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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진도9코스 역방향
서망항-남도진성-동령개재-동령개삼거리-남선마을-윤고산둑-고산사-중만마을-상만마을-국립남도국악원
20220803
1.고산 윤선도의 애민정신과 배중손 장군의 아픔
서해랑길 진도10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한 뒤 10코스 안내판이 세워진 곳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여름날의 뙤약볕이 따갑게 내리쬔다. 흐느적거리는 몸을 일으켜 서해랑길 10코스 시작점 표지물을 거쳐 9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서해랑길 진도9코스 역방향 탐방을 되돌아본다. 서망항에서 서망리마을회관을 거쳐 진도대로로 올라서 남도진성 앞까지 진도대로를 따라갔다. 남도진성 앞에서 맞은편 남동해안길로 들어서 진도남성 활터와 선소 터를 거쳐 남동-동령개재 임도 출입구에서 임도를 따라 고개를 넘어 동령개재로 내려갔다. 동령개재에서 진도대로와 재회하여 진도대로를 따라 동령개소공원, 동령개삼거리를 거쳐가다가 오른쪽 소산 기슭 언덕길로 들어가 굴포리 남선마을로 내려갔다. 남선마을 앞에서 다시 진도대로와 재회하여 굴포마을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왼쪽 농로로 들어가 굴포방조제 방향으로 따라가다가 굴포방조제 수문 앞에서 다시 진도대로와 만났다.
윤고산둑(굴포방조제)과 윤선도 사당 고산사를 거쳐 중만해안을 따라 진도대로를 이어가다가 연대산(蓮大山) 중턱에서 진도대로와 헤어져 숲길로 들어가 상만마을 방향으로 고개를 넘어 내려갔다. 상만3교 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꺾어 농로를 따라가다가 상만마을회관 앞 진도대로와 다시 재회하였다. 나절로미술관을 거쳐 귀성마을 삼거리에서 진도대로와 헤어져 아리랑마을 방향으로 들어서 국립남도국악원 아래 서해랑길 진도9코스 안내판 앞에서 9코스 역방향 탐방을 마쳤다. 8월의 태양은 뜨거웠다. 목이 말라 끊임없이 물을 마셔서 물이 부족하여 고생하였다. 다행히 백동리 신동슈퍼에서 얼음생수를 구입할 수 있어서 탈진을 면할 수 있었다.
남도진성은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으며, 현재의 남도진성은 조선시대에 재축성한 것이라고 한다. 남도진성에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앞서간 일행을 따라가기 위해 포기하였다. 예전에 2번 올라보았다는 것으로 위로하지만 남도진성에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남도진성 남문 옹성 앞을 흐르는 세운천의 아름다운 무지개다리 단운교와 쌍운교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남도진성을 스쳤다. 남도진성은 고려 때 배중손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향하기 직전까지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남도진성에서 패배한 삼별초군은 굴포항 방향으로 쫓기다가 배중손 장군이 전사하자 김통정 장군이 남은 삼별초군을 이끌고 굴포항을 빠져나가 제주도 항파두리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래서 굴포항 맞은편 백동리 해안에 배중손 장군 사당과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배중손 장군 사당과 동상은 군내면 용장리 용장성으로 옮겨져 있다.
고산 윤선도의 명품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를 학창 시절에 배웠다. 고산은 예전부터 불려온 어부가를 환골탈태시켜 연시조 40수 <어부사시사>로 창작하였다. 기억에 남은 "연잎에 밥 싸두고 반찬으란 장만마라"의 시구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후렴구가 웅얼거려진다. 그리고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을 예찬한 6수의 연시조 <오우가五友歌>도 생각난다. 그 중 대나무를 노래한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어 있느냐" 구절이 아직도 생생히 읊어진다. 명품 단가(短歌)의 고산 윤선도가 진도 굴포만에 둑을 쌓아 농토를 간척하여 이곳 마을 농민들에게 농작하게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간척 사업인 윤고산둑은 백성을 사랑하는 선비정신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곳 굴포, 남선, 신동, 백동 등 네 마을 주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날 고산 윤선도 선생에게 고산감사제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고산의 애민정신에 감동하고 마을 주민들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 더욱 감동한다.
임회면 상만리 여귀산 아래에 위치한 국립남도국악원은 지역 문화예술 관광자원화의 토대를 넘어서서 한국 국악의 자존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현대 음악은 서양화되어 우리의 전통 음악인 국악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악이라는 전통예술을 부흥시켜 우리 민족 음악의 국제화,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는 국립남도국악원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진도아리랑과 강강술래, 진도씻김굿 등 진도를 비롯한 남도 지역의 전통음악을 수집하여 계승하는 일뿐만이 아니라 전통음악의 새로운 창조에도 기여해야 한다. 몇 해 전 방송계를 강타한 트로트 가수 송가인이 이곳 진도 출신으로 진도 지산중학교 2학년 때 판소리를 시작하여 판소리 명창에게 사사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음악 출발은 국악 판소리이다. 국립남도국악원이 국악의 메카로 태어나기를 기원한다.
