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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하나님의 친백성
히9: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히9: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히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히9: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이번에는 특별히 언약궤에 대한 마지막 진술 -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핀들이 있고" - 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오랜 역사 내내 기독교회가 겪어 온 문제, 특히 지금 겪고 있는 문제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며, 자신에게 열려 있는 모든 영광스러운 가능성 또한 모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자손의 파란만장하고 오랜 역사가 특히 이런 성향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백성이었는데도 계속 불행했고 혼란에 빠졌으며 곤경과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이 누구인지 계속 잊고 지낸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위대한 백성임을 잊어버렸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주셨으며 무엇을 주려 하시는지 잊어버렸습니다. 계속 다른 나라만 쳐다보며 그들처럼 되고 싶어 했습니다. 다른 나라가 가진 것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신정체제가 왕정체제보다 더 놀라운 것임을 깨닫지 못한 채 왕국들을 부러워하며 왕을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들도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나라라고 내내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의 진정한 독특성을 보지 못한 결과, 불행하게 탄식하고 반역하며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다가 돌아오는 역사가 되풀이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참된 본질을 깨닫지 못한채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만 계속 자신들을 이해했다'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었습니다. 어디에 가고 어디에 머물든 그들의 본질을 상기시켜 주는 영구한 기념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살펴볼 본문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어디에 가든 언약궤가 항상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성막과 함께 옮겨 다니게 하셨고, 나중에는 예루살렘에 크게 지은 성전 안에 두게 하셨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이 맺은 약정의 증거로서, 하나님은 그 안에 몇 가지 물건들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인약의 돌판들을 보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물건들을 궤 안에 보관케 하신 데는 몇 가지 사실을 영구히 상기시키시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바라볼 때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은 언약궤와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들의 정체성과 핵심 본질을 상기시키심으로써, 순전히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을 이해하려 드는 지속적인 성향 및 곤경과 재난에 계속 짓눌리는 성향에서 구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과거 어느 때보다 오늘날 이 기념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회의 현 상태를 보면 그리스도인이 전혀 자랑할 수 없는 형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왜 이토록 무리하고 무능해졌습니까? 왜 이토록 현대 세계에서 미미한 존재가 되었습니까? 왜 이토록 비웃음과 조롱과 무시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왜 이토록 인간적인 조직의 방식과 방법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왜 이토록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신부의 모습과 다릅니까?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묻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이토록 형편없는 표본이 되어 버렸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 사람들에 대한 신약성경의 묘사 및 사도 바울 같은 인물이 자기 경험이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빛나는 표현들과 자기 자신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그 큰 차이가 느껴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1:8) 우리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까? 원형경기장에 사자 밥으로 던져진다는 선고나 사형 선고를 갑자기 받아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할 수 있습니까?(행5:41)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기념물들로 돌아가는 대신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기념물이 옛적에는 언약궤 안에 들어있었지만, 지금은 신약성경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낮은 차원에 머물려 합니다. 너무나 쉽게 성경이 아닌 인간의 생각과 철학과 상식에서 끌어온 기준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하려 합니다. 이 모든 성향을 바로잡는 길은 이스라엘 자손이 했어야 했던 일을 우리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백성에게 주신 기념물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신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것들을 구한 기념물로 보관해라. 궤 안에 만나 한 오멜을 담은 금항아리를 두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을 두어라. 어디에 가든, 무슨 일을 겪든 이 세 가지 기념물을 항상 기억해라. 이것들이 너희의 안녕과 행복과 삶 전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본원리를 제시해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 기념물들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사례에 대한 서술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원형인 만큼, 이 기념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들에게는 물리적인 형태로 주어졌고 우리에게는 영적인 형태로 주어졌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완전히 동일합니다. 이 세 가지 기념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신분을 떠받치는 절대적 토대입니다. 항상 이것에 비추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해야 하며, 기독교회와 그 본질 및 토대를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로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를 살펴보십시오. 홍해를 건너 광야 길을 가던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의 별미를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먹을 양식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히 양식을 주겠다고 하셨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지면에 작은 이슬방울처럼 보이는 것들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그것을 거두며 만나. 즉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불렀습니다. 여정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은 계속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정량을 거두어 언약궤 안에 보관하게 하셨습니다.
