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만나고 싶었습니다 - 대담 / 본지 편집주간 임 애 월
바람 속에 핀 모래꽃
윤 고 방 시인
처서가 지나 조석으로 제법 선선해진 들길을 달려 경기도 양평군 국수리에 사시는 윤고방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정겨운 실개천을 휘돌아 작은 다리 너머에 위치한 전원주택은 첫 이미지가 문학관처럼 세련되면서도 참 아늑해 보였다.
근처 푸르른 숲을 배경으로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시며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임애월 : 윤고방 선생님, 안녕하세요? 물 좋고 산 좋은 양평에서 만나 뵙네요. 정말 반갑습니다.
윤고방 : 네, 안녕하세요? 이렇게 먼 시골에까지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임애월 : 양평은 수도권에서 가깝고 산수가 좋아 별장이나 전원주택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는데, 이렇게 멋진 곳에서 살고 계시네요. 양평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살고 있지요? 부럽습니다.
윤고방 : 네, 그렇게들 얘기하더군요. 이곳저곳에 예술가들이 많이 살기는 합니다만, 사람 사는 데가 다 거기서 거기겠지요, 뭐. 서울 오고가며 강 구경하는 재미가 늘 고맙고, 역시 시골 인심이 참 후하구나 하는 생각도 자주 합니다.
임애월 : 하시는 일이 많아 바쁘실 텐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부터 들려주세요.
윤고방 : 전원주택 겸 작업실을 이곳 국수리에 지은 지 한 2년 쯤 되어갑니다. 저는 평생 아파트에서는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데, 집 안팎으로 손볼 것이 워낙 많은 게 소위 전원주택 아닙니까? 이거저것 고치고 만들고 하는 일을 원체 좋아하는 편이라서 이 시골 생활이 참 마음에 듭니다.
밤에는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요, 일주일에 하루는 양평군 평생교육센터에 가서 시서화 또는 현대수묵화 강의를 하고, 가끔씩 미네르바문학회 일이나 문학행사가 있으면 전철을 타고 강물 구경하며 상경하는 행복한 촌놈이 되기도 하구요.
임애월 : 겉으로만 보면 정말 행복해 보이는 일상입니다. 대도시에 사는 지인들이 많이 부러워하지요? 이렇게 근사한 집에, 아름다운 정원, 그 옆을 흐르는 개울이며, 특히 깨끗한 공기... 정말 지상낙원이 따로 없겠습니다.
윤고방 : 서종면 수입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터 잡고 집짓고 분야별로 엄청난 잡동사니 이삿짐 옮기는 기간이 약 2년이었는데, 명 재촉이 따로 없더라고요. 1년 동안을 더 마무리하고 나니 이제야 산과 들이 눈에 좀 들어옵니다. 그러나 아직도 바깥 작업실 겸 창고 공사가 남아 있어 걱정입니다.
임애월 : 고향이 수원이라고 들은 것 같아요. 아닌가요? 외가가 수원이었나요?
윤고방 : 네, 외가가 수원입니다. 잃어버리다 못해 쫓겨났다고 생각하는 저의 고향은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수내리였는데 지금의 판교 테크놀로지 인근이지요.
임애월 : 네, 신도시가 들어선 지금의 판교가 고향이시군요.
윤고방 : 본적지의 주소는 수원시 인계동 857번지, 아직도 뇌리에 여전히 뚜렷이 새겨져 있는 지번인데요, 최근에는 편의상 서울로 옮겼습니다만, 일제 말엽과 광복 무렵에 부모님 세대가 한동안 살면서 수원은 오랫동안 저의 본적이 되었습니다.
실은 외할아버지께서 기독교계와 수원지역을 대표하신 분으로서 3.1운동 당시 48의사 중 한 분이셨습니다. 그런 연유로 수원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이지요.
임애월 : 아하, 외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신 훌륭하신 분이시군요. 저는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과 그 후손들도 무조건 존경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아무나 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픈 기억을 되살려드려 죄송한데요. 첫 시집 하늘 가리고 사는 뜻은의 추천위원이신 이원섭 시인은 “그에게 불어닥친 ‘아수라의 바람꽃’의 정체는 바로 6·25의 회오리바람‘이고, (중략) 그 유년기에 겪었던 아픔이 뿌리내려 수십 년을 흐르는 중, 잎새와 잔가지가 다 떨어져나가면서 마치 산호나 되는 것처럼 순수한 정서로 결정(結晶)되었음을 보게 된다”라고 하셨는데, 민족의 비극인 6·25를 직접 겪으셨잖아요, 작품에서도 어둡고 광적인 배경으로 묘사되고 있고요, 어린 시절이지만 그때 고통이 매우 크셨을 텐데, 어떻게 그 시절을 건너오셨는지 말씀 좀 해 주세요.
윤고방 : 그때 저는 네 살이었으니까 구체적으로 뼈저린 경험이 있었다고 하긴 어렵겠지만, 오히려 어린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회오리의 파편들이 더 강하게 제 여린 살 속으로 파고 들어왔고 또 오래도록 박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친가는 몰락한 대지주, 대자를 붙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고등학교 때 고향이라고 올라와 보니, 할머니께서는 “저기 저 분당 30리가 다 우리 땅이었는데, 왜 이 모양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그 놈의 사상이라는 게 다 뭔지... 저 구름 언제 벗어 밝은 세상 다시 보나”하며 한숨을 토해내곤 하셨거든요. 할머니와 스물여섯 살 젊은 엄마와 어린 저만 전란 속에 남겨둔 채, 아버지, 삼촌, 고모들은 사상에 휩쓸려 모두 자취를 감추셨지요.
외가 쪽은 외조부께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일제의 고문과 핍박 속에 병을 얻으셔서 재산 한 푼 남기지 못하신 채 광복 며칠 후 돌아가셨구요. 대체로 그것이 공식 아닙니까? 요즘 ‘도둑놈, 도둑님’인가 하는 드라마에도 나오더군요.
임애월 : 정말 드라마에나 등장함직한 성장 배경이군요. 어리지만 그 신산한 세월의 분위기와 느낌은 알게 모르게 영혼의 내면 속으로 스며들어 깊숙한 곳 어딘가에 깊게 저장이 되었겠지요.
윤고방 : 첫 시집에 들어 있는 연작시 「유년의 바람꽃」들은, 피난민 열차, 엄마 잃은 아이, 모자원, 고아원 생활 등의 어린 날 상처들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한 자가 처방전이었습니다. 문학의 예술 치료효과를 일찌감치 믿고 있었다고나 할까요?(웃음)
임애월 : 어린 시절에 겪었던 트라우마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음은 예술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한 일이기도 하고요.
