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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행복 선언 - (2)
마 5:1-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
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
희 것임이요...
새해가 되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송구영신 예배 때 제출한 새해 기도제목을 보니까 첫 번째가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복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여러분들은 지금 아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복의 내용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나오는 복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복입니다. 쌓을 곳이 없도록 주지 않으시나 보라고 말씀하셨고, 떡 반죽 그릇에도, 우양의 새끼에게도, 실과에도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모두가 눈에 보이는 복입니다. 뿐만 아니고 저주도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땅이 갈라져서 저주가 임하고, 나병이 발병하는 등 모두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저주입니다. 그래서 때로 오해의 소지도 많습니다. 실제로 보수신앙에서 그리고 권위적 신앙형태를 가지고 있는 신앙인들은 이를 율법적으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신약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은 오해의 소지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대부분 영생, 구원, 자녀됨, 구속, 천국 등의 영적인 복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이 진정한 복이고 복중의 복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이 이 영적인 복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어거스틴이 회심한 후 마태복음을 읽습니다. 그리고 주석을 썼습니다. 그때 마태복음 5-7장까지의 말씀의 제목을 산상수훈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말씀을 산상수훈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산상은 갈릴리 해변의 언덕을 말합니다. 또한 수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에 대한 핵심을 제시하셨다 해서 이를 수훈 또는 보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산상수훈의 말씀속서 우리에게 한 가지 당부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천국 시민정신을 압축하고 집약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산상수훈에서 먼저 팔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서신서는 먼저 앞부분에서 교리를 말씀하고 그 뒤에 실천부분을 언급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그런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산상수훈에서 먼저 제시된 팔복은 교리이고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내오는 내용들은 모두 실천내용들 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 복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진정한 복은 “여덟 가지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을 팔복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어떤 사람이 이 팔복을 누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팔복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천국
첫째는 천국입니다. 3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복 중의 복은 “천국을 얻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을 헬라어로 “바실레이야”라고 하는데 그 말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즉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 나라가 세 곳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천국은 에덴동산입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계셨던 곳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지키지 못하여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천국은 내 마음입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은 지금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내 마음에 계시면 내 마음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 안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가정과 삶의 터전이 주님이 함께 계시는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세 번째 천국은 앞으로 주어질 내세적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복은 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이 천국화 되어야 합니다. 내 집이, 마음이, 환경이, 교회가, 나라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적으로 세상에서도 이 천국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또한 그 다음에 주어지는 천국을 소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천국 때문에 순교하였고 고난도 달게 받았습니다. 사도바울도 수고하고 고난 받고 온갖 위험을 다 감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대하였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이 천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천국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값없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 천국에 갔습니다. 천사가 조사해 보니 그 사람에게는 선한 기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어떻게 왔냐고 물었더니 방금 전에 선한 일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길을 가는데 어느 여성이 불량배들에게 에워싸여 시달리는 것을 보고 자신이 가서 막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량배들로부터 뭇매를 맞아 실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보시다시피 그 때문에 5분전에 여기 오게 되었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스갯소리입니다. 천국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설명해야 할 부분이지만 예수님이 제시한 복중에 첫 번째 복은 바로 천국입니다.
위로 받음
두 번째는 위로받음의 복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곁으로”라는 뜻과 “부른다”는 뜻의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위로라는 말은 “내 곁에 오셔서 나를 부르심”이라는 뜻이 됩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서 브엘세바로 도망가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일어나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위로받음입니다. 야곱이 형을 피하여 도망하는 중에 광야에서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그 밤은 두려운 밤이었습니다. 들짐승이나 강도떼의 위협에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위로하시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낙심하며 살던 어느 날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불로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가서 고통 받는 민족을 구원하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모두 위로받음 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기 위함이라고(눅 2:25) 하셨고 성령님이 오신 목적도 위로 때문(요 14:16)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이 위로가 참 중요합니다. 아이들도 위로가 필요하고 어른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위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목회할 때 교회가 불화하고 갈등과 파벌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그 말은 오늘날로 말하면 금식기도원에 갔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갈등이 심했으면 사도바울 같은 능력 있는 사도가 그랬겠습니까? 바울은 기도원에 가서 의기소침해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고린도교회에서 청년회장인 디도를 위로자로 파견했습니다. 디도는 사도바울이 전도한 사람으로 오늘로 말하자면 청년회장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도바울이 디도가 옴으로 인해 화평을 얻었다고 좋아합니다. 