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칠경삼종회
 
 
 
카페 게시글
유적지 이야기 스크랩 (푸른 숲 산문)공당에 가는 길(31)중산리 달성서씨 중양서원을 찾아서
光浩 추천 0 조회 42 12.04.16 19:5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푸른 숲 산문집 Ⅱ

 

공당 가는 길

1976년 3월 1일∼

 

 

31. 중산리 달성서씨 중양서원(中陽書院)을 찾아서

 

 

                                                      푸른 숲

 

 

 오늘은 공휴일! 모처럼 지역사회를 둘러보는 날이다. 학구 내 설치된 서원을 찾아본다.

 우리나라 서원(書院)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거나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제사하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강학(講學)과 선현(先賢)의 제향(祭享)을 위하여 조선중기 이후에 사림(士林)에 의하여 향촌(鄕村)에 설립된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 운영기구였다. 서원은 제향과 강학의 기능을 가진 점에서는 관학(官學)과 차이가 없었지만 제향의 대상이 공자와 그의 제자인 성현이 아닌 선현이며, 설립의 주체가 중앙정부가 아닌 사림(士林)이고 설립의 배경이 성균관이나 향교와 같은 관학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는 경상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에 의해 1543년 순흥(順興)에 건립된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다. 백운동 서원이 자리 잡은 순흥 지역은 소백산의 산자락 속에 위치한 풍기의 이웃마을로 안향이 살았던 곳이다. 그 후 1548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백운동서원을 공인화 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에게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를 허락한 명종은 1550년 2월에 소수(紹修)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렸고, 이것은 조정에 의하여 성리학의 정통성이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서원이 갖는 중요한 기능인 선현의 봉사(奉祀)와 교화(敎化)사업을 조정이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원의 수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자 영조는 서원건립을 금지하고 사액을 일체 불허하였다. 서원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기 위한 방책으로 서원이 훼철된 것은 조선말기 고종 때 집정한 흥선대원군에 의해서이다. 대원군은 철폐령을 내리고 1871년 사액서원 중 봉향인물이 문묘종사자 및 충절대의가 뛰어난 자가 아니면서 첩설한 서원은 철향명령을 내리고 봉향자 일인일원(一人一院)의 원칙으로 전국 47개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훼철했다. 그러나 훼철된 서원 가운데 상당수가 복고적인 선비들에 의하여 다시 복설되어 현재 전국에 900여 개소가 있는데 영남권에 470개소로 50%를 점하고 특히 경북권내에 290여 개소로 많은 서원이 현존하고 있다. 서원이 설립된 장소는 존경받을 만한 선현의 일정한 연고지나 고향을 중심으로 이곳에서 사람들이 은거하여 수양하며 독서하기에 좋은 곳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하여 산수가 뛰어난 곳이다. 1550년 문헌서원(崔沖), 영천의 임고서원(鄭夢周), 함양의 남계서원(鄭汝昌) 순으로 설립되었고 동방오현으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이 문묘에 종사되었다.

 내북초등학교 학구 내에 서원이 세 군데나 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경북 영일군 동해면 중산리 달성서씨의 중양 서원(中陽書院)을 찾아본다.

