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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차
운율, 음성의 효과를 노리자
3. 신경림의 민요 율격 수용²⁷⁾
신경림의 1980년대 초반까지 시론들을 모은 첫 평론집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1부에 수록한 「나는 왜 시를 쓰는가」와 「시와 민요」, 「시와 이데올로기」, 「시정신과 역사정신」은 시인의 창작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시, 민중의 사랑을 받는 시를 강조하였으며 이를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한글 전용과 고유의 민요가락을 되살리는 시를 쓸 것을 주장합니다.
「농무」 이후의 시집인 『새재』와 『달넘세』는 시인이 민요 등 전통 민중시가 양식을 현대시에 차용한 창작상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²⁸⁾ 그 결과 많은 평자들은 신경림 시의 민요적 성격에 대하여 주목하였으며 창작방법으로서 ‘민요시론’²⁹⁾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일군의 시인들이 근대 자유시 형식에 회의를 느끼고 민요의 수용을 통해 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보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³⁰⁾, 신경림의 시에서 민요 양식의 차용은 당시 시가 ”일반 민중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고 있던 상황“³¹⁾에 대한 창작방법의 혁신이었습니다. 1979년 6월 단국대학교에서 강연한 「나는 왜 시를 쓰는가」는 그의 중요한 민요시론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저는 구체적으로 시가 민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 시속에 우리 고유의 민요적 가락을 되살리는 것이 어떻겠느냐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최근 여러 해 동안 졸시 「새재」를 쓰기 위해 자료를 모은다는 구실로 시골, 특히 남한강 일대를 여러 번 돌아다녔는데 강마을 어딜 가나 들을 수 있었던, 아직도 농민들 사이에 전승되어 오고 있는 민요가락처럼 저에게 감동을 준 것은 없었습니다. 결코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어떠한 현대문학 작품도 형상화하지 못했던, 이 민족의 한과 설움, 견딤과 참음, 끈질긴 생명력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민요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특수 프로그램이나 뒷골목 술집에서 가수나 작부에 의해 가까스로 보존되고 전승되고 있다는 느낌인데 이것을 시 속에 끌어들이는 것은 민요의 계승을, 발전을 위해서라기보다 시가 민중의 사랑을 되찾기 위하여 매우 시급한 일이라 여겨집니다.³²⁾
위의 인용 글을 살펴보면, 신경림은 시가 민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하여 민요적 가락을 되살리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는 장시 「새재」를 쓰기 위하여 남한강 일대를 돌아다니며 민요 자료를 모으면서 시에 민요형식의 차용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신경림은 그의 시론인 「시와 민요」에서 무가의 수용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오늘의 시 속에 무가를 수용하는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가란 병과 재난을 쫓고 복과 행운을 비는, 주술적인 목적을 가진 무당의 노래이다. 무가는 무당의 감정이나 바람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바람이 해결된다는 전제 아래서만 무가는 있을 수 있으며, 무가가 절실하고 간절한 것은 여기 연유한다. 무가가 이 주술적 성격과 함께 가진 것은 예술적 성격이다. 무가는 무당이 민중을 대신하여 표현하는 원시적 형태의 문학의 하나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무가의 문학적 성격은 「바리공주」나 그 밖의 동해안 무가 등 서사적 무가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서사 무가가 발전해서 판소리가 되었다는 설도 들리는 판이다.³³⁾
그가 주장하는 것은 무가 전부를 오늘의 문학 속에 수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당시 지나친 말장난, 삶을 대하는 장난기 때문에 제 구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시에 대한 대안으로 무가의 절실하고 간절한 정신을 시로 계승하자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무가의 예술성도 현대시 속에 되살리면 현대시의 소생을 위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민요의 중요한 형식 가운데 하나는 율격입니다. 민요의 기본 율격은 2음보 형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2음보에서 4음보로 확대하고, 그 변형인 3음보나 5음보로 나타납니다. 음보는 율격의 기본 단위이고 각 편의 행이나 연, 나아가 형태를 결정짓는 가장 작은 요소입니다.
