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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
이훈구(연세대학교 교수)
2000년 3월 25일 TV를 켜니 부모를 토막 살해한 범인이 잡혔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범인 O석은 부모를 토막 살해하여 과천의 중앙공원, 명동의 지하철 쓰레기통 등 여러 군데에 버렸다. 범인이 완전범죄를 노렸지만 하나 실수를 했다. 부모의 사체 중에 손가락을 그대로 두고 그냥 팔만 잘라 버린 것이다. 중앙 공원에서 쓰레기 치우는 미화원이 무슨 봉투를 발견했는데 이상하게 묵직해서 풀어보니 팔뚝이 나왔다.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손가락을 가져다주어 지문조회를 하여 쉽게 사건이 들통 난 것이다.
그런데 기자들이 용의자의 형에게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동생을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범인의 형이 진술한 내용을 듣고 이 사건이 가정사의 문제이고 아동학대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
명문대 출신 부모와 명문대생 아들
O석이는 고려대학교 컴퓨터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아버지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월남전에 자원해서 무공훈장을 두 개나 받은 앞길이 촉망되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O석이의 부모는 1960년대 말에 결혼을 했다. 그때는 군인이 굉장히 인기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사관학교를 나와서 초고속 승진을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도 대기업의 부장으로 재직했다. 부모 모두 명문대를 나오고 경제력도 풍족하여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아들이 부모를 죽인 것이다. 그것도 토막 살해를 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더라도 범인은 백 번 죽어 마땅할 놈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을 조사하여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나는 형량을 많이 감해주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나는 독자들로부터 두 종류의 이 메일(e-mail)을 받았다.
하나는 책에 수록된 범인의 일기를 읽고 ‘이제 자기는 부모를 미워하지 않고 죽이지 말아야 되겠다고 결심했다.’는 내용이다. 또 한 부류는 “왜 살인범을 옹호하느냐? 당신은 학문을 위해서 아부하는 사람이다.”라고 항의했다. 직접 전화를 걸어 내가 몇 시간 동안 설득한 분도 있다.
나도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를 때리고 싶다거나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다. 내가 비록 학문적으로 아동학대의 중요성을 실감하여 범인을 이해하려고 했으나 아직 내 자신도 범인이 정말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 갈등한다.
내가 1998년에 한국심리학회 회장일 때 청소년 보호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청소년 문제에 애를 많이 쓰신 강지원 검사하고 법심리학회를 만들었다. 사실 미국에서는 심리학자가 법에 관여하는 일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법정에 자문가로 등장하는 것이다. 재판에서는 목격자의 진술이 중요하다. 그래서 목격자가 정확하게 보았는가, 목격자가 왜곡한 것이 아닌가에 대한 판정은 심리학자들이 한다. 또 범인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범행을 했느냐, 아니면 정신분열증 상태에서 했느냐를 판가름해 주는 것도 심리학자의 몫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법정에 심리학자를 동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심리학을 사회에 알리고 법정에 심리학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심리학자와 법학자들을 모아 법심리학회를 조직하였다.
법심리학회에서는 O석의 사건을 아동학대로 보고 외국의 사례를 알아보기 위해 미국 심리학회의 아동학대에 관한 최고의 권위자인 조 하딩 교수를 초빙했다. 하딩 교수의 말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존속 살해사건이 한 해에 3백 건이 발생하는데 부모가 범인을 학대한 것으로 밝혀질 경우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는다고 했다. 강의를 듣고 나서 내가 질문을 했다.
“존속 살해범이 아동피학대자로 판명된 경우 그 범인을 보호하는 것이 미국법으로 정해져 있느냐?”
“아니다. 따로 법 조항에 있는 것은 아니고 정당 방위권을 행사하면 된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아동을 학대했기 때문에 아동이 심적으로 너무 타격이 커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모를 살해한 것이라는 식의 정당방위 개념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하딩 교수는 정당방위의 개념은 상당히 포괄적이라고 했다. 부모의 아동학대를 죄악시하려면 첫째 아동학대가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조성되어 있어야 하고 또한 언론이 이것을 많이 보도해 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에서는 심리학자들이 아동학대에 대해서 많이 연구했고 매스컴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아동학대를 중요한 범죄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용기를 얻고 이 사건을 연구하게 되었다.
