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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및 本貫의 由來)
수원백씨는 중국의
인문초조(人文初祖)인 헌원황제(軒轅皇帝)의 후손이다. 백씨 성을 처음 사용한분은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평왕(平王) 의 태자인 건(建)의
아들 승(勝)이다. 그는 서기 400여 년 전에 황제가 백읍(白邑:현재 河南省 息縣)을 봉해줌으로서 읍의 이름인 백(白)자를 성씨로 쓰게 된
것이다.
역대 백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 백우경(白宇經 )의 자(字)는 경천(擎天), 호(號)는 송계(松溪)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다. 원래 당(唐)나라 소주(蘇州) 사람인데 인품이 고결하고 학문이 뛰어나 벼슬이 당나라 첨의사(僉議事)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나라 간신배들의 모함을 당하자 서기 780년(신라 宣德王 元年) 스스로 당나라를 떠나 신라로 건너왔다.
시조 송계공은
계림 자옥산(鷄林 紫玉山) 기슭에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거처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덕왕(宣德王)이 몸소 찾아와 영월당
현판에 경춘(景春)이라고 쓰고 암자(庵子) 이름을 정혜사(淨惠寺)로 고쳐 주었다.
그는 그 곳에서 도(道)를 닦으며 불교를 포교하는데
힘쓰니 한때 정혜사에 일곱 암자가 딸려 불교가 번창하고 유교 교육에도 정성을 다하니 그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시초라고 한다. 세월이 오래되어
정혜사는 간데없고 그 터에 남아있는 13층 석탑(石塔)만이 국보 제40호로 지정되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는 그 뒤 당나라
황제의 귀국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으나 끝내 귀국하지 않고 신라에 남아 신라의 대상(大相)을 지내다 73세에 운명하였다.
시조공의 묘는
옥산 남쪽 기슭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실전되었던 것을 그곳 주민들이 ‘백정승의 묘’라고 일컫는데서 실마리를 찾아 1965년
시조공의 묘(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백릉곡 남록해좌 소재)를 추심하는데 성공했다.
수원백씨는 시조공에서 중시조 휘(諱 ) 창직(昌稷)에
이르는 세계(世系)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그 사이의 선조를 선계(先系)로 모시고 세계가 확실한 중시조를 1세로 기세(起世)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중시조의 자(字)는 화숙(和叔)이요 시호(諡號)는 영희(英禧)이며 벼슬은 중랑장(中郞將)이다. 배위(配位)는 신라
경명왕(景明王)의 딸인 상화공주(尙和公主)이며 계배(繼配) 진천임씨(鎭川林氏)는 고려 2대왕인 혜종의 비(妃) 임씨와
자매간이다.
수원백씨는 시조 송계공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린지 1,200여년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며
국가경영에 이바지하고 있다.
수원백씨는 지금 남북한을 통하여 70여만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남한에만 33만 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하고 있어서 한국 성씨 가운데 27위를 차지하는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알려져 있다.
*고령에 정착하게 된 시대와 배경
수원백씨 16세손 휘 순중(順中) 공조참의(工曹參議)께서 1551년 3월 초순에 전북 장흥군 안량면
기산리에서 고령군 안림리로 이우(移寓)하여 정신재공파(靜愼齋公派) 입향조이다.
수원백씨 파명록(派名錄)에 보면 29개 파로 분류하고
있다. 그 가운데 고령에는 현재 정신재공파를 비롯해 도승지공파(都承旨公派), 산음공파(山陰公派), 훈정공파(訓正公派), 선정공파(禪亭公派),
담암공파(淡庵公派), 별좌공파(別坐公派), 문경공파(文敬公派) 등 8개 파 150여 가구 400여 후손이 자자손손 대를 이으며 세거하고
있다.
수원백씨 고령군 종친회에서는 쌍림면 산주리 백고재(白高齋)에서 매년 춘계제향(春季祭享)을 올린다. 백고재가 건립되기 전에는 고령세거
종인들이 한 자리에서 춘제를 지낼 수 있는 재실이 없어 고심하던 중 2006년부터 고(故) 소송(小松) 백동제(白東濟)씨가 사재를 투입해 짓기
시작했다. 그러다 소송께서는 재실을 미처 완공하기 전인 2008년 운명을 달리했다. 장남 백창조씨가 부친의 큰 뜻에 따라 공사를 계속하여 5년
만에 완공, 수원백씨 고령문중(高靈門中)에 기증했다. 재실을 백고재라 명명하고 입구 관문은 소송께서 덕을 많이 베풀었다고 덕선문(德宣門)이라고
현판했다.