신경림은 시에 다양한 민요의 율격을 수용하는데, 민요 율격을 수용한 가장 성공적인 시는 「목계장터」입니다. 이 시는 ”전통적 율격의 활용에 의해 민요적 가락을 재생하는 데 뛰어난 성공“³⁴⁾을 거둔 작품이며, ”민요조의 전통적 가락을 현대적으로 재생시키는 데 탁월한 성공을 거둔 명편“³⁵⁾입니다. 이 시가 독자의 정서를 뒤흔들고 있는 시적 힘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해명해보면, 결국 민요 율격의 계승이라는 방법적 측면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3/3/3/4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2/3/3/4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4/3/3/2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3/4/4/3
뱃길이라/ 서울 사흘/목계 나루에 4/4(2/2)/5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3/4(2/2)/5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4/3/4/3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2/3/3/4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2/3/3/4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3/4/3/4
물여울/ 모질거든/바위 뒤에/ 붙으라네 3/4/4/4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4/4/5(2/3)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4/4/5(3/2)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4/4/4/3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3/3/3/4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2/3/3/4
-신경림, 「목계장터」전문
단연 16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목계장터를 중심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환을 민요 율격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우리의 고유한 가락인 3, 4조의 4음보격 민요조에 반복어법의 표현과 반복구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상당히 서정적이고 향토적이며 비유적으로 진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요가 현대시에 감각적으로 아름답게 수용된 사례인 것입니다.
유종호는 이 시가 옛 가락을 되살린 작품 가운데 옛 가락의 참 모습에서 가장 떨어져 있으면서도 가장 뛰어난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³⁶⁾ 우리는 이 시를 읽어가면서 가락의 친숙성을 느낍니다. 이 시에서 민요가락을 듣는 것과 같은 강한 전통적 리듬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운율적 질서에 친숙한 4음보격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³⁷⁾
/표시는 3 또는 4음절수를 주조로 하는 우리 전통시가의 1음보 표시입니다. //표는 4음보가 모인 전통 율격의 단위 표시입니다. 이 시는 구조적으로 아주 안정된 4음보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³⁸⁾ 여기서 2행의 ‘땅’과 3행의 ‘나루’ 등은 음절수가 2음절인 변격이지만 「목계장터」가 민요의 기본 율격인 3 또는 4음절 주조의 4음보격을 토대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변격은 2음절이 1음보가 되거나 5, 6음절도 1음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율격은 ‘자연 언어의 운율적 가능성이 실현되는 추상적 규칙’이므로 기준 음절수에 다소 맞지 않는 부분도 기본율격으로 소화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부분은 평탄하고 쾌적한 율동감을 주며, 변격의 부분은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긴장을 일으켜 정서를 고양시키거나 강조하는 등 신선한 효과를 거두게 합니다. 따라서 “변격의 알맞은 활용은 율격의 파괴가 아니며, 율격이 존재하는 의의의 일부”³⁹⁾라고 합니다.
이 시의 표현상 특징은 전통적인 민요의 리듬을 연상시키는 4음보를 주된 율격으로 하면서, ‘하고’, ‘하네’, ‘라네’ 등의 어미를 반복적으로 구사하여 생동감 있는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방랑과 정착의 심상이 교체되어 나타나고 있으나 마지막 부분에서 처음의 1, 2행을 변주 또는 반복을 하며 주제를 강조하는 안정된 구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시는 표면상 1인칭 화자의 독백으로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독백은 화자 개인의 삶의 애환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떠돌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민중의 고뇌라는 일반화된 삶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시가 ‘목계장터’라는 생활 현실의 공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시적 화자가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들이 시적 표현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름’이나 ‘바람’ 등으로 표상되는 떠남과 ‘들꽃’이나 ‘잔돌’ 등으로 표상되는 정착의 이미지 사이의 대조적 표현은 퇴색해 가는 목계나루에서 방랑과 정착의 기로에 서 있는 농촌 공동체의 시대적 삶과 화자의 개인적 삶 사이의 갈등을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부연하자면, 목계는 1910년대까지 중부지방의 각종 산물의 집산지로 남한강안(南漢江岸)의 수많은 나루터 중 가장 번창하기도 했지만, 1921년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의 일환으로 충북선이 부설되자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신경림의 민요 율격 계승 노력은 다른 시에서도 나타납니다. 민요에서 가장 보편적인 율격은 3, 4음보격입니다. 「목계장터」에서는 4음보격을 계승하였지만 다른 시에서는 3음보격을 계승하기도 합니다.