상사보다 더 힘든 부모
내가 O석이를 직접 만나야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교를 데리고 당시 안양교도소를 방문하여 특별면회를 신청했다. O석이가 들어오는데 키가 작고 얼굴은 상당히 앳되었다. 중류 가정에서 아무런 고생 없이 자라온 해맑은 얼굴이다. 내가 교정에서 매일 보는 어느 학생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나중에 O석이가 쓴 일기를 보니 자기는 평소에 쌀벌레를 죽일 수 없어서 병에다 그것을 키웠다 하는 얘기가 나온다.
O석이의 용모를 보고 이것은 확실히 아동학대 같아서 내가 취지를 설명했다. 내가 너를 연구하고 싶고 이것을 책으로 써야 되겠는데 거기에 동의를 해주겠느냐고 물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O석이가 어렵게 동의해 주었다.
사건이 고등법원으로 올라갔다. 존속 살인범은 가중처벌이다. 그런데 부모를 둘이나 살해했기 때문에 1심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심에서부터 아동학대라는 것이 매스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천주교 신부들이 탄원서를 쓰고 해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부모를 죽인 살인범이 무기징역을 받았다. 대법원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O석이의 형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서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 집에서 부모하고 자식들이 웃은 기억은 하나도 안 난다. 나는 IMF시절 숭실대학교에 다녔지만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될 것 같아서 대학 2학년 때 학력을 속이고 한전에 고졸사원으로 들어갔다. 대졸사원은 우대하고 고졸사원은 푸대접하고 못 살게 구는데 그래도 상사는 조금이라도 부하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가짜 애정인지는 몰라도 가끔 와서 어깨를 두드려 줄 때면 참으로 따뜻하고 기분이 좋았다. 나는 이런 조그마한 애정조차로 부모로부터 받아본 적이 없다. 동생 O석이는 더욱 그랬다. 우리 형제는 직장생활보다 더 힘든 생활을 20년 동안 해왔다.”
그의 진술이 진행되는 동안 방청석이 울음바다로 변했다.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다
내 둘째 누나가 올해로 68살이고 초등학교에서 정년을 하셨는데 그 누님의 교육방식이 O석이 부모와 대동소이하다. 내가 아이를 안아주는 것을 보고 누나가 야단을 쳤다.
“자식은 그렇게 길러서는 안 된다. 자식은 안아주고 뽀뽀해 주면 안 되는 것이다. 자식은 단호하게 길러야 한다.”
사실 우리가 부모 밑에서 그렇게 자라왔다. 나도 아마 자녀에게 상당히 엄했던 것 같고 내가 O석이의 일기를 읽으면서 나 자신의 교육방법을 반성했다.
그가 쓴 일기에는 삐삐 얘기가 나온다.
O석이는 고려대 컴퓨터학과의 재학생으로 장래가 촉망되고 얼굴도 미남이었다. 자연 여학생들이 관심을 보였고 이성교제도 했다. 여자친구와 연락하려면 삐삐가 있어야 한다. 삐삐를 개통하려면 5만원이면 되는데 O석이의 아버지는 그것을 안 사줬다.
아버지는 전화가 있는데 삐삐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한다. 친구들의 90%는 삐삐를 갖고 있다. 그런데 나는 없다. 친구들과 대화를 할 수가 없다. 나는 왕따다.
나는 O석의 일기 21권, 아버지의 일기, 어머니의 수첩을 인계 받아서 1년간 연구에 들어갔다. 그 일기는 사건 전에 쓴 것이니 확실한 증거 자료이다. 나는 O석이의 일기에 처음부터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불만 내용이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나오지 않는다. 부모에 대한 원망은 그가 대학 2년 휴학 후, 군에 갔을 때부터다.
