주1) 아팃 장군은 무장투쟁이 종식됐음을 선언했다.(주1)
군대는 주둔지로 복귀했다. 새로운 헌법이 선포되어 대중적으로 선출된 국회(하원)와 균형을 맞추기 위한 임명직 상원을 구성했다. 1983년 4월에 열린 총선에서는 민간인 신분이 된 쁘렘의 정당이 다수당이 되었다. 이러한 구성은 "전-민주주의"(Premocracy: 민주주의 준비단계)라고도 불렸다.
(사진) 푸미폰 국왕의 최측근으로 "국왕의 복심"이라고까지 불리는 쁘렘 띠나술라논 현 추밀원 의장의 최근 모습. 1980-1988년 사이에 총리를 역임한 그는, 1998년부터는 추밀원 의장을 맡아오고 있다. 그는 2006년 태국 쿠테타의 배후 기획자로도 광범위하게 알려져있다.
쁘렘 총리는 당시 동남아시아 지역을 강타했던 경제혁명의 수혜자이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의 불황에 이어서 경제성장이 시작됐던 것이다. 태국은 사상 최초로 상당한 경제대국이 됐고, 태국의 주력 수출품이었던 쌀, 고무, 주석을 대신해서 컴퓨터 부속품과 섬유, 그리고 신발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베트남 전쟁과 반군활동이 끝나자, 관광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주요한 외화수입원으로 부상했다. 도시 인구는 급속히 불어났지만, 전반적인 인구성장률은 감소했다. 비록 이산(Isan, 이싼: 북동부) 지방이 소외됐긴 했지만, 경제성장으로 인해 심지어 농촌지역에서도 삶의 질이 향상됐다. 태국은 대만과 한국 같은 "동아시아의 호랑이들"(East Asian Tigers)만큼 빠른 성장을 하진 않았지만, 지속적인 성장률을 보였다.
쁘렘 총리는 1983년과 1986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8년간 총리직을 유지했고, 개인적 인기도 많았다. 하지만 민주주의 정치의 부활은 보다 모험적인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었다. 1988년의 새로운 총선에서 찻차이 춘하완(Chatichai Choonhavan) 예비역 장군이 총리가 되었다. 쁘렘은 다수당이 3번째 총리 임기를 맡아줄 것을 제의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
3.2. NPKC와 피의 오월
찻차이 총리는 정부 계약건에 있어서 군부의 특정 파벌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여 라이벌 파벌의 반감을 샀다. 이 라이벌 파벌을 주도한 인물들은 수톤 콩솜퐁(Sunthorn Kongsompong, สุนทร คงสมพงษ์: 1931-1999), 수찐다 크라쁘라윤(Suchinda Kraprayoon, สุจินดา คราประยูร: 1933- ) 같은 "쭐라쩜끌라오 왕립 [육군] 사관학교"(Chulachomklao Royal Military Academy: CRMA) 5기생들로, 이들은 찻차이 내각을 "부패정권" 혹은 "뷔페 내각"(Buffet Cabinet)이라 부르면서 1991년 2월 쿠테타를 일으켰다.
군사정권은 스스로를 "국가평화유지위원회"(National Peace Keeping Council: NPKC)라 자칭한 후, 민간인인 아난 빤야라춘(Anand Panyarachun: 1932- )을 과도총리로 임명했다. 아난이 실시한 부패척결 및 직선적인 수단 동원은 인기를 얻었다.
새로운 총선이 1992년 3월에 열렸다. 승리한 연립여당은 쿠테타 지도자 수찐다 장군을 총리로 지명했다. 이러한 일은 그가 이전에 국왕에게 약속했던 것을 파기한 행동으로, 새로운 정권이 위장된 군사정권이 될 것이란 광범위한 의혹을 확인시켜 준 것이었다.
