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14-23
함께 참여하였으니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세 번이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고 데살로니가로 들어갔을 때 두 번 받았고, 지금 로마 감옥에서도 받았습니다. 사역 말미를 향해 달려가던 바울이 감옥에서 잠시 멈춰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영혼의 호흡을 가다듬던 그는 빌립보교회에 대한 감사와 당부가 필요하다는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글을 적기 시작합니다. 본문은 그러한 맥락에서 전해진 공식적인 이야기를 매듭지으며 칭찬과 감사, 그리고 추가적인 당부를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4장13절까지 바울은 우리가 ‘자족’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자족한다는 것은 돈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량의 시각이 아닌 필요의 시각으로 보겠다는 결심과 실천입니다. 있어야 할 것을 구하긴 하지만, 조금 더 편하기 위해서, 보기 좋기 위해서, 자랑하기 위해서 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하는 것에 조건을 더하곤 합니다.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먹을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매일 만나를 먹는 것에 질려 고기를 구합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을 대단하다고 여기면서도 반대되는 것을 구합니다. 조금 더 향기가 나고, 혀를 만족시키며, 분위기도 좋은 왕의 진미를 원합니다. 입을 것 구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복의 필요나 품질을 따지기보다는 어느 브랜드인지와 유행에 맞는지를 중요히 여깁니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내주어야 한다는데(누가복음 6:29), 옷장에는 옷이 넘쳐 정리가 필요할 정도입니다. 살 곳도 당연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자신은 머리 둘 곳이 없다 말씀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누가복음 9:58) 따른다는 우리는, 아파트인지 빌라인지 주차는 어떤지 지하철과 거리나 학군은 어떤지 큰 마트가 있는지, 많은 비교와 고민을 하느라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인데(요한일서 2:16), 아직도 세상에 있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윤택함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욕망이 스멀대며 말 거는 것 보니 저에게 있어 자족이란 비워야만 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자족함은 나눔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괴로움에 참여한 빌립보 교인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합니다(14절). 고마워합니다. 감옥에 있던 바울에게 괴로움이란 자신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타인을 도울 수 없다는 괴로움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진리를 알아야 했고,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 나아가야 했습니다. 바울이 멈춰있는 동안 복음의 전파가 지체되지 않도록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복음의 시초를 경험한 빌립보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의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교회의 도움으로 바울은 사역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교제와 교통입니다.
함께 참여하다는 단어 슁코이노네오는 함께 라는 뜻의 ‘쉰’과 타인과 나누고 의사소통한다는 ‘코이노네오’의 합성어입니다. 우리는 타인과 무엇을 함께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죄를 함께 나눔으로 재앙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요한계시록 18:4). 많은 사람의 욕망이 모인 곳에 내 욕망을 떼어 붙이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더 많이 벌고, 안정적이게 될지도, 짜릿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교제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종말엔 남는 것 없이 말라비틀어진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1절에서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로마서 12:13).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합니다(갈라디아서 6:6). 빌립보 교회가 돈이 많아 바울을 후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국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더 좋은 문화를 경험하려 했다면 될 수 있는 한 많은 돈을 필요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빌립보교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속에서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손해 보며 살 것을 각오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미 희생하고 있는데, 굳이 누군가를 돕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교회는 바울의 사역을 지원합니다. ‘함께한다는 말로 그치지 않고 함께 참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즐거움으로 삼았던 것입니다(베드로전서 4:13). 이러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19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채워지게 되리라’고 축복합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것을 18절은 예배의 용어를 빌어 칭찬합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서 구약의 제사법을 명할 때, 자신의 귀한 것을 드려 온전히 불태움으로 나오는 냄새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고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전에서 제물을 태우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것을 불로 태우듯 타인을 위해 내어 놓는 이들은 '삶의 예배’를 드린 것이라 합니다. 타인의 생명을 보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을 이어가게 한 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돈을 극복하기 힘든 세상입니다. 하지만 빌립보 교회가 돈을 극복하고 바울을 후원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바울의 사역은 다른 부분을 통해 채워지고 이루어졌을 것이고, 빌립보서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교회 이름으로 서신이 남겨졌을지도 모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주님의 말씀이 세세토록 남아 참열매 됨을 신뢰하며(베드로전서 1:24-25), 이를 위해 돕고 나누어 주는 것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것을 지금 내 생활이 풍요로워야 한다는 권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주위 사람들과 우리가 흙으로 돌아간 후 남아있게 될 사람들을 위한 봉사의 책임이라 여겨야 합니다. 자족하기에 나누어줄 수 있겠지만, 나누어 주는 가운데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자족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여호와의 손을 붙잡고 참 영광이신 그리스도, 참 풍성하심인 예수 품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19절의 ‘나의 하나님’이 20절의 ‘우리 아버지’가 되고, 우리가 21절의 ‘성도 즉 성자’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자족함과 함께 참여함의 길을 걸어갈 때 시작됩니다.
이제 우리는 21절과 같이 '서로 문안해야’ 합니다. 문안 가운데 서로가 성자(하나님의 아들이자 구별된 사람)임을, 그리고 형제임을 확인할 것입니다. 또한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 손이 필요한 바울을, 로마의 녹봉을 받고 살아감에도 신앙을 지키겠다며 고난의 길로 들어서는 가이사의 집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자신의 것을 불태우듯 나누어 줄 것입니다. 그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뿌리내리길 소원합니다(23절). 적당히 미소 지으며 신앙을 교양 삼는 사람은 은혜가 얼굴에만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다 잘되기만 바라는 사람은 은혜가 손과 발에만 멈춰있기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가 심령에 다다른 사람은 감옥에 갇혀도, 세상 속에서 손해 보며, 바보처럼 나눠 주어도 괜찮다고 합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있는 하루이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자족하고 나누어주는 바울과 빌립보교회를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정작 우리 삶에선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나누지 않겠다며 꼭 잡고 뒤로 감추던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 아니라 제국의 욕망 아래 순응하며 살아왔음을 봅니다. 함께해야 할 이를 찾고 나누어야 할 것을 보내며 문안해야 할 이를 향해 다가가고 싶습니다. 로마 시민임을 자랑으로 여겼던 빌립보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자랑으로 여겼던 교회가 있었듯 돈이면 다 된다는 세상 가운데 은혜의 논리로 살아가는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자족하기를 바란다면서 나눔 없이 살지 않았나 돌아봅시다.
2. 오늘 내가 함께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생각해봅시다.
3. 내가 나누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4. 우리가 문안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5. 은혜가 심령에 머물기 바라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은혜를 구합시다.
(작성: 이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