친구들이 부럽다. 친구들은 휴가 가면 집에서 왕 노릇을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찬밥이다. 아버지는 느리다고 굼벵이, 엄마는 키가 작다고 좀팽이라고 놀린다. 나는 지금도 집에 가면 부모 눈치를 슬슬 본다.
이때부터 부모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나오다 제대를 하고 나서 두 달 후의 일기에는 ‘심판’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자기가 받은 21가지의 학대 사실을 기록했다. 그 기록을 보면 O석이 어머니는 벌을 좀 심하게 줬다. O석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지만 겨울에 옷을 홀랑 벗겨 베란다에서 세워두기도 하고 말을 제대로 안 한다고 밥 먹다가 젓가락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또 성적이 나쁘다고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매를 들기도 했다. 물론 이런 것은 자녀 훈육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깔려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체벌을 가하는 것은 자녀가 이해를 하기 때문이다. 나도 아버지가 엄했지만 어머니가 감싸주시고 자애로운 분인 줄 알기 때문에 견디어 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O석의 경우는 처음부터 부모의 애정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벌을 가하면 가슴에 맺힌다.
애정결핍은 평생 간다
어린 시절 부모의 애착은 자녀의 성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하로와 수오미라는 두 심리학자가 막 태어난 원숭이를 가지고 실험을 했다 그들은 두 마리 모조 원숭이를 만들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든 원숭이이고 다른 하나는 우단으로 만든 원숭이였다. 철사원숭이에게는 우유병을 들려주었다. 새끼 원숭이를 굶겼다가 모조 원숭이 있는 데로 보내면 어디로 가겠는가? 배가 고프니 우유가 있는 철사 원숭이에게 갈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단으로 만든 모조 원숭이에게 먼저 간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원숭이조차도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우유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O석이 어머니는 그런 애정표현을 못했다.
O석이 어머니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어머니가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다. 특히 O석이의 아버지는 심했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다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속으로는 아내와 자식을 위하면서도 아내와 자식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안 한다. 이 부부는 성격이 맞지 않아서 각 방을 쓰고 불화했지만 이혼은 안 했다.
내 책의 2/3는 O석의 것이다. O석이의 일기는 그대로가 다 명문이다. 나도 글 잘 쓰는 교수로 정평이 나있다. 그러나 O석의 글은 나보다 더 잘 썼다. O석이가 글을 잘 쓰게 된 것은 어머니의 스파르타식 교육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외국의 유명한 문학작품전집을 안겨 주면서 3일에 한 권씩 읽으라고 엄명을 내렸다. 형은 책 읽는 것보다 매를 맞는다고 버텼다. 그러다 보니 매일 형과 엄마가 싸운다. 엄마는 아버지하고도 싸우고 형하고도 싸우니 자신만이라도 충직한 아들이 되자고 해서 엄마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40권의 문학 작품을 다 읽고 나니까 그의 문장력이 보통 수준을 넘은 것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아내가 문학전집 20권을 사서 딸아이에게 읽으라고 책장에 넣어주었더니 엄두가 안 나서 한권도 제대로 못 읽는 걸 봤다. 그것은 왜 그런가? 뷔페음식 잘 먹는 방법과 같은 이치다. 뷔페식당에 가면 접시에 가득 음식을 담아온다. 그러면 제대로 못 먹는다. 잘 먹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조금씩 덜어다가 먹고 조금 쉬었다가 또 가져다 먹는다. 자식에게 문학작품 40권을 안겨주면 그것은 접시에다가 음식을 잔뜩 쌓아놓고 먹어치우라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O석이에게는 스파르타식 교육이 효과가 있었는지 문장력이 아주 좋다.
자식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서 큰 우주를 형성할 수도 있고 작은 돌멩이로도 만들 수 있다. O석이는 사실 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 가려면 논술준비를 해야 되는데 한 달 동안 논술공부 하기가 싫어서 고려대 특차로 간 것이다. 만약에 O석이가 논술고사를 준비 하나도 안하고 놀다 서울대학 논술고사를 치렀어도 합격했을 것이다. 그만큼 논리적이고 문장력이 좋았다.
