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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피서지, 해운대 해수욕장
우리나라 최고의 피서지 해운대 해수욕장은 동백섬 입구 송림 공원에서 미포 앞까지 유연한 반달형 해안선을 가진 천혜의 관광지다. 여름철이면 전국에서 1,000여만 명의 피서객들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며, 주변 경관과 휴양 시설이 조화를 이루어 사시사철 바닷가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해운대 백사장의 모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잘 다듬어진 양질의 은모래인데, 백사장을 산책한 후 가볍게 털어 내면 될 정도로 깨끗하고 몸에 잘 묻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해운대 백사장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면 답답하던 가슴이 저절로 탁 트인다. 거침없이 펼쳐진 푸르고 넓은 바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수평선, 그리고 저만치 아련하게 보이는 오륙도. 이 모든 것들이 해운대 해수욕장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들일 터이다. 여름의 해운대는 외지의 피서객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지만, 겨울에는 부산 시민들이 한적한 바닷가를 거닐며 사색에 잠기거나 겨울의 햇살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를 감상하는 낭만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산 시민들은 가을 겨울에 해운대를 더 많이 찾는다.
해운대는, 누구에게는 첫사랑과 첫 데이트를 한 장소이기도 하며, 다른 누구에게는 신혼여행으로 와서 첫날밤을 맞이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 어떤 이들은 실연의 아픔을 해운대 바닷가에서 토해낸 적도 있을 것이고, 시험을 마친 후 친구들과 해방의 장소로 찾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부산에 사는 사람이라면 해운대에 얽힌 추억거리 한 가지씩쯤은 간직하고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은 부산의 정체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뭐라 해도 해수욕장은 한여름에 그 진가를 발휘한다. 시원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는 해수욕은 여름철을 즐기는 백미이다. 6월부터 8월까지 해운대 해수욕장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인파들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동네가 된다.
2013년 올해도 어김없이 해운대 해수욕장은 연일 만원이다. 특히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고 있고 매일 무더위 신기록을 갈아 치우는 요즘, 친구들과 또는 가족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원한 해수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해운대를 찾는 재미가 뭐 특별한 것이 있겠는가. 교통이 편해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 그리고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도 편하게 하루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이 해운대이다. 그런데 이 좋은 해운대 해수욕장에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밤낮 수시로 해운대로 출몰하는 한 남자, 그는 과연 누구일까.
해운대의 해결사 용팔이를 아시나요
해운대 해수욕장의 명물 용팔이를 아시나요-해운대 관광시설관리사업소 단속반장 박용철 씨의 해운대 이야기
[海運臺海水浴場-名物-海運臺觀光施設管理事業所團束班長朴龍鐵氏-海運臺-]
강철 주먹을 지닌 검은 선글라스의 사나이, 해운대 용팔이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165㎝가 채 되지 않는 작은 키에 탄탄한 듯하면서 검게 그을린 피부, 항상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는 용팔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고 있다. 이런 그의 외모를 보면 누구나 그 정체를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일명 용팔이라고 불리는 박용철씨[1956년 생]는 광안리와 해운대에서 피서객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뛰어난 수영 솜씨로 인명 구조는 물론, 때로는 폭력배들과 맞서 싸우는 배짱 있는 사나이, 때로는 청결한 해수욕장을 유지하기 위해 청소부도 마다하지 않는 의리의 사나이로 변신해 가면서 부산의 바다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무슨 일만 생기면 ‘용팔이, 용팔이’라며 그를 부른다. 그는 해운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 자타 공인 해운대의 해결사다. 든든한 용팔이가 있기에 우리는 해운대에서 안심하고 피서를 즐길 수 있다. 평생을 바닷바람 맞으며 바다의 사나이로 살아온 용팔이 박용철씨, 그의 특별한
인생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해운대의 새벽을 깨우는 자
동이 틀 무렵의 바닷가는 그리 낭만적이지 못하다. 밤새 음주가무를 즐겼던 흔적들이 떠오르는 태양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사이렌을 울리며 등장하는 차 한 대, 바로 비치클리너라고 하는 청소차다. “지금은 백사장 청소 시간입니다. 청소가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피서객 여러분들은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인의 쓰레기는 분리수거해서 쓰레기장에 버려 주시기 바랍니다.”
