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8 세계 여성의 날 유래
○ 1900년대 초반, 여성들은 이전에 없던 극심한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산업혁명은 여성들에게 이미 주어져있던 가사와 육아의 부담 외에 저임금의 비인간적인 노동을 강요하였다. 19세기 중반 방직공장 노동자 중 23%만이 남자였고 나머지는 여성과 어린아이였지만 이들은 남성노동자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거의 무권리 상태에서 생활해야 했다.
○ 공항으로 인한 경제침체기였던 당시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은 빵 대신 먼지를 마시며 하루 12-14시간씩 일했지만 그들에게는 선거권도, 노동조합을 결성할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여성들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조차도 없는 완전한 무권리 상태였던 것이다. 귀부인들의 화려한 외출복에 은색 금색으로 번쩍이는 장식을 박느라 눈이 머는 여성이 생기기도 하였으나, 여성들에게는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굶지 않기 위해 일하면서도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받아야 했다. 급기야 트라이앵글이라는 한 피복회사의 여성노동자 146명이 불에 타죽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1908년 3월 8일 1만 5천여명의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룻저스 광장에 모여 “노조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10시간 노동 보장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하라”“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임금을 인상하라”를 외치며 무장한 군대에 맞서 싸웠다.
○ 2년 뒤인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 모인 세계 진보적인 여성노동자들은 제2차 세계여성대회에서 독일의 여성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인 클라라 체트킨의 제안에 따라 <미국 섬유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된 3․8 시위를 매년 세계여성의 날로 기념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후 전세계 여성의 투쟁과 연대가 활발해지면서 각국에서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남녀차별 철폐, 여성빈곤 타파 등 여성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 이후 세계적으로 3.8 기념대회를 계기로 한 투쟁이 이어졌는데,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반대 및 물가안정운동,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군부독재 반대운동, 1943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무솔리니 반대시위를 비롯해, 1979년 칠레의 군부정권 반대시위, 1981년 이란 여성들의 차도르 반대운동, 1988년의 필리핀 독재정권 타도 촛불시위, 1994년 태국의 90일 유급출산휴가 확보투쟁 등이 그 대표적인 투쟁이다.
<2> 우리나라 3.8 세계여성의 날 행사의 역사
○ 이후 매년 3월 8일이 되면 세계 각국의 수천 수 만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방방곡곡에서 집회와 기념식을 갖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거리를 행진하며 ‘여성의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실천을 결의하는 날로 기념하며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 미국에서는 3월 한달간 여성단체들이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고, 중국에서는 3월 8일을 공식휴일로 지정해 여성들을 위한 갖가지 행사를 국가에서 열어주는 등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북한에서도 1910년 이래 여맹을 비롯한 전 여성들이 함께 모여 3월 8일을 ‘국제 부녀절’로 기념하여 기념대회를 열고 있다.
○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 후반 일제하에서 기념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일제의 모진 탄압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다
○ 우리나라에서는 1922년부터 기념대회를 가졌으며 기층 민중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지위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강연을 열기도 했다. 이후 세계여성의 날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그 맥이 이어지지 못하다가 해방 후 1946년 47년 여성해방주간이 선포되면서 대회와 기념식이 부활하였다. 당시 3․8대회에서는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과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 3․8 기념행사가 새롭게 시작된 것은 1985년 여성단체들이 연대하여 개최한 제1회 한국여성대회였다. 당시 행사는 ‘민족․민주․민중과 함께하는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1986년 제 2회 한국여성대회에서는 ‘민주화와 여성의 생존권’이라는 주제로 20여 여성단체들이 기층 여성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고 KBS시청료 폐지운동을 벌여 나감으로써 가정주부들의 대거참여가 이루어졌다.
○ 이후 여성대회는 ▲86년 아시아 올림픽과 남북분단 ▲민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수입개방 압력 ▲군부독재의 내각책임제를 중심으로 한 장기집권음모 ▲생존권 확보 ▲남녀평등권 쟁취 ▲여성에 대한 폭행 ▲성상품화 ▲에이즈 등 다양한 여성운동의 과제를 밝히고 연대활동을 다지는 날로 자리매김해왔다.
○ 한편, 여성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그해 여성노동자의 요구를 알리고 한해 동안의 실천과제를 결의하는 여성노동자대회가 시작된 것은 1988년부터이다. 1988년 서울지역노동자협의회 여성국과 한국여성노동자회 주최로 열린 ‘여성노동자 큰잔치’를 시작으로 민주노총이 건설되기 이전인 94년까지 매년 평등평등 노동권과 고용안정을 요구하는 여성노동자대회가 개최되었다.
1997년 민주노총 여성위원회가 만들어진 이듬해, 98년 3월 8일에는 양대노총과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하여 중앙대회 1000명, 인천대회 300명, 마산대회 250명, 광주대회 150명, 부산대회 300명 등이 참가하는 규모있는 대회를 진행하였다. 2000년부터는 민주노총이 독자적인 여성노동자대회를 개최하여 조직 내외의 주요 여성관련 이슈를 부각시키고 민주노총이 한해 주요하게 제기한 여성관련 이슈와 과제를 전 조합원과 함께 공유하고 결의하는 장으로 만들어 왔다.
<3> 3.8 여성의 날이 갖는 의미
○ 차별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 세계 여성의 단결과 연대를 확인하는 날
○ 전국의 여성단체들을 비롯하여 주부, 대학생, 일반시민, 지식인, 종교인, 노동자 등 각계각층의 여성과 남성들이 모여 3월 8일을 계기로 우리나라 여성의 현실을 짚어보고,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점과제를 선정해 실천의지를 모아내는 단결과 연대의 자리
○ 성차별과 여성인권이 외면당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 구조를 제거하고 여성의 인권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나가는 자리
○ 그리고 다음과 같은 연설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자리
<3.8 여성의 날의 유래>
1908년 3월 8일 루저스 광장, 미국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1만 5천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은 무장한 군대와 경찰에 맞서 "임금을 인상하라!", "10시간만 일하자!",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동시적으로 발생한 경제공황 속에서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은 쉬지 않고 일하며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그녀들은 정작 인간이자 노동자, 시민으로서 그 어떤 권리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여성들의 봉기는 비단 미국 뿐 아니라 유럽대륙으로도 퍼져나갔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물가가 오르자 '주부들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여성노동자들은 처음엔 악독한 상인들을 위협하거나 시장의 상품 진열대를 부수기도 했지만, 곧 그런 행동들만으로는 생계비용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의 참정권이 필수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성노동자들의 저항을 기억하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여성노동자회의에서 독일 사회주의자이자 여성운동가인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의 제안으로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은 20세기 산업국가에서 열악한 노동현실에 분노한 여성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투쟁했던 것을 기억하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도모하고자 여성운동진영이 의식적으로 노력한 성과인 것입니다.
그 후 1년이 지난 1911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부터 여성의 날이 준비되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정부와 사회에서의 여성의 평등에 대한 문제들을 분석했습니다. 드디어 첫 번째 여성의 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거리 곳곳에서는 시위가 열렸고 그를 막으려는 경찰들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들의 집단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남성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할 수 있다면,
산전산후 휴가를 받고 아이를 탁아소에 맡길 수 있다면,
모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성(Sexuality)과 수태를 조정할 권리가 있다면
이것 모두는 바로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렸던 3‧8여성의 날 기념대회 연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