 건립연도는 1794년도. 서섭(徐涉), 서시복(徐時福)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정조 18년(1794년)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며 경내 건물로는 망월문(望越門), 상충사(尙忠祠) 강당, 서재, 신문, 전사청(奠祀廳), 고작사 등이 배치되어 있다. 관리는 달성서씨 문중에서 하며, 서섭(徐涉)은 달성서씨 판서공파 파조로 세종, 문종, 단종 등 3대 임금을 모셨고 벼슬은 대호군을 거쳐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달성서씨 판서공파의 유래에 보면, 남은(南隱) 서섭(徐涉) 선생(先生)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 문신·유학자. 호는 남은(南隱)이다.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대구(大邱) 금호읍(琴湖邑) 어은(漁隱)이다. 부친 승사랑(承仕郞) 광흥창부승(廣興倉副承) 서문한(徐文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조 때 등과한 후, 문종조·단종조에 벼슬을 지냈고, 관직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세종(재위 1418∼1450)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후일 사육신의 순절을 애통해 하여 시골로 내려와 은둔생활과 후학을 기르며 여생을 보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이 김 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도로 귀양 보내자, 간신들을 물리치고 집현전 학자들을 등용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영월사변(寧越事變) 때 “문영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이라는 시를 남기고 낙향한 후, 은둔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 유림들은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중양재(中陽齋)·분양서원(汾陽書院)을 건립하고 향사를 지냈다. 또한 첨모재(瞻慕齋)와 신도비를 건립하여 그의 유지를 기렸다. 저서로 『남은선생집(南隱先生集)』2권 1책이 있다.

 서섭(徐涉)의 호는 남은(南隱),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파조(派祖)로 세종조(世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종(文宗)을 거쳐 단종(端宗)에 이르기까지 벼슬이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그는 단종초에 왕족과 간신들의 발호(跋扈)를 경계하여 착간소(斥姦疏)로 개혁을 주장하다가 유배(流配)당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호를 남애(南涯)에서 남은(南隱)으로 바꾸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도 그의 행적을 모르고 있다가 문녕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 문륙신순절감음(聞六臣殉節感吟), 재적소시시(在謫所時詩)와 여손격재(與孫格齋) 업서(業瑞), 계자손설(戒子孫說), 백형친감제문(伯兄親監祭文)들이 포함된 유고(遺稿)와 그 행장(行狀)이 1924년 그가 살던 낡은 집 친정에서 발견되어 늦게나마 그의 충절을 알게 된 후손과 유림에서 1926년 그의 묘소아래 담모재(膽慕齋)를 건립, 그를 주향(主享)하고 1994년 그의 자인 서차원(徐次元)과 아울러 두 부자를 배향(配享)하면서 유림에서 덕산서원(德山書院)으로 개칭 중건(重建)하였다. 감원(坎元)은 성종(成宗)때의 충신이며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구언상소(求言上疏)를 올려 성종(成宗)의 실정을 직담하였다가 충반위죄(忠反爲罪)로 심한 고문을 당한 직신(直臣)인데 성종실록(成宗實錄)에도 상재되어있으며 문집도 간행하였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경의사(景義祠)를 비롯하여 방 3칸, 대청 1칸의 정침외(正寢外)에 동서의 존성재(存誠齋), 구인재(求仁齋)와 남은선생(南隱先生) 신도비각(神道碑閣)이 함께 있다.