1978년에 《현대문학》 초회 추천,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문학에 대해 관심이 있으셨는지요? 선생님의 문학의 뿌리가 어디쯤서부터 태동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윤고방 : 구수한 옛날이야기와 시 구절들을 끊임없이 풀어 놓으시던 할머니, 홀어머니의 애달픈 예술적 감수성이 아마도 혈통상의 뿌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위에 6·25가 던져 준 초강력 압박감이 자연스레 문학 또는 예술이라는 분화구를 만들어 주었다고 봅니다. 「이어도(1975)」의 작가 이청준(1939~ 2008)선생은 1977년에 발표한 <지배와 해방>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더군요. “문학 창작의 욕망은 애초 우리가 사는 현실 질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자가 그 패배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구해내기 위한 위로와 그를 패배시킨 현실을 자기 이념의 질서로 지배해 나가려는 강한 복수심에서 비롯된다.”고 말이죠.
임애월 : ‘자신을 구하기 위한 복수심’이라는 그 말씀에 저도 완전 공감합니다.(웃음)
윤고방 : 문학가가 되겠다는 거창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린 마음에는 ‘형편없이 구겨진 몹쓸 운명에 대해 보란 듯이 설욕을 해 보이겠다.’는 복수심 때문에 삶의 기록인 문학에 대해 절실하게 생각하게 되었구나 하는 것이지요.
복수심이란 표현이 다소 경직된 감정을 내포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좀 더 부드럽게 ‘회복에의 열망’이라고 해 두면 어떻겠습니까? ‘무한 결핍의 근원에 대한 눈흘김’이란 표현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초등학교 5-6학년 무렵부터 이 괴로움과 온갖 억울함을 낱낱이 적어서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일기를 열심히 썼습니다.
임애월 : 그 당시에 선생님의 문학을 향한 출발에 동기부여가 된 인물이나 사건이 있으셨는지요?
윤고방 : 어머니가 계신데도 고아원 생활을 4년이나 했던 김해가 가장 고통스런 피란지였습니다. 김해중학교 1학년 국어 선생님께서는 일기쓰기를 특별히 권장하셨는데 검사도 철저히 하셨습니다. 마침 돛단배가 물과 바람을 만났다고나 할까요?
선생님께서 어느 날 제 일기를 보신 후부터는 남다른 관심을 보내 주시는 거였습니다. 일기장에 적힌 고아들의 일상사나 심리 상태가 젊은 교사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수도 있고, 우선 문장력은 제법 그럴 듯한데 시간마다 졸고 앉아 있는 녀석을 괴이하게 여기기도 하셨을 겁니다. 어린 오줌싸개들을 두 시간마다 깨우느라 불침번을 서야 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수업시간의 졸음은 막을 수가 없더라구요.
스물 일고여덟 정도의 처녀 선생님, 얼굴은 갸름하고 지적인 미모를 갖춘 분이었는데 늘 연푸른 색안경을 쓰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그 빡빡머리 앳된 숫총각 놈들한테는 인기 절정일 수밖에 없었고 시쳇말로는 문자 그대로 여신이었지요. 그런데 그 여신께서 가끔씩 교무실로 저를 불러서는 이런저런 사정을 요모조모 캐묻기도 하고, 돌려보낼 때는 “이 책 다 읽고 가져와. 일기장에다 독후감 쓰는 것도 잊지 말고” 하시면서 손에다 책 한 권씩을 쥐어 주셨습니다. 한창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사춘기 초년병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어깨가 으쓱할 일이었지요.
임애월 : 어릴 때 고아원에 계셨다는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듣네요. 어린 시절에, 더구나 가장 고통스러웠던 피란 생활 속, 학교 선생님께 듣는 칭찬은 정말이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을 듯합니다. 특히 여선생님이셨으니 더욱 좋으셨겠습니다.(웃음)
윤고방 : 그럼요, 잔뜩 흐리기만 했던 세상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하늘이 저렇게도 푸른 것이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선생님께 받은 로빈슨크루스의 모험, 빨강머리 앤이나 이름이 멋들어진 수필집 여러 권을 밤새워 읽으며 난생 처음 맛보는 미래에 대한 꿈과 희열에 마냥 부풀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신성한 여인으로 오래도록 감추어 놓았던 것도 사실입니다.(웃음)
임애월 : ‘고방’은 필명이시잖아요?
함자가 참 예스러우면서도 친근감이 가는데요. ‘고방’이라는 필명을 쓰시게 된 배경 설명 좀 부탁드릴게요.
윤고방 : 1978년 현대문학에 추천을 받을 때는 본명인 윤창혁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본명은 우선 부르기가 어려워서 전화에서는 윤상석이요?, 윤창석이요? 하는 엉뚱한 반문이 자주 와서 성가셨고, 우연히 성명학을 뒤적거리며 따져보니 제 이름자가 수리상으로 최흉수로 나오더군요. 거기다가 잃어버린 고향 땅의 소유주인 조부 인감을 위조한 장본인과 이름이 똑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지요.
그 당시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을 때는 난생 처음 마련한 집 건넌방에서 밤낮없이 시 공부에 매달렸었는데, 겨울엔 물그릇이 땡글땡글 어는 냉골이었지만 이 ‘골방’이 바로 내가 다시 태어날 곳이로구나 생각하고는 ‘윤골방’으로 했다가 다시 ‘윤고방’으로 한 것입니다. 40년 동안 윤고방으로 살았는데 좀 촌스럽기는 해도 구수한 맛이 나서 저는 만족입니다.
임애월 : 윤골방에서 ‘ㄹ’ 탈락현상이 일어난 거네요. 일단 흔치 않은 이름이어서 기억하기 좋고요, 촌스럽다기보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예스럽습니다. 이름자를 바꿔야만 하는 이유도 충분했네요.
조금 전에 서재에서도 구경했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시서화(詩書畵)를 함께 하시잖아요? 아참, 도예가 빠졌네요. 제가 이렇게 정신이 없어요. 하나도 제대로 해내기가 힘이 드는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훈련과 노력의 결과인가요? 아니면 재능을 타고나셨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으신 건가요?
윤고방 : 글쎄요, 남들은 “당신은 팔방미인이구만, 재주가 많아서 참 좋겠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한 가지만 하지, 왜 그렇게 여러 가지 하느라고 끙끙대면서 힘들게 사냐?” “한 우물을 파라, 한 마리 토끼만 좇아야 한다니까?”하는 연민과 힐난이 섞인 충고들을 끊임없이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詩로 등단하기 전, 밤 새워 시 습작을 계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국 근대 6대 화가이신 심산 노수현 화백을 찾아가서 3~4 년간 그림을 배웠고, 그 후 일중 김충현 선생한테서 글씨를 배웠습니다만 늘 허겁지겁 시간에 쫓겨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애월 : 이 대목에서 어느 시인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문득 생각납니다. 어떤 문학행사에서 선생님과 룸메이트가 되었는데 새벽에 깨어나 보니 방에 안 계시더랍니다. 나중에 조식 시간에, 완성된 그림 한 장을 들고 나타나셨대요. 정말 부지런한 분이시라는 걸 그때 느끼셨답니다.