2.탐방 과정
서해랑길 10코스를 역방향으로 끝내고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먹은 뒤 9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서해랑길 9코스는 목포해양경찰서 진도파출소 옆 골목으로 이어진다.
목포해양경찰서 진도파출소 옆 골목 건물 옆 나무기둥에 서해랑길 10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서해랑길 진도10코스 시작점 표지물이 있는 곳에서 서해랑길 진도9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한다.
목포해양경찰서 진도파출소 옆 골목길 뒤쪽에 서해랑길 10코스 안내도, 골목 오른쪽에 시작점 표지 기둥이 세워져 있다.
왼쪽에 서망마을, 오른쪽에 서망항이 있다. 서해랑길은 서망항 주차장 앞을 통과하여 국도18호선 진도대로로 나간다.
오른쪽 앞에 보이는 섬은 죽도이다.
서해랑길 9코스 역방향은 진도분소를 지나 왼쪽 길로 들어가 서망리마을회관을 거쳐 진도대로로 나간다.
서망방파제 뒤에 죽도가 보인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서망마을을 거쳐 이곳으로 이어진다.
서해랑길 9코스 역방향은 남도진성 앞까지 진도대로를 따라 이어간다.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해안과 바다의 섬은 사자도일 것이라 추정한다.
오른쪽 산 뒤에 서망항이 있을 것이고, 중앙의 섬은 길마도, 그 뒤 오른쪽 섬은 장죽도인 듯.
왼쪽에 남동마을, 정면에 남도진성, 서해랑길은 남도진성 앞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해안길로 이어진다.
남동지구 전원마을 조성사업으로 새로이 한옥마을이 조성되었으며 그 오른쪽에는 전통마을인 남동마을이 있다.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남도진성이 있는 남동마을은 새로이 조성된 전원마을과 전통마을을 모두 아우르는 것 같다.
진도 남도진성 자리는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향하기 직전까지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유적지로서, 진도 남도진성은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의 진도 남도진성은 조선시대에 재축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2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남동리를 남도포(南桃浦)라 불렀다. 남도포에는 삼국시대부터 해안경비에 이용된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정부는 이곳 남도포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그 지휘관인 종4품인 만호를 배치하고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진도 남도진성을 축성했다. 당시 남도포의 만호는 조도의 해역과 신안 하의 해역을 관할했다. 기록에 따르면 남도포에 만호부가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음력 1월)의 일이라고 전하고 있어 현존하는 진도 남도진성은 세종 20년 이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남도진성 앞 교차로에서 남도진성 맞은편 남동리 해안길로 이어진다. 오른쪽에 화장실이 있다.
남도진성 남문 옹성 앞을 흐르는 세운천에 단운교가 보인다.
진도 남도진성의 길이는 610m, 높이는 5.1m이다. 석성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성안의 관아와 객사 및 내아가 복원되었다. 동·서·남문 등 3개 문이 있고 남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성곽의 형태는 동벽의 길이가 서벽에 비해 약간 짧은 사다리꼴이다. 성벽은 1m 내외의 장대석으로 성의 기초를 구축한 다음 상부로 올라 갈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내탁법에 의해 쌓아 올렸다. 성돌은 방형 및 장방형의 판석형의 돌로써 대개 대형석재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쌓았다. 동·서·남문 등 3개 문이 남아 있는데 그 규모는 각각 폭 2m, 3m, 3.7m이다. 또한 서문과 동문에는 각각 2개 및 1개의 문지 초석이 남아 있다. 이들 문에는 각각 옹성을 두었다.