영산(靈山)인 가야산 정기 뻗어 내린 만대산(萬代山)의 기상이 살아 숨 쉬는 천하제일의 명당 터에 소송이 사재로 재실을 건립한
것은 수원백씨 고령문중의 숭조(崇祖), 돈종(敦宗), 교손(敎孫)의 전당으로 선조의 덕업선양(德業宣揚)과 후손들의 단합을 위한 사업이었다.
이러한 큰 뜻을 수원백씨 고령문중 종인들은 충.효.선을 생활이념으로 하고 종친 단합에 더욱 힘쓰고 있다.
휘(諱) 동제(東濟)의
호(號)는 소송(小松)이며 보명(譜名)은 우기(又基)이다. 소송은 시조(始祖)로부터 29세이며 파조(派祖) 휘 장(莊)의
17세손이다.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한 13대조 휘 순중(順中)이 수원백씨 고령 입향조(入鄕祖)이며, 증조고(曾祖考) 휘 상헌(尙憲),
조고(祖考) 휘 병규(炳圭)이다.
소송의 부친 휘 원대(元大)께서 수원백씨 초대 고령종친회장으로서 숭조(崇祖), 돈종(敦宗),
교손(敎孫)에 열과 성을 다 하여 종친간 대동단결을 이룩했고, 빈곤으로 인해 불취학(不就學) 아동을 위해 야간공부방을 개설, 일족의 문맹퇴치에도
부단히 노력했다. 비는 서흥김씨(瑞興金氏)이다.
소송(小松) 백동제 공은 1934년 2월 26일 고령군 쌍림면 신곡리 193번지에서
출생하여 성장과정에 엄친슬하(嚴親膝下)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가세가 빈곤하여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이 후
(주)성림축산(成林畜産) 대표이사로 기업을 경영했고, 대구라이온스클럽 총재를 역임하고 노후에 향토의 발전과 정신문화개도를 위해 입향,
(사)대한노인회 제16대 고령군지회장을 역임했다. 지회장 재임 시 노인복지 향상에 힘쓰고, 효친경로사상의 고취와 윤리도덕의 실천을 강조해 왔다.
특히 천성이 중후하고 도량이 넓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매사에 진력하는 노력가로서 주위에 칭송이 자자하다.
특히 선고의 유지를 이어받아
숭조, 돈종사상이 투철하여 종친들의 천거에 의하여 수원백씨 대구종친회장과 전국백씨중앙종친회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성씨총연합회 수석부총재와
세계백씨연의회(世界白氏聯誼會) 고문, 그리고 백씨 발상지인 옥산세사(玉山世祠)에도 공로가 지대하며 가문의 명성을 보전해 왔다.
또한 소송은
이미 30여 년 전에 청운장학재단을 설립해 가난으로 공부를 하기 어려운 관내 학생들을 발굴해 매년 수천만 원씩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
장학사업은 고인이 떠난 후에도 장남 백창조씨가 부친의 큰 뜻을 이어받아 청운장학재단 이사장을 맡아 이어가고 있다.
이 밖에도 소송의 업적은
많다. 만대산 아래 납골당을 건립해 당초 가족묘지로 하려던 계획을 바꿔 관내 일족은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 관내 집성촌 및 문중을 빛낸 인물
안림리 신곡에 8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고, 산주리, 백산, 고령읍, 성산면
득성, 다산면 등에 30여가구, 총 400여 종인들이 관내에 세거하면서 매년 춘계제향(春季祭享)에 많은 종인들이 참석, 특히 종인 단합이
돋보인다.
현재 수원백씨 고령종친회 회장을 올해로 10년째 맡고 있는 백원치(白員治, 74)씨이며, 백재호 총무와 손발을 맞춰가며 종친
단합에 특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그리고 전국백씨중앙종친회장을 역임한 고(故) 소송(小松) 백동제(白東濟) 회장을 비롯해 수원백씨경상북도
종친회장을 역임한 백경기(白景基, 文道)씨, 백정현(白正鉉) 대구지검 부장판사는 백경기씨의 차남이다.
그리고 백창조 청운장학재단 이사장,
백종범 창원대 교수, 백재헌 대한민국미디어본부장, 백무조 초등학교 교장, 백봉주 울산병원장, 백학기 전 삼성재단 제일모직 이사, 백덕길 동대구
농협장, 고 백상기 수원지검장 등과 이 외에도 수원백씨 고령문중을 빛낸 인물들이 많다.
/자료정리 최종동 논설위원
자료제공
시조공 29세손 백경기(白景基, 文道),
시조공 29세손
백원치(白員治)종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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