윤고방 : 그랬었나요?(웃음) 언뜻 생각이 납니다만, 그때는 전날 눈여겨보아 두었던 어느 고풍스런 종택을 새벽녘에 찾아가 한 컷 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었어요. 단체의 일정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런 경우 눈치껏 해야죠. 그래서 저는 ‘몰래 스케치’ 또는 ‘도둑 스케치’라고 스스로 부르고 있습니다.
배움의 욕구를 채우는 즐거움, 진땀 흘리는 재미(?)에 빠져 지내기는 했지만, 단순 계산으로도 남들보다 최소한 세 배 네 배는 더 바쁘게 정말 숨차게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내가 왜 이러나?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하면서 깊은 회의와 갈등에 빠졌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교직생활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상담교사 자격증을 따러 가서, MBTI 성격검사를 하면서 저의 성격이 ENTP형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풀이를 보니 ‘모험가, 발명가, 예술가가 적격이며, 이상 추구형으로 호기심이 많아서 한 가지에 전념하지 못하므로,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일들을 소홀히 할 수 있으니 조심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족집게 무당이 따로 없었지요. ‘아 그래서 내 별명이 럭비공이나 돈키호테 또는 창밖의 남자였구나!’하며 무릎을 탁 치는 순간, 오랜 의구심은 일단 풀렸습니다. 그 후론 별 망설임 없이 남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고 저의 깊은 내면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기로 독하게 마음먹었습니다.
임애월 : 그러니까 즉, 다방면에 타고나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로 저에게는 들립니다.(웃음)
사실 서재에 걸려있는 조롱박 그림을 보면서 한국화가 저렇게 육감적(?)일 수도 있구나... 혼자 생각했어요. 정적인 고요함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튀어나올 듯 꿈틀거리는 동적인 이미지에 생기가 넘쳐흘렀거든요. 제 느낌이에요.(웃음)
윤고방 : 과찬이십니다. 우리나라 문인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날의 문인화가 있기까지 우여곡절도 많고 아직까지 정의나 기능면에서 풀어야 할 과제도 많은 예술 장르라는 걸 느낍니다. 단지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저의 인생과 생활 면모를 좀 더 본격적인 문인화 형식으로 표현하고 싶을 뿐이죠. 구태의연한 생각이라고 할지 모르나 기운생동(氣運生動)의 원리에 한 걸음 다가서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임애월 : 아무튼 대단하신 열정이고 능력이십니다.
아까 잠깐 얘기하다가 중단되었는데요. 첫 시집 하늘 가리고 사는 뜻은은 서럽고 어두운 분위기가 시집의 전편을 흐르고 있는데, 특히 연작시 「유년의 바람꽃」들에서는 전쟁이 주는 무자비한 고통 속에서 참혹한 시간을 건뎌내야 했던, 고향마저 잃어버린 어린 소년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아직도 어느 시골집 담장 언저리에서 반딧불이로 날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유년기의 사건들은 성장 후에도 성격이나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생살을 파고드는 참혹했던 유년의 그 고통들을 예술로 승화시키셨나 봅니다.
아비는 대륙의 미친 회오리였다.
열대성 난기류를 덮쳐서
불면의 황톳벌에 내지른
아수라의 바람꽃이었다
1950625-1953717
바람아, 너의 등번호는
우리들 이마에 찍힌 수인번호.
천 년 이무기 우는 여름밤.
쇳물 녹아 흐르는 산하에
달맞이꽃은 무더기로 피고 지는데
대낮에도 혓바닥 붉은 달이 떠서
피로 얼굴을 씻고 있었다.
- 「유년의 바람꽃 · 1」 전문
윤고방 : 네 살, 다섯 살 무렵, 피난길에 나설 때 어머니께서는 국방색 담요를 잘라서 여러 겹으로 덧대어 저의 신발을 만들어 주셨는데, 몇 십리 길을 잘도 걷더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무개 화물열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며 새까맣게 그을음을 뒤집어쓰기도 하면서 호남선을 타고, 큰이모님이 전도사로 일하고 있는 제주도로 피란을 갔습니다. 이 시는 그때의 잔상들을 중심 이미지로 삼은 것입니다. 육이오의 끔찍한 뒷모습인 셈이지요.
임애월 : 고통스럽고 공포감이 컸던 어릴 때의 기억들은 영상적인 이미지로 부호화되어 무의식의 깊은 저층에 각인 · 저장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에 튀어나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지요. 스스로 알아서 치유를 하셨으니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 뿐이지요.
그 시집 안에 직접 빚으신 도자기 사진들을 앞쪽에 함께 실으셨잖아요? 그 중에서 백두산 천지가 제 마음에 와 닿았어요. 분청자기의 안쪽에 천지 그림을 넣어 구워내셔서 입체감이 살아있고 청자빛 바닥과 하늘이 광대무변한 천지를 그대로 담아놓은 것처럼 보였거든요.
520 X 520 X 210 분청자기
윤고방: 네, 백두산과 천지의 형상을 코일링 기법으로 만들어서 분청자기로 구워냈는데 느낌이 좋아서 첫 시집의 표지 그림으로 삼고 본문 속에도 넣었습니다.
시로 등단하고, 연 날리기, 잃어버린 조상 땅 찾기 재판이 한데 뒤범벅이 되어 정신이 어질어질할 무렵, 약 5년이나 계속된 재판이 패소로 끝난 시점에서 도자기 수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인감증명서가 위조된 사실과 그 장본인까지 법정에 증인으로 세웠기에 원인무효 재판에서 ‘이제는 이겼구나’ 싶었는데, 막강한 재력으로 중무장한 김우중의 대우가 재단법인이었던 아주대학교를, 일개 교사가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승소의 순간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거금을 어디다 쓸 것인가 김칫국부터 마시면서 저는, 궁벽하기 짝이 없는 인간문화재들을 도울 민속예술학교 설립의 꿈에 잔뜩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까지 가서도 결국 지고 말았습니다.
임애월 : 안타깝네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막강한 금력을 개인이 이기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들이 꿈꾸는 ‘정의’라는 이름도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게 만드는 게 권력과 자본이니까요.