진도 남도진성의 남문 앞으로는 동에서 서쪽으로 천이 흐르고 있는데, 주민들은 이 천을 ‘가는골(세운천)’이라 한다. 이 개천에는 두 개의 홍교가 있는데 남문 바로 앞에 단홍교가, 이로부터 9m 거리에 쌍홍교가 위치하고 있다. 단운교는 옆에서 볼 때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리 위에는 흙을 돋우고 잔디를 심었다. 길이 4.5m, 너비 3.6m, 냇바닥에서 다리 중앙부위까지의 높이가 2.7m로 작은 규모이다. 진도지방에 흔한 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다리의 아치 윗부분에는 편마암질의 돌을 판석 형태로 사용하고 아랫부분에는 윗부분에 사용된 돌보다 약간 큰 강돌을 사용하였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아치 부분인데, 다듬지 않은 납작한 모양의 돌을 세로로 세워서 불규칙하게 아치 형태로 돌려 쌓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쌍운교와 단운교는 진도 남도진성의 남문 밖을 흐르는 개울인 세운천을 건너는 2개의 무지개다리이다. 진도 남도진성은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고와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2001년 6월 5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쌍운교는 주민들에 의해 1930년 즈음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단운교는 1870년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단운교에서 40m 정도 떨어진 쌍운교는 개울의 너비가 단운교보다 넓어 쌍무지개 형식으로 만든 점이 단운교와 다르다. 단운교와 마찬가지로 편마암질의 다듬지 않은 돌과 강돌로 쌓아 만들었다. 쌍운교의 길이는 5.5m이고 너비는 2.5m로 높이가 2.7m이다. 이곳에 흐트러져 있던 자연석들을 모아 맞물려 반원형으로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단운교는 옆에서 볼 때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리 위에는 흙을 돋우고 잔디를 심었다. 길이 4.5m, 너비 3.6m, 냇바닥에서 다리 중앙부위까지의 높이가 2.7m로 작은 규모이다. 진도지방에 흔한 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다리의 아치 윗부분에는 편마암질의 돌을 판석 형태로 사용하고 아랫부분에는 윗부분에 사용된 돌보다 약간 큰 강돌을 사용하였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아치 부분인데, 다듬지 않은 납작한 모양의 돌을 세로로 세워서 불규칙하게 아치 형태로 돌려 쌓았다.
단운교와 쌍운교는 비록 규모는 작으나 단아한 멋이 있고,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투박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서민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도 남도진성은 평탄한 대지 위에 축조한 평지성으로서 현재 남동마을의 대부분을 감싸고 있다. 남동리는 서방 및 남방으로 돌출한 서망산 및 망대산 사이의 내해에 자리 잡고 있다. 진도 남도진성은 망대산 하록의 북단에 위치해 외부에서 보면 S자형으로 구부러져 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는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으면서 진도 남도진성 남서쪽의 망대산과 서망산에서는 적을 감시하기에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도포진(南桃浦鎭) 앞 바다와 남동해안 오른쪽에 남동마을이 보인다.
왼쪽에 남도진성 사대가 있던 활터가 있다.
임회면 남동리 남도진성 사대(射臺)는 남동마을 주민들에 의해 사장(射場:활터)으로 구전되어 왔다. 남도진성 앞 홍교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마을에서 상을 당했을 때 마지막으로 사자를 애도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고지도에 의하면 남도진성 사대는 선소 북서쪽의 가장 안쪽의 해안가에 표기되어 있고, 구전으로만 전해져 왔었다. 남도진성 사대는 (재)전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시굴·조사되었다. 조사결과 70×90㎝ 규모로, 깊이 30㎝의 석관묘와 백자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을 뿐 사대(射臺)와 관련된 확실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2011년 10월 18일 선소와 함께 진도 남도진성 추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곳에 남도포만호진(南桃浦萬戶鎭)이라고도 불렸던 남도포진(南桃浦鎭)이 있었다고 한다.
전라수영(全羅水營)은 영산강 하류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왜구를 방어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1423년(세종 14) 전라수영을 목포(木浦)로 옮겼다. 그리고 목포의 병선은 황원(黃原)의 남면 주량(周梁)[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으로, 수영의 병선 3,4척을 매달 윤번으로 진도의 서쪽 소가포(所可捕)에 정박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 진도에는 소가포진 이외에도 사월곶진(沙月串鎭)이라는 또 하나의 수군진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월곶진은 진도 고읍성의 동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들 2개의 수군진은 해남과 분리된 진도군이 치소로 삼았던 진도 고읍성이 북쪽 지역에 위치한 까닭으로 동쪽 해안에는 사월곶진, 서쪽 해안에는 소가포진을 배치하여 진도군의 치소인 진도 고읍성을 방어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진도 고읍성으로 복귀한지 1년 후인 1438년(세종 20) 주량에 있던 병선을 남도포로 옮겨 설치하면서 남도포만호진(南桃浦萬戶鎭)이 신설하게 되었다. 이로써 진도의 주방어선은 진도 고읍성을 중심으로 한 북쪽 해안지역에서 남쪽 해안지대로 옮겨졌으며, 그만큼 왜구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남도포진은 처음 설치된 후 주량의 전라수영에 속하였다. 1479년(성종 10) 순천부 내례포(內禮浦)[여수시 국동 일대]에 전라좌영이 설치됨에 따라 주량의 전라수영은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남도포진은 전라우수영 관하의 임치첨절제사영의 8개 만호진(어란포·금갑도·남도포·목포·다경포·법성포·검모포·군산포진) 가운데 하나로 개편되었다. 중종 때에는 삼포왜란 등 계속된 왜변으로 인하여 전라 좌수영·우수영 관하의 수군진들이 재정비되었다. 남도포진은 전라우수영 가리포진관의 6개 만호진(회령포·마도·이진·어란·금갑·남도포) 가운데 하나로 다시 편제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83년(숙종 4)에 위도진·고군산진·지도진·임자진·고금도진·신지도진 등이 신설되었지만, 남도포진은 계속해서 가리포진관(加里捕鎭管)의 6개 만호진 가운데 하나로 편제되어 있었다. 남도포진은 1895년(고종 32)에 칙령 제141호에 의해 폐지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도포진이 있었던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남도진성 앞 남동해안과 건너편에 남동 전원마을이 있다.