○ 달성서씨 판서공파 남은선생 휘 섭 사적 : 군신대륜은 하늘에 경이요, 땅에 의라, 만고에 뻗혀 없어지지 않는다. 석에 단종이 손위할 때에 강상(綱常)을 붙들고 의리로 항거하여 충에 죽고 절을 세움은 삼상과 육신이 동일하다. 또 생육신과 같이 자취는 다르나 의리가 같은 이 있어 육신(六臣)을 칠신(七臣)이라 해야 가할 자는 고 달성서판서(達城徐判書) 휘(諱) 섭(涉) 남은공(南隱公)이다. 공이 삼조 재상으로 단종조에 국세가 의난함을 보고 목욕 상소하니 왈 선왕이 재세할 때 집현전 제신에 하신 말씀 신도 선왕 곁에서 들었다 하고 또 주나라에 관채가 있고 한나라에 오초(吳楚)가 있다. 등어(等語)는 그 마음은 충성하나 그 말은 심히 위태하다. 이로 인하여 멀리 귀향 갔다가 세조가 천명에 응함에 공은 홍안처럼 멀리 날아 남산 아래 은거하더니 단종의 변을 듣고 백형 현감공이 또한 하양현감(河陽縣監)을 버리고 귀가하여 통울이 병이되어 몰하거늘 공이 제문(祭文)을 지어 통곡하되 조석으로 머리를 모아 말하되 생존을 도모하지 아니 하였다 하고 또 수양산(首陽山)이 어디 있나 아사(餓死)와 다름없다. 나도 곧 형을 따르리라. 하였으니 형제간에 일이 같고 마음이 같음을 볼 수 있다. 그 감절음 망경사 화견시와 손격제와의 왕복서와 계자설등제편은 시사를 통도하여 공의 뜻을 자술함이니 다 혈충을 토로한 글이다. 은나라에 세 충신이 있으니 비간은 간하다가 주왕(紂王)의 노여움을 사서 죽고 미자는 제기를 안고 발길을 돌리고 기자는 거짓 광인이 되여 종이 되니 그 일은 서로 같지 아니하나 같은 것은 마음인지라 이러므로 공자께서 은나라 삼인(三仁)이라 하시니 공이 비록 자취를 감추어 자정하였으나 그 마음은 곧 삼상과 육신의 마음이다. 오호라 세대가 멀고 언행이 인민 하여 나라의 사기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집의 보첩에도 사적이 나타나지 아니하여 문헌으로 고증할 수 없으므로 세인이 공을 알 길이 없고 자손 되는 자도 또한 조선의 덕을 알지 못하고 천양하지 못한 한탄을 면할 바 없더니 어찌 다행하게도 의곤(義坤)가에 대대로 비전해 오던 시렁위에 비밀히 간직한 묵은 상자 속에서 단란고지의 유문이 수백 년 뒤에 처음으로 나타나니 벽중의 서와 항두(航頭)의 문과 같은지라 이 또한 천명이라 하겠다. 공의 충성심과 의리가 다 이글에 있는지라. 이로서 세상에 전한 즉 옛날에 굴한 것이 금일에 피어지고 전자에 침회한 사적이 후자에 현양하리니 어찌 반드시 문적이 많아야만 하리요.

아! 황청산이 그 반드시 공의 마음을 밝게 하리라 뒤에 세조의 실기를 속편할 자는 반드시 남은공(南隱公)을 채택하여 이것을 도울 것이라. 남은(南隱)은 공의 호요,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인천채씨에 참의 륜(倫)의 따님이며, 다의당 귀하의 증손이라. 묘는 동국간좌(同局艮坐)에 있다. 사남 십사세손을 두었으니 맏에는 진원(震元), 다음에는 감원(坎元), 삼남에 간원(艮元), 끝에는 태원(兌元)이며, 증손에 시중은 문과 현감이요, 오세손(五世孫) 승준의 호는 경제며 효자로 참봉에 추천되었으며 임진난에 충익공 곽재우와 같이 의병을 일으키었으니, 이 사실이 임진록과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 斥 姦 疏(척 간 소) : 엎드려 삼가 상소 하옵니다. 신은 고금의 치와 난을 보건데 치는 요순보다 더 성함이 없고 난은 걸주보다 더 심함이 없으나 그러나 군주가 독단함이 아니요. 신하와 함께 모의하니 신하가 현량하면 모의가 선할 것이요. 신하가 불현 하면 모의가 불선 하나이다 그런고로 요순도 스스로가 요순이 아니라 군자를 친근하여 요순의 덕을 이루었고 걸주도 스스로가 걸주가 아니라, 소인을 친근하여 걸주의 악을 조장함이니 사람을 가려 직책을 임명함을 어찌 신중하지 아니하리까 옛날에 동중서가 말하되 인군이 대위를 수수하는 그사이가 심히 두렵다 하였으니 이제 전하가 즉위하시고 저 불쾌한 수삼 무리가 전하가 유충하심을 틈타서 필연한 세력을 암암 중에 잠장하고 있으니 전하는 혹 살펴 아시나이까. 고어에 말하되 크게 간사함은 충성과 같다하니 대개 충과 간은 분간하기 실로 어렵나이다. 그러나 비유컨데 경중을 알고져 할진대 먼저 저울로 달 것이요. 시와 비를 알고서 알고져 할진대 먼저 사리로 참착할 것이니 인군이 인하고 신하가 충직한 사리로 행하면 가히 군자가 누구이며 소인이 누구임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또 충신과, 간신을 인군이 대우여하에 좌우되나이다.