윤고방 : 한순간에 깊은 절벽으로 곤두박질친 느낌이었는데, 때마침 새로 옮겨간 학교의 미술교사를 통해 도자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패소의 울분과 번뇌를 그 동안 익힌 시서화와 함께 흙과 불 속에 쏟아 넣는 일은, 망각을 위한 지상 최고의 최면 치료제였습니다.
임애월 : 또 다시 ‘자가 치유’의 길로 스스로 빠져들어 가신 거군요.
윤고방 : 아마도 그랬나 봅니다. 홀어머니 슬하라는 불우한 성장기를 공유한 도공이었던 인 교수와는 죽이 잘도 맞아서, 습기와 화기가 뒤범벅이었던 지하 공방의 가마에 불을 활활 땔 때는, 어설픈 사물도 맘껏 두들기면서 막걸리 사발을 수도 없이 비워댔지요. 알고 보니 그는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시인의 처 인병선 씨의 동생이더라고요. 근 십 년 동안은 퇴근하자마자 장안동 지하 공방으로 달려갔고 그래서 「도방에서」라는 시도 얻었습니다.
목말라 깊은 밤
당신의 어둠을 데불고 이리 오시오
가마 속에 눈을 꼭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막걸리 한 사발에
북어 한 바리 받쳐 놓고
사물 한바탕 신명나게 울린 다음
불을 지핍시다
눈부시게 빛나는
고뇌의 도가니 속에서
아직 식지 않은 분청 빛
새 하늘이 열릴 때까지
- 「도방에서」 부분
임애월 : 윤강원 평론가는 시집 서평에서 ‘시서화의 달인’이라고 하셨고, 해도 되고요. 항간에는 ‘윤고방 시인이 시서화 삼절을 탐한다’는 소문도 있던데 사실인지요?(웃음)
윤고방 : 탐한다는 말이 맞기는 맞습니다. 언감생심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감히 시서화를 꿈꾼단 말입니까? 가슴속 깊숙한 신당에다가는 남몰래 추사 선생님을 모셔 놓았지만, 혈통 좋은 다복한 집안에 태어나기를 했나, 타고난 천재성이 있길 한가, 유배생활로 세월을 얻기나 했나?
까마득한 인생 밑바닥에서 혈혈단신으로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밤낮으로 시간에 쫓겨 사는 주제에 시서화라니, 억지춘향도 유분수라는 주변의 눈총이 당연한 것이지요. 한 가지라도 똑 부러지게 제대로 하면서 먹고 살 궁리나 할 것이지 쯧쯧...
그런데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앞서 말씀드린 이청준 소설가의 ‘복수론’이 제게는 꼭 들어맞는 시나리오 같습니다. 상투적인 드라마 속의 한 장면 같지만 참담한 실패에 대한 복수 의지는,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들어 놓을 ‘물방울로 바위 뚫기’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꼭 뚫어진다는 얘기는 아니지만요.(웃음)
임애월 : 네, 그 ‘복수 의지’가 삶에 대한 끝없는 열정으로 이어지시니... 뭐 나쁘지는 않겠습니다.(웃음)
두 번째 시집 바람 앞에 서라도 시와 산문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데 자칭 ‘예술잡놈’이라고 하시지만 사실 거기에 실어놓은 그림들이 모두 범상치가 않아 보입니다. 물론 대한민국미술대전 등 큼직한 대회에서 특선, 입선 등 수상도 많이 하셨고 한국미술대전 문인화부 초대작가로도 활동하고 계시고요.
윤고방 : 어떤 예술 분야든지 그 방면에서 전문가 대접을 받으려면 지독하게 어려운 기초 수련 과정과 남다른 노력과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한 가지에 몰입하여 웬만큼 성취했다 싶으면 다른 두세 가지가 저 만큼 도망가고, 멀리 도망간 그놈을 바짝 끌어당겨서 좀 가까워졌다 싶으면 또 다른 놈들이 도망을 가고 해서, 참으로 힘겨운 40년 세월이었지요.
서예가 선배로부터는 한 가지에 제대로 전념하지 못한다고 ‘잡놈’이란 힐책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제 본성의 욕구를 충족시켜 온 즐거운 지옥이었던 셈입니다.
또한 문학이면 문학, 미술이면 미술이란 전문 분야는 이런 얼치기 잡놈에게는 당연히 냉담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미 정립된 전문성, 정통성 즉 기득권이 일부라도 훼손되거나 불분명해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겠지요. 어쨌든 이러한 융합 예술론이 제도권의 벽에 맞닥뜨리고 보면, 또 다른 의미의 만만찮은 어려움이 가중되는 게 사실입니다.
임애월 : 그 시집 안에 연(鳶)을 날리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던데 한동안 연을 만들고 날리는 데 미쳐있었다(?)고요? 국제연날리기 대회까지 기획 · 진행하셨다고 들었는데, 연은 어떤 계기로 접하셨나요?
윤고방 : 한창 의욕에 넘치던 30대 초반 젊은 시절,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국어의 한 분야인 민속학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는데, 한 분야만이라도 내가 직접 배워서 학생들에게 체험하도록 해야 되겠다 싶어, 민속놀이의 여러 분야 중 연 만들기와 날리기를 선택했습니다. 민속박물관 담당자의 소개를 받아서 그 분야의 인간문화재 노유상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연 만들기와 날리기를 열심히 배웠지요.
눈물이 핑 돌도록 궁핍하고 노쇠하신 인간문화재를 돕기 위해, 재직하던 학교에서 연 만들기 실습시간 겸 강연회를 열고, 전교생을 동원해서 교내 연날리기 대회와 전국중고등학생 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빠져들어서 사단법인 민속연보존회의 부회장을 맡게 되었고, 회장인 노 옹이 추진하는 서울국제연날리기대회를 1회부터 3회까지 기획하고 진행하는 등 모든 걸 다 팽개친 채 거의 십 년을 보냈습니다. 그 전까지 공들여 왔던 시·서·화·도 고놈들은 벌써 저 만큼씩 도망가고 있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실 벽 넓이보다 더 큰, 가로 4m 세로 6m의 조립식 방패연을 만들어 시를 적고 그림을 그려서 한일월드컵 기념연으로 날리기도 하고, 화가 100여 명과 함께 한국연그림협회를 만들어 독도 현지에 가서 ‘독도는 한국땅’이란 플래카드를 매달아 날리기도 했습니다.
임애월 : 무엇이든 하시면 참 대단하게 빠져드시네요.
연의 매력은 어디에 있나요?
윤고방 : 매력이요? 말도 마십시오. 새끼손가락 굵기 만한 연줄을 통해서 온몸에 전해져 오는 바람 맛, 하늘 맛, 그건 아마 헤밍웨이 소설 ‘노인과 바다’ 속에서 청새치와 싸우는 주인공, 산티아고 할아버지만이 좀 알 것입니다. 미칠 수밖에 없었다고 실토한다면 정말 돌았구나 하시겠지요?(웃음)
그래서 2013년에 KBS 갤러리에서 기획 초대한 ‘윤고방 기행화첩전’ ‘작가의 말’에 이렇게 적기도 했습니다.