왼쪽에 남도진성 선소가 위치한다.
남도포진의 관할 구역은 나주 관할의 하의도, 신도, 대야도, 상태도, 하태도(이상 신안군), 진도 관할의 가사도, 상조도, 하조도, 나배옥도, 석남도, 태우도(대마도), 소우도(소마도), 관청도, 포을만도(관매도), 청등도, 동거차도, 서거차도(이상 진도군) 등으로 진도군 서부 지역과 이와 접경하고 있던 신안군의 일부 섬까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남도포진 내에 있는 남도포진성(진도 남도진성)은 평탄한 대지 위에 축조한 평지성으로서 현재 남동마을의 대부분을 감싸고 있다. 남동리는 망대산 하록의 북단의 위치하고 있어 외부에서 보면 S자형으로 곡면되어 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는 엄폐되어 있으면서 남도포진성 남·서쪽의 망대산과 서망산에서는 적을 견제 감시하기에 좋은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망대산에는 조망대를 설치, 운영하여 직접 조망하거나, 다른 요망대에서 조망한 적변을 남도포진성의 남쪽에는 세운천(속칭 가는 골)이 남도포진성의 자연 해자 역할을 해주고 있는데, 세운천은 동에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어지며 단운교와 쌍운교가 위치하고 있다. 남도포진에는 2005년 조사한 선소, 봉수, 사대(활터)가 남아있다. 병선의 파손이나 부식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에 이를 수리, 건조하고 또 배가 정박하는 시설로 선소는 반드시 필요하였다. 선소는 현재 남망산의 북서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망대산 정상에는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한 봉수시설이 남아있다. 사대(射臺, 활터)는 『남도진여지도(南桃鎭輿地圖)』에 선소 북서쪽의 가장 안쪽의 해안가에 ‘사대(射臺)’로 표기되어 있는 곳으로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져 왔을 뿐 유구는 남아있지 않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오른쪽 임도를 따라 진도대로 동령개재로 이어진다.
이곳은 진도수협 땅이었는데 진도 및 광주 지역 교회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교회 수양관인데 거의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오른쪽 아래에 남도진성 선소 터가 있다.
1872년 『남도진여지도(南桃鎭輿地圖)』에 의하면 선소는 ‘전선건물소(戰船建物所)’로 표기되어 있어, 배의 출입과 건조 및 수리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진도 남도진성 앞 홍교에서 서쪽으로 약 400m 정도 들어가면 석축시설이 드러나 있다. 이곳은 남망산[119m]의 북쪽 사면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바다와 연접해 있다. (재)전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평면 장방형, 단면 사다리꼴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규모는 길이 33.3m, 폭 8m, 잔존높이 6.3m이고, 기저부에는 나무기둥과 판목, 그 외곽에 추가 돌을 깐 부설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바다 왼쪽에 장죽도가 보이며, 중앙에 솟은 산 뒤쪽에 서망항이 있다.
오른쪽에 남도진성 선소의 석축이 있으며, 남도포진과 남동마을, 그 오른쪽에 남도진성이 있다.
남동리 해인길에서 동령개재로 이어지는 임도 출입로가 왼쪽에 있다. 서해랑길은 남동-동령개재 임도를 따라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남도-동령개재 임도를 거쳐 진도대로 동령개재로 이어진다.
이곳이 임도 정상인 듯. 남동해안에서 이 바위 있는 곳까지는 오름길,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굽이돌아 동령개재로 내려간다.
남동-동령개재 임도 정상부에서 북동쪽의 질매봉을 바라보았다. 질매봉은 굴포리 지역에서 이정표가 되는 듯하다.
질매봉 정상의 바위 모습이 여성의 유두(乳頭)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진도대로와 재회한다.