새벽 네 시, 위와 같은 방송을 하면서 차는 어김없이 백사장으로 출동한다. 비치클리너는 백사장의 쓰레기를 줍고 모래를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차가 없었을 때는 사람들이 투입돼서 쓰레기를 주웠지만 요즘은 참 편리해졌다. 비치클리너가 출동하고 나서야 밤새 백사장에서 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이 차를 운행하면서 방송을 하는 사람은 바로 박용철씨다. 그는 비치클리너를 운전하면서 곤히 잠든 사람들도 깨우고 취객들도 보살핀다. 그는 백사장의 쓰레기뿐만 아니라 바닷속까지 들어가서 쓰레기를 줍는다. 위험천만한 병 조각 등이 가까운 바닷속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든든한 그가 있기에 해운대를 찾은 피서객들은 큰 사고 없이 해운대를 맘껏 즐길 수 있다. 운명의 그날, 광안리에서 벌어진 일 영도가 고향인 박용철씨, 그는 영도에서 마지막 전차를 타고 부모님 손을 잡고 영도를 벗어났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광안리 입구, 거기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수영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금성중학교 2학년을 중퇴한 그는 사춘기를 보내면서 한때 ‘주먹의 세계’에서 방황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사나이로 태어나 약간의 싸움은 좀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며 그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는다.
그렇게 사춘기를 주먹의 세계에서 보낸 후 1974년도에 부모님 손에 이끌려 고려제강에 취업했다. 나쁜 길로만 빠지려고 하는 아들을 부모님은 그냥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친이 국가 유공자였기 때문에 취직을 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취업을 하고 두 달쯤 지났을까. 그는 연골이 손상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아직도 그 흉터가 왼쪽 무릎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렇게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6개월을 보낸 후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 당시 광안리 해수욕장은 지금과 같이 아파트와 상가들에 둘러싸인 곳이 아니었다. 아직 해수욕장 주위의 매립도 진행되기 전으로, 지금 민락 수변 공원 쪽 회 센터 있는 곳이 자연 그대로였을 때였다. 그 주변에서 사춘기를 보내다 보니 수영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또한 친구가 레저용으로 조그마한 보트 대여점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트 노도 누구보다도 잘 저었다.
당시에는 광안리 민락동 돌섬과 방파제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할 일이 없을 때는 친구와 거기서 종종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3인용 보트를 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조금 불안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앞에서 5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보트가 뒤집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에 힘이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생들이 너무 안타까워 친구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때 내가 다쳐서 다리에 깁스를 푼 지 얼마 안 되었던 때거든요. 그런데 사람 비명 소리를 들으니 가만 있을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그냥 친구와 같이 뛰어들었지요. 수영에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바다에 뛰어들어 친구가 한 명, 그가 한 명 이렇게 두 명을 끄집어 올려 뭍으로 나왔다. 그러나 한 명은 결국 살리지 못했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바다와 인연을 맺고 구조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구조 활동을 하면서 생긴 별명이 바로 용팔이다. 용철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1970년대 액션 배우 박노식의 별칭인 용팔이에서 따서 붙였다고도 한다. 당시 용팔이는 의리를 잘 지키고 어려운 일에 제일 먼저 나서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웃 사람들이 박용철씨의 의로운 모습을 보고 붙여 준 별명이다. 그래서 그는 용팔이라는 별명을 좋아한다. 광안리에서 해운대로의 이동 1975년부터 그는 광안리에서 본격적으로 구조 활동을 시작했다. 물론 회사에는 요양을 핑계로 댔다. 다리가 다 낫고 난 후에는 주간에는 회사, 야간에는 광안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수영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구조 활동을 시작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당시 구조 장비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한 상태였다. 스펀지 비슷한 솜이 들어간 라이프 재킷과 구명 튜브가 제공됐고, 오리발은 개인이 준비해야 했다. 이 정도의 기구만으로 구조 활동을 해야 했다.