“(전략) 40년이 넘도록 시, 그림, 글씨, 도자기, 연을 번갈아가며 혹은 뒤섞어가며 숨 가쁘게 살아왔다. 가까이서 멀리서 ‘제발 한 가지만 하라’는 성화가 빗발친다. 그러나 시서화라는 위험천만한 호랑이 등에 올라탄 이 멍텅구리는 거룩한 운명을 거역할 수 없노라. 친절하고 아리따운 삶의 동행자들이여, 제발 이제는 ‘한 가지만 하라’고 등 떠밀지 마시라.”
그런데 말이지요, 시 전문지 『한국시학』에다가 시 얘기 아닌 엉뚱한 얘기만 한다고 독자 분들께서 눈 흘기시면 어떡하지요? 걱정됩니다.(웃음)
임애월 : 독자 분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더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웃음) 그럼 다시 시에 대한 이야기로 갈게요.
2012년에 상재한 세 번째 시집 낙타와 모래꽃에서 최선옥 시인은 “비애를 환희로 환기시키는 시적 사유와 행간 속의 이미지라든가 비유가 경이롭다” “삶은 슬픔이나 혼란이 뒤섞인 것이면서도 한편으론 희망을 갖게 하는 그 어떤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 점이 바로 시집 낙타와 모래꽃이 주는 미학”이라고 하셨어요. 끝없이 목마른 사막의 낙타와 그 목마름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사막, 그게 우리들이 살아내야 하는 삶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종일토록 모래바람 속을 걷는다
때도 없이 광풍이 일어
붉은 모래산들이 우뚝 일어서더니
한꺼번에 쏟아져 넘어진다
아지랑이 뜨겁게 쌓이는 언덕 위에
마천루로 솟은 소금기둥 하나
청록의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기둥 벽면에 박힌 거울 속에
수염이 허옇게 바랜 낙타 한 마리
지도에도 없는 가시덤불을 헤쳐
푸른 나무 한 가장이 물고 있다
모래꽃이 피어있는 곳을 가르쳐다오
신기루 향기는 沙丘에 가득한데
아직도 새로이 뛰기 시작한 맥박을
한 아름 안고 있는 발자국은
묻혀버린 발자국 위에
쌓이고 또 쌓이고
- 「낙타와 모래꽃 · 3」 전문
윤고방 : 네, 첫 시집에 나왔던 ‘바람꽃’은 감칠 맛나게 근사해 보이는 말이지만 사전에 보면 부정적이고 매우 음산한 예감을 주는 말인데 비해, 세 번째 시집 속의 ‘모래꽃’은 사전에는 없고 제가 만들어본 말입니다. 겉으로는 생뚱맞고 어색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긍정적이고 따뜻한 이미지를 실어 보려 했습니다. 지금은 최연수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계신 평론가 최 시인께서 저에게 멋진 옷 한 벌 지어 주신 격이라 감사드릴 일이지만, 여러 가지로 미흡한 제 시들에 대한 과분한 평가입니다.
나름으로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세상, 모래와 같은 메마름도 꽃으로 여기고 살아가겠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담고자 했는데, 과연 그 의도가 제대로 표현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임애월 : 멋진 시들이 많아서 시집을 읽는 동안 행복했어요.
이 시집의 서문을 읽어 보니 번복하신 게 있네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겠노라고 하셨던 젊은 날의 다짐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로 바뀌셨군요. 세상을 대하는 시선이 부드러워지는 건 연륜이 주는 넉넉함 덕분인지요?
윤고방 : 바쁘실 텐데 유심히도 보셨군요.(웃음)
숨겨 두었던 비밀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하지만 감사드릴 일이지요. 젊은 시절 등단 소감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겠다’는 다짐은 사실 세상을 미워하고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선 겉으로 보기에 비관적이고 염세적이로구나 하시겠지만, 감히 말씀드리자면 불교의 해탈을 염두에 둔 건방진 표현이었습니다.
궁극의 깨달음을 구하는 수도자로 살고 싶을 정도의 의욕 과잉 상태였다고 할까요. 나이 들고 나서 ‘다시 태어나지 않을 자신이 없어진다’고 중얼거리면서 젊었을 때의 뜻을 번복한 듯이 표현한 것은, 결국 탈속하지 못하고 쩔쩔매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솔직한 자괴감, 낭패감의 표현인 것이지요. 윤회의 질긴 사슬을 벗기가 어디 그리 쉽겠습니까.
임애월 : 아직도 하시고 싶은 일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금년에 네 번째 시집 쓰나미의 빛을 상재하셨지요?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시집 제목으로 쓰신 ‘쓰나미’라는 말은 그 자체가 무시무시하거든요. 거기다가 후쿠시마 사고 영상이 자꾸만 떠올라 정말 오금이 저려옵니다.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사고 비슷한 것도 이 지구상에 다시 일어나면 안 되는데 원전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우리나라의 환경을 생각하면 정말 걱정이 큽니다.
2011년 3월 11일을 기억하시는가
세상의 고요가 비명의 목청을 깨고 나오던 시각
거친 숨소리가 심해 절벽 갈라진 틈바구니에서
불덩이 잿덩이 바람덩이를 한데 휘몰아
검붉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던 시각
뼛속깊은데서부터오래오래대륙의향내를탐하며천지사방으로발기한햇살꿰어들고달리는섬하나있다굶주린神風에갈기세운깃발이다
땅 끝까지 바다 끝까지 울려 퍼지는
수궁악사들 구성진 너울의 장엄한 흐느낌 속에서
환태평양 불의 고리를 꿰어 든 알몸뚱이가 꿈틀거린다
얼굴 불콰한 마그마, 만취의 춤사위가 일렁거린다
가구라탈뒤에숨은웃음이빠안히보이는데마침내는천지사방에순백의피강물흐르게할그대는결코지울수없는쓰나미의깃발인것이냐
- 「쓰나미의 빛 · 1 - 깃발」 전문
윤고방 : 제 시 속의 쓰나미는 물론 물리적 자연현상 그 자체만은 아닙니다.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이란 나라는 거리만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뿐이지, 역사적으로 보면 너무나도 멀고 먼 나라 아니겠습니까.