동령개에서 남동까지 3km가 진도 미르길 제5코스에 해당된다. 서해랑길은 진도 미르길의 동령개 삼거리까지 동행한다.
안내도가 잘못되어 있다. 안내도에 표시된 '현위치'는 동령개삼거리 아래쪽에 표시되어야 한다.
동령개재 오른쪽에 무궁화꽃 정원이 있고 그 아래에 동령개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왼쪽에 이어지는 산봉은 청둥산인 듯.
동령개(동령포) 포구와 방파제, 바다에 불무도와 사자도가 보인다.
진도대로 옆 동령개소공원에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적은 여러 바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름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 죽는다는 것은/ 호사스런 저 산자락을 베고 눕는 일
갈증에 울먹이던 저잣거리/ 두 발목 잡아끄는 수렁을 지나/ 연기처럼 구둘장을 벗어나는 일/ 연기처럼 긴 머리채 헤뜨리고서
벙어리 저 들녘을 내려다보는 일/ 피리새 원추리꽃 훨훨한 구름/ 비로소 나도/ 무념의 한 칸 마루 정자를 짓는 일
멀리 여름산/ 고매한 눈길을 쫓아가노라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동령개소공원에는 이렇게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여러 바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서 굴포리로 넘어온 지역인 듯.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동령개와 동령개방파제 그리고 그 앞에 사자도가 보인다.
동령개 위쪽 산기슭에 자리한 동령개마을이 평온해 보인다.
서해랑길은 직진한다. 오른쪽 위는 진도 자연휴양림 가는 길, 오른쪽 아래는 동령개마을 가는 길이다.
중앙 왼쪽에 천둥산과 그 오른쪽에 청둥산인 듯. 서해랑길은 천둥산과 청둥산 아래 남동-동령개 임도를 따라왔다.
동령개삼거리를 지나 곧바로 진도대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굴포리 남선마을 방향으로 꺾어간다.
중앙 오른쪽에 연대산, 맨 뒤에 여귀산이 구름에 가려 있다. 임회면 굴포리 남선마을이 바로 앞에 있고, 건너편은 임회면 백동리로 왼쪽에 백동마을, 오른쪽에 신동마을이 있다.
질매봉의 암봉이 남동-동령개재 임도에서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성 유두 모양의 바위가 중앙에 있다.
중앙에 솟은 연대산과 그 아래 백동리 신동마을, 신동마을 앞쪽은 굴포리 굴포마을이다. 건너편 왼쪽에 백동리 백동마을이 펼쳐져 있다. 아래의 들판은 1650년 고산 윤선도가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아서 간척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굴포리 남선마을과 굴포마을, 백동리 백동마을과 신동마을 주민들이 매년 정월 대보름날 고산의 덕을 기리는 고산감사제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바로 아래는 임회면 굴포리 남선(南仙)마을, 왼쪽 뒤에 희여산, 그 앞 작은 산은 월출산인 듯.
남선리(南仙里)는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에 속하는 행정리. 1896년 굴포리에서 분리되면서, 임회면의 남단에 있으며 산수가 아름다우므로 남선리(南仙里)라 하였다. 또한 도를 닦는 절이 있어 절골이라 부르다 쩍골로 불리기도 한다. 1800년 경 밀양 박씨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1850년 경 김해 김씨가 옮겨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1896년 굴포리에서 분리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굴포리로 병합하여 임회면에 편입되었다. 질매봉[258m]-상골재[152m]-소산[154m]으로 이어지는 산릉 북동쪽 완경사면에 입지한다. 남선리 뒤쪽의 완경사면은 밭이며, 전면의 간척지는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남선리 서쪽으로는 남선제(南仙堤)가 위치한다. 일설에 의하면 배후산지인 월출산에 사람의 모습과 똑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로 인하여 남선리에 쌍둥이가 많이 생긴다 하여 1910년 경 남선리 사람들이 바위를 깨트려 버렸다고 한다.
남선리는 임회면 남쪽 18번 국도변에 위치한다. 서쪽은 굴포리, 북쪽은 백동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18번 국도에서 갈라진 2차선 도로가 남선리까지 연결되어 있다.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75세대에 13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현재 주요 성씨는 밀양 박씨·김해 김씨·진주 강씨 등이다. 밀양 박씨는 현재 6대째에 이르고 있으며, 김해 김씨는 5대째에 이르고 있다.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쌀과 외대파이다. 마을 조직으로는 운상계·동계·부녀계가 있다. 유물유적으로 절부 밀양 박씨 기념비(1955)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도대로와 남선길이 교차하는 남선삼거리 도로표지판이 앞에 있다. 앞의 진도대로를 따라 굴포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굴포마을 방향 진도대로에서 왼쪽 농로로 꺾어 들어가 들녘 농로를 따라 굴포방조제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 뒤에 질매봉, 오른쪽 뒤에 희여산이 있다. 9코스 시점 방향으로 이어간다.