이 만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만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적적이고 조자연적인 요소가 있음을 상기시키는 영구한 기념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인간이 아는 모든 유형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광야를 이행했던 이스라엘 자손을 보십시오. 그들은 다른 나라가 경험치 못한 일을 광야에서 경험했습니다. 다른 모든 나라는 자급자족하며 살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만나를 거두어 살았습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공급입니다. 평범한 인간의 말로 설명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동이요. 기적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핵심 본질이 여기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게 살았고 교회 그렇게 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기원부터 기적이고 초자연적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요! 이스라엘은 여타 다른 나라들과 다른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창조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보시고 그 고향과 친척 중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이 한 사람에게서 한 나라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들은 후에 애굽으로 내려 갔고 - 소망 없이 노예로 매여 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출애굽기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습 - 아무 소망 없이 매여 종살이하는 모습 - 보다 더 절망스러운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늘을 보았다면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한 지도자를 세우셨으며, 놀라운 기적을 잇따라 행하심으로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마침내 홍해 건너게 하셨고 원수들을 수장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길을 가도록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기적적이고 전능한 능력을 떠나서는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평범한 역사가 아니며, 단순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초자연적인 이야기입니다. 언약궤 안의 만나 항아리는 이 사실을 계속 상기시켰습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낮은 차원에 주식 않을 위험이 상시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 그저 남들보다 조금 나아지고자 애쓰는 평범한 사람들입니까? 처음부터 평범한 인간의 관심으로 이해해야 하는 사람입니까?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른 사람들입니까? 성경 메시지 전체가 그것이 거짓된 생각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사신이 하나의 기적입니다 완전히 구별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스스로 행동하고 노력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이 친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기원이 그렇듯이 그리스도인의 기원 또한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자요 하나님이 친히 다루신 자요, 자신의 성령을 그 안에 두신자입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입니다(벧후1:4) 그리스도은 여타 사람들과 다른 존재입니다 좀 다르거나 좀 나은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그 기쁘신 뜻을 위해 구별하신 백성이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출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삶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기원과 시작한 유일무이했던 것이 아닙니다. 삶도 유일무이하고 달랐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수단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놀라운 떡으로 살면서 길을 갔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기원과 시작이 유일무이하다면, 이후의 삶도 구별되고 차별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훈계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3)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은 유대교인들의 말을 듣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습니다. 우리 삶은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상기해야 할 사실이 이것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인 기관입니다. 세상 여러 기관 중 한곳이 아닙니다. 지상 어느 기관과도 다른 곳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곳입니다. 특별한 곳입니다. 순전히 영적인 곳입니다. 오, 그런데 어리석게도 세속적이며 세상적인 곳이 될 때가 너무 많아서 걱정입니다! 세상의 수단과 방법으로 존속하려 들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옛적 이스라엘 자손처럼 곤경과 재앙을 면치 못합니다. 교회는 교육과 문화와 철학에 기대어 살고자 애써 왔습니다. 기도 모임도 사라지고, 간증 모임도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그런 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의 학식과 지혜에 기대어 살고자 애씁니다.
교회의 전체적인 상황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 그리스도인 개인들도 같은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이 초자연적으로 태어난 존재이며 이후에도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은 채 삶을 이어 가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양식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요 기도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심리학이나 학문과 지식을 활용하려 들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지식도 완전히 무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혼을 먹여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떡 뿐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없으면 구원의 샘에서 계속 물을 길어 올리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우리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 하나님의 언약궤 안에 두게 하신 만나를 잊는 것은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사셨는지 보십시오 새벽미명도 되기 전에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을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어리석게도 아침과 저녁에 대충 기도하고 온종일 생활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만나가 필요합니다 만나가 없으면 삶이 쇠약해지고 그리스도인의 특징으로 항상 나타나야 할 활력이 사라집니다
여러분에게 상기시켜야 할 측면이 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때에 맞게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죄를 짓고 원망하며 거역하는 옛적 백성들도 친히 부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때에 맞게 자기 백성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 없는 사실입니다.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점을 상기시켜주는신약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마10:30) 하나님이 우리 자신보다 무한히 더 우리의 안녕을 염려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의 눈은 온 땅을 감찰하며 축복 할자를 찾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부양하시며 모든 필요 를 채워 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은 무한하다는 사실도 기억합시다. 그는 끝도 없고 한도 없는 자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행하던 광야에는 천연식품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왜 애굽을 떠났을까?" 한탄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마늘과 양파를 먹고 싶어 했습니다. "왜 우리를 광야로 끌고 왔느냐?"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내놓은 대답이 이것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모르느냐? 내일 아침 너희 눈앞에 기적이 펼쳐질 것이다." 오, 끝없이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이여! 여러분도 곧 광야를 방랑할지 모릅니다. 