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지충 바오로 (1759-1791)
생애>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1759년 진산에 거주하던 양반인 아버지 윤경(尹憬 1723-1771)과 어머니 안동권씨 권기징의 맏 딸 권조이(權召史 1724-1791)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산 윤선도의 6대손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는 그의 동생이다.
천주교 창설기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윤지충과 인척관계에 있다. 윤지충의 고모가 마재 정재원의 후처로 출가하였다. 이벽은 사돈이 되고 이승훈은 고총사촌 매형이 된다. 정약용은 고종 사촌, 호남의 사도 유항검은 이종 사촌, 권상연 야고보는 외 사촌이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윤지충의 아버지 윤경(尹憬)은 양반이었으나 가정 형편이 가난하였는데 한의학(漢醫學)으로 성공해서 먹고 살 만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약업은 가업이 되었다. 윤경의 아들 윤지헌 역시 한약업에 종사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윤지충은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였고 1783년 봄 초시에 합격해서 진사(進士)가 되었다.
1784년은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된 해이다. 이벽의 연구와 권고로 이승훈이 최초로 영세를 하고 귀국한 뒤, 이벽 이승훈 권일신등의 공동창설자들에 의해 세례가 베풀어지고 교회가 창설되었다. 그 해 겨울 정약용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윤지충은 이 무렵에 고종사촌 정약용(요한) 형제들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1784년 한양에 상경해 김범우를 통해 《천주실의》와 《칠극 七克》 을 빌려와 탐독하였다. 1787년 정약전 안드레아를 대부로 삼고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바오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뒤 윤지충은 외사촌 권상연에게 선교하였다.
1791년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순교하는 진산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천주교회의 박해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중국에 진출한 수도회들의 선교지 의례문화에 대한 편파적인 이해와 충돌 상급기관(교황청) 보고 , 그리고 교황청의 선교지에 대한 깊은 숙고와 배려가 결여된 대책 지시로 빚어진 일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진산사건을 촉발시킨 중국)교회 의례 논쟁에 대해 보도록 한다.
예수회의 중국)동방 선교 방향 >
예수회는 16세기 말 중국 선교에 진출하였다. 당시 이 수도회는 동방선교를 위해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동방 국가의 신뢰를 얻기 위해 선교사들에게 건축학ㆍ토목학ㆍ천문학ㆍ물리학ㆍ수학 등 과학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들을 선발하고 교육하여 파견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고 전교를 할 수만 있다면, 그 나라의 문화를 인정하고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보유론과 적응주의 원칙 입장이었다. 예수회의 중국선교는 1576년 마카오에 선교부가 설치되면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으로는 1587년 이탈리아인 선교사 마태오 리치(Matteo Ricci)의 입국과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마태오 리치 신부는 중국 선교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유학자들의 옷을 입고, 중국어를 배우고 유교와 공자 숭배 조상 공경과 제사 등의 전통과 관습을 이해하고 존중하였다.
중국 의례에 대한 예수회 내부 결정>
마테오 리치 사후 예수회 중국 지구 회장 직무를 계승한 롱고바르도(N. Longobardo)는 조상 제사 허용 여부와 ‘하느님 Deus’에 대한 중국어 용어 사용 여부에 대해 수도회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1628년 1월 롱고바르도는 수도회 내부 회의를 개최했고,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Deus(하느님)’에 대하여 ‘천주’(天主)라는 용어로 통일했다. 다른 하나는 조상제사에 대해 효경의 차원에서 허용하는 원칙을 세웠다.