영부인이 되고 싶었던 어머니
O석이의 외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셨다. O석이의 외할아버지는 사업을 하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많은 유산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O석이 외할머니는 60년대에 고명딸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미술 과외를 시켰다. 60년대에 피아노를 사주고 미술 과외를 시켰다는 것은 웬만한 재력이나 자녀에 대한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딸의 등하교길에 동행할 정도로 엄한 교육을 시켰다. O석이의 어머니 황여사의 꿈은 한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화여대에 진학하면서 자신의 꿈이 현실화되는 게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황여사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지 못하면 영부인이라도 되자는 것이었다. 군인 중에서 남편감을 골랐고 자기하고 10살 차이인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다. 남편은 해군 출신의 소령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 온 생활환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황여사와 남편은 가정불화가 시작되었다. 황여사는 돈 많은 청상과부가 금지옥엽으로 키운 고명딸이고 이화여대 정외과를 나온 재원이다. 남편은 4남 1녀 중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가 사업을 했지만 큰형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을 한다는 이유로 재산을 축내기 시작했다. 이때 아버지가 큰아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끊었어야 됐는데 계속 지원했다. 그러나 O석이 아버지인 둘째 아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또 O석이 아버지는 내성적이었다. 그래서 O석이 아버지는 성장기에 방에서 나온 적이 없다고 한다.
환경주의자들은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는데 요즘은 반은 환경론, 반은 유전론이다. 여러분 자녀 중에서도 여러분을 닮아서 아주 호탕한 자녀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자녀도 있을 것이다. O석의 아버지가 그랬고 따라서 그의 아버지와 갈등이 좀 있었다. 그런데 O석이 아버지가 대학에 들어갈 때쯤 집안이 아주 어려웠다. 그래서 고졸사원으로 태평양화학에 입사를 했는데 거기서 열심히 일을 하니까 상사가 잘 돌보아주었다.
그러나 그는 고졸사원으로 여기 있다가는 비전이 없을 것 같아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그래서 자기가 자수성가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고 자식들한테 그것을 항상 자랑한다. 사실 자수성가한 사람은 좋은 성격도 있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가 무엇이든 해결했기 때문에 자신만만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부모로부터 냉대를 받고 자수성가 한 사람과 아주 여리고 여린 이대 정외과를 나온 부부가 합쳐졌을 때에 화합하기가 어려웠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황여사의 일기를 보면 황여사가 남편에게 순종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자기 잘못으로 여기고 남편한테 졌는데 그 이유는 이런 것도 있었다. 황여사는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사위와 장모 사이가 안 좋다. 사위가 장모한테 인사하는 것을 못 보았다고 한다. 다행히 그가 월남전에 참전했고 일선 근무로 외지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갈등은 표면화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부부가 냉기를 갖게 된 것은 대령 진급에 실패하고부터다. O석의 아버지가 대령 진급에서 몇 번 누락되자 황여사가 인사 청탁을 하자는 귀띔을 했는데 O석이의 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했다.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어서 일거에 거절하여 결국 중령으로 예편하고 학훈단장 조금 하다 기업체의 부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래서 황여사는 인생의 살맛을 완전히 잃게 된다.
남편이 딱딱하고 정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가 출세해서 대통령이 되면 자기 일생의 꿈을 펼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순종하였는데 중도에서 전역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집에 와서까지 군대식으로 가족을 다뤘다. 군대식 요리방법을 적어 놓고 그런 식으로 해 달라는 주문도 했다. 거실에서 슬리퍼를 신고 다니라고 명령하고 머리카락이 하나 떨어지면 누구 것인가를 확인해서 혼을 냈다. 가족들의 숨을 막히게 했다.
