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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글]
소설 아리랑[조정래 작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조정래 소설 ‘아리랑’의 공간은 한일합방 무렵의 김제 만경평야에서부터 시작해서 일제 수탈기의 군산항구, 하와이, 일본, 만주, 연해주, 중국 본토, 중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민족 수난과 투쟁의 현장들을 모두 다 섭렵하고 있다.
조정래의 르포 근성은 악착스러운 바 있다.
그가 소설 속에서 제시하고 있는 진실은 기본적으로 사실의 힘에 바탕하고 있다.
역사인식과 상상력이 사실을 재조립한다.
그는 사실의 편이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고발사건(국가보안법 위반 및 명예훼손)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이 조정래에게 요구한 반증 자료는 80개 항목이다.
조정래는 작년(2009년 9월 22일) 이 80개 항목에 대한 반증자료를 모두 제출했다.
자료는 한 보따리에 달했다.
이 반증자료들은 모두 다 그의 악착스런 르포근성의 결과이다.
이 ‘문학기행’은 ‘아리랑’의 모든 공간을 추적하지 못한다.
소설의 발원지인 전북 김제평야와 군산항구 만을 다녀왔다.
김제평야는 한반도 수리도작농업의 성지(聖地)이다.
옛 마한(馬韓)의 저수지 벽골제는 지금은 들판 한가운데에서 수문 돌기둥이 남아있고, 돌기둥 너머는 지평선이다.
소설 ‘아리랑’의 도입부는 이 수천년의 도작농업사회가 식민지로 편입되는 과정이다.
수많은 김제평야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떠났고, 더 많은 사람들은 식민지가 되어버린 평야에 남아서, 소설 속으로 풍요로운 등장인물들을 배출시킨다.
김제 사람들은 ‘아리랑’의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핵심을 이룬다.
싸우는 아나키스트 지식인 송수익과 머슴 출신 독립군 대장 지삼출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들의 고향은 모두 김제평야이고, 그들의 이념적 색깔의 편차에 관계없이 그들의 목표는 평야의 회복이었다.
김제에서는 사람의 눈앞에 아무 것도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는, 크고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사람의 시선은 모처럼 방해받지 않는 호사를 누리게 되는데, 크고 넓은 삶의 풍경을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의 시선은 이 평야의 넓이를 결국은 감당하기 어렵다.
이 넓이는 바다나 하늘이나, 황무지가 아니라 인간의 땀과 눈물로 가득 찬 삶의 들판이기 때문이다.
김제평야는 지평선이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지평선까지 가득한 삶이며 노동이다.
소설 ‘아리랑’과 함께 김제평야에 서면, 논에 모 한 포기 꽂는 일이 곧 역사임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는 공산주의에서 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념과 행동노선의 편차로 분열되지만, 그 많은 노선들은 결국 다시 민족의 운명을 지향한다.
그래서 ‘아리랑’ 속의 민족주의는 현실을 설명하고 미래를 가리키는 여러 사상과 노선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 모든 노선들의 역사적 바탕이며 공통된 지향성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단순하고도 치열한 삶의 본능이며, 그 본능의 정당성이다.
단재의 민족주의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 단순성은 여러 갈래의 노선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포용성을 갖는다.
‘아리랑’의 민족주의는 김제평야에서 발원한다. 김제평야는 그 단순성의 깊이와 포괄성의 넓이로 한없이 넓고 깊다.
군산항은 1899년 5월에 개항되었다.
군산항은 개항 직후부터 호남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내는 수탈항구로서 급속도로 팽창했다.
군산은 식민지 근대의 핵심부로 휘황찬란했고 초기 자본주의의 새 풍속과 새 문물로 발랄하게 들떠 있었다.
전주와 군산 간에는 벚나무 가로수로 유명한 전군가도가 뚫렸고, 군산항 선착장에까지 쌀을 실어 나르는 철도가 연결되었다.
김제평야의 몰락 위에서 군산은 번창했고, 그 식민지의 항구는 초기 자본주의의 꽃이었다.
증권시장이 최초로 개설되었고 돈만 주면 지위를 따지지 않고 태워주는 인력거가 등장했다.
소설 속에서, 역사와 인물은 군산에서 유전(流轉)한다.
김제평야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군산으로 몰려들고, 군산에서부터 다시 하와이, 간도, 연해주로 내몰린다.