중국 의례에 대한 수도회 간의 갈등 전개>
중국에서 그리스도교 선교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예수회보다 반세기 늦게, 도미니코 수도회(1632년) · 프란치스코 수도회(1633년; 외에 프랑스 외방 전교회, 아우구스티노회)도 중국 선교를 시작했다. 그런데 도미니코 수도회는 이미 스페인령 필리핀에서 반 적응주의 선교를 펼쳤었다. 도미니코회 선교사인 모랄레스(J. B. Morales)는 복건성 복안에서, 세례를 받고 선교 교사로 활동하는 중국인 왕다두(王達竇)가 조상 제사를 바치는 것에 대해 미신 행위라 단정하고, 17개 조항의 문제점을 교황청에 제기하였다. 모랄레스는 1643년 직접 로마로 건너가 당시 우르바노 8세 교황에게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전교 방법의 ‘가부可否’ 결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의 급서로 후임 인노첸시오 10세 교황(재위 1644년~ 1655년)이, 1645년 9월 12일 종교,재판소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사 의례를 금지한다'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예수회에서는 1651년 마르티니(M. Martini)를 로마로 파견해,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종교적 의미가 없음을 강조했고, 만약 금지한다면 중국 선교가 불가능해진다는 이유로 교황 훈령을 해제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알렉산데르 7세 교황(1655~1667)은 1656년에 “중국의 신자들은 공자와 조상을 기리는 의식에 참여할 수 있다”라는 훈령을 내렸다.
1659년 도미니코회 선교사 폴랑코(J. Polanco)가 조상 제사에 대한 교황의 ‘금지와 허용’ 훈령 중 어느 훈령을 따라야 하는지를 교황청에 질문하자, 1669년 클레멘스 9세 교황(1667-1669)은 “모두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 구체적 환경에 따라 적용돼야 한다”는 절충안을 발표했다.
그 이후 중국 교계 제도의 변화로 파리 대학 신학박사인 메그로(C. Maigrot)가 1684년 복건성 종좌대목(주교)에 임명되자, 1693년 3월 20일 그는 자신의 교구에서는 중국 의례를 엄금할 것을 천명했다. 이에 북경에 거주하는 예수회 선교사 그리말디(P. Grimaldi), 토마스(A. Thomas), 페레이라(T. Pereira), 제르비용(J. F. Gerbillion) 등은 청나라 황제 강희제에게, 의례 문제에 대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달라는 청원서를 올려 황제의 의중을 파악했다. 황제는 “아무것도 고칠 것이 없다”라며 예수회 생각과 같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후부터 중국에서 가톨릭 전례 논쟁은 수도회 간 문제에다 교황과 황제와의 문제가 추가되었다.
■ 교황과 황제 간 중국 의례 논쟁
1704년 11월 20일 클레멘스 11세 교황(재위 1700~1721)은 ‘천주’ 호칭만을 허락하고, 중국인들이 공경하는 공자를 포함하여 조상에 대한 '제사 금지'를 선포하면서, 교황 특사 투르농(C. Tournon)을 파견해 청국 황제 강희제를 설득하고자 했다. 1705년 12월 4일 북경에 도착한 투르농은 황제인 강희제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1706년 유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대신 자신을 보필하고 있던 ‘중국통’이라 불리던 복건 대목(주교) 메그로(C. Maigrot)를 황제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투르농이 12월 17일 남경에 도착했을 때, 강희제가 “한자도 제대로 모르는 자가 감히 중국의 도를 논한다”라며 주교 메그로(C. Maigrot)를 쫓아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투르농은 1707년 1월 25일 ‘남경 명령’을 공포했는데, 그 내용은 중국에서 의례 금지 명령과, 황제가 천주교에 관해 묻는 것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에 격노한 강희제는 교황 특사 투르농 일행을 마카오로 추방함과 동시에 중국에서 전교를 희망하는 선교사들은 인표(印票)를 소지하도록 했다. 인표(印票)에는 “영원히 서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등의 내용이 기재돼 있었고, 선교사는 마테오 리치의 규율을 따를 것을 선서한 후에야 발급받을 수 있었다.
1715년 3월 19일 클레멘스 11세 교황(재위 1700~1721)은 칙서 「그날들」(Ex illa die)을 통해 ‘중국 의례에 대한 7개 조항’을 선포했다. 내용은 ‘천주’ 이외의 용어 사용 금지, 중국적 전통과 관습인 조상제사 및 공자 제사 금지였다. 단, 망자의 이름 위에 반드시 ‘천주교 효경부모지도리’(天主敎孝敬父母之道理)라고 적어야만 위패 사용이 허락됐다.