지금은 광안리에서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그때 광안리는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모래알도 너무 좋았고, 여름철에는 피서객도 넘쳐 났다. 그런 광안리에서 안정되게 구조 활동을 계속한 지 4년째 되던 해, 해운대로 옮겨 갈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미 1970년대 말 광안리에 목재 회사가 생긴 것과 함께 바다 매립이 진행되면서 바다가 점점 오염되기 시작했고, 이에 점점 관광객들이 발길을 하지 않는 해수욕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광안리에서 4년째가 되던 1979년, 그해에 불어닥친 두 개의 태풍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남겼다. 광안리에서도 익사자가 발생했지만 해운대는 상황이 더 심했고,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해운대로 활동 장소를 옮겼다. 그때가 1979년 7월 20일, 그 전까지 다니던 회사도 미련 없이 그만두고 해운대에서 방범대에 소속되어 활동을 계속했다. 막상 큰소리치고 회사를 그만뒀지만 부모님께는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동안 부모님 속깨나 썩였기 때문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구조 활동은 그가 주먹 판에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며 정신을 차리고 시작한 일이었기에 회사를 그만둔 것 자체에는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다 1970년대 익사체가 피서객들의 발에 걸리도록 사고가 많이 나던 시절부터 최근까지 그가 구조한 피서객은 약 500여 명이다. 그 사람들을 구조할 때 박용철씨 또한 위험한 순간에 직면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터, 정말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다고 한다. 1979년에 광안리에서 해운대로 옮겨 왔지만 여전히 구조 장비는 열악했다. 더군다나 해운대는 광안리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피서객이 많았다. 광안리가 풀장이라면 해운대는 사나운 바다였다. 처음 접한 해운대는 광안리와는 전혀 달랐다. 특히 해운대의 이안류는 정말이지 적응하기 어려웠다. “1970년대에는 삼각파도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이안류였어요. 내가 이 이안류를 발견해서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물이 몇 m에 얼마나 흘러 나가는가를 조사한 것이지요.”
해운대 바다는 이안류 때문에 사람이 깊은 바다 쪽으로 밀려가는 현상이 종종 발생했다. 지금도 이안류는 해운대 해수욕장의 골칫거리다. 이안류에 사람들을 구조하러 갈 때에도 그는 별다른 장비 없이 맨몸으로 구조 활동에 나서야만 했다. 지금의 파라다이스 호텔 앞바다가 이안류가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곳인데, 그 앞에서만 14년 정도 있었다. 이안류가 심했지만 그곳이 해수욕의 요지였기 때문에 피서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고, 그래서 그만큼 신경이 많이 쓰이는 곳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찔하지만, 해운대에 처음 왔을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그에게 5~6m의 파도는 별것 아니었다. 장비가 없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박용철씨는 머리 모양이 스포츠형이다. 빡빡 깍은 머리가 그를 더 날카롭게 보이게 한다. 그런데 그 헤어스타일에도 다 이유가 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이 구조를 하러 다가간 그의 머리카락을 잡고서 살려고 기를 쓰기 때문이다. 일단 머리카락이 잡히면 빼낼 도리가 없고, 도리어 물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절대 머리카락을 기르지 않는다. 아마 은퇴하기 전까지 긴 머리를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그의 이마 깊숙한 곳에는 2㎝ 정도의 흉터가 남아 있다. 1982년 즈음, 외국 유학을 일주일 앞두고 친구들과 해운대로 놀러 온 사람을 구조한 적이 있었다. 일단 백사장에서 인공호흡으로 어느 정도 소생을 시키고 응급차로 병원에 가면서도 계속 인공호흡을 하던 차, 응급차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차 내부 기구의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래도 당시에는 피가 나는 줄 모르고 계속 인공호흡만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 피범벅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병원으로 부상자를 옮겼건만 안타깝게도 그 학생은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는 그 일을 이제까지의 사고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해운대에서 익사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박용철씨의 임무는 바닷가 근처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는 119 시스템이 미비했던 때였기에 부산·경남은 물론이고 멀리 대구·경북에서도 익사자가 생기면 그를 불렀다. 그럴 때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출동을 했다. 그것이 본인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어디 위험한 순간만 있었겠는가. 당시에는 고생했지만 지나고 나면 재미있고 황당한 일들도 많았다.
