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쪽수는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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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 소리에 공포심은 섞여 있지 않았다. 유쾌한 충격 같은 것을 받았거나, 술에 취했거나 아니면 순전히 바보 같은 사람이 과장스럽게 내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나에게 흰 옷을 입은 남자들, 창살을 친 창문, 손목과 발목을 묶는 가죽끈이 있는 딱딱하고 좁은 간이침대를 연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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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열 블록 정도 비에 젖은 구불구불한 거리를 돌아 내려가서, 물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나무 밑을 지나 유령같이 거대한 대지 위에 서 있는 커다란 저택들의 불 켜진 창문 옆을 지나갔다. 언덕 위에 어렴풋이 무리지어 있는 처마와 지붕,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들은 숲 속 마녀가 사는 집처럼 멀리 떨어져 닿을 수 없는 곳 같았다. 나는 쓸데없이 휘황찬란하게 붉을 밝히고 있는 주유소로 나왔다. 뿌옇게 된 유리창 안에서, 하얀 모자를 쓰고 진청색 점퍼를 입은 점원이 지루한 듯 의자에 꾸부정하게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나는 다시 길에 접어들어 계속해서 걸었다. 나는 이미 젖을 만큼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런 밤에 택시를 기다리다가는 턱 밑에 수염이 새카맣게 자랄 것이다. 그리고 택시기사들은 기억력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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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 기운이 냉랭했다. 나는 방문을 다시 잠그고 손수건으로 손잡이를 닦아낸 뒤 다시 토템 기둥으로 돌아갔다. 무릎을 꿇고 융단의 보풀을 현관까지 죽 훑어보았다. 마치 발꿈치가 질질 끌려간 것처럼 그쪽 방향으로 두 개의 홈이 나란히 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 그런 짓을 한 자는 힘깨나 썼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상처받은 마음보다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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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제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저는 셜록홈스도 아니고 파일로 밴스도 아니니까요. 저는 경찰이 밝혀낸 것을 바탕으로 해서 조사를 할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부러진 펜촉 하나를 주워서 거기서 사건을 구성하는 능력도 없습니다. 탐정 업에 있는 사람이 그런 류의 일을 해서 먹고 산다고 생각하시면, 경찰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겁니다. 그런 것은 경찰들이 모르고 넘어가는 종류의 일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경찰이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경찰들이 정말로 일을 맡았을 때 어떤 일을 종종 못 보고 넘어간다고 말씀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렇게 넘어간다면 뭔가 더 허술하고 모호한 것이 개입되어 있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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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죽으면 어디에 묻혀 있는지가 중요할까? 더러운 구정물 웅덩이든, 높은 언덕 꼭대기의 대리석 탑이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당신이 죽어 깊은 잠에 들게 되었을 때, 그러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게 된다. 기름과 물은 당신에게 있어 바람이나 공기와 같다. 죽어버린 방식이나 쓰러진 곳의 비천함에는 신경쓰지 않고 당신은 깊은 잠에 들게 되는 것뿐이다. 나도, 이제는 그러한 비천함의 일부가 되었다.
역시 최대한 줄거리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범위에서 올려봅니다.
전 처음엔 이 소설에 그렇게 큰 감흥이 없었는데, 읽을수록 다른 맛이 있는 소설 같아요.
첫댓글 재밌군요. . 쓰는 사람은 지겨울 듯 ㅎㅎ
이쿠. . 다시 들어가려니깐 잘 안되네요. 밥벌이 님 다음에!~ ㅎ
아, 빅슬립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저도 기억나는 귀절들을 모아놨는데, 밥벌이님과 솔찬히 일치하네요. 특히 마지막 구정물 웅덩이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귀절입니다. 책 찾으면 땅바닥표 빅슬립 기억나는귀절도 올려볼께요. 주인공이 삼삼하게 떠오르네요.감사히 읽었습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