하지만 태국의 1992년은 시암의 1932년이 아니었다. 수찐다 장군의 행보는 결국 수많은 방콕 시민들이 전례없는 규모로 시위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이 시위는 육군 소장 출신이었던 짬렁 시므앙(Chamlong Srimuang: 1935- )이 이끌었다.
수찐다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대들을 방콕으로 출동시켜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이로 인해 수도 방콕 중심부에서 학살이 발생했고, 수백명이 사망했다. 군부 내에 균열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내전의 우려 속에서 푸미폰 국왕이 개입했다. 국왕은 수찐다 장군과 짬렁을 TV로 방영되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소환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평화적 해법을 촉구했다. 결국 수찐다 장군은 사임했다.
4. 최근의 태국 정치
4.1. 새로운 민주체제
푸미폰 국왕은 아난 전 총리를 다시금 과도 총리로 임명하여 1992년 9월에 개최될 총선을 준비토록 했다. 새로운 총선에서는 추완 릭파이(Chuan Leekpai: 1938- )가 이끈 "민주당"이 주로 방콕과 남부지방에서 승리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유능한 행정가였던 추완 총리는 1995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는 1995년 선거에서 반한 실빠-아차(Banharn Silpa-Archa: 1932- )가 이끌고 보수파 및 지방 정당들이 연합한 세력에게 패배했다.
반한 내각은 출범 직후부터 부패 의혹에 시달려 조기총선 압력을 받았다. 결국 1996년 총선이 개최됐고, 이 선거에서 차왈릿 용짜이윳(Chavalit Yongchaiyudh: 1932- ) 예비역 장군이 이끈 "신-열망 당"(New Aspiration Party)이 간신히 승리했다.
차왈릿 총리는 집권 이후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에 직면했다. 이 사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초래되어 그는 1997년 11월에 사퇴했다. 그를 계승해 2번째로 총리가 된 추완 릭파이는 통화 안정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협정을 맺어, IMF가 경제 회복에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태국의 이전 역사들과 대비해서, 이 사태는 민간인 통치자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해결한 사례에 속한다.
4.2. 탁신 친나왓의 집권
2001년 총선에서 탁신 친나왓이 정책적으로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가운데, 추완 총리의 IMF와의 협상과 기금 투입 문제가 쟁점이 되기도 했다. 탁신의 정책은 낡은 정치와 부정부패, 조직화된 범죄와 마약 등에 실질적으로 반대하는 것이었다. 2001년 1월, 탁신은 이전의 자유로운 총선에서 그 어떤 총리도 획득하지 못한 유례없는 대중적 대승을 거뒀다.
탁신 자신은 --- "친나왓 컴퓨터 통신"(Shinawatra Computer and Communications)이란 사명이었던 --- 태국 굴지의 이동통신 기업 "친코프"(Shin Corporation)의 오너였지만, 자신의 주식들을 모두 부하 직원이나 자식들이 장성하여 스스로 관리가 가능할 때까지 돌봐줄 사람들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이 주식들은 최종적으로는 그의 가족들에게로 양도되었다. 이러한 주식 공여 문제는 법정으로까지 옮겨졌지만 법원은 그가 승소 판결을 내렸고, 이로써 그는 총리는 주식을 소유할 수 없다는 법적인 문제로부터 자유로와졌다. 하지만 법원은 그의 승소를 인정했어도, 정적들과 태국 국민들은 이 재판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다.
탁신은 집권기 동안 태국 경제를 매우 신속하게 회복시켰고, IMF의 채무 역시 기한에 맞춰 전액 변제했다. 2002년 무렵의 택국은, 특히 방콕에서 다시금 경제적 붐이 일어났다. 저가의 제조업은 중국 및 여타 저임금 국가들로 이동했기 때문에, 태국은 급속히 팽창한 중산층 시장과 수출전략을 위해, 보다 고도의 제조업 부문으로 구조를 이동시켰다. 정부가 간헐적으로 "사회질서" 캠페인을 통해 밤문화를 통제하는 단속을 펼치긴 했지만, 관광산업 --- 그 중에서도 특히 섹스관광 --- 역시 대규모 외환수입 창구 역할을 여전히 담당하고 있었다.
