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를 동서로 가로질러 무심하게 흐르는 내가 이른바 ‘무심천’이다. 이 무심천을 두고 노산 이은상은 ‘그 옛날 어느 분이 애타는 무슨 일로/ 가슴에 부여안고 이 물에 와 소소할제/ 말없이 흘러만 가매 무심천이라 부르던가/ 눈물이 실렸구나 보태어 흐르누나/ 원망이 잠겼구나 흐르는 듯 맺혔구나/ 이 물에와 호소하던 이/ 몇 분이나 되던고’라고 노래했다.
또, 지역의 문인 한병호는 한점 티끌없이 맑은 서정으로 청주를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 무심천 둑길을 걸으며 청주를 노래하고 있다. ‘무심천을 바라본다/ 흐르는 물빛도/ 떠다니는 유람선도 없다/ 하루종일 바라봐도 아무 것도 없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왔다 구름처럼 흘러가는/ 바람의 빈 여울목/ 10년을 바라보아도/ 100년을 바라보아도/ 보이는게 없다/ 보이는건 빈하늘 뿐이다/ 어떤 이는/ 미라보다리 밑에 흐르는 세느강을 생각한다지만/ 무심천은/ 이대로가 좋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대로가 좋다’
전설지명 연구가인 김기빈의 글을 빌리면, 옛날 청주 남천가에 다섯살된 외아들을 데리고 조그마한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집에서 청주로 들어가는 남천위로 통나무로 된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어느해, 큰 장마가 들어 물이 불어나 황토물이 통나무다리 밑으로 넘실대며 흘렀다.
그 무렵 인근의 대원사 스님이 탁발을 나왔다가 모자가 살고 있는 집에 들러 시주를 대신해서 잠시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여인은 마침 성(城)안에 다녀올 일이 있었는지라 다녀올 때까지 어린아이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집을 나섰다. 스님은 피곤한 몸을 툇마루에 누윈채 어린애를 보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밖에서 왁자지껄하더니 애절한 여인의 통곡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니 축 늘어진 어린아이를 안은 여인이 울부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이 잠깐 잠이 든 사이에 어린아이가 남천 통나무 다리에 올라가 놀다가 개울에 떨어져 목숨을 잃은 것이다. 스님은 자신의 불찰을 뇌우치며 죽을 수만 있다면 목숨을 버리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 뒤 여인은 어린애를 화장하여 남천에 띄우고 삭발을 한 뒤, 어린 넋의 극락왕생을 빌며 산으로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대원사의 스님은 크게 부끄럽게 생각하고 인근의 여러 가람에 알려 승려회의를 열었다. 그 모임에서 어린아이의 영혼이 극락왕생을 비는 큰 제를 올리고 또한, 통나무다리 대신 튼튼한 돌다리를 놓게 되니 이 다리가 ‘남석교(南石校)’요, 동네 이름이 ‘석교동’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또 다리를 놓을 때 대원사 동쪽에 있는 선도산에 장막을 쳐 돌을 캐, 다듬었다하여 ‘동막골’이란다.
이런 전설을 간직한 남천이 어느 사이엔가 오늘날 무심천(無心川)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무심천’은 글쓴이 생각으로는 우리말에서 물의 본딧말인 ‘무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무수+내-무수내-무시내-무신내-무심내(無心川)’로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를테면, ‘물막이’의 뜻으로 ‘무수막-뭇막-문막(文莫:강원 원주)’으로, 또 ‘무수골-무쇠골-금호동(金湖洞:서울)’의 경우도 한자로의 뜻빌림(意譯)이 되는 경우, 이런 우(愚)를 범한다.
고을이 맑고 깨끗하여 ‘청주(靑州)’이던가! 그 청주인들의 심성도 이제는 무심하여…, 공단이 들어서고 시가가 번창, 흘러나오는 생활오수로 크게 오염되어 무심하기 이를데 없는 무심천(無心川)이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