임회면 굴포리 들녘의 농로를 따라 굴포방조제 방조제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의 산은 연대산이다.
질매봉[258m]-상골재[152m]-소산[154m]으로 이어지는 산릉 북동쪽 완경사면에 입지한다. 남선리 뒤쪽의 완경사면은 밭이며, 전면의 간척지는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남선리 서쪽으로는 남선제(南仙堤)가 위치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굴포리(屈浦里)는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에 속하는 행정리. 본래 진도군 임이면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굴개 또는 굴포라 하였다. 1896년 굴포에서 남선리가 분리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남선리를 병합하여 굴포리라 해서 임회면에 편입되었다. 굴포리는 연대산[148.8m]과 소산[154m] 사이의 만입된 곳에 위치한 천연의 요새이자 양항이다. 굴포리는 임회면 남쪽 해안가에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남해 건너 짝별리와 마주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남선리와 접하고 있다. 18번 국도에서 갈라진 4차선 도로가 남북 방향과 동서 방향으로 굴포리를 지난다.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74세대에 15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들은 굴포간척지에서 논농사와 어업을 병행하고 있다. 마을 조직으로 어촌계가 있다. 주요 기관 및 시설로 지방어항인 굴포항, 임회굴포당제보존회, 주안교회 등이 있다. 유물유적으로는 배중손 장군사적비와 굴포봉수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건너편은 임회면 백동리 신동마을, 오른쪽 산은 연대산, 맨 뒤 구름 덮인 산은 여귀산, 굴포방조제가 고산사당으로 이어진다.
굴포방조제는 1660년대 후반 윤선도(尹善道)[1587~1674]가 처음으로 막았다고 한다. 현재의 방조제는 1940년에 다시 축조하여 1946년 준공된 것이다. 굴포방조제 안의 간척지는 백동들이 되었다. 백동들을 농경지로 활용하기 위해 1942년 백동저수지를 축조할 때 이곳에 살던 20여 가구가 현재의 백동리 위로 이주하였다. 굴포방조제는 진도군 임회면 남부의 굴포리와 짝별리 사이 만입부에 위치한다. 18번 국도에서 갈라진 4차선 도로가 굴포방조제까지 연결되어 있다. 굴포방조제는 한국농어촌공사 진도지사에서 관리한다. 구역 면적은 59㏊, 간척 면적은 51.2㏊, 높이는 2.8m, 길이는 294m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바로 앞에 고산 윤선도의 사당 고산사가 보인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임회면 신동리 방향으로 이어진다.
왼쪽에 소산, 오른쪽에 질매봉이 보인다. 윤고산둑으로 오른쪽 들판이 간척되어 굴포리와 백동리 주민들이 혜택을 받고 있다.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굴포방조제는 1660년대 후반 윤선도(尹善道)[1587~1674]가 처음으로 막았다고 한다. 현재의 방조제는 1940년에 다시 축조하여 1946년 준공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설명안내판에는 축조시기를 1649년~1650(2년) 추정이라고 적혀 있다. 어느 것이 맞을까? 2021년 5월 26일에 설치된 설명안내판을 믿고 싶다.
2021년 6월에 세워진 '고산윤선도선생 사적비'가 삼문 앞에 있고, 수령 230년의 해송이 뜰 안에 있다. 이곳은 배중손 장군 사당이었으며 배중손 장군 동상이 있었는데, 2021년 2월 1일 배중손 장군 사당과 동상이 용장산성으로 옮겨가고 고산 윤선도 사당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예전에 있던 배중손 사당을 고산 윤선도 사당으로 새로이 단장했다. 그 사연이 고산 윤선도선생 사적비건립내역에 자세히 적혀 있다.
1991년 4월에 세운 고산윤공선도선생사적비, 2021년 11월 18일 세운 고산 윤선도선생 사적비건립내역비, 오우가 시비가 있다. 고산 윤선도선생 사적비건립내역비에는 배중손 장군 사당이 용장산성으로 옮겨간 이유가 상세히 적혀 있다. 이곳에서는 고산 윤선도 선생이 쌓은 둑으로 간척된 농지의 혜택을 입은 굴포마을, 남선마을, 백동마을, 신동마을 주민들이 매년 정월 대보름날 고산 선생에게 감사하는 감사제를 지내오고 있었는데, 1999년 배중손 장군 사당과 동상이 건립되면서 마을주민과 배중손 사당 건립측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3년 진도군은 배중손 사당 건립측과 배중손 장군 사당과 동상을 이전하기로 합의하고 2021년 2월 21일 이를 완전히 이전하여 이후 고산사로 새로 단장하면서 오우가와 어부사시사 시비 등이 새로이 건립되었다.