 석에 예양이 범중행씨를 섬겨서 간신이 되고, 지백을 섬겨서 의사가 되니 이 어찌 허언이리까 차호라 선왕이 재세하실 때 집현전제신에 말씀하시되 짐이 천추만세후라도 경들이 차아를 잘 보호하라 하시니 신이 비록 어질지 못한 사람이오나 역시 선왕 곁에서 듣고 지금 오히려 귀에 분명남아 있나이다. 엎드려 원하옵건데 집현전 제신을 심복으로 추천하고 고굉으로 총애하시면 현인은 조정에 다투어 이를 것이요. 간신은 자연 두려워 전율 할 것이니 이러한 즉 국가는 아무런 우환이 없나이다. 증자 말씀에 명주가 위에 있어 선과 악을 판시하고 예법으로 바로잡지 아니하면 백성이 어찌 금함을 알아 바른대로 돌아 가리요 하니 금일의 급무는 인당의 난동을 제지하면 천하는 거의 반석과 같이 안전 하리이다. 무릇 왕족은 비록 번신이라 하나 주나라에는 관채의 난이 있어 주공과 같은 성인이 아니면 육형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한나라에는 오초의 변란이 있어 주아부의 역량이 아니면 누가 능이 평정 하였으리까 이것을 보건데 군병도 교양하지 아니할 수 없나이다. 가사불의의 변이 있을 때 전하의 성무로 더욱 분의를 가다듬어 결단하시면 하물며 훈련한 군사가 먼저 병사의 용맹을 연습하니 누가 죽음을 맹서하고 성열에 도모하지 아니 하리까 엎드려 원 하건데 전하의 명철한 지려로 잠시도 안침하지 마시고 오직 심상에 크게 관념 하소서 어진 재상을 선임하고 양장을 택함을 선무로 하사 난을 제거하여 정으로 돌이키면 저 불쾌한 무리들도 어찌 개과하지 아니하리까. 오직 전하의 조처 좌우에 있나이다. 신은 본래 먼 시골에 미천한 사람으로 외람하게 천은을 입어 대부직에 종사한지 이미 세월이 오래 이로데, 아직 시폐를 구제하는 한 말씀도 드리지 못 하와 황공 황공하나이다. 삼가 죽음을 무릎 쓰고 천정에 들리게 하노이다.(終)

 중양서원(中陽書院)은 서원을 둘러싸고 펼쳐져 있는 고즈넉한 앞산과 그 앞을 흐르는 시냇물, 그리고 뒷산의 기운이 모아지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와 서원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서원 정문인 망월문을 들어서면 강당이 보이고 서원 안에는 선비들의 상징으로 꽃이 오래 동안 지지 않아 이름 붙여진 백일홍 나무가 서있다. 그리고 강당을 지나 한 단을 높인 곳에 상충표가 배치하여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포항에도 다수의 서원이 있지만 이 처럼 고풍스러운 정취로 찾는 이들에게 서원의 진수를 만끽하게 해주는 곳은 많지 않음으로 서원을 원형보존하고 개발하여 지역문화상품으로 발전시켜가는 지혜와 노력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푸른 숲 20120328)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12.04.16 21:22

    첫댓글 오늘(음 3월 下丁) 중양서원의 향사에 갔었는데,
    달성서씨 판서공파조인 徐 涉자 南隱公할아버지와 그 손자 時자福자할아버지와,
    증손 淙자할아버지를 모시고 배향하였음.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