이미 광야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르고, 곧 광야로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나 항아리가 있다는 사실,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상기시키는 기념물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배고프고 목말라 곧 죽을 것 같을 때 만나가 내리고 샘이 터질 것입니다. 그가 여러분을 버리시거나 떠나시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영원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전적으로 의지하면 때에 맞게 돌보아 주실 것이며, 그의 무한한 자원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 담긴 두 번째 물건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이것은 민수기 16장에 기록된 구약의 사건에 비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를 방랑하던 시절, 세 사람-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너희가 분수를 모르고 설치는구나. 아론은 자기만 대제사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우리도 거룩한 백성이 아니냐? 우리도 아론처럼 하나님께 향을 드릴 수 있고 제사를 드릴 수 있지 않느냐?" 그들은 이렇게 반역하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7장에 기록된 지팡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언약궤 안에 보관함으로써 그에게 올바로 나아가는 법을 상기시키는 영구한 기념물로 삼게 하셨습니다. 기적의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길을 갈 때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점에서 어긋난 길로 가 버립니다. 민수기 16-17장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한 가지 방법, 유일한 방법을 단번에 확정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교훈이요 현재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교훈입니다. 이 교훈은 두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만 유일한 방법으로서 하나님이 친히 그 방법을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인간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세세한 규례와 규범을 주셨고 본을 주셨습니다.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라고 하셨습니다(히 8:5). 그런데 그 방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보여주는 완벽한 그림입니다. 성경이 명확히 제시하는 대답이 이것입니다. 현대인은 "글쎄, 꼭 그래야 할 것 같지는 않은데"라고 합니다. 철학이나 인간의 생각을 끌어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견해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영구한 기념물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거역한 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이 것입니다. "내가 제사장을 세웠으니, 너희는 그 제사장을 통해서만 내게 나아와야 한다. 내가 아론을 불렀고 그에게 할 일을 알려 주었다. 너희는 오직 이 방법으로만-제사장과 제사를 통해서만 나아와야 한다."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 -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을 통해서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없이는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속죄 제물 없이 나아오는 자를 받아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잖아요"라고 저한테 말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공평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죄를 벌하신다는 개념이 마음에 들지 않네요"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이 친히 "이것만이 내 방법이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속죄를 이루신 일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서도 죄 사함을 받고 양심의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새 생명을 얻고 확실한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그렇게 해보라고 하십시오. 하나님은 "여기 내 대제사장이 있다. 내가 기꺼이 받을 유일한 제물이 있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사 30:2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사시고 죽으신 것과 그 거룩한 몸으로 내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며 날 위해 자신을 주신 것, 하나님 앞에서 내 대제사장이요 대언자 되어 주신 것만이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는 유일한 자격임을 기억하게 되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피가 필요합니다. 출발만 갈보리에서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에도 늘 갈보리가 필요합니다. 죽음의 마지막 고통을 겪을 때 붙잡을 유일한 소망 역시 그리스도께서 나와 내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해주신 이 일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언약의 돌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생명이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으로 받은 놀라운 것임을 알았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나아가 동행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 또한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돌판들이 상기시키는 문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돌판들에 담긴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벧전 1:16).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자기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언약의 돌판들을 언약궤 안에 보관하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반드시 알아야 하기에 보관하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반박할 것입니다. "지금 거룩함과 성화를 설교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편협하게 규례와 규범들을 나열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 빛과 어둠은 사귈 수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은 섞일 수 없습니다. "두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암 3:3).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한다고 주장하려면 마땅히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데, 그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입니다(합 1:13).
하나님의 축복을 알려면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4). 대제사장이 자신을 드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의 거역을 참으시며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참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모든 일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계속 죄를 지으면서도 쉽게 용서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오, 거룩한 백성이 되는 놀랍고도 영광스러우며 귀중한 특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닮게 하시며 자신이 살았던 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에서 분리해 내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악을 미워하시듯 악을 미워하며 가증히 여기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죽으셨습니다.
언약궤 안에 담긴 언약의 돌판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이 축복의 조건입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충만한 영광을 전부 경험하고 싶다면, 사도 바울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말하고 싶다면(빌 1:21), 임종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라고 말하고 싶다면(빌 1:23), 이 모든 복을 얻고 싶다면, 하나님이 알려 주신 거룩한 삶, 자신의 성령을 선물로 주어 가능케하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바로 이것이 우리의 신분이요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남들보다 조금 나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새로운 피조물, 그가 친히 붙드시고 지키시며 부양하시는 백성, 그와 교제하는 영광스러운 운명으로 부름받은 백성, 그때까지 거룩한 하나님께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사는 백성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백성이여,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저 높은 부름의 참된 높이까지 올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