“어떤 아가씨를 구조했는데 호흡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인공호흡을 했지요. 그런데 그 아가씨가 뭔 음식을 그리 많이 먹었는지 엄청나게 토해 내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했겠어요? 인공호흡은 계속 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내가 먹었지요. 그랬더니 덜컥 식중독에 걸린 거야. 한 일주일 병원 신세를 좀 졌습니다. 그런 웃긴 일도 있었네요.”
어떤 청년은 물에 빠져서 호흡과 맥박이 거의 없었는데, 그가 심장 마사지와 인공호흡을 해서 겨우 숨통을 틔어 놓았다. 그리고 그 청년을 병원을 옮겼는데, 멀쩡하게 정신을 차리고 병원을 걸어 나오더니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자신의 명품 신발을 찾아내라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딱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럴 때는 정말 수십 년 해 온 일이지만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싶어 후회가 밀려오기도 한다고 한다. 이렇게 위태롭게, 때로는 황당하기도 한 순간들을 굽이굽이 넘어가며 그는 지금도 구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아직은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1997년 불법 파라솔과의 전쟁
1990년대 파라솔 가격이 3만 원에서 5만 원까지 치솟는 등 바가지 상혼이 기승을 부릴 때 불법 파라솔과의 전쟁을 시작한 것도 그였다. 막상 시작은 했지만 처음에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당시 파라솔 운영권은 어깨들, 즉 조폭들이 가지고 있었고 피서객들은 그들의 ‘봉’이었다. 부르는 게 값이었고 피서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파라솔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해운대 백사장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해운대구청에서는 협찬받은 파라솔 2,000여 개를 공익 40~50명과 함께 설치하면서 불법 파라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구청 직원들은 더운데도 불구하고 작은 박스 안에 들어가서 표를 끊어 주고, 박용철씨는 불법 파라솔을 단속했다. 그렇게 차츰차츰 불법 파라솔을 정리하면서 공영 파라솔을 늘려 갔다. 아무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일을 해낸 것이었다. 그러나 조폭들과 실랑이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갈비뼈에 금이 가는 것은 예사고 칼을 들이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완전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현장이었지요. 단속을 하는데 나까지 도망가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단속을 하다 보면 그 현장에 나 혼자만 남아 버리는 거예요. 보통 단속 나갈 때는 공익 서른 명, 직원 열댓 명 이렇게 나가는데, 조폭들이 파라솔 봉 한 번 휘두르면 다 도망하고 나 혼자 남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젊은 애들하고 3대 1로 싸웠어요. 참 많이 맞았지요. 병원 신세도 많이 졌고.”
그런 상황도 그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피서객들이 돈 때문에 이 좋은 바다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몸을 아끼지 않는 그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결국 파라솔 운영권은 관할 구청인 해운대구청에서 관리하도록 토대가 만들어졌고, 지금은 저렴한 가격으로 전국의 피서객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파라솔 가격을 안정화시킨 일이 제일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전국 어디에서도 이 가격에 놀 수 없지요. 지금은 스마트비치라고 해서 스마트폰이나 카드로 결제하면 5,500원, 현찰은 7,000원인데, 하루 종일 파라솔과 돗자리를 빌려서 놀 수 있어요. 이보다 더 싼 곳이 전국 어디에 있겠습니까. 투명하게, 뭐든지 투명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해운대에 와서 바가지요금 때문에 짜증 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해운대 해수욕장을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해 왔어요.”
그렇게 1997년부터 불법 파라솔과의 전쟁을 벌여 왔고, 2000년에 가격을 완전히 안정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박용철씨도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는 그 공을 함께 일한 구청 직원들에게 돌렸다.
