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하이델베르그대학은 1386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설립자인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와 이곳을 최초의 바덴 주립대학으로 만든 카를 프리드리히의 이름을 따서 '루프레흐트-카를 대학'이라고도 부른다. 하이델베르그대학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하이델베르그대학 신학부 역시 세계의 신학을 주도하며 명성을 떨쳐왔다. 또한 게르하르트 폰 라드, 군터 보른캄 등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하이델베르그에서 교수로 활동해 왔다.
현재 독일 대학의 신학부들은 수준이 거의 평준화되어 있는 상태. 또한 우리나라나 미국의 신학대학과는 달리 교단이 아닌 국가가 대학을 지원하기 때문에 교단에 따라 진보 혹은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따위의 일은 없다. 그래서 대다수 독일의 신학대학은 학교별로 특징적인 학풍을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 학교가 아니라 교수에 따라 학교의 학풍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델베르그 신학부도 마찬가지.
그러나 하이델베르그 신학부 출신들은 하이델베르그가 다른 어떤 대학보다도 다양한 테마를 다양하게 배울 수 있는 학문의 전당이라고 말한다. 아주 보수적인 신학부터 아주 진보적인 신학까지 여러가지 색깔이 공존한다는 얘기. 하지만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서로 다른 신학의 색깔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어울려 열린 마음으로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하이델베르그인 것이다.
하이델베르그대학 신학부는 지금까지 정통 독일신학의 맥을 이어왔다. 시대나 유행에 현혹되지 않고 신학의 본질적인 면을 꾸준히 탐구해 온 것. 그래서 어느 시대 어떤 신학이 유행(?)했다고 말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1970년대 하이델베르그에서 박사학위를 한 성공회대 손규태 교수는 "하이델베르그의 신학을 시대별로 특징짓기란 매우 어렵다"면서 "굳이 따지자면 60년대에는 역사로서의 계시에 대해, 70년대에는 타이센을 위시한 성서의 사회경제사적 해석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같다"고 전했다. 80년대 하이델베르그에서 공부한 한 채수일 교수 역시 "하이델베르그 신학은 거의 변함이 없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신학과 경제문제를 논하는 경제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선교신학이 붐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말했다. 1지난 2000년 하이델베르그에서 학위를 받은 임홍빈 박사는 "하이델베르그는 최근에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신학에 관심을 갖는 것 같다"면서 "또한 봉사신학부를 따로 두고 있을 만큼 봉사신학에 대해 열정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손규태 교수는 "하이델베르그는 과거 유럽(독일)의 테두리 안에서 신학을 탐구했지만 지금은 선교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등을 통해 제3세계와도 학문적 교류를 하고 있다"며 "타문화, 타종교에 대해서도 점점 더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신학자 가운데 하이델베르그 신학부에서 가장 먼저 신학박사 학위를 한 사람은 우리나라 민중신학의 기틀을 마련한 안병무 박사이다. 안병무 박사는 1960년대 독일에서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을 연구했으며 이를 토대로 한국에 돌아와서 민중과 민족의 실존에 대해 가르쳤다.
안박사의 뒤를 이어 1970년대 김영한(1974 기독교철학, 훗셀과 나토르프-훗셀의 현상학과 나토르프의 신칸트 이론에 있어서 철학의 최후 정초 문제학에 대하여·현 숭실대 교수) 손규태(기독교윤리·현 성공회대 교수)가 하이델베르그에서 수학했다. 1980년대는 김광채(1989 어거스틴의 정의관) 등이 공부했다. 하이델베르그 출신 국내 신학박사들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채수일(1991 선교학·현 한신대 교수), 권호덕(1991 조직신학, 종교개혁신학 특히 칼빈의 신학을 수용한 에르와르 뵐·현 천안대 교수), 이광진(1994 신약학·현 목원대 교수), 고덕신(1995) 구순자(1996 쉘링의 자유론에 나타난 신론과 그 신론에 대한 틸리히의 수용), 이후천(1996 선교신학, 아시아의 문화토팍화신학: 한국의 감리교 신학자들, 대만의 송천성 그리고 스리랑카의 알로이시우스 피어리스에 있어서 문화토팍화 이해·현 협성대 교수), 임걸(1996 하나님의 말씀, 선동와 교회-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신학의 조직신학적 기초들), 강성영(1997 기독교윤리, 현실, 신앙과 삶-세계 속의 하나님의 현실과 비종교적 해석의 윤리적 의미와 상관성), 노태성(1997 공관복음의 하나님의 가족사랑: 원시 기독교의 한상영역에 관한 편집사적, 사회사적 연구), 신준호(1997), 한국일(1997 선교신학, 독일어권의 선교신학에 있어서 선교와 문화·현 김옥순(1998 봉사신학, 디아코니아신학의 교회론적 사회-정치적 단초들이 한국장로교회에 주는 의미), 박찬웅(1998 요세프루스와 누가에 나타난 세례 요한상과 나사렛 예수상에 관한 사회사적-편집비평적 비교연구), 이승렬(1999 봉사신학, 한국개신교 사회봉사의 역사와 그 사회봉사적 사역의 갱신에 대한 전망) 등이 90년대 학위를 받았다.
또한 김동춘(2000 구원의 프로그램으로서 Gemeinschaft-Gemeinschaft 개념의 축면에서 본 위르겐 몰트만의 삼위일체적, 생태적 구원이해), 김윤규(2000 한국과 요한 크리스토프 블륨하르트에게서의 영성, 한국 개신교회를 위한 지침들), 임홍빈(2000·현 한신대 강사), 박정수(2001 죄용서-그 종교적, 사회적 차원), 송강호(2001 인류공동체를 위한 회심: 다문화권 사회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전제로서의 변혁적 학습) 등이 가장 최근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다.
하이델베르그대학 신학부는
1386년 대학의 설립과 함께 시작된 신학부는 하이델베르그의 가장 핵심적인 학과였다. 이는 중세대학들이 신앙과 정경에 그 근본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이델베르그 신학부의 최초 강의는 성서해석과 조직신학으로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하이델베르그는 초기부터 신학부가 학생들의 신앙고백을 실행하는 장소가 아니라 건전하고 합리적인 학문적 바탕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곳임을 분명히했다.
마틴 루터와 필립 멜란체톤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하이델베르그대학 전체, 특히 신학부를 재정비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하이델베르그 신학부의 초점은 성서해석에 맞춰져있다.
이후 하이델베르그 신학부는 엘렉토르 칼 프리드리히, 리차드 로테, 에른스트 트뢸치, 바르틴 디벨리우스, 게르하르트 폰 라드, 군터 보른캄, 한스 폰 캄펜하우젠, 빌헴름 한 등을 위시로 세계신학을 주도하게 된다.
오늘날 하이델베르그의 신학은 성서신학, 역사적·에큐메니칼적 그리고 사회적 목회연구 그리고 종교철학에서의 연구가 주요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현재 하이델베르그 신학부에는 1000명의 학생이 재학중에 있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개신교 신학부 학생들이다. 카톨릭 신학부는 매우 미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학부에 재학중인 한국학생은 30~40명 정도. 하이델베르그는 원래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지만 최근 15학기째부터는 학비를 받는 것으로 체제를 바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