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송지희 기자의 보살의 길 / 공민왕비 노국공주
본국 대신 지아비의 나라 품은 고려의 국모
원나라 위왕의 딸 보탑실리
고려 독립·자주정책 지지
깊은 밤, 한줄기 달빛이 고요한 방안을 깨웠다.
달빛은 곧장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에 가 닿았다.
어슴푸레 빛나는 영정을 마주하니 마치 공주가 살아 돌아온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염없이 영정을 바라보던 공민왕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세월이 얼마나 흘러야 그녀를 잊을 수 있을는지. 어쩌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공민왕에게 노국공주는
영혼까지 나누었던 다시없을 동반자였으며 삶을 지탱하는 힘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은 함께 부처님을 따르는 도반이기도 했다.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사찰을 찾아 나라의 안녕과 마음의 평안을 발원했다.
나란히 엎드려 절을 할 때면, 곁에선 공주의 옷깃 사각거리는 소리에
마음 속 깊이 솟아오르는 벅찬 행복도 느꼈다. 노국공주는 무척이나 신심이 깊었다.
자신이 공무에 바쁠 때면 혼자라도 기어이 인근 사찰을 찾아가 참배하곤 했다.
보우 스님을 봉은사로 초청해 설법을 청했을 때,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실 정도로’ 기뻐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당시 노국공주는 보우 스님의 법문에 깊이 감화돼 그 자리에서 스님에게 절을 하고,
은으로 만든 바릿대와 수놓은 가사 등을 산처럼 쌓아 공양 올렸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선종에 깊이 심취했다.
밤이면 함께 불경을 읽고 나란히 참선에 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랬던 그녀가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의 곁을 떠난 것이다.
기억을 곱씹을수록 지독한 그리움이 가슴을 후벼 팠다. 공민왕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사무친 그리움은 맨 정신으론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고통이어서,
공주가 떠난 후 하루하루를 술에 기대어 보낸 지 이미 오래다.
술에 취한 채 바라본 영정 속 공주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다.
혹시나 하는 심정에 손을 뻗어 봐도 손끝에 와 닿는 것은 화폭의 차디찬 촉감 뿐,
세상이 끝나버린 듯 상실감이 밀려들었다. 쏟아지는 눈물이 빈 술잔을 다시 채웠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공주의 죽음은 왕을 하루하루 망가뜨려가고 있었다.
만취해 쓰러지는 공민왕의 흐려진 시선 너머, 노국공주의 온화한 미소가 아른거릴 뿐이다.
고려 31대왕 공민왕과 그의 비 노국대장공주.
그들의 사랑은 역사 속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각별했다.
특히 노국공주를 향한 공민왕의 애틋한 사랑은
남은 삶을 송두리 채 망가뜨릴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뒤 영정을 직접 그려 벽에 걸고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밤낮으로 마주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정치에도 일체 관심을 끊은 채
오직 공주의 영전을 더 화려하고 더 크게 증축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이 때문에 역사서에 기록된 공민왕의 일생도 노국공주의 죽음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나뉜다.
고려사에 다음의 기록이 전한다.
“공민왕은 즉위하기 전에는 총명하고 인후하여 백성의 기대가 컸고
즉위 후에는 정치에 노력해 국내외가 크게 기뻐하며 태평세상을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부터 과도히 슬퍼하여 의지를 상실하고
정치를 신돈에게 일임하였으며,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스스로 철저히 망가졌던 공민왕,
그에게 노국공주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한 나라의 왕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노국공주의 일생과 행적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고려사 열전’ 후비편에 공주의 삶이 남아있지만,
그나마도 공민왕과 관련된 단편적인 기록에 그칠 뿐이다.
오히려 살아있을 때의 행적보다
죽은 뒤 공민왕이 그녀를 위해 행한 일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 종실 위왕의 딸로, 본명은 보탑실리다.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숙위생활을 하던 1349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두 사람의 혼인은 시작부터 정치적 이해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원나라에서 숙위생활을 하던 공민왕은 왕이 될 가능성이 극히 낮은 힘없는 왕족에 불과했으며,
노국공주 역시 원 순제와 6촌 형제간이었지만
원나라 조정에서 큰 세력을 가진 집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가 혼인으로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익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노국공주와의 혼인은 공민왕이 고려왕으로 즉위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됐다.
결혼한 지 불과 2년 후인 1351년, 원나라가 선대왕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그를 고려의 왕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아내 노국공주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공민왕은 첫 정치적 행보로 변발 폐지령을 내렸다.
원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고려를 개혁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자주국가로서 고려의 독립을 꾀하는 시발이기도 했다.
노국공주는 조용히 남편의 뜻을 따랐다.
원나라 공주의 지위를 의식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지만,
공주는 공민왕이 고려왕으로 즉위한 순간부터 스스로 고려의 국모이길 택했던 것이다.
실제 그녀는 공민왕비로 살았던 17년간, 한 차례도 원나라 공주임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지아비의 나라 고려를 가슴깊이 품었고,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민왕의 노력을 곁에서 묵묵히 지지했다.
어쩌면 이 같은 노국공주의 태도는
두 사람의 혼인이 정략이 아닌 진실한 사랑의 서약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도움으로 왕이 됐음에도,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기 위한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했기에 나라 안팎으로 적이 많았다.
더욱이 당시 고려는 격동하던 국제 정세 속에서 흔들리는 촛불이나 마찬가지였다.