“여기서 껄렁껄렁하는 애들이 내한테는 큰소리쳐도 우리 계장님한테는 절대 뭐라고 못 합니다. 내야 뭐 성질이 급해서 팍팍하지만 계장님은 논리적으로 말하니까요. 해운대를 불법 점거하고 있는 상인들은 논리적으로 말하면 꼼짝을 못 해요”
구청 직원들과 단속반원들의 이런 환상적인 팀워크가 오늘날의 바가지 없는 해운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현재 해운대 해수욕장의 파라솔 운영권은 해운대구청이 가지고 있고, 백사장에서 파라솔을 직접 관리하는 사람들은 지역 영세민들이다.
해운대를 34년간 지킨 선의의 용팔이
그는 불법 영업도 단속을 나간다. 그런 사람들을 단속하지 않으면 해운대 바닥이 전부 잡상인 천지가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상인들은 내한테 불만을 털어놓아요. 내가 그 바닥에서 성장해 왔기 때문에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거지. 그래도 어떡하겠습니까. 안타깝기는 하지만 해운대를 찾는 피서객들의 안전을 생각하면 잡상인, 불량 식품, 불법 영업 단속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해운대 해수욕장에서는 무엇을 배달시키든지 그 많은 파라솔 사이를 뚫고 용케 배달을 온다. 모든 메뉴가 배달 가능한 셈. 백사장에서 배달은 얼마든지 시켜도 되지만, 통닭이나 김밥을 가지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사람들은 좀 곤란하다. 그중에는 불량 식품이 많기 때문이다.
“통닭 두 마리로 세 박스를 만들어서 다른 통닭과 같은 가격을 받으면 그건 바가지나 다름없지요. 피서객들은 배달시키는 것조차 귀찮아서 돌아다니는 판매상을 불러서 먹지만, 그건 좀 바뀌어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단속 한 번 나가면 300~400마리씩 수거해서 폐기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해운대 용팔이가 너무 악독하다고 소문이 난 거야. 상인들은 내한테 악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피서객들한테 나는 해운대를 34년간 지킨 선의의 용팔이라고 불렸으면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피서객들의 안전한 물놀이를 위한 일이니까요.”
단속을 하는 그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독하게 단속한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
“단속을 하면서 정말 많은 욕을 먹었어요. 예를 들면, 옛날에는 고동을 삶아 파는 할머니가 많았잖아요. 그 할머니들이 오늘 다 못 팔면 그걸 냉장고에 제대로 넣어 두지도 않고 다시 삶아서 내일 또 판다고요. 그런 것은 단속을 해야 하잖아요. 김밥도 옛날에는 부전 시장에서 대량으로 가져와서 팔았는데, 한여름 뙤약볕에 한 시간이면 쉬어 버리거든요. 그러니 단속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단속을 하면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저 생긴 것도 못되게 생겨 가지고 생긴 대로 논다’는 소리를 해요. 그 소리를 수천 번도 더 들었지요. 상당히 독하게 했어요. 그런데 지나고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심하게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피서객의 안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그는 피서객들에게 불법 판매 식품을 절대 사 먹지 말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한다. “피서객 여러분들, 덥고 귀찮지만 전화로 배달시켜 드시든지 가까운 곳은 나와서 주문을 하시든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정찰제로 하고 바가지를 씌우지 않거든요. 그리고 해운대는 어디서든지 배달이 가능하니까 절대 불법 판매 행위를 하는 사람들한테 사 먹지 마세요. 판매하는 사람들은 다 메이커라고 하는데 단속해서 보면 전부 짝퉁입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누구를 위해서 종을 울리나.’ 요즘 박용철씨가 자주 하는 말이다. 해운대 상인들하고는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그들도 6월에서 8월까지는 용철씨에게 ‘형님’이라고 하지만, 그 외의 계절에는 그를 마주치면 인사도 안 한다고 한다.