(사진) 탁신 친나왓 전 총리. 그는 태국 사회를 되돌아올 수 없는 하나의 흐름에 몰아넣은 인물인 동시에, 태국사회 여론의 극단적 양분화에서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005년 2월의 총선에서 탁신은 더욱 큰 승리를 거두면서, 2번째 임기의 안정성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탁신은 태국 역사 상 가장 논란에 휩싸인 총리였다. 그가 유능한 지도자로 칭송받는 것에 비례해서, 반대자들의 비판도 격렬해졌다. 그는 최초 총리가 되었을 당시부터 숨겨놓은 재산에 대한 의혹을 받았다. 그는 언론과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그가 미얀마의 군사정권과 관계를 맺었던 점도 비판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가 실행했던 "마약과의 전쟁"에서는 수천 명의 용의자들이 살해됨으로써,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게다가 직권남용과 이권개입에 관한 보도들도 나오곤 했다.
2005년 12월, 미디어 재벌이었던 손티 림텅꾼(Sondhi Limthongkul, สนธิ ลิ้มทองกุล, 林明達: 1947년생)이 자신이 진행하던 뉴스 분석 프로그램에서 탁신을 비판하여 그 프로그램이 편성에서 제외되자, 반 탁신 운동에 나섰다. 손티가 전개한 운동은 탁신에 대해 직권남용, 부정부패, 인권침해, 부도덕성 등의 비판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판에는 PTT(국영석유가스공사) 및 EGAT(태국전력공사)의 민영화, "미국-태국 FTA"의 불평등성, "수완나품 국제공항"(Suvarnabhumi Airport) 건설사업에 대한 부정부패 의혹 제기, 탁신 일가가 계속해서 "친코프"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생하는 이권개입 의혹제기 같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탁신 일가는 2006년 1월 소유하고 있던 "친코프" 주식을 매각했다. 하지만 태국 법률에 따라, 그들은 자본수익에 대한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일은 법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손티 및 그 동맹세력인 "옐로우셔츠"(PAD: 노란셔츠) 시위대, 그리고 여타 야권에서는 면세 거래는 부도덕한 일이라며 공격을 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손티와 PAD는 수개월 간의 대중집회를 개최했다.
2006년 2월, 탁신은 조기총선 요구에 부응하여 4월에 총선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야당들은 이 선거를 보이콧했고, 이후 "헌법재판소"는 4월 선거에 대해 무효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2006년 10월로 또다시 새로운 총선일정이 잡히게 되었다.
4.3. 2006년 태국 군사쿠테타
2006년 9월 19일 탁신이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에 머물고 있을 때, 육군사령관 손티 분냐랏낀(Sonthi Boonyaratglin: 1946년생) 대장이 쿠테타를 일으켜 상황장악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10월로 예정되었던 총선을 취소됐고, 군부는 <1996년 헌법>을 폐기한 후에 일부 각료들을 구금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푸미폰 국왕은 이 군사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군사정권은 탁신의 여권을 말소시켰지만, 그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군사정권이 지지한 새로운 헌법이 선포되어, 2007년 12월 23일 새로운 총선이 실시됐다. 이 총선에서 탁신에 대해 충성적인 사막 순타라웻이 이끄는 "국민의 힘 당"(PPP)이 다수당을 차지했고, 민주적 통치도 회복됐다.