오우가 시비의 수석송죽월 전서체 글씨가 멋지다.
배중손 장군 동상이 있던 자리에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시비가 세워졌는데, 그림과 전서체 춘하추동 글씨가 멋지다.
고산사 뜰에서 10여 분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먹고서 출발하였다.
왼쪽 굴포식당&신동슈퍼에 들어가 얼음 생수를 구입하여 타는 목을 달랬다. 중앙의 산은 연대산, 서해랑길은 해안에서 연대산 오른쪽 진도대로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임회면 백동리에서 상만리로 넘어간다. 법정리 임회면 상만리에 속하는 중만마을이 해안가에 있다.
중만해안에 짝별방파제, 그 건너편에 굴포방파제와 굴포항이 있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섬들이 상구자도, 하구자도가 맞을까?
짝별방파제와 그 오른쪽 중만마을, 고산사당과 고산둑, 건너편 굴포마을, 중앙에 질매봉, 왼쪽에 소산이 조망된다.
연대산 언덕을 넘어 진도대로에서 오른쪽 숲길로 들어선다.
왼쪽에 상만마을이 펼쳐져 있고, 중앙 뒤에 서해랑길 9코스 시작점인 국립남도국악원이 구름에 덮인 여귀산 아래에 있다.
여귀산(女貴山)은 전라남도 진도군 남동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세의 규모도 커서 임회면 동북부를 거의 덮고 있다. 임회천의 발원지이며, 18번 국도가 남쪽 산록을 지난다. 진도군 임회면 용산리 용호마을에서 보면 산의 모습이 단정하게 차려입은 선녀처럼 보인다고 한다. 여귀산은 그저 평범하게 보이지만 오르면 산록은 후박나무, 동백나무 등 식생이 무척 우거져 있다. 반면 산 정상은 상당히 오르기 힘든 바위산으로 되어 있다. 산지 주능선과 산정에서 남쪽을 조망하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을 볼 수 있고, 아래로 오봉산과 연대산을 볼 수 있다. 이곳의 일출과 낙조는 유명하다. 정상부의 산죽 군락지는 그 옛날 정상에 봉화대가 있어서 봉화대를 지키던 봉화수들이 기거했던 곳인데 호랑이의 피해를 막기 위해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전해오는 명칭 유래는 없다. 계집 녀(女)자에 귀할 귀(貴)자를 쓰고 있는데, 여자 산신령이 다스리는 산으로, 귀한 여인이 나올 풍수를 지녔다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산지 모습이 마치 단정하게 차려입은 선녀가 가야금을 타는 형상이라 하여 풍수지리가들은 옥녀탄금형의 산이라 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임회면 상만리 상만마을, 왼쪽에 진도 상만교회 십자탑이 보이고 그 뒤쪽에 상만리 비자나무 숲이 있다. 앞의 대파밭 뒤에 있는 상만3교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꺾어 농로를 따라 진행한다.
상만마을 왼쪽 끝에 진도 상만교회가 있고 그 뒤에 비자나무 숲이 있다. 상만3교를 건너 바로 오른쪽 농로로 진입한다.
연대산 자락 진도대로 상만고개에서 임도로 들어와 고개를 넘어와 상만3교 다리를 건너 상만리 농로를 따라왔다.
왼쪽에 임회면 상만리 상만마을, 오른쪽 뒤에 구름에 덮인 여귀산, 그 아래 국립남도국악원이 살짝 보인다.
9코스 시점까지 700m가 남아 있다.
진도대로 옆 나절로미술관 앞을 통과하여 귀성삼거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시아문학 2022년 시화전이 시아문학회 주최, 나절로미술관 후원으로 8월 20일까지 열렸다. 입장료 성인 2천원, 학생 1천원.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여귀산 아랫자락에 위치한 나절로미술관은 한국화가 이상은씨가 폐교된 (구)상만초교를 개조하여 2007년 문을 열었다. 나절로는 "스스로 흥에 겨워 즐거움"이란 뜻으로 쓰는 전라도 사투리로 미술관을 지은 이상은 화가의 호이자 자유분방한 내면적 예술세계를 표현하는 곳이란 뜻을 함유하고 있다. 5천여 평의 대지위에 마가렛 꽃 가득한 향기와 아름다운 정원, 전통 흙집으로 단장된 쉼터휴게실 등이 만들어져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 미술관에는 한국화 서양화, 조각 등 한국의 중진·중견 작가들의 작품과 나절로미술관장의 작품 등 2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미술품 구매도 가능하다. 나절로미술관은 13년간의 기다림과 준비 속에 아름다운 미술관이 탄생했으며, 5월과 6월에는 마가렛 꽃이 절정을 이루고 작은 음악회도 선사한다. 미술관내에는 민박시설(2동, 20여 명)이 되어 있어 민박도 가능하며 주변에 남도국립국악원과 바다의 절경은 찾는 이의 발길과 눈을 사로잡는다. - 국내여행정보 사이트에서
서해랑길은 진도대로에서 오른쪽 아리랑길 귀성마을과 아리랑마을 방향으로 이어진다.