바닷속은 보물 창고
박용철씨는 가끔 바닷속으로 잠수를 한다. 바다에서 돈을 건져 자원 봉사자들에게 음료수를 사는 것이다. 피서객들이 돈을 옷 속에 넣고 물놀이를 하다 보면 돈이 흘러나와 그 일부가 조류를 타고 이동하게 되는데, 그 돈이 모이는 장소는 박용철씨만이 알고 있다. “북동풍이 부는 날에 돈들이 어떤 망루 앞 암초에 모두 모인다고. 그러면 거기서 돈을 건지는 거지요. 보통 한 번 건지면 20~30만 원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 돈은 내 돈이 아니잖아요. 피서객들이 흘린 돈을 파도가 모아 준 거니까 내가 건졌다고 해서 내 혼자 쓸 수가 없지요. 그래서 자원 봉사자들하고 음료수도 사 먹고 통닭도 먹고 그렇게 씁니다.” 아직도 박용철씨는 바다 수영을 한다. 오히려 지금 젊은 사람들보다 수영하는 폼이 더 좋다. 자유형을 하면 후배들이 정말 멋있다고 박수를 친단다.
“며칠 전에도 바다 수영을 했는데 아직 살아 있더라고. 폼이 아주 괜찮았지요. 스포츠는 폼이 중요하다 아닙니까. 하하하. 그래도 예전에는 단숨에 300~400m를 갔는데 지금은 70m 정도 가니까 힘이 듭디다. 나이가 들어서 그렇겠지.”용팔아, 용팔아, 쉴 틈 없이 불러 대는 그 이름 박용철씨의 아침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시작된다. 일단 새벽 세 시 이십 분까지 출근을 한다. 집은 반여 3동. 퇴근 시간은 대중없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밤 아홉 시, 열 시까지는 일했다. 그런데 올해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밤늦게까지 일을 하려면 너무 힘들다. 그는 10여 년 전에 뇌출혈로 한 번 쓰러진 적이 있다. 다행히 빨리 조치해서 천만다행이었다. 또 심장도 좋지 않아 스탠스를 박았다. 거의 걸어 다니는 종합 병원이다.
새벽 세 시 이십 분에 출근을 하면 먼저 화장실부터 살핀다. 화장실이 제일 민원이 많이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고, 24시간 운영을 하기 때문에 청결을 유지하는 데 보통 신경이 쓰이는 곳이 아니다. 이렇게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서 네 시에는 비치클리너의 시동을 켜고 백사장으로 출동한다. 백사장 정돈 작업을 끝내면 일곱 시. 일단 한 시간 반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여덟 시 사십 분쯤에 차를 끌고 해수욕장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시설 점검을 한다. “피서객이 원활하게 백사장을 다닐 수 있도록 파라솔을 너무 빡빡하게 꽂지 말라고 외치는 거지요. 그리고 백사장하고 바로 붙은 거리 있지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곳, 그곳을 청소하라고 고지를 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파라솔을 관리하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인데, 그걸 잘하는 단체도 있지만 말을 안 하면 안 하는 단체도 있거든요.” 박용철씨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로 파라솔 관리를 빼놓을 수 없다. 공영 파라솔로 전환된 이후 쭉 그 일은 그의 몫이었다. “파라솔, 튜브가 전부 다 내 손에서 나갑니다. 송정까지 관리를 하지요. 이것도 아무나 못 하는 겁니다. 단체에 따라 색깔 배열도 다르게 해야 하거든요. 지금 보면 색깔이 겹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다 일정한 양만큼 해서 지정된 자리에 파라솔을 설치해야 해요. 색깔별로 펴져야 보기도 안 좋겠습니까.”