그 위대한 사도바울이 일개 청년회장이 와서 위로하는 위로 한마디에 그렇게 좋아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위로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래서 성경에는 말씀하기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위로는 공감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마음에 공감을 일으키고 소통을 일으킵니다. 그 공감은 아픔과 갈등을 치유하고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안개를 걷히게 합니다. 또한 무거운 현실을 걷고 일어나 치유 받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위로자가 되어야 하고 또한 위로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위에서 자살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여인 하나가 난간 위로 올라가 시위를 했습니다. 누구든 올라오면 뛰어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여경이 상대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머리를 풀고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나도 여자다. 당신에게 말해줄 것 있다”라며 가까이 다가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날 두고 시집을 가셨다. 그래서 나는 고아원에서, 남의 집에서 일하며 자랐다. 나도 자살을 여러 번 시도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실패했다.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더라. 그래서 그때 생각한 것이 ‘죽느니 그 힘으로 차라리 살아보자’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여 오늘 여경이 되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여경의 이야기를 다 들은 여인은 여경을 따라 순순히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것이 공감이고 위로입니다. 이런 공감과 위로가 있을 때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같은 처지, 같은 입장의 사람을 만나면 금방 가까워지고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시험에 떨어져 낙심한 사람을 위로하려면 삼수생이 가야 제격입니다. 콩나물 장수를 전도하려면 생선가게 주인이 가야 합니다. 밍크코트 입고 가서 전도하면 눈도 안 마주칩니다. 암환자에게는 암을 고침 받은 사람이 가야 합니다. 교도소는 전과자로 개과천선한 사람이 가서 전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다미엔 신부가 하와이 몰로카 섬에 가서 나병환자들을 상대로 선교를 하는데 어떤 일을 해도 그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미엔 신부는 자신의 몸에 스스로 병균을 넣어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때서야 나병환자들 모두가 마음을 열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최고의 복은 위로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입니다. 그것은 큰 선물이고 큰 복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3일 주야를 더 달려갔습니다. 야곱은 환상 중에 위로를 받고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다시 그곳에 돌아와 정착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으십시오. 예수님은 그 위로받음이 최고의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업 받음
다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에는 땅이라는 말이 45회나 등장합니다. 여기서 땅은 헬라어로 “게”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상에서의 땅입니다. 이는 가나안과 같은 땅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천상의 땅으로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 말씀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땅은 변치 않는 영원한 유산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3대 복이 있었는데 넓은 땅과 많은 자손과 복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땅이 꼭 포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고향에서 이끌어 내실 때에 이 복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430년 동안 익숙하게 애굽에서 살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실 때에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소망하며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이처럼 땅은 사람들에게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강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게 마련인데 주님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역설을 많이 말씀합니다. 이 땅은 세상의 땅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나안 땅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계시록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합니다. 이는 종말 때 주어질 땅 곧 천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그 땅을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팔복에서 첫 번째, 세 번째, 여덟 번째 복을 천국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배부름
네 번째 복은 배부름의 복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부름이 복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아이나 배가 부르면 다 너그러워집니다. 여기에서 배부름은 목동이 양을 몰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먹여서 양들이 배부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목자 되신 예수께서 성도들을 생명수와 하늘의 양식으로 채워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영혼의 만족함과 평안함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완벽한 영혼의 만족함이고 배부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배부름은 의의 배부름입니다. 이 의에 배부름은 많이 먹어서, 횡재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뜻대로 살면 수지도 칭찬도 횡재도 없습니다. 오히려 핍박과 조롱과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면 핍박이 주어지지만 내 안에는 감사와 기쁨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의의 배부름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는 예수님 일행이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찬미하며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찬미하실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찬미가 나온 것이나 행전 13:52절의 바울 일행이 버가에서 전도하다 온갖 방해를 받고 동네를 떠날 때 기쁨이 충만하였다는 것 모두 의의 배부름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 가다가 돈뭉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로 파출소에 가서 주인을 찾아 주라고 맡겼습니다. 한편으로 마음의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돈을 주인에게 찾아주었을 때의 마음의 기쁨은 더 큽니다. 내 손에서 돈뭉치가 빠져 나갔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한 기쁨과 행복감 그리고 만족감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한 일을, 선한 삶을 살아가고 때로 희생도 순교도 발생하고 의사도 열사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역무원이 기차가 오는 줄도 모르고 철길을 건너가던 아이들을 긴급히 구조하고 자신은 두 다리가 절단되었습니다. 그는 의족을 끼운 채 다시 역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다리를 가지고 일할 때보다 오늘 의족을 가지고 일할 때가 훨씬 더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다리가 절단되었으나 내 마음에는 행복감이, 의를 이루었다는 보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의로 배부름입니다. 노인학교에서 뱃놀이를 갔습니다. 할머니 한분이 배에서 중심을 잃고 바닷물에 빠졌습니다. 그때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 할머니를 구해 올라왔습니다.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배에 올라오시더니 크게 소리쳤습니다. “누가 내 등을 떼밀었어?” 비록 타의에 의해서 바다로 뛰어 들었다 해도 그 할아버지는 어깨가 으쓱해질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의의 배부름입니다. 예수님은 이 복을 네 번째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