남해안 관광 벨트사업의 하나로,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귀성리 일대에 추진하고 있는 진도 전통 민속마을 사업이다. 정부와 진도군은 2000년부터 7년간 약 262억 원을 투입해 전라남도 진도군 오봉산 기슭 7만여 평에 민속 관광촌인 아리랑마을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처음에는 진도군 임회면 서망지구에 계획했다가,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묶여 사업지구를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귀성마을로 변경했다. 2001년 착공한 이래 2004년 7월 사전 환경성 검토 및 국토이용계획 변경 미협의의 문제로 2004년 7월 사업이 일시 중단되었다. 2005년 3월 전남권 관광개발 변경계획을 승인받았고, 2005년 6월 20일 사전 환경성 검토협의에 따라 2005년 6월 27일 국토이용계획 변경 고지를 했다. 2005년 9월 전라남도로부터 관광지로 지정되었고, 이후 관광지 민간투자 사업자를 모집공고하고 있다.
여귀산 남쪽 자락으로 오봉산(五峰山) 봉수대 밑 동네인 이 지역은 ‘항구미’라 하여 경관이 아름다운 어촌으로 짹별, 월평, 귀성 등의 동네로 이루어져 있다. 국립남도국악원이 여귀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탄성을 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수평선상에 제주도의 한라산이 떠오르고, 새벽이면 수평선상에 샛별인 금성이 떠올라 예부터 노인 장수촌으로 일컬어왔다. 아리랑마을은 전체 사업비 약 262억 원 중 산업비 82억원으로 도로망을 완비하였고, 아리랑 체험관, 홍주 체험관, 공원, 민속촌, 아리랑 고개, 주차장 등을 건설 추진하고 있다. 나머지 180억 원은 민간자본의 유치로 전통문화 체험관, 위락 센터, 음식점, 숙박시설, 가족형 호텔, 팬션, 실버타운 등을 건설하기 위해 공모 중이다. 이와 별도로 진도군은 이 주변에 예술촌 건설을 계획, 기본 설계를 마쳤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뒤쪽 여귀산은 구름에 덮여 있다.
문화관광부에서 1999년 9월에 민속예술의 보고 진도에 국립남도국악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2000년 7월에 건립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기본계획에 따라 여귀산을 등지고 절경인 바다가 한 눈에 펼쳐지는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373번지에 있는 12만 5천여㎡(3,8000평)의 부지에 연면적 9천56㎡(2,892평)의 지하1층 지상 3층 규모, 총 사업비 325억원 규모로 확정한 뒤 2000년 12월에 국제적인 규모로 설계 및 공모하였다. 2001년 11월 27일에 기공식을 하고 2년 8개월의 공사를 시행하여 2004년 3월에 국립남도국악원 건물을 완공하였다. 2004년 3월부터 개원준비를 위해 준비 기획단을 구성하여 2004년 7월 7일에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국립남도국악원 건물은 지하1층 지상3층(부지 34,258평, 건물 2,891평)의 규모이다. 국립남도국악원 내 주요시설로는 실내공연장으로 600여석 규모의 국악전용극장인 진악당과 원형 야외공연장인 달빛마당, 야외 소규모 공연을 위한 별빛마당, 숙소동인 사랑채 등이 있다. 국악이라는 전통예술을 통하여 앞으로 우리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알림으로써 문화선진국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켜 국가브랜드 제고 및 우리 전통문화 홍보와 문화외교 강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예술문화기관으로서 의의가 크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여귀산 남쪽 자락으로 오봉산(五峰山) 봉수대 밑 동네인 이 지역은 ‘항구미’라 하여 경관이 아름다운 어촌으로 짹별, 월평, 귀성 등의 동네로 이루어져 있다. 국립남도국악원이 여귀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탄성을 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수평선상에 제주도의 한라산이 떠오르고, 새벽이면 수평선상에 샛별인 금성이 떠올라 예부터 노인 장수촌으로 일컬어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