클레멘스 11세 교황은 메차바르바(C. A. Mezzabarba)를 2차 교황 특사로 중국에 파견했다. 1720년 12월 25일 북경에 도착한 메차바르바 특사는 강희제에게 ‘전교허용 및 중국 의례 금지령’을 실시하게 해 달라는 것이 자신이 온 목적임을 밝혔다. 강희제는 “천주교 전교 금지는 교황 칙서 「그날들」(Ex illa die) 때문”이라고 말하자, 메차바르바 특사는 칙서를 변형시켜서라도 강희제와의 타협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메차바르바 특사가 남긴 ‘준행 8조’(准行八條)다. 메차바르바 특사는 1721년 1월 14일 ‘준행 8조’로 황제의 호감을 사려고 했으나, 황제의 생각에 변함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지체없이 중국을 떠났다. 1722년 강희제의 서거로 다음 황제가 된 옹정제는 1724년 과학 분야에 종사하던 선교사만을 남기고 모두 중국 밖으로 추방시키고 선교 금지 명령을 내렸다.
■ 중국의례 논쟁의 종결 및 이후
1742년 7월 11일 베네딕토 14세 교황(재위 1740~1758)은 칙서 「경우에 따라서」(Ex quo singulari)를 선포해, 1715년의 칙서 준수로 더 이상 중국에서 의례에 대한 논란을 금지시킴으로써 의례 논쟁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이 논쟁의 여파로 예수회는 1773년 7월 21일 클레멘스 14세 교황(재위 1769~1774)에 의해 해산되었다. 당시 서양 수도회들의 선교권 쟁탈전은 전쟁에 가까웠다. 이제 북경 선교는 예수회 대신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활동하게 되었다. 밀사 윤유일 바오로가 중국을 넘나들며 이들과 접촉하였다.
이후 1930년대 만주국(滿洲國)의 공자 숭배에 대해 비오 11세 교황은 1935년에 천주교인의 공자 공경 예식 참여를 허용했고,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허용했으며, 1939년 12월 8일 비오 12세 교황은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선포해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가 허용됐다.
■ 중국 의례논쟁이 조선 천주교회에 미친 영향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중국에서 선교하던 예수회를 해산한 이후, 중국 의례 거행 반대쪽에 서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가 조선 천주교회를 관리 감독하였다. 따라서 조상제사 금지는 더욱 엄격하게 되었다. 1791년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의 진산사건과 1801년 신유박해 등은 한국 천주교회와 조상제사와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참조 신의식(멜키올) 교수 가톨릭 사전/위키백과 사전>
조선 천주교회는 1790년 9월 윤유일 바오로를 북경 밀사로 파견하여 성직자 영입과 교회가 궁금해하는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그중에는 신주와 제사 문제가 있었다. 당시 북경 주교인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구베아 주교는 교황 베네딕토 14세(중국 의례 금지) 와 교황 클레멘스 14세(중국 의례 논쟁으로 인한 예수회 해산) 결정과 선언에 따라 “주님의 존재와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따르는 조선의 교우들을 교회의 가르침 또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것이요... 이미 우리 중국 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신주나 위패를 봉헌하는 것을 미신으로 금해 왔으며, 공자에 대한 숭배나 조상에 대한 숭배도 금지해 오고 있소 그러니 조선 교우들도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야 하오...” 라고 하며 제사금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전달하였다.
1791년 윤유일 바오로에 의해 조선에 전달된 북경 주교의 제사 금지령 회답 이후, 초기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가던 지도자들이 일부 이탈하였다. 권철신은 두문불출하였고,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이 돌아섰다. 정약종은 오히려 분발하였다. 그런데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유난히 다르게 행동하여 진산사건으로 이어졌다.
