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땅이 내게 절하는 꿈 창세기 37:2-11
I. 당신에게 꿈이 있습니까?
어느 정신병동에 자신을 쥐로 착각하고 고양이를 몹시 무서워하는 한 사람이 입원을 했습니다. 문진을 하던 의사가 물었습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환자가 대답했습니다. “생쥐 때부터 그랬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세상이 두려워하는 존재입니까?
세상이 두려워하는 사람 셋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유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소유를 초월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참된 비전을 위해 목을 내어놓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는 꿈을 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댓가를 당당히 지불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들”이란 꿈, 소망, 비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꿈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역사에 남은 위대한 업적들은 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꿈에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역사를 창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위기는 바로 꿈을 잃어버린 위기입니다. 잠언은 말합니다. “꿈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 뚜렷한 비전이 없으면 백성들의 생활이 방탕해 진다는 뜻입니다. 꿈꾸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은 사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그 삶이 권태롭고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지식이나 지혜가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신 까닭은 그들에게는 남다른 꿈과 환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이나 공동체나 가정을 축복하시고자 할 때, 먼저 마음속에 꿈을 갖게 하고, 그 꿈을 따라 기도하게 하시고, 그 꿈을 따라 축복하셨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나라가 없는 암울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2000년이 넘는 세월을 나라없이 보내며 멸시를 받고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유대인들은 민족성을 잃지 않고 꿋꿋이 버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어엿한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메시야에 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고난의 순간이 닥쳐올 때마다 “아니마민”이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는 반드시 오신다. 그러나 약간 늦게 오실 뿐이다.” 메시야 소망은 그들 신앙의 기초요, 뼈대요, 전부였습니다. 이 꿈을 포기하는 것은 그들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요, 민족 전체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희망이요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꿈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는 인류의 유일한 구원의 꿈입니다. 예수는 인류의 유일한 복음의 꿈입니다. 꿈이 잃어버린 분이 있습니까? 이 성탄절기 그리고 새해엔 예수님과 함께 희망의 세계를 열어 가시기 바랍니다.
성령도 꿈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을 보십시다.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이 본문은 교회가 세워진 이래 최초의 설교입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분명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세우셨고 성령의 활동이 있는 곳입니다. 이 성령은 꿈을 주는 영입니다. 악령은 모든 꿈을 부셔 버리는 절망의 영입니다. 성령이 계시는 교회는 젊은이나, 늙은이나, 가난한 이나, 부자나, 건강한 자나, 병든 자나, 찾아오는 모두에게 꿈을 주고 희망을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꿈파는 가계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꿈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절망과 좌절과 낙망에 부딪혀 허덕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에 오실 때마다 꿈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만약 교회가 사람들에게 꿈을 주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생명력을 잃은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가 교인들의 가슴에 영롱한 꿈을 심지 않는다면, 삶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 설교는 죽은 것입니다.
독일의 실천 신학자 루돌프 보렌은 “설교는 환상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가 게오르규는 꿈이란 “배의 돛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돛은 바다위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돛단배를 이끌어 줍니다. 이와 같이 꿈은 우리의 삶을 도와 전진케 해준다는 뜻입니다. 바다는 세상과 같습니다. 배는 우리의 인생, 돛은 꿈입니다. 꿈이 있어야 험악한 세상에서 전진할 수 있고 활기를 얻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마틴루터 킹은 어린 시절에 백인 친구와 함께 놀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노는 것도 거절당하는 서러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가슴에 설레이는 꿈을 안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남부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에 있는 덱스트 침례교회 목사로서 흑인들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위인의 생애를 살게 됩니다.