내몰리는 사람에게 군산은 마지막 땅이지만, 쫓겨간 땅에서 새로운 수난과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는 출발의 땅이기도 하다.
군산항 선착장에는 김제평야의 쌀을 실어내던 식민지의 철로가 지금 잡초 속에서 녹슬어있고, 그 철길 옆으로는 배라크처럼 지은 미곡창고 몇 동과 1908년에 지는 서양식 군산세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벨기에산 적벽돌로 지은 이 건물은 서울의 한국은행 본점이나 서울역 건물과 같은 양식이다.
김제시 죽산면에는 일본인 대지주 하시모도의 집과 그의 송덕비도 남아있다.
이것은 한반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기념물일 것이다.
그 기념물들은 한반도의 현재의 의미를 묻고 있는듯 했다.
‘아리랑’ 전 12권은 8·15 해방으로 끝난다.
이 8·15 해방에는 만세소리가 없다.
‘아리랑’의 마지막 장면인 8·15는 적막하다.
왜 그런가. 아마도 저 20세기의 기념물이 거기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리랑' 줄거리
‘아리랑’은 12권의 대하소설이다.
한일합방 직전부터 8·15 광복까지가 시대 배경이고 김제 만경평야, 군산항구에서부터 하와이, 만주, 중앙아시아, 소만국경 등 한국 유민(流民)과 저항세력들의 발길이 닿았던 많은 지역들이 이 대하소설의 공간이다.
전 4부로 구성된 이 소설의 각 부별 골격은 다음과 같다.
제1부
김제의 소작농 방영근은 빚 20원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간다.
친일파 백종두는 일진회 군산지부장이 되고 진보적 지식인 송수익은 의병투쟁에 나선다.
토지조사사업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자 수많은 농민들은 졸지에 땅을 빼앗기고 산발적 시위에 가담했던 농민들은 총살당하거나 징역을 산다.
제2부
하와이에서는 거류민 조직이 결성되고 3·1운동이 일어나고, 만주에서는 여려 계파의 단체들이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등 한민족의 대반격이 시작된다.
송수익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대장이 되고, 대종교에 입신(入信)한다.
그 당시 재만 민족주의 진영 항일무력의 주력은 대종교의 지도력 밑에 있었다.
방영근의 동생 방대근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토벌대는 재만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방영근의 어머니 감골댁은 이때 살해된다.
한편 김제평야에서는 하시모도가 죽산면의 농토를 반 이상 차지한다.
제3부
관동대지진으로 재일 한국인들은 무참하게 살해된다.
국내외에서 공산주의 운동은 다양한 이념의 갈래를 보이며 항일운동으로 나아간다.
부잣집 아들 정도규는 사회주의자가 되고, 연해주 빨치산에 가담한다.
송수익은 관동군에 체포되고 국내에서 지주 하시모도의 권력과 횡포는 날로 커간다.
제4부
일본군의 재만 조선 독립군 토벌 작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조선 독립군은 참혹하게 무너져가면서 결사 항전한다.
재만 한인 20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고, 일본군은 진주만을 기습한다.
조선여자들은 정신대로 끌려나간다.
관동군에 붙잡힌 송수익은 징역 15년을 받고 복역 중 옥사한다.
송수익이 옥사하자 그의 아들 송가원(의사)은 의업을 포기하고 광복군에 가담한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러시아는 선전포고를 한다.
만주에서 일본의 힘이 빠져나가자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의 농토를 빼앗기 위해 쇠스랑을 들고 몰려온다.
조선인들은 다시 유랑의 길로 나선다.
이것이 8·15 해방이다.
■ 조정래
▲1943년 전남 승주 선암사에서 태어남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70 단편 ‘누명’으로 등단, 이후 ‘태백산맥’ ‘아리랑’ 등 대하소설 발표
▲1999년 ‘조정래 문학전집’ 전 9권 간행
■ 소설속 내촌마을 테마관광코스로 개발
전북 김제시는 대하소설 ‘아리랑’의 무대인 김제평야의 죽산면 홍산리 내촌 마을을 중심으로, 김제와 ‘아리랑’을 연계시키는 테마관광코스 개발사업을 확정했다.