파라솔 관리가 끝나고 나면 오후에는 불량 식품 단속을 벌이기도 하고 요즘에 기승을 부리고 있는 몰카족들을 잡기도 한다. 또 해수욕객들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부표 점검도 그의 몫이다. 여기서도 용팔이, 저기서도 용팔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하루가 지나간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진다. 그에게는 하루가 너무 빠르다. 하루가 빨리 지나가는 만큼 세월도 빠르게 흘러간다. 해운대에서 34년이라는 세월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신비한 자연 현상
점점 유실되는 해운대의 모래들, 좁아져만 가는 백사장. 이러한 것들이 해운대에서 가장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까. 해운대에서, 특히 조선 비치 호텔 앞의 모래는 진짜 수천 년, 수만 년을 내려온 자연산 해운대 모래라고 한다. 그곳을 1m 정도 파 내려가면 해운대의 기존 자연산 모래를 만날 수 있는데, 한때는 그 모래를 봉투에 담아 샘플로 해서 다른 지역에 모래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보통 진도와 목포 앞바다의 모래가 해운대 모래와 비슷했다. 그래서 박용철씨는 밤새 바지선을 타고 진도, 목포까지 가서 모래를 퍼 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곳도 모래를 가져갈 수 없을 정도로 유실된 상태이다. 자연 현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위로할 수밖에. 올해는 해운대에도 모래가 많이 없다. 특히 조선 비치 호텔 앞은 백사장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올해 해운대에서 모래가 유실되는 것도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신문에서도 보듯이, 34년간 있으면서 태풍도 안 불었는데 조선 비치 모래가 다 떠내려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한국 콘도 앞 미포에 백사장이 형성된 것도 2013년 올해가 처음입니다. 저 현상은 간혹 가다가 한 번씩 나타나기도 하는데 올해는 정말 이상하네요. 아마 바람 방향이 바뀌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만약 바람이 미포 쪽에서 동백섬으로 불어 주고, 파도도 좀 세게 치면 조선 비치 앞에 모래가 차는데……. 조선 비치 앞 모래가 너무 없어서 8월 3일에 백사장 중앙에 있는 모래를 밤새 밀어서 매워 놨는데, 지금 또 없잖아요. 12m 정도로 늘려 놨는데 일주일 만에 하나도 없어. 자연 현상은 신비하지요. 해운대는 천혜의 해수욕장이지만 모래가 계속 유실돼서 안타까워요. 그래서 여러 학교 교수들이 인공적으로 모래를 복원시킨다고 하는데 할 수 있을까.”
그는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 인공 모래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순간적, 임시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현재 자연 현상으로는 예전과 같은 넓고 반짝이는 백사장을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다. 지금 해운대는 바람 방향이 두 달 넘게 바뀌지 않고 있다. 더 이상한 것은 수온이 낮으면 적조가 발생하지 않는데 올해는 17~18도에서도 적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가 34년간 해운대에 있으면서 올해만큼 이상한 일을 겪은 적은 없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자연 현상에 그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해운대는 1년 내내 축제 중
사람들은 보통 7, 8월의 해운대만 떠올린다. 그러나 해운대는 1년 내내 행사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에 따라 박용철씨의 일도 1년 내내 계속된다. 그는 가는 해의 마지막 날과 오는 해의 첫날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1월 1일 해운대 해맞이 행사, 그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2월 31일부터 24시간 대기한다. 그렇게 해맞이 행사를 끝내고 나면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가 기다리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도 사람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3월 한 달은 여유가 좀 있어요. 그런데 4월 1일부터 모래 조각 체험 교실이 시작하기 때문에 그 준비를 해야 하지요. 그 행사가 끝나고 나면 바로 5월 말부터 시설물 관리에 들어갑니다. 6월 1일자로 해수욕장이 개장하기 때문에 할 일이 많아요. 화장실 점검에서부터 편의 시설, 파라솔 편성 등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리고 10월에 국제 영화제가 있잖아요. 직접 해운대 바다와는 관계가 없지만 우리 부산에서 제일 큰 국제 행사 아닙니까. 그 행사가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우리가 보조를 잘해 줘야지요. 그리고 11월에는 백사장 평탄화 작업을 합니다. 그 지휘도 내가 다 해요. 그러고 나면 12월 말까지 여유가 좀 생기고. 그렇게 한 해 한 해를 지내 왔습니다.”