가는구나/ 모두들/ 가는구나 4/3/4
구럭 질끈/ 어깨에/ 짊어 메고 4/3/4
언청이/ 헌데 난 놈/ 애꾸눈이 3/4/4
모두들/ 제멋대로/ 한데 얼려 3/4/4
논다니질하고/ 싸움질하고 6/5
찧고 까불고/ 별 방정/ 다 떨면서 5/3/4
가는구나/ 모두들/ 가는구나. 4/3/4
- 신경림, 「길 2」 부분
죽음의 길을 형상화한 위 시는 언청이, 헌데 난 놈, 애꾸눈이, 외팔이, 절뚝발이, 곰배팔이 등 생생한 인물의 묘사와 “질끈 어깨에 짊어 메고”, 논다니질, 싸움질, 찧고, 까불고, 방정, 어깨춤, 조라치 걸음 등 인물의 행위가 뚜렷합니다.
위의 시는 한 행에 3음보 중심 율격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격(파격)율격은 2음보나 4음보와 비교했을 때 훨씬 유동적입니다. 경쾌한 느낌을 주는 3음보의 율격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에서처럼 「아리랑」이나 「둥기당 타령」등과 같이 유흥민요나 가창유희요에 주로 나타납니다.⁴⁰⁾
또 그는 시에 무가 운율을 차용하고 무가의 어법을 활용합니다. 무가는 구연을 해야 하므로 시가의 음성적 형식인 운율로 되어 있는데 가사 구성은 대체로 4/4조이지만 곡조는 지역에 따라 다릅니다.⁴¹⁾ 무가의 또 하나 특징은 율문 전승인데, 무가의 악곡은 대개 그 지방의 민요곡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서사무가⁴²⁾와 같은 “장편 무가는 4음보격으로 듣기 좋게 구송(口誦)됩니다.⁴³⁾ 예를 들어 경기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무가 중에는 노랫가락이나 창부타령 등 민요곡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신경림의 시집 『달넘세』에는 주술성과 음악성, 대화성 등 무가 양식을 수용한 시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달넘세』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분단과 광주항쟁 등 민주화과정에서 희생당한 원혼의 혼령을 화자로 하는 작품이 많은 양을 차지합니다. 「새벽」 「열림굿 노래」 「승일교 타령」 「곯았네」 「어머니 나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허재비 굿을 위하여」 「병신춤」 「4월 19일」 등의 작품이 원혼이나 혼령 등 죽음의 심상과 관계됩니다.
신경림은 무가의 절실하고 간절함을 오늘의 시 속에 정신적으로 계승할 것과, 무가의 주술적 측면을 배제하고 예술성을 현대시 속에 되살린다면 “현대시의 소생을 위해 크게 도움”⁴⁴⁾이 될 것이라며 스스로 무가 형식을 차용하여 시를 창작한 것입니다. 민요 율격을 전승한 신경림의 시 가운데 스스로 성공작이라고 생각하는 ‘떠도는 원혼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씻김굿을 분석하여보기 바랍니다.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꺾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
밤도 낮도 없는 저승길 천리만리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잠들라네 날더러 고이 잠들라네
보리밭 풀밭 모래밭에 엎드려
피멍든 두 눈 억겁년 뜨지 말고
잠들라네 날더러 고이 잠들라네.