김제시에 따르면 내촌 마을을 ‘아리랑 문학 마을’로 지정하고 소설 ‘아리랑’의 육필원고 및 이와 관련된 작가의 소장품 일체를 인수받아 보관할 전시관을 건립 운영할 계획이다.
또 소설 속에 나오는 죽산면의 일본인 대지주 하시모도의 집 등, 작품과 관련된 기념물들을 인수 복원키로 했다.
소설 속에서 죽산면 홍산리 내촌은 일제에 맞서는 소작농민들의 고난과 저항의 발원지로 등장하고 있다.
김제시는 이 테마관광코스로 문학탐방팀들을 유치하기로 하고 이같은 사업을 오는 10월의 ‘지평선 축제’와 연계할 계획이다.
또 소설 ‘아리랑’의 영화 및 TV 드라마 제작에 따른 세트장도 유치하기로 하고 제작자들과 교섭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전남 보성군도 작가 조정래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보성군 일대의 여러 기념물, 자연지형 및 거점들을 연계하는 테마관광코스 개발계획을 확정했다.
보성군은 이 기념물들의 일부를 매입해서 휴식공간으로 바꾸고, 문학탐방팀들을 유치할 계획이다.
[옮긴 글]
소설'아리랑' 의 배경 지역을 찾아서(퍼옴)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난 이제야 읽게 되었다. 때 늦은 감이 있어 남들에게 그 감동을 전하는 것도 멋적은 일이라 여겨진다. 뒤늦게 혼자서 느낀 그 감동을 되새김질 하기위해 소설 속 배경이 되었던 김제로 길을 떠난다. 정읍과 인접한 곳이라 한나절이면 족하다 생각되었다. 2009년 2월, 나는 먼저 김제시 부량면 벽골제 근처에 위치한 아리랑문학관을 찾아갔다. 지평선이 보이는 너른 김제 들녘 가운데에 자리잡은 문학관에 찾는 이가 별로 없어 한가로웠다. 덕분에 전시실을 여유롭게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전시관에 전시된 자료들은 소설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잘 보여주었고 전시관을 나오면서 새삼 작가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감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다음은 인접한 김제시 죽산면 소재지에 위치한 구 하시모토농장 사무실을 찾아가 보았다. 당시 전북지역에 일본인들이 조성했던 9개의 농장, 그 중에 하나였던 하시모토농장을 가게 된 것이다. 현재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말끔히 단장이 되어 있었다. 일제에 의한 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다음으로는 소설속의 주요 인물들이 살았던 죽산면 소재지에서 그리 멀지않은 내촌과 외리 마을을 찾아가 보았다. 한적한 농촌마을에 인적도 없어 누구하나 붙잡고 얘기하기도 어려웠다. 나즈막한 구릉지와 너른 평야가 어우러져있는 지형에 마을은 위치하는데, 취락은 그 경계지점을 따라 연속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과거 이곳은 1914년 이전까지 홍산면이라 불리워졌고 그 홍산면의 중심마을이었다고 한다. 기러기가 날아가다 앉는다고 하는 풍수상 길지라고도 전해지는 곳이다. 소설속의 주인공이었던 보름이와 수국이가 금새라도 나타날 것 같은 착각을 하며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여느 농촌처럼 사람이 드문 농촌마을에서 그나마 사람을 알아보고 자기 존재를 알리는 것은 마을의 견공들이었다. 정적을 깨는 개들의 외침이 길어지면 안될 것 같아 바로 마을을 빠져나와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고 집을 향하였다.
평소 문학 서적과는 별로 친하지 않기도 하였지만 10권이 넘는 대하소설에 도전하기란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상당한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장편소설 읽기를 이렇게 마치고 나니 스스로 대견스럽다는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하기야 십수년을 바쳐 글을 쓰는 작가에 비하면 한달정도 투자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조정래의 나머지 대하소설에도 도전을 해볼련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느 아리랑을 읽었으니 이제 태백산맥과 한강에 도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본다. 늦었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고 하지 않았던가? 역사소설을 탐독하는 일은 개인적인 즐거움이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에게 생생한 근현대사의 진실을 가르칠 수 있는 소재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제시 부량면 벽골제 부근에 위치한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관. 옛 벽제초등학교 터를 활용하였다고 한다.
문학관 안에 전시된 사진. 호남평야의 일부인 김제만경평야의 너른 들녘을 찍은 사진.