남편이 출세도 못하고 군인정신도 버리지 못하여 가족들을 피곤하게 하니까 이때부터 황여사는 종교에 의존하게 된다. 신학대학에 들어가 전도사 자격증을 따지만 자연히 가정살림은 소홀히 한다. 남편에 대한 좌절과 분노를 자식에게 터뜨린다. 엄마의 잔소리에 형은 대학교 들어간 다음에 가출해서 친구 집에 가서 살고 집에 남아있는 O석이가 엄마의 괴롭힘을 두 배로 받는다.
키가 작으니까 판검사밖에 할 것이 없다
O석이는 고등학교 생활도 불행했다. 중요한 것인데 O석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수음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O석이의 초등학교 일기에는 달력을 손수 그려 X표를 친 게 있었다. O석이에게 ‘달력의 X표가 뭐냐?’고 묻자 머리를 극적이며 수음한 표시하고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키가 163㎝로 큰 편에 속했다. 그런데 그때 자기와 키가 같았던 손석찬(가명)이가 중고등학교 합쳐서 4년 동안 같은 반이었는데 갑자기 폭발적으로 자라기 시작해서 키가 183㎝에 체중이 80㎏이나 되는 거구가 되어 버린다. O석이는 그 녀석을 만나면 쥐구멍을 찾는다. 손척찬이 O석이 목을 쥐고 “애는 내 원숭이 새끼다. 옛날에는 키가 같았는데 지금은 내가 거머쥐고 다닌다.”고 떠벌였다. 그러면 친구들이 O석이에게 “원숭아, 울어봐라.”하고 놀렸다.
O석이가 키에 대해서 이처럼 강박관념을 갖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자기가 3일에 한 번씩 하는 수음 때문에 키가 안 자랐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수음을 해서 저주를 받아 키가 자라지 않았다고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O석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O석이 너는 키가 163㎝이니 사회 나가서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너는 행동도 그렇게 굼벵이니 고시에 합격해서 판검사가 되거나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지 않으면 할 것이 없다.”
나는 O석이의 아버지가 좋은 뜻으로 위와 같은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O석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알아주는 학교이다. 서울대학교에 몇 십 명씩 들어가는 학교에서 O석이는 전교 4등을 놓쳐 본 적이 없다. 공부 잘 하는 것을 아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법대 가면 아버지가 기쁘겠다고 말하면 좋을 것을 방법이 서툴러서 그런 것인지 “키가 작으니까 판검사밖에 할 것이 없다.”라고 모멸감을 준 것이다. 가뜩이나 수음 때문에 키에 대해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던 O석이는 아버지까지 그런 얘기를 하니까 자기는 여자하고 데이트로 못할 사람으로 자신을 낙인찍는다. O석이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한 말이지만 결과는 자식에게 상처만 주고 만 것이다.
O석이가 부모를 살해한 결정적인 원인은 부모와 처음으로 대판 싸웠기 때문이다. 부모는 그의 형이 오래 전부터 가출하여 동가식서가숙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집근처에 아파트를 얻어주었다. O석이가 형의 이삿짐을 도와주고 집에 돌아왔지만 그는 사실 기분이 착잡했다. 평소 부모가 못마땅하게 생각한 형은 독립시켜 이제 자기만 집에서 부모의 잔소리를 독차지하게 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분을 눈치 채지l 못하고 어머니는 O석에게 형의 이사가 잘 되는가를 꼬치꼬치 물었다. 드디어 화가 폭발한 O석이는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반항한다. 왜 형만 위해주고 자기한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느냐고 따지고 옛날 부모가 자기를 심하게 다룬 것을 불평한다. 이때 어머니가 “그런 일이 있었냐?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했으면 O석은 마음을 가라앉혔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생사람 잡는다고 펄쩍 뛰었고 그날 저녁 남편에게 이를 고해 바쳤다. 그 다음날 아버지가 O석을 불러 다시 크게 야단쳤음은 물론이다.