내부적으로도 불안전한 왕권으로 끊임없이 내분이 일었다.
이런 힘든 시기 한결같은 공주의 지지는 왕에게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어쩌면 노국공주는
불안한 그의 정치적 입지를 든든하게 뒷받침해 준 정신적 지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난산으로 병 얻어 세상 떠나
공민왕, 깊은 상실감에 타락
공민왕을 위한 노국공주의 태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례가 있다.
바로 1363년 발생한 흥왕사의 변이다.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친 공신 가운데 김용이란 자가 다른 이의 공적을 시기해 일으킨 난으로,
공민왕의 목숨까지 노렸던 일대사건이다.
김용은 왕의 신임을 받던 정세운 등을 죽인 뒤 공민왕까지 시해하고자 마음먹고
왕이 머물던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 흥왕사 행궁으로 쳐들어 왔다.
이때 노국공주의 활약이 눈부시다. 위험천만한 순간에도,
공주는 여느 왕실 여성처럼 피하거나 숨지 않았다.
오히려 공민왕을 태후의 밀실로 피신시키고 문 앞을 지켰다.
원나라와의 연결고리가 아무리 약해졌다 한들 엄연한 원나라의 공주였기에,
막무가내로 그녀까지 해칠 수는 없으리란 계산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믿는 구석이 있다한들 칼 앞에 두렵지 않을 수는 없었으리라.
노국공주는 남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밀실 앞을 떠나지 않았고 공민왕을 무사히 지켜냈다.
공민왕은 자신을 굳게 믿고 위험한 순간
몸을 던져 지키고자 했던 그녀를 지극히 아낄 수밖에 없었으리라.
노국공주는 불심도 대단히 깊었다.
‘고려사’ 공민왕편의 기록에
공주가 왕과 함께, 또는 혼자 사찰을 찾았다는 수많은 기록들이
그녀의 남다른 불심을 대변하고 있다.
공주는 연등일이면 왕과 함께 사찰을 찾아 참배했을 뿐 아니라
혼자서도 왕륜사와 봉은사, 복녕사, 민천사, 묘련사 등을 찾아 끊임없이 기도했다.
홍건적과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부처님의 가피에 의지해 나라의 평안과 임금의 안위를 발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두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 있었다. 바로 자식 문제다.
그 누구보다 금술이 좋았음에도 자식이 생기질 않았다.
노국공주는 특히 봉녕사를 꾸준히 찾아 불공을 드리며 자식을 발원했던 듯 하다.
왕의 후사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점은 두 사람에게 적지 않은 고민이었으리라.
지성으로 발원하면 이뤄진다 했던가.
공민왕 14년, 오랜 세월을 치성으로 불공드린 끝에 노국공주는 후세를 잉태했다.
공민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임신 후와 만삭이 될 즈음,
감옥의 죄수들을 대거 풀어주는 등 나라의 경사로 이를 알렸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위험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왕은 조정의 관리들에게 절과 신사를 찾아 기도를 드리라 명하고 죄수들을 모두 석방했다.
그리고 분향하며 한시도 공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허나 이생의 인연은 거기까지였을까.
공민왕의 지극한 정성에도 결국 노국공주는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노국공주를 떠나보낸 공민왕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조정에 4개 도감과 13부서, 각각의 별감을 설치해 공주의 장례를 맡아 치르도록 했다.
불교를 믿었던 노국공주를 위해 국가적인 불공을 독려했을 뿐 아니라,
7일마다 승려들로 하여금 빈전(殯殿)부터 사찰까지 상여를 따르도록 명했다.
장례를 위해 모든 국가의 재원을 동원했기에 국고는 날로 비어갔고
노국공주의 죽음을 애도하던 민심도 점차 돌아섰다.
그러나 공민왕은 멈출 줄을 몰랐다.
왕륜사 동남쪽에 대규모 영전을 건축할 때에는
쓰러져 죽은 소가 길가에 널려있다 기록될 정도로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했다.
또 교종사찰이었던 운암사를 노국공주가 따르던 선종으로 바꾸고
능지기와 토지, 노비를 하사해 대대손손 공주의 능을 지키도록 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 이미 함께 고락을 맛보았고
귀국한 후엔 여러 번 사변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흥왕사 사변에서 역적이 지척에 창졸한 때에는 몸으로 나를 막아 지켰으니
우리나라가 오늘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데에 공적이 비할 바 없이 크다.
또한 일관되게 온공하고 침착하였으며 은혜롭고 인자했다.
나라를 가지고 가정을 가지는데 배필처럼 중한 것은 없으며,
이렇듯 내조의 공을 세운 이에 대해서는 더욱더 잊을 수가 없다.”
공민왕의 탄식은 그가 얼마나 노국공주를 그리워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본국을 버리고 지아비의 나라를 섬긴 노국공주,
그리고 노국공주가 떠난 후 모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공주의 그림자만을 좇았던 공민왕.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있어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존경하고 의지할 수 있는
부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노국공주를 향한 그리움에
끝없이 집착한 공민왕의 모습은 적지 않은 아쉬움을 남긴다.
‘집착은 모든 고통의 시작’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깊은 상실감을 더 큰 원력으로 승화시켰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고려의 역사는 적잖이 달라졌을 듯 하다.
또한 두 사람의 사랑도 한층 숭고한 모습으로 후대에 전해졌을지 모를 일이다.
2012. 09. 18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