4.4. 2008년 정치위기
2006년 쿠테타 이후, 태국 정치는 탁신 전 총리 지자파와 반대파로 양분되었다. 반 탁신파는 "옐로우셔츠"라고 알려진 PAD(태국 국민민주주의 연대)를 결성했고, 자신들의 상징 로고 안에 입헌군주(국왕)를 의미하는 왕관을 그려넣으면서, 탁신에 대해 국왕의 권위를 실추시키려 한 "불경한"(=대역무도한)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친 탁신파는 2006년 쿠테타 당시, 이에 반대를 하면서 "레드셔츠"로 알려진 UDD(반독재 국가민주 연합전선)를 결성했다. 이들은 군부가 제정한 헌법 폐기를 주장하며, 탁신 및 그 지지자들에 대한 사면령을 요구했다.
2007년 12월 선거에서 친 탁신 성향의 사막 순타라웻 정부가 출범하자, PAD는 새로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정부가 추진하던 헌법 개정도 반대했다. 2008년 8월 26일, PAD 시위대는 정부청사를 포함한 여러 관공소 건물들을 점거했다.(주2) 사막 총리는 사임을 거부했지만, 무력을 통한 시위해산도 시도하지 않았다.(주3) 8월 29일부터 시위대는 방송 및 철도 기반시설들을 점거하고자 했다.(주4) 9월 2일, 시위대는 최소 1명이 사망하는 사태를 발생시켰다.(주5) 사막 총리는 이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PAD 시위대 집회 및 대중매체 사용을 금지시켰다.(주6) 시위대는 9월 8일까지도 여전히 정부청사를 점거하고 있었다.(주7)
2008년 9월 9일, "태국 헌법재판소"는 사막 총리가 이권개입을 금지한 <2007년 헌법> 제267조를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사막 총리가 총리직에 있으면서, 자신이 진행하던 TV 요리쇼 사회자를 계속해서 맡아 진행하여, 경제적 이익을 봤다는 것이 판결의 이유였다. 또한 여타 장관들 역시 총리와 함께 총사퇴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판결로 인해 사막 총리가 당장 해임되는 것은 아니었고,(주8) 그를 제외한 여타 장관들은 새로운 내각이 구성될 때까지 모두 현직을 유지했다. 한편 사막 총리의 "국민의 힘 당"(PPP) 깐 티얀깨우(Karn Tienkaew, กานต์ เทียนแก้ว) 부총재는 국회 내 선거를 통해 사막 총리의 권력을 회복시킬 것이라 밝혔다. 그는 "사막은 여전히 적법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 당은 그 자신이 스스로 '노'(No)라고 하지 않는 한, 그를 복권시키는 투표를 진행 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 말고도 많은 후보자들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주9)
2008년 10월 4일 사라톤 빠딧(Sarathon Pradit) 경찰 대령이 이끄는 태국 경찰 팀이 PAD 시위 조직자 중 1인인 차이야왓 신수웡(Chaiwat Sinsuwongse, ไชยวัฒน์ สินสุวงศ์)을 체포했고, 이어 5일에는 짬렁 시므앙을 체포했다. 이와 같은 조치는 8월 27일 짬렁 및 여타 8인의 지도자들에게 발부된 사전 구속영장에 따른 것으로, 이 영장은 반란 및 모의, 불법집회, 해산명령 거부 등의 혐의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정부청사에서 농성중이던 손티 림텅꾼은 시위는 지속된다고 발표했다. 그는 "경고하는데, 당신들 정부 및 경찰은 타는 불 속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요. 만일 나를 체포한다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당신들을 요절낼거요"(주10)라고 말했다. 짬렁 시므앙의 부인 잉 시릴룩(Ying Siriluck)은 빠툼타니(Pathum Thani)에 위치한 국경순찰대 제1지구 청사로 찾아가 남편을 면회했다.(주11)(주12) 경찰은 손티는 물론, 행동주의자 국회의원 솜끼앗 퐁파이분(สมเกียรติ พงษ์ไพบูลย์, Somkiat Pongpaibul), PAD 지도자 솜삭 꼬사이숙(Somsak Kosaisuk) 및 피폽 통차이(Pibhop Dhongchai, พิภพ ธงไชย) 등에 대해서도 체포 노력을 계속했다.(주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