윤지충 바오로, 진산사건>
조선은 유교를 지배적으로 신앙하던 유교 국가였다. 유교의 최고 덕목은 효(孝)와 충(忠)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금기가 깨어지는 일이 진산에서 발생하였다. 윤지충은 정약전을 대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후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와 동생을 입교시켰고 인근에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였다. 1791년 5월 그의 어머니 권씨가 세상을 떴다. 그녀는 임종시에 장례절차를 천주교 교리에 맞게 하라고 유언했다. 윤지충을 이를 따랐다. 불과 반 년전인 1790년 10월 22일 밀사 윤유일은 귀국하면서 구베아 주교의 '제사와 신주 봉안 금지' 사목교서를 받아와 전파하였다. 윤지충은 사목교서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제사를 올리지 않고 신주를 불태웠다. 이웃에 살던 그의 사촌 권상연도 이를 따라 자신의 부모에 대한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 두 양반 집안이 이렇듯 삽시간에 큰 변화를 일으키니 친척과 친지 집안들과 관가에서 말썽이 아니 될 수 없었다. 이 두 형제의 행위는 먼저 친척과 친지들의 분노로 이어지고 관아에 알려지고 조야에 알려졌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노론의 측근인 홍낙안은 정적을 쓰러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앞장서 상소문 통문등의 여론을 선동하였고, 윤지충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지자 그는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공주로 도망갔으나, 관가에서 포졸들을 널리 풀고, 삼촌이 볼모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1791년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은 같은 남인이며, 두 형제의 죽음을 막고자 두 사람을 달래며 불충과 불효를 추문하고 이단을 버리라고 설득했지만,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가 있었음에도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이에 윤지충과 권상연(權尙然) 두 사람은 전주 감영에 이송되었다. 전라 감사의 배교 회유와 신자들의 이름을 발설하도록 갖은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천주 교리를 설명하면서 유교적 제사의 불합리한 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고, “ 천주님을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올린 보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쳐, 1791년 12월 8일 33세로의 나이로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당하였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순교의 칼날을 받았다. 잘린 목은 5일 동안 효수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다. 윤지충은 예수님과 같은 나이, 숨진 시간도 같은 오후 3시였다.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은 5년 동안 현(縣)으로 강등하여 전라도 53개 고을의 마지막에 두도록 했다. 또한 진산 군수 신사원은 사건을 방임한 죄를 물어 형장 100대에 삭탈관직하여 유배토록 했다.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 윤지충·권상연이 처형된 후 9일 만에 장례 허락을 받고 친척과 친구들이 장례를 치루었다.
두 분의 참수 처형은 천주교의 확산을 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주교 전파의 불씨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윤지충이 옥중에서 남긴 공술기(供述記)는 「죄인 지충 일기」라는 이름으로 필사되어 신자들 사이에 성경을 읽듯이 영적독서(靈的讀書)로 소중하게 읽혀졌다. 1801년 초기 교회 지도급 인물이었던 최해두(崔海斗)라는 양반은 경상도 흥해(興海)에서 유배살이를 하며 참회록인 「자책(自責)6)」을 썼다. 이글에서 그는 영웅적으로 죽은 순교자들이 있지만 “진산(晉山)의 윤지충과 권상연만은 못하다”고 했다.
* 죄인 지충 일기
1795년 진산사건 직후 심문 과정에서 윤지충은 천주학에 접하게 된 경과와 사건의 경위, 그리고 자신의 심경을 자세히 적은 ‘죄인지충일기(罪人持忠日記)’를 작성했다. 그 내용은 다블뤼 주교가 쓴 ‘조선주요 순교자약전’에 전문이 번역되어 실려 있고,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전재되었다. 한글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사학징의(邪學懲義)’ 끝에 부록으로 실린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 집을 수색해서 적발한 천주교 관련 도상과 교리서를 압수하여 불태우기 전에 압수품 목록을 적어둔 내용이다. 그 중 윤유일의 조카 윤현(尹鉉)의 집에서 압수한 엄청나게 많은 천주교 관련 서적 목록 중에 ‘죄인지충일기’ 1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기록이 실물로 존재했던 것은 틀림없다.(정민 교수 자료 발췌)
참고: 인터넷 자료/차기진, 고난의 밀사 윤유일/교회사 강의록(서울 가톨릭대)/정민, 다산 독본
|
첫댓글 2024년 5월 29일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성인과 순교자는 존재의 완벽보다 신앙의 무모함이 있다. 이벽,권일신,윤지충과 권상연,정약종,황사영, 강완숙등이 그렇다. 놀랍고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