생애 처음으로 부모와 맞서고 이것이 잘 해결되지 않는 것이 큰 불행을 자초했다. O석이 부모가 아들의 마음을 헤아려 조용히 그를 다시 불러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화 부족이 이 가정의 또 다른 문제였다.
지금 바로 자녀와 대화하자
자녀 양육의 가장 핵심은 사랑, 처벌, 대화이다. 유치원 교사를 대상으로 애들의 심적 능력이 가장 우수한 A집단, 중간정도 가는 B집단, 제일 하류인 C집단을 분류하고 그 집단의 어머니를 만나서 가정교육을 관찰했다.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C집단은 사랑만 하고 처벌을 안 하는 집단이다. 사랑만 하면 아이 버린다는 것이 C집단의 경우에서 나타난다. B집단은 대화도 안 하고 사랑도 안 주고 처벌만 하는 집단이다. 이것이 O석 부모의 집단이다. O석 부모의 스파르타식 교육에서 오는 장점은 있다. 아이의 머리가 명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텅 비었다. 사랑을 못 느끼고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람과 어울리지 못한다. A집단은 이 세 가지를 골고루 다 섞어 가정교육을 하는 집단이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사랑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정말로 사랑했는지, 안 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도 사람인 이상 모든 자녀에게 똑같이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 나는 8남매 중 가운데로 태어났다. 부모가 8명에게 골고루 사랑을 나누어주기는 불가능하고 그래서 편애를 한 경우가 있다. 여러분들도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
두 번째는 처벌인데 잘못하면 야단쳐야 한다. 그러나 요즘은 우리 사회의 교육이 어디로 가는가 할 정도로 문제이다. 대학입시 때문에 부모들이 자녀가 고 1만 되면 자녀들을 왕으로 떠받든다. 공부하느라고 애쓰는 애 앞에서 부모들이 기가 죽어 숨소리도 못 낸다. 그러다 자식이 공부를 잘 하고 일류대학을 가면 부모가 만족한다. 그런 과정에서 애들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 갈 것인가? 일류대학 다닌다고 자기 자신만 알고 사람 위할 줄 모른다. 돈만 알고 권력만 아는 사람으로 키워내는 교육이 지금 우리의 중고등학교 교육이다.
정주영 회장이 일류 서울대학교를 나왔는가? 초등학교를 나왔다. 사실 일류 대학 나와 회사 회장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일류대학 나온 사람은 남의 회사에 가서 참모 역할은 하지만 정주영 같은 배짱 있는 사람은 못 된다. 우리나라 교육이 잘못 되어도 한없이 잘못된 것이다.
기성세대는 컴퓨터를 못해 고생할 정도로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그만큼 달라진 아들의 정신세계, 심리세계를 부모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부모가 우리에게 해 온 가정교육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우리의 가치관과 생각이 바뀌는 것은 쉽지가 않다.
<푸른 화원>이라는 영화가 있다. 아주 어려운 가정이지만 부모가 다정하게 자식과 더불어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훈훈한 영화다. 그 영화를 내가 중학교 때에 형하고 둘이 가서 보고 감명을 받았다. 세상에 저런 아버지가 있는가? 우리 아버지와는 전혀 다르다. 극장 문을 나오면서 우리 아빠는 왜 그러냐고 했더니 형이 벌써 눈치 채고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라고 했다.
형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좀 많이 받았다. 우리 가정 내력을 얘기하면 어머니는 딸 넷을 낳고 형이 태어나서 어머니의 입지를 공고하게 해 주었다. 그러니까 형은 태어나자마자 축복받은 인생이다. 그런데 다음에 내가 태어났는데 나는 찬밥이었다. 형은 잘 나갔다. 초중등 시절에 반장을 놓친 적이 없고 명문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관직에서 성공했다.
68세 된 둘째 누나가 최근에 이 책을 읽고 이런 얘기를 했다.