고려시대만 해도 왜구의 침입이 530여 회, 때로는 500여 척의 배로 약탈과 살육을 저질렀구요. 임진왜란 때의 우리 측 희생자는 2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피해는 숫자로나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이 안 되는 국가적 민족적 피해인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시는 순수 서정의 산물이어야 하므로 지난 과거의 상처는 빨리 잊거나 모른 체해야 상책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듯하더군요. 순수 서정, 반드시 지켜야만 하지요. 그러나 또다시 약자가 되어 이웃의 부당하고 간악한 강자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어느 날 그때에도 우리들의 소중한 목숨이, 아름다운 서정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지난날의 저네들 조상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참회는 고사하고 반성조차 하지 않는 몰염치하고 부도덕한 강자에게 조물주가 내려줄 회초리는 쓰나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쓰나미의 내습을 알려주고 목숨을 잃은 엔도미키라는 착하고 희생적인 일본 처녀를 우리의 유관순에다 대비시켰고, 아베 정권이라는 부당하고 어리석은 강자는 반드시 침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예고하고 싶었습니다.
거칠다고 하면 거친 대로 딱딱하다고 하면 딱딱한 대로 목숨과 생존을 가장 고귀한 가치로 삼는 한 사람의 정직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좋은 게 좋다’는 미지근한 생각은 약육강식의 악순환 속에서 약자의 희생만 되풀이할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임애월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과거는 빨리 잊어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의 생각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우리들 모두 분명한 정체성과 역사관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누구든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시와 소설 등에서 반(反)원전 문학 장르의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어요. 시집의 제목으로 ‘쓰나미’를 강하게 어필한 뜻은 그런 활동의 일부라고 봐도 되는지요?
윤고방 : 넓은 뜻으로는 그렇겠지요. 그러나 원전 문제는 찬반의 논리가 너무나 뚜렷이 대립하고 있어서 쉽사리 어느 한 쪽으로 깃발을 흔들어 줄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 시대가 드리워 놓은 암울한 반 생명의 모순성과 위험성을 예감하고 경고하는 목소리를 우리 시인들도 외마디거나 신음이거나 간에 토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암울함 위에 빛을 던져 넣을 궁리도 해야 하구요.
임애월 : 물론입니다. 시는 서정이지만 시인들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에 대해 모른 척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송희복 평론가는 “연작시 「쓰나미의 빛」은 공적인 담화의 성격을 지닌다. 이 시가 추구하는 가치가 많은 사람들이 공명하는 공익의 가치와 무관하지 않아서”다 라고 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담보하여 편리성을 추구하는 원전의 두 얼굴을 이제 조금씩 경계해야 되지 않을까요?
윤고방 : 시는 결국 원론에 의지할 때 공허한 듯해도 가장 힘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핵의 잔혹무비와 효율극대의 두 얼굴 중 진정한 공익성을 위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생명성과 인간성을 최고의 잣대로 해야 한다면 당연히 비핵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학의 사명은 보다 원론에 충실한 목소리를 뚜렷이 내야 하는 것일 테고, 대안을 마련하여 차질 없이 미래를 준비하는 건 고심에 찬 정책 수행자들의 몫이겠지요.
임애월 : 네, 좋은 말씀에 공감합니다.
방향이 좀 다른 질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모님께 몸의 일부를 떼어주셨고, 애처가라고 근동에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윤고방 : 글쎄요, 소문이 과연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웃음)
혼인 후 약 20년은 정신없이 보냈지요. 사글세로 시작한 궁핍한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맞벌이를 하느라 아이들을 처가에 맡겨 놓고는 모자간에 눈물겨운 이별과 상봉이 계속되기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내에게 만성신부전증이라는 가혹한 짐이 지워졌습니다. 질병과의 지루한 싸움이 10년쯤 계속되고 보니 생명이 경각에 달리는 지경이 되었고, 혈액투석이냐 이식수술이냐의 고비에서 운 좋게도 혈액형이 같은 제가 신장 한 쪽을 주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미혼이었던 아들들이 서로 공여하겠다고 했지만 말렸습니다. 제가 워낙 여러 가지 일을 벌여 놓는 바람에 엄청나게 괴로웠을 아내를 생각하면 이 기회에 그 동안 진 빚을 갚아야겠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성장 과정에서 가정과 가족의 공백이 가져온 뼈저린 아픔을 맛보았기 때문에, 신장 공여는 아내와 가정에 대한 저의 애착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인 것이죠. 한편으로는 신장 공여로 해서 만약 몇 년 덜 살게 되더라도, 저는 현실과 수명에 관해 그다지 강한 집착을 갖지 않으므로 남은 인생을 얼마든지 알차고 만족스럽게 살 자신이 있었던 겁니다.
임애월 : 내 수명이 감해지더라도 괜찮다는 그 말씀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가정이 삶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자 근원이라는 그 말씀도 당연하십니다. 사모님은 건강하시지요?
윤고방 : 네, 남은 생애 동안 계속해서 면역 억제제를 쓰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약물 부작용에 시달릴 수밖에 없지만, 정기적으로 통원 치료를 하면서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임애월 : 그 정성으로 두 분 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진정으로 기원하겠습니다.
지난 달 바이칼문화제에 다녀오셨다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었어요. 올해가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이라 그 길을 되짚어보는 기념행사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까지 총 6,500km를 기차로 이동하셨다고요?
정확한 행사명과 어느 단체에서 주관을 했는지, 동참하신 분들은 어떤 분들인지도 말씀해 주시지요.
윤고방 : 네, 국제한민족재단에서 주관하는 행사였는데,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수백만의 한민족 식구들의 애환을 살피고 함께 하는 단체이더군요. 이번에는 1937년 스탈린 독재 체제 하에서 연해주에 살던 17만여 명 고려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80년을 회상하는 시베리아 횡단 행사를 치렀는데, 거기에 문인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습니다. 13~14일째 되는 날에는 카자흐스탄 국립대에서 제18회 세계한민족포럼을 열어 ‘남북한 정세와 동아시아 미래’와 ‘다민족다문화 공존질서’란 주제로 열띤 학술대회도 열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새한촌에서는 80년 전에 이곳을 쫓겨난 고려인들의 생존 흔적이 매몰차게 지워지고 있더군요. 우리 일행들이 그곳에 당도한 바로 그때, 이주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마지막 고택 한 채가 러시아 인부들의 해머로 부서지고 있었는데, 한쪽 벽에는 ‘서울거리2A’라는 도로명 표찰이, 그래도 다행스럽게 우리 본토인들의 임종 속에 숨을 거두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에서는 항일투쟁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의 비극적인 최후, 안중근 의사, 이준 열사와 이상설 의사의 흔적을 아픈 마음으로 돌아보았고, 하바로스크에서는 독립투사 이동휘, 김유천 선생과 아리따운 여성 김알렉산드라의 눈물겨운 투쟁 일화와 장렬한 최후를 생각하며, 모두들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말로만 듣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를 6박 7일 동안 횡단 열차를 타고 직접 보고 듣다 보니 참으로 감동의 연속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80년 전에 같은 시간과 공간을 한 달이 넘는 동안 소와 말을 나르던 화물 열차에 실려, 극도의 추위와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우리 고려인들을 생각하니, 감동은 오히려 불쑥불쑥 분노로 화하여 복받쳐 오르더군요.
