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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호 동쪽, 제천시 청풍면과 수산면 일대는 ‘아마추어 암릉길의 보고’라 해도 좋을 만큼 무수한 바위능선들이 갈래를 뻗고 있다. 충주호 서쪽에 이웃한 충주시 입장에서는 샘이 날 정도로 조망 좋은 암릉길이 산재해 있다.
예전부터 등산꾼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던 이 암릉길들은 86년 충주호가 생겨난 이후부터는 더욱 주가가 오른 상태다. 멀리 월악산이며 주흘산쪽으로 펼쳐진 첩첩산릉만으로도 기막힌데, 아름다운 굴곡의 호안선을 가진 짙푸른 충주호 풍광이 거기에 보태졌기 때문이다.
충주호에 꼬리를 담근 이 지역 산릉 그 어느 것을 잡아 올라도 감탄스런 호수 풍광이 펼쳐진다. 그중에도 제천꾼들이 한 손 안에 꼽아드는 최상급의 절경 암릉들이 있으니, 신선봉~미인봉~조가리봉에 이르는, 청풍문화재단지 동쪽 바로 옆으로 흘러내린 암릉이 그중 하나다.
동산, 망덕봉 능선과 더불어 충주호를 향한 3대 암릉길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신선봉 능선을 제천 꾼들로부터 소개받아 9월8일 산행에 나섰다. 이틀 전 큰 비가 내려 충주호가 혹시 흙탕물로 부옇게 흐려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했지만, 만수위의 충주호는 속속들이 진한 짙푸름으로 채워져 있었다. 미처 숲에 스며들 새도 없이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호우만 아니면 충주호가 흙탕물로 흐려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제천꾼들은 일러준다.
충주호반에서도 산행은 낮은 곳인 호숫가에서 시작, 높은 산정을 향해 오르는 것이 정석처럼 굳어 있다. 그러나 호수가 이 산행로에서 가장 중요한 경관 포인트라면 굳이 호수를 등지고 오를 이유가 없다. 호수를 등지고 오르다보면 좋은 조망점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그래서 우선 동쪽의 높은 산정인 신선봉에 오른 다음 호수를 마주 바라보며 내려가는 산행을 하기로 했다.
몇 해 전 갑오고개(하오개) 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되었기에 산행은 이곳 갑오고개에서 시작, 주능선을 따라 올라 900m봉~신선봉으로 이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제천꾼들은 갑오고개에 오르기 훨씬 전인 상학현 마을에서 차를 세운다. 갑오고개에서 신선봉까지는 숲이 울창해 충주호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시원한 사태골로 올라가자는 방태식 회장의 제안이다. 취재산행로는 그렇게 신선봉~미인봉~조가리봉으로 정해졌다.
호수쪽으로 하산하며 호수 풍광 보기로
상학현 마을 앞 널찍한 공터에서 하오개쪽으로 100여m 더 올라간 지점의 도로 오른쪽에 사태골로 접어드는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 있다. 입구에 아무 팻말이나 표식이 없지만, 도로를 따라 걸어오르다 보면 쉽게 눈에 띈다.
차량이 겨우 드나들 좁은 콘크리트 포장길로 접어들자마자 나서는 갈림길목에서 계곡 길은 우측이다. 200m 남짓 더 간 곳에서 오른쪽으로 또한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왼쪽의 직진 길을 택해야 한다.
용소라 이름 붙은 큼직한 소도 있는 사태골은 숲이 워낙 짙고 날씨마저 흐려 어둡고 침침해보였다. 등산로를 겸한 임도가 계곡에서 다소 거리를 두고 나 있어 계곡 구경을 제대로 하기는 어려웠다.
신선봉 정상은 누렇고 모난 돌들로 큼직한 돌탑이 쌓여 있다. 이 돌탑만 아니면 하나의 독립된 봉 정상임을 쉽게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밋밋하다. 주위는 짙은 숲으로 가려 조망 또한 전혀 없다.
신선봉에서도 평탄한 능선길을 따라 800m 남짓 서쪽으로 나아간 뒤에야 비로소 호수가 바라뵈는 암부에 다다랐다. 날이 흐린 데다 안개마저 몰려와 답답했던 숲속의 침침한 분위기를 훌쩍 거두어내는 듯한 기분으로 활갯짓을 하며 오른 이곳 능선 머리에서 바라뵈는 충주호는 아직 손바닥만 했지만, “야, 호수다!” 하는 감탄과 더불어 일행을 한 자리에 모여 서게 했다.
짧거나 다소간 길며, 간혹 매우 가파른 바위지대 중간의 어느 동앗줄은 중간이 끊어져 있다. 누군가 매달린 상황에서 끊어졌다면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것 같다.