“나도 아버지한테 찬밥 신세였다. 아버지가 큰누나만 사랑하고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아버지 관심을 끌려고 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그때 우리 집은 큰 사무실이 있고 안채가 있었던 집이었다. 누나가 초등학교 때 걸레질을 열심히 하면 아버지가 칭찬해 줄 것으로 생각했단다. 그래서 아버지가 계실 때를 택해서 매일 가서 걸레로 닦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칭찬 한 마디도 안 하더라고 하여UT다. 어머니는 참 좋은 분이셨다. 어머니가 그렇게 좋았기 때문에 우리 8남매가 좋게 풀렸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어머니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자녀와 대화를 하자, 실은 나도 자녀와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자녀와 대화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설 연휴 때 아들을 데리고 등산 하면서 느꼈다. 아들은 서울에서 가까운 대학에 갔다가 편입시험을 쳐서 지금은 성균관대에서 수학이라는 기초학문을 하고 있다.
“나는 네가 연세대학교에 들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네가 성균관대학교를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금은 수학을 박대하지만 10년 안에 수학자를 우대할 것이다.”
아들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늘 마음 한 켠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이 하는 학문에 대해 인정해주어서 희망과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 그 대화를 하지 않았다면 아들은 무거운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내가 1959년도에 심리학과에 간다고 하니까 제일 먼저 형이 반대하였다. 아버지가 반대하는 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니까 당연히 받아들였지만 법대 다니는 형이 반대를 했다. 그래서 섭섭했는데 그때 심리학과 안 보내려 했던 이유는 심리학과를 졸업해서는 취직도 못하고 별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심리학과를 갔기 때문에 심리학계에서 그나마 알려진 교수로 지내지 다른데 갔더라면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심리학이 재미있었고 다시 태어나도 심리학을 공부할 것이다.
교육은 장기 마라톤
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여러분들은 연세대학교에 들어와 날개를 달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여러분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지적능력은 삼류대학교 학생들과 똑같다. 여러분들이 수능고사에서 30점, 50점, 100점 더 받았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 ․ 고등학교 때 달달 외웠던 것은 우리 실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장거리 마라톤에 나서는데 지금부터 공부하는 사람들은 4년 동안 천지 차이가 날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연세대 심리학과라고 하면 문과대학에서 영문과 다음으로 높다. 학생들의 영어 실력은 4학년이 되면 다 까먹어 1학년보다도 떨어진다. 중 ․ 고등학교 때 하기 싫은 공부를 스파르타식으로 하니까 이제는 공부라는 것은 진절머리가 나는 것이다.
야후회사를 창립한 제리양(Jerry Yang)의 자서전을 보면 자기가 책을 5천권 읽었다고 한다. 야후는 인터넷 회사로 세계 재벌이 되었다.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 여러분들 자녀가 교과서 빼 놓고 책을 몇 권 읽는지 한번 알아보라. 아마 10권 미만일 것이다.
대학교 들어가서 자기 돈 내고 책 사본 애가 얼마나 있는가 알아보자.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학생들의 능력은 하버드대, 예일대에 못지않다. 그러나 결코 하버드대, 예일대를 따라갈 수 없다. 우리 애들은 초중등시절에 이미 지적 호기심을 싹둑 잘라 버렸다. 책이라면 진절머리가 나도록 달달 외우게 했다.
여러분들은 나의 자녀 교육방법에서 어떤 시사점을 받을 수 있다. 내 딸도 지방대학에 갔다. 나는 자식들을 몰아세우지는 않았다. 나는 O석이 엄마처럼 자녀가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진학했다고 해서 자신의 꿈이 실현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자식이 연세대학에 들어오면 자랑스럽다. 동료들의 자녀가 연세대학 들어오는데 내 자식은 못 들어오니 창피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자식들에게 좌절을 주지는 않는다.
“공부는 대학교 가서부터 해야 되는 것이다.”
나의 말에 딸도 용기를 가졌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으로 편입하고 지금은 미국의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MBA과정을 밟고 있다. 교육은 장기 마라톤이다. 단거리 100m 뛰어서 서울대학, 연세대학 들어왔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계속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매진하는 것이 인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