저는 행사 진행자들의 양해를 얻어 시화문 기행첩 세 권을 완성했는데, 제게는 정말 평생의 기념이 될 만한 성과물이 되었습니다. 제 시화문 기행첩이 단지 아름다운 경치만을 담을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장에 대한 기록물로서도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앞으로의 작업 방향을 잡는 데에 이번 여행이 중요한 역할을 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행사를 주관하는 전 모스크바국립대 이창주 교수는 대단한 기획자요 열정가였습니다. 이번 순례단은 함세웅 신부, 이부영 전의원, 표완수 시사인 대표 등과 학자, 언론인, 예술가, 일반 시민, 학생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85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임애월 : 네, 정말 의미가 큰 행사였군요.
선생님께서는 거기서 헌시를 낭독하셨다지요?
윤고방 : 네, 순례단의 평화축제가 열린 곳은 신령스런 금강송 사이로 바이칼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박4일 동안 기차여행이 시작된 그 다음날, 행사 때 낭송할 시 한 편을 지어 달라는 주최 측의 제안을 받고 좀 당황했지요. 운신도 어려운 2층 침대칸에 뒹굴면서 기행첩 한 권을 완성해가는 틈틈이 시 창작의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끊임없이 척추를 통해 울려오는 철길의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주술가의 방울소리처럼 저의 무의식을 흔들더군요. 제목을 ‘울려오는 소리’로 잡았습니다.
임애월 : 아하, 아까 서재에서 그 ‘기행시서화첩’을 구경했는데 기행하면서 즉석에서 쓰신 작품이군요. 그래서 그런지 더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옛날 옛적
파미르고원에서 알타이산맥을 넘어
바이칼호를 건너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리고 달리던 만 년의 바람 속으로
울려오는 소리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오늘은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을 향하여 뻗은
시베리아 횡단 만 리 철길을 따라
들려오는 소리 있습니다.
고조선과 고구려와 드넓은 발해 벌판
잃어버린 발자국의 후예들이
차가운 화물열차에 짐짝으로 실려 떠나며
눈물의 아라리 한숨의 쓰라리에
실어 보내던 소리 있습니다.
자작나무 숲과 풀꽃들의 배웅 속에
당신들의 피와 살이 흩어진 땅 끝과
우리들이 높이 받드는 하늘 끝이
한데 어우러져 만나는 순간에
깨어나라 외치며 태어나는 섬광 한 줄기
그 빛나는 시발점으로 달려갑니다.
여든 해의 어리석음과 뉘우침을 싣고
둔중한 철마의 뼈마디마다 깊이 새겨진
그날의 통한마저 싣고 갑니다.
울리는 소리를 향해 갑니다.
너는 누구냐?
너희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우리는 누구냐?
- 「울려오는 소리」 ‘바이칼호 아리랑 평화축제’에 붙여
네... 나는 누구인지, 우리는 누구인지... 다시 되짚어 봐야겠습니다. 그곳의 풍습이 우리와 닮은 점이 많아 우리 민족의 시원(始源)이 그곳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시던데, 선생님께서는 그곳에 직접 다녀오셨으니 어떤 느낌이 드셨을지 궁금합니다.
윤고방 :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 저로서는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지요.
전체 길이가 약 620km로 거의 한반도 길이와 같은데 폭은 좁아서 우리나라 면적의 3분의 1정도라 하더군요. 우주선에서 보면 새파란 외눈처럼 보인다고도 하던데, 그 전체 모양을 보면 꼭 초생달같이 생겼어요. 달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시발점, 초생달? 무언가 신비스런 영감 같은 것이 번쩍하고 오는 것 같았습니다.
‘시베리아의 진주’라고 불리는 바이칼호, 학자들에게는 문화인류학, 고고학의 보물 창고로 여겨지기도 한다지요. 일찍이 육당도 이 일대의 토착 원주민인 코리 부랴트족의 서낭당 문화, 솟대 등의 무속 풍습이 우리와 흡사하여 우리 민족의 시원이나 이동의 주요 경로로써 주목했다 합니다. 그 외에도 이 호수의 알혼섬은 징기스칸 탄생설과도 관련이 있는데, 최근에는 우리나라 고전소설 춘향전과 나무꾼과 선녀의 근원설화와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조그만 마을 우슈토베와 고려인들의 무덤이 있는 바슈토베에 갔을 때는 특별한 비감에 젖었습니다. 1937년 강제이주 당시 10만명 가까운 고려인이 시베리아 엄동설한의 허허벌판에 내던져진 곳이었는데, 당시에 구덩이를 파고 목숨을 부지했던 참혹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쪽으로는 여름철인데도 바삭바삭 마른 풀로 가득한 낮은 언덕 아래, 녹슨 철 울타리로 둘러진 카자흐식 무덤들이 한많은 고려인들의 유골을 품고 있더군요. 저는 거기서 집행부의 요청으로 진혼시 한 수를 삼가는 마음으로 지어 바쳤습니다.
사흘 밤낮을 달려도 끝나지 않던 대평원,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허리통이 한결같이 하얀 자작나무들과 침엽수들의 길고긴 행렬, 시베리아는 우리 겨레의 오래고 오랜 고락의 숨결이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는 영육의 고향이자,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의 땅이라는 것을 감명 깊게 깨우치고 왔습니다.
임애월 : 그 자작나무 숲의 하얀 침묵을 하나씩 알아내야 하는 게 우리들에게 남겨진 사명 같습니다.
요즘 문단활동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해 주시지요.
윤고방 : 저는 등단 후 발표도 하면서 활동을 좀 하다가 근 20년 동안 문단 밖에서 딴 짓거리를 하며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다시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쯤 되고요.
생각해 보면 문단이란, 가까이 가면 너무 뜨거워 얼굴이 화끈거리고 멀어지면 등어리가 썰렁해지는 모닥불과 같은 것 아닐까 싶어요. 인간 세상은 고달픈 바다요, 때로는 한겨울 같기에, 위로 받기 위해 또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문학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모닥불 같은 문단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거 때만 되면, 별별 야릇한 일들이 벌어지곤 해서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 문인은 오직 작품으로 말하고 작품으로 승부해야 마땅할 것입니다만, 각자의 다양한 욕구를 서로 부대껴가며 살 수밖에 없다면 국가든 사회든 어디든지 맑고 혼탁함, 잔잔함과 소용돌이가 숙명적으로 병존하게 마련이겠지요.