로프 없이는 거의 통행이 불가능한 20m 급경사 절벽지대에 다다랐다. 중간중간 손으로 잡기 좋으라고 매듭을 지어둔 굵은 로프가 설치돼 있긴 하지만, 아까 끊어진 동앗줄을 본 탓에 안심하고 매달리기가 불안하다. 절벽에 겁먹고 혹 중간에 실수할 염려가 있는 초심자 한 사람은 가져간 보조자일로 만약을 대비해 확보한 뒤 내려보냈다.
왼편 저쪽으로 호수 풍경이 펼쳐지는 암릉길은 그 후로도 연속되었다. 바위턱을 손으로 잡거나 밀며 발 아래가 아찔한 절벽이기도 한 암릉길을 가는 재미에 빠졌다가, 기암 노송이 호수와 어울린 풍경을 만나면 잠시 멈추어 서로 기념사진을 찍어주기도 하면서 산행을 이어갔다.
바위지대 위의 소나무들은 늘 수분이 부족한 상태에서 생장하며 자연스레 이리 틀리고 저리 휜 멋진 형상으로 자란다. 신선봉~미인봉~조가리봉 능선 전 구간에서 이렇듯 일부러 철사로 틀을 잡아 키운 것 같은 노송을 수없이 만났다.
깊이 안부로 떨어졌다가 다시 오밀조밀한 암릉길을 더듬어 오르자 거기서는 코뿔소의 두상을 닮은 코뿔소바위가 기다리고 있다. 제천사람들은 충주호에서도 청풍문화재단지 근처의 호수면을 일러 청풍호라 달리 부른다. 이곳 코뿔소바위에서는 청풍호가 한결 넓게 드러나뵌다. 발 아래가 절벽임을 깜박 잊게 하는 절경이다.
학현리 아름마을 민박으로 내려가는 갈림길목엔 신선봉 2.2km, 미인봉 1.2km 팻말이 걸려 있다. 이곳 이후부터 한동안은 또한 숲으로만 길이 이어지다가 미인봉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다시 조망이 터졌다. 미인봉 정상 동쪽의, 호수가 아니라 우리가 내려온 능선이 바라뵈는 그늘 아래 암반에서 점심 도시락을 풀었다. 이 봉은 저승봉이라는 음산한 이름으로 불리다가 최근 제천시가 미인봉으로 바꾸었다. 절반쯤이 맑고 깨끗한 화강암으로 드러난 이 봉이 왜 저승봉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호수쪽 풍경은 진작에 끝난 것 같은데, 방태식씨는 아직 조가리봉이 남았다면서 수통을 챙겨 넣는다.
쪼개진 나무팻말이 걸려 있는 미인봉 정상(596m)을 넘자마자 왼쪽 갈림길로 내려가야 조가리봉 방향이다(오른쪽은 급경사 샛길). 여전히 오르락내리락 하며 이어지는 능선의 암부가 드러난 곳이면 어디든 호수가 뵈는 조망처였다. 고사목, 바위 사이에 뿌리내린 뛰어난 조형미의 소나무들도 여전히 풍경을 돕는 장식물로 따라왔다.
저 앞의 조가리봉은 그 어원이 쪼가리가 아니라 조의 낟가리라고 방태식씨는 말한다. 비록 높이는 582m에 불과하지만, 쪼가리라 하기엔 솟아오른 덩치나 기세가 너무 당당하다.
왼쪽으로 300m만 가면 정방사 안내팻말이 선 갈림길목을 지나 곧 조가리봉 정상에 섰다. 동전조차도 들어갈 틈이 없어 뵈는 바위틈새에 뿌리를 박고 자란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감탄스럽다.
이제 그만 끝인 것 같았지만, 이곳 조가리봉 북서릉에서 내려다뵈는 충주호 풍경은 호수로 바투 다가든 지점이라 호수면의 서늘한 바람결이 금방이라도 얼굴을 스칠 듯 시원스럽고 넓었다. 마침 오후 햇살이 비치며 호수면은 찬란히 빛났다. 내려가기 싫어, 하면서 다들 호수 풍경이 펼쳐지는 평평한 암릉 위에 배낭을 벗고 앉았다.
단순히 맑기만한 하늘이었다면 이렇듯 풍경이 아름답지 못했을 것이다. 성하의 녹음으로 치장한 산릉들이 에워싼 푸른 청풍호 위로 눈부시게 희거나, 혹은 두터워서 짙게 회색이 배어들기도 한 갖가지 모양의 구름들이 푸른 창공과 뒤섞이듯 하며 시시각각 다른 빛의 조화를 보였다. 그 생동하는 풍경을 마주한 채로 우리는 오래도록 앉았다가 “다음에 이곳으로 노을 구경 하러 올라오자“며 마지못해 일어섰다. 그후 20여 분 이어진 급경사 내리막에서는 무릎이 제법 시큰거렸지만, 조금 전의 그 절경을 본 댓가 치고는 오히려 가벼웠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