소설 '아리랑'을 위해 씌여진 원고의 첫 페이지. 12권의 대하소설인데 원고지로는 2만장 정도의 분량이라 한다.
4부로 나뉘어지는 소설의 역사적 배경은 일제의 실질적인 통치가 시작된 1904년부터 시작이 된다. 그래서 일제 35년이 아니라 40년이라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김제시에 산재된 문화재와 소설 아리랑과 관련된 곳들을 표시한 지도. 새만금 간척지가 완공되면 이곳의 지도는 또한번 크게 바뀔 것 같다. 김제시에서 1년동안 생산되는 쌀의 양은 전국 생산량의 2.5%를 차지한다고 하고 이 정도의 양은 강원도 전체 쌀 생산량과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나라의 곳간 구실을 하는 곳이다.
김제시는 앞으로 소설 아리랑과 관련된 장소를 연계하는 문학벨트를 조성하여 관광 상품화를 할 계획이라 한다.
벽골제 근처에 있는 아리랑 문학비.
김제평야의 들녘. 파릇파릇한 보리밭이 봄의 기운을 느끼게 해준다. 듬성듬성 위치한 마을들이 그저 정겹기만 하다. 산이 없기에 하늘과 땅이 일직선으로 만나는 지평선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너른 들이기에 도로도 고속도로처럼 직선을 이루며 멀리 소실점을 만들어낸다. 벽골제에서 죽산면을 향해 달리는 도로.
부안쪽에서 김제죽산면으로 들어서면서 볼 수 있는 원평천과 국도상의 다리. 원평천은 동진강의 지류이며 벽골제와 관련된다.
김제시 죽산면 소재지에 위치한 구 하시모토(교본)농장의 관리사무실이 있었던 곳.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로 쓰였던 건물. 지금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해방이후 한때는 병원으로, 그 이후 동진농조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서양풍의 건물.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옆에 위치한 창고건물.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이다.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뒷쪽에 위치한 기념비석. 하시모토를 찬양하는 글이 담긴 송덕비인데 아마도 당시 친일세력들이 세워준듯..... 소작인들을 닥달하며 치부하던, 우리 조선인들에게는 원망의 대상이었던 자에게 무슨 찬양할 것이 있었을지.....소설 내용처럼 악랄한 농장주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하시모토 농장사무실을 뒤쪽에서 바라보았다. 외벽과 내부를 최근에 페인팅한 것 같다.
김제시 죽산면 사무소. 소설속에서는 친일행각을 벌이며 치부에 전념했던 중인출신 백종두가 면장으로 근무했던 곳.
죽산면 소재지의 중심거리. 북쪽으로 직진하면 김제시. 좌회전하면 만경과 군산으로 이어지는 길. 다른 농촌처럼 이곳도 인구가 크게 감소된 곳이라고 한다.
죽산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촌마을과 외리마을이 위치한다.
소설속에서 감골댁과 그 주변 인물들이 살았던 곳. 1914년 이전까지 죽산면이라는 행정구역명 대신 홍산면이 있었으며 그 당시 가장 번창했던 중심마을이라고 한다. 나중에 하시모토 농장이 들어서면서 죽산리가 번창하였고 그로인해 면의 이름과 그 중심지가 변동되었던 것 같다.
낮은 구릉지와 평야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내촌마을.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 홍산의 안쪽에 있다하여 내리라 하였고 나중에 내촌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기러기가 앉을만한 길지라는 의미로 마을 뒷산을 홍산이라 하였는데 마침 내촌마을 위로 기러기떼가 브이자를 이루며 날아간다.
내촌 마을의 노인들이 모여드는 노인당. 마을에 노인들이 주를 이루기에 어차피 마을회관 역할을 하는 곳.
허리가 휜 할머니들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유모차. 지금은 어딜가나 농촌마을에 유모차가 흔하게 보인다.
홍산교회를 중심으로 내촌마을과 외리마을이 나뉜다.
홍산리에서 죽산리로 향하는 들녘의 도로.
멀리 죽산면의 소재지 죽산리로 이어지는 도로. 죽산이라는 나즈막한 산이 있다하여 죽산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평천을 끼고 북쪽에 발달한 김제시 죽산면. 소설속의 배경지, 죽산리와 홍산리가 인접한다. 차량에 장착된 내비게이션 화면을 찍으면 지도가 따로 필요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