바다에서 보낸 한평생, 힘이 닿는 데까지 봉사하며 살고파그는 아내와 헤어진 후 남자 혼자의 힘으로 아들 둘을 훌륭하게 키워 냈다. “너무 힘들었어요. 아들 둘을 키우는 것이. 막내가 아직 기저귀도 안 뗐을 때부터 내가 다 키웠어. 바다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박용철씨에게 작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인명 구조 봉사를 하는 것이다. 젊었을 때 그는 자신의 눈에 목격된 사람의 90%를 소생시켰다. 지금 아무리 장비가 발달되었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내 최대의 피서지이자 국제적인 피서지 해운대에 놀러 오는데, 만약 사고가 나면 안 되잖아. 그래서 파도가 잔잔할 때만 사람들이 놀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요즘처럼 한여름 피서철에는 전 직원이 물속에 투입이 돼서 배를 타고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수욕장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보람이고, 그래서 상당히 괜찮은 일이라고 느끼는 겁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피서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내가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피서객들의 수준이 옛날에 비해서 무척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백사장에서의 음주 문화, 밤 문화는 아직 멀었다는 거예요. 자기가 먹은 것은 아무리 취기가 있다고 해도, 애든 어른이든 분리수거는 못 할망정 쓰레기 수거장에 모아만 줘도 우리가 얼마나 편하고 고맙겠어요. 새벽 네 시부터 백사장에 투입돼서 다들 너무 욕보는 거라. 날이 새면 이벤트 광장에 쓰레기가 넘쳐 난다고……. 너무 힘듭니다. 밤에 놀러 오는 피서객들은 절주도 좀 하시고요. 그래도 올해는 술 먹고 폭행 사건이 없어서 다행이네요.”
그렇게 해서 그럭저럭 강산이 세 번 바뀌었다.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나의 작은 힘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자부심과 보람,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그는 바다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이제 그는 은퇴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더욱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도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난 용팔이, 바다에 인생 전부를 건 그는 오늘도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선글라스를 끼고 피서객들의 행복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참고문헌
「해운대 용팔이를 아시나요」(『노컷 뉴스』, 2009. 8. 5)
인터뷰(해운대 관광시설관리사업소 단속반장 박용철, 남, 58세, 2013. 8. 12)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10년 7월 27일의 해운대 해수욕장 전경
▲ 비치파라솔이 있는 해변 풍경 - 1
▲ 비치파라솔이 있는 해변 풍경 - 2
▲ 와,~ 상큼한 바다 내음, 시원한 바다 - 1
▲ 와,~ 상큼한 바다 내음, 시원한 바다 - 2
▲ 와,~ 상큼한 바다 내음, 시원한 바다 - 3
동백섬 출렁다리
출렁다리에서 바라본 해안 산책길로 가면 누리마루로 이어진다.
황옥 공주 인어상=출렁다리를 건너 전망대에 올라서면 황옥 공주 인어상의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나란다' 나라 황옥 공주가 해운대 '무궁'나라 은혜 왕에게 시집와서 고국이 너무 그리워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바다로 나와 '나란다'를 보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추억의 아이스케키' 옛날 어릴 때 얼마나 먹고 싶은 과자인데, 이제는 거저 주어도 이가 시리 못 먹을 쳐지이다.
해운대 해수욕장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피서객들로 인산인해이다.
물반 사람반(?)
모래찜질하기=모래를 파헤치고 그 속에 머리만 내밀고 몸을 모래로 덮는다.
신경통과 관절염, 감기 예방, 피부염, 무좀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하나,
젊은이들은 추억을 만들기 위하여 즐겁게 놀이를 하고 있다.
해양경찰이 전망대에서 혹시나 사고 있을까 바다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독서 삼매경에 푹 빠진 외국인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에 빠져 책을 멀리하고 있는데···
해운대 해수욕장 끝자락 미포로 해서 달맞이고개 문덴로드로 접어들었다.
문덴로드 포토존에서 해수욕장을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 워낙 강한 역광이 되어 해수욕장 모습이 희미함.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호젓한 산책길을 걷을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 지정 사진찍기 좋은 경관명소 Best spot to take photos
이곳은 문탠로드에 있는 대표적인 해안절경, 전망지로 해운대 해수욕장의
해안선과 광안대교 야경, 대마도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해월정=대한 팔경중 하나의 명소로 파란 남해와 갈맷빛 동해가 절묘하게 만나는 지역이다.
저녁밥을 먹고 운동삼아 내자와 집뒤 달맞이 길을 따라 해운대해수욕장을 걸어 동백섬을 돌아 집으로 왔다 오래만에 보는 해수욕장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
2022-01-17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