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의 지명(地名) 유래는 낙동강 끝이란 의미가 담겨 있으며,「아래치」「끝치」라고 풀이된다. 동래부지(東萊府誌) 편찬 당시엔 사천면(沙川面) 상단(上端)ㆍ하단(下端)이 있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사천면 하단에는 786호(戶)의 호수(戶數)가 있었다. 동래읍내(東萊邑內)의 호수 1,165호에 비하면 동래 다음의 대집단부락(集團部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동강 하구의 중심은 지금의 사하구 하단동이다. 나루터가 있었던 하단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갈대숲과 낙조가 장관을 이루던 한적한 포구였다. 하단이란 이름은 동래군 사천면을 편의에 따라 상단과 하단으로 나눌 때 생겼다. 그 때 상단이라 하면 지금의 사상이고, 하단은 사하의 넓은 지역을 일켣는다. 흔히 이르는 '낙동강 700리'는 이곳에서부터 뱃길이 끝나는 경북 상주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하단포(下端浦)는 부산항 개항(開港)(1876년) 당시 부산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자가 모였고, 이곳에서 다시 낙동강 물을 이용하여 내륙지방에 운반되던 상업의 요지였다. 당시 상인들은 인근 명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싣고 삼랑진(三浪津), 왜관(倭館), 상주(尙州)로 드나들며 나락과 교환했다. 하단포에는 나락을 사들여 도정(搗精)하는 객주업(客主業)이 발달하였고, 소금과 곡식 더미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1892년 7월 처음으로 기계 시설에 의한 부산정미소(釜山精米所)가 생기면서 하단포에 닿은 낙동강 유역과 김해평야의 나락이 이곳으로 운반되어 정미소로 들어가기도 하고 일본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미곡(米穀) 거래 시장으로 하단의 번창은 대단하여 부산에서 대티(大峙)만 넘으면 모두 하단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따라서, 상품이나 농산물의 교역지(交易地)로 흥청댔고, 구포(龜浦)와 함께 큰장(市場)이 섰던 곳이다. 부산장, 하단장, 동래장은 그 당시의 이름난 장이었다. 지금은 수운의 쇠퇴와 도시발달로 인해 많이 위축되긴 하였지만 아직도 2일 7일이면 5일장인 하단장이 서고 인근 김해(金海), 명지(鳴旨) 등에서 장꾼들이 몰려들면서 번창하였다,
그러나 하단의 번창했던 영화는 1900년초 경부선 철도 부설뒤 몰락하기 시작했다. 열차편을 이용한 물자의 운반으로 정미업이나 그 밖의 교역지는 자연적으로 하단에서 구포로 옮겨지게 되었고, 화륜선(火輪船)과 각종 상선(商船)이 분주하게 오가던 낙동강엔 옛 동산유지(東山油指) 옆에서 명지(鳴旨)로 오가는 도선만이 옛 영화를 반추할 뿐 적막에 젖어 있다. 구한말(舊韓末)까지 큰 포구로서 번성했던 하단은 매년 낙동강의 홍수로 그 하상(河床)이 높아져 좋은 포구(浦口)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잃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1930년 부산부(釜山府)가 9만석(九萬石)을 수용하는 분뇨(糞尿)탱크를 하단에 만들어 대티고개의 투기장에 버린 분뇨가 지하구(地下溝)를 통하여 이곳에 저장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저장된 분뇨는 낙동강으로 뻗어나간 분뇨관을 통하여 배출되어 분뇨선(船)에 실려 김해평야로 나가기도 하고, 낙동강에 버리기도 하였다.
해방후의 하단은 쓸쓸한 한촌(寒村)이었다. 명지(鳴旨)로 건너가는 나루터로서 면목을 유지했고, 부산시내로 들어오는 학생과 명지 등에서 반출되는 야채를 받아들이는 조그마한 선착장에 불과한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낙동강에 펼쳐진 갈대밭과 하단의 명물인 재첩과 고시라기 회를 찾아 나오는 시민들의 발길이 보이는 정도의 조용하면서도 낭만적인 시골 마을 그대로였다. 그러나, 도시개발과 근대화의 물결은 하단에도 밀려 왔다.
1973년 하단 분뇨처리장의 폐쇄와 구획정리 사업으로 일약 도시화로 발전되었다. 도로는 신설 포장되고, 구포까지 강변도로가 사상 공단 설치와 함께 신설되었고, 신평ㆍ장림공단 쪽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 낙동강을 가로막아서 바닷물 유입을 차단하여 부산시 상수원을 확보하기 위한 낙동강하구둑 건설공사의 1987년 완공으로 명지, 진해를 잇는 교량이 생겨 하단동의 모습이 더욱 새롭게 바뀌었다. 쾌적한 신흥도시로 탈바꿈해 하단에서 강 마을의 한적함과 낭만은 사라졌다.
갈대밭이였던 낙동강변에대 단위 아파트 단지인 가락타운이 들어서기까지 시온섬과 을속도의 경치는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장관으로 손꼽혔다. 중년이나 노년층에게 낙동강 하구는 그 옛날 하단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 갈대밭에서 연인과 사랑의 밀어를 나누었던 추억의 장소이였기때문이다. 붉게 타들어가는 늦가을 석양무렵 바람결에 쓰러지는 하얀 갈꽃 위에서 무리지어 날개짓 하는 철새들의 군무는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의 극치로 유명했다.
낙동강의 최남단 포구로서 부산항 개항이전 부산으로 들어 온 물품들이 낙동강 뱃길로 운송되기 위해 모여들던 곳인 하단포구(下端浦口)의 영화는 간 곳 없고, 오직 그 자리에 재첩을 파는 식당이 몇 개소 있을 뿐이다. 그나마 포구로서의 명맥을 잇기 위한 행사로 하단어촌계에서는 2006년부터 매년 6월하순때쯤 웅어축제를 열고 있다. 어촌계가 자리 잡은 곳은 아파트 숲에 숨바꼭질 하듯 숨어있는 하단포구. 낙동강하구둑 위쪽에 들어앉은 작은 포구다. 부산의 몇 안 되는 강 포구 중 가장 활발하게 포구 기능이 펼쳐지고 있는 현장이다.
그러는 가운데 반가운 소식이 있다. 70년대 후반까지 하단포 나루터에는 50여 척의 황포돛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황포돛배는 낙동강을 건너는 주민들의 교통수단이기도 했다. 4평 남짓한 뱃간에 하단포와 명지를 오가는 주민들의 애환, 을숙도를 찾는 연인들의 사랑을 실었다.하지만 1986년 낙동강하굿둑 건설과 함께 하단포 선착장이 사라지면서 황포돛배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 지역에서 반도체 관련 업체를 운영하는 이채윤(59)씨가 10여 년 전 당시 하단어촌계장이 었던 친구 이춘식(59)씨로부터 황포돛배 명맥이 끊어질 처지에 놓였다는 얘기를 듣고 황포돛배를 복원하였으며, 이배는 지난 10여 년 간 하단어촌계에 보관하고 있다.
출처 : http://bluewaves.tistory.com/4289
흐르는 강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