-신경림, 「씻김굿떠도는 원혼의 노래」 부분
전라도 씻김굿 형식을 차용한 총 6연 25행의 시입니다. 시인이 주를 붙였듯이 씻김굿은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하는 굿으로 원통한 넋을 위로해서 저 세상으로 편히 가게 하는 무속의 의례입니다. 이 시가 쓰인 시대 상황이나 씻김굿이 전라도 지방에서 하는 굿임을 상정하여 볼 때 1980년 광주항쟁기간 동안 죽은 원혼을 소재로 하여 쓰인 시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시 가운데 “꺾인 목 잘린 팔다리” “피멍든 두 눈” “찢긴 이 손” “피 묻은 저 손” 등을 볼 때 잔악한 정치적 폭력 상황에서 죽은 원혼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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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공광규,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 푸른사상, 2005, 80~121쪽 참조.
28) “내가 민요에 주목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써온 시 세계에 대해 어떤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극복해 보려고 민요의 가락이나 민요의 미적 정서를 도입하면 어떨까 생각했던 거예요. 원래 『새재』를 쓸 때부터 민요조로 쓰고 싶었어요.”(신경림 ·박시교 대담, 《유심》 2002 여름, 287쪽)
29) 윤여탁, 「창작방법으로서의 민중시론」 한계전 외, 『한국 현대시론사 연구』, 문학과지성사, 1998, 345~349쪽 참조. 신경림은 1984년 ‘민요연구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민요기행을 기획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요채집에도 힘썼다. 그 성과가 두 권의 『민요기행』(한길사 1985, 1989)으로 나오기도 했다.
30) 주요한, 김억, 홍사용, 김동환 등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기존의 시 형식에 회의를 나타내고 민요시를 창작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민요시는 시의 제재를 단순 자연물이나 자연현상에서만 취하게 되었으며, 현실에 대한 관심을 은폐하는 대신 전통적인 정서나 향토적 정취란 이름의 퇴영적인 세계로 함몰하고 말았다. 이는 민요의 율격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근대시로 성취해낸 김소월에게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감태준, 「근대시 전개의 세 흐름」, 김윤식 외, 『한국현대문학사』, 현대문학, 1989, 135~138쪽 참조)
31) 김윤태, 「민중성, 민요정신, 현실주의-신경림의 평론에 대하여」, 구중서 외, 『신경림의 문학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314쪽 참조,
32) 신경림,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이승훈 엮음, 『한국현대대표시론』, 태학사, 2000, 151~152쪽.
33) 신경림,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전예원, 1983, 66~67쪽.
34)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 외,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89쪽.
35) 장영우, 《불교문예> 2002 봄호, 61쪽.
36) 유종호, 「슬픔의 사회적 차원」, 『동시대의 시와 진실』, 민음사, 1982, 135~136쪽 참조.
37) 이시영, 「목계장터의 음악적 구조」, 『곧 수풀은 베어지리라』, 한양출판, 1995, 163쪽참조.
38) 이동순은 4음보율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고 5, 6행과 12, 13행에 3음보 가락을 매우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동일음보의 또는 단순반복에서 오는 호흡의 지루함을 조절하고 있다고 하였다.(이동순,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연구》, 1991.12)
39) 김홍규, 「근대시의 환상과 혼돈」, 『문학과 역사적 인간』, 창작과비평사, 1980, 192~193쪽.
40) 김선풍 외, 『민속문학이란 무엇인가』, 집문당, 1993, 186~187쪽 참조.
41) 김성배, 『한국의 무속』』, 집문당, 1980, 281쪽 참조.
42) 서사무가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며 주인공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 사건을 서술한 이야기이다. 오구굿에서 노래로 불려지는 「바리공주」가 가장 대표적이다. 「바리공주」 이야기는 무당의 조상인 바리공주가 출생 후에 버림을 받았다가 다시 부모를 만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다는 점에서 동서양에 공통적으로 전승되는 영웅 이야기와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으나 효행이 첨가된 것이 특징이다. 「바리공주」는 지역별로 많은 채록이 이루어졌으며 전국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오출세, 『한국서사문학과 통과의례』, 집문당,1995, 60쪽 참조)
43) 장덕순, 『한국문학사』, 51쪽.
44) 신경림, 앞의 책, 67쪽,
45) 신경림 · 박시고 대담, 앞의 책.
2024. 2. 23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