돌아앉아서 비난만 하기보다는, 그래도 그 공동체에 직접 참여해서 어둠 한 주먹, 더러움 한 자락이라도 내 손으로 걷어내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다가 금상첨화로 내가 피워낸 꽃 한 송이나 맑은 샘물 한 줄기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 강물이 조금은 더 맑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임애월 : 네, 문인들도 사람이다 보니까 문단에 더러 민망한 일들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야바위꾼 같은 일부 문인들보다는 정말 문인다운 문인들이 더 많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이렇게 긴 시간 흔쾌히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의미 있고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윤고방 : 네, 함께 해 주신 임병호 회장님, 이상정 사무국장님, 이렇게 어수선한 곳을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돌아볼 수 있게 해 주신 한국시학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어린 시절, 한국전쟁의 포화 속을 고통으로 건너오신 윤고방 선생님.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치유의 방편으로, 시, 그림, 글씨, 도예, 연(鳶) 등 어느 하나도 예사롭지 않은 예술세계를 정립하고 확장하시는 데에 온 영혼을 불태우고 계신다.
자칭 ‘예술잡놈’이라고는 하시지만 이미 예술계에서 인정받은 그의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 치열한 예술정신이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더욱 강건하시기를 기원해 드린다.
■□ 시인의 자선시
짝사랑 외 4편
윤 고 방
평생 한 사람만 사랑했네 하고 중얼거리자
세상의 온갖 새들이 웃고 지나가더군
뜨겁게 내려 쌓이던 지난날의 햇살들
아직도 식지 않은 채 먼지로 쌓인 별빛들
내 품 안에 잠시 안겼던 사람들과
마음에 잠시 나를 품었던 사람들이
교차로에서 서로 몰라보며 지나가고
오방색으로 알록달록 치장한 그림자들이
다시 연기가 되어 날아가버린 오후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싶었네 하고 내뱉자
이번엔 아무도 웃지 않았네
물방울 나라
하나에 하나씩 몸을 섞어도
억만 개가 어느 새 또 하나가 되는
단단하고 끈끈한 수평선의 나라
물방울이 다스리는 나라에 살겠네
세상 구석 어디서나 우리는 외톨이지만
낮은 데로만 함께 흘러서
가장 높은 하늘에 닿는
돌아보라 세상은 넘치는 물소리뿐
죽어서 다시 죽어도 끝끝내 다시 돌아올
이 세월 이 땅 위에 오늘은
이름 없는 실개울도 분노의 소나기로 섰는데
가세, 눈물마저 마른 세상
웅덩이 한복판에 뿌리를 박고
뚝심 좋은 사랑으로 살겠네
겨울 주점에서
손끝에 맺히는 어둠을 따서 술을 담근다
토라진 옹이는 옹이대로 모아서
눈 시늉으로 우선 달래어 놓고
소갈머리 없는 알맹이도 하나
더 깊이 잠재웠다
따고 또 따도 열리는 어둠에야
이젠 눈 흘길 수도 없지만
바윗 벼랑 까치밥만큼이나
혼자 야물어진 껍데기를
어쩌면 녹일지도 몰라
뒷 고방에 과육 향내 터지는 날
발꿈치 팔꿈치 굳은 살 몇 점
여항간에 헤매다 돌아온
두꺼운 얼굴서껀 쉰 목청서껀
지글지글한 석쇠 위에 올려놓고
수액樹液 오르는 핏줄마다
달디달게 관솔불 당겨
청솔가지 옹이마다 화안히 취하는데
아무래도 손가락은 피멍진 어둠일 뿐
해 떨어지면 담그는 술을
동이마다 넘치는 어둠을
생살 터지는 오장육부에 두루 적시며
알맹이 울음 하나 들판에 깨어 있고
겨울도 노을을 따라
서쪽으로 가기 위하여
모두들 서쪽으로 간다
정육점이 보이는 길
끝없이 팽창하고 있는
빙하기의 허리 어디쯤에
덜미를 잡혀 있을까
정육점에 가 보면
사각의 유리벽 속에
구석구석 밖으로 통하는 길마다
틈새를 메운 성엣발과
살아 있는 살기殺氣로 형광은 붉게 타지만
참 신기하게도 편안히 정물靜物로 떠 있는
푸르붉은 살덩이가 보이지
더 가까이 다가서 보면
깨어 있는 꿈과 잠든 몸뚱이 사이를
용케도 발 가누고 섰는
우리들 이승의 별 하나도 보이지
꽃들의 낮은 비명을 딛고 열리는 아침에도
아직은 하늘에 별이 살아 있고
옷깃을 스치는 간빙기間氷期의 또 하룻날에
우리들의 살덩이는
고름과 진물과 한데 엉켜 웃으면서
쉬 쓸 듯 성엣발 속에 뒤를 묻고
껍질 질긴 씨 한 톨 뿌려야 하는데
누구나 생애에 꼭 한 번씩은
잊혀 완전히 돌아눕기 위하여
미명未明의 대지에 뿌리는 재 한 줌
가지고 떠나는 자들의
버리고 떠나는 자들의 어느 재 한 줌도
온전히 섞여 다시 불타서
허공 끝* 무극無極 밖으로
덜미를 풀어 던질 수 있을까
*동양철학에서 태극의 처음 상태. 우주의 근원.
어둠 환상곡 1
옛날 옛적 가슴 깊은 곳에
단단하고 예쁜 어둠 하나 묻어 두었다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눈보라에도 고개 숙이지 않는
까맣게 빛나는 씨앗 한 톨
두꺼운 땅 속에서 움텄다
줄기에 잎이 무성해지는 날
꽃 한 송이 피어날 텐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일수록
땅 속 어둠이 고향인 줄을
눈 밝은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꽃 지고 맺히는 까만 씨앗 한 톨은
반드시 눈물 속에 묻어야 한다는 걸
눈 밝은 세상일수록 알지 못한다
- 윤고방 시인 프로필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석사),
현대문학 초회 추천(1978), 한국문학시 부문 신인상(1982) 등단
시집 하늘 가리고 사는 뜻은(1990), 바람 앞에 서라(2007),
낙타와 모래꽃(2012), 쓰나미의 빛(2017) 등
한국문협, 국제PEN한국본부 운영위원, 미네르바문학회 회장
경기문학상 본상, 제1회 한국문학인상 수상, 미네르바 편집위원
한국미술대전 특선 3회 등 문인화부 초대작가
KBS갤러리 기획초대전 등 개인전 5회 및 다수 출품
문협 평생교육원 현대시서화 강사(전), 현대시서화연구원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