그가 한 유명한 연설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나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나와 여러분의 아이들이 피부의 색깔이 아니라 그 인격의 내용에 따라 평가되는 나라에서 사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알라바마주에서 흑인 소년 소녀가 백인의 소년 소녀의 손을 잡고 형제와 자매로서 같이 지내는 날이 올 것입니다. 골짜기가 메워지며, 언덕이 낮아지며,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인간이 그것을 우러러 보는 날이 올 것입니다. 미국이 위대한 나라가 되기 위하여 이 꿈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유의 종이 울려 퍼지게 해야 합니다.” 이 연설을 마쳤을 때, 백만이 넘는 군중은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어린 시절 가졌던 자유의 꿈을 그는 미국의 꿈으로 키웠고 그 꿈을 위해 일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는 위대했습니다. 위대한 꿈을 가졌고 그 꿈을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에게 어느 분이 찾아와서 “목사님의 그 많은 꿈이 생전에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니까 그분의 대답이 “천만에요, 나는 죽을 때까지 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요!”라고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꿈을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말입니다. 한가지 꿈이 성취되면 또 다른 꿈을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말입니다. 죽을 때가지 계속해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II. 요셉은 꿈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고난중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살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요셉입니다. 요셉의 일생은 파란 만장하고 흥미진진하고 스릴이 있는 하나의 드라마입니다. 요셉은 그 아버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비 야곱은 요셉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본문 3절에서 야곱이 요셉에게 지어 입힌 “채색옷”이란 그냥 알록달록 꼬까옷이 아닙니다. 몸에다 천을 그냥 걸쳐 입은 것이 당시 양치기들의 의복이었던 것에 비해, 본문에서 야곱이 요셉에게 지어 입힌 옷은 색깔도 화려했지만 그 소매라든가 옷의 가장 자리가 정교하게 장식된 귀공자의 옷이었습니다.
여기 채색옷 입은 요셉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마3:17)
②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주님은 요셉의 채색옷이 아니라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과 진리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요1:14)
③ 이러한 예수를 미워한 유대인들은 바로 요셉의 형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요1:11)라고 하였습니다. 저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보고 오히려 그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아가 요셉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예표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채색옷 입은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미워합니다. 우리는 은총의 채색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흰옷(계7:13-14), 제일 좋은 옷(눅15:22), 아름다운 옷(슥3:1-4), 빛의 갑옷(롬13:12-14),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실로 은총의 채색옷입니다. 구속의 옷이요, 빛의 아들들이 입는 옷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사랑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피묻은 옷을 입은 여러분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뇨”(롬8:32) 여러분 꿈을 가지십시요. 요셉을 도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다. “그 형제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 이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라는 부분을 히브리말로 보면, “다정하게 인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원래 히브리 사람들은 인사할 때 “샬롬”, “평화”라는 말을 씁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만 그 뜻은 훨씬 더 깊습니다. 우리말 “평화, 평안, 안녕”에 상당하는 히브리말 “샬롬”은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어느 한 면도 빠짐없이 모든 것이 가득 채워져 이지러짐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완전한 구원과 같은 내용을 가집니다. 그 누가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편할뿐 아니라, 가정도 사회도 안정되고,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살 때 히브리 사람들은 이를 “샬롬” 즉 평화, 평안,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샬롬”, “평화”라고 인사했습니다. 이는 곧 당신의 삶이 모든 면에서 구겨진 데가 없이 쫙 펴져서 복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뜻이 됩니다.
① 이러한 샬롬의 인사를 형들이 요셉에게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소년 요셉이 꿈꾸는 이야기입니다. 요셉도 장년시절이었고 멋진 노년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셉을 생각할 때 늘 꿈꾸는 소년 요셉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만큼 이 본문은 중요합니다.
요셉이 꿈꾼 첫번째 얘기를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형님들, 지난밤에 제가 꾼 꿈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요! 형님들과 제가 밭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가 묶은 곡식 단이 우뚝 일어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형님들이 묶으신 단들은 제가 묶은 단을 빙 둘러서더니 제 곡식단을 향하여 절을 하더군요...”
누가 들어도 맹랑한 꿈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형들은 버럭 화를 내며 요셉을 꾸짖습니다. “예끼 이녀석, 그 무슨 소리냐? 아니 네 녀석이 우리 위에 왕노릇 하겠다는 말이냐? 네 녀석이 우리를 다스리겠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작작해 이 녀석아!”
② 요셉은 이같은 형들의 매우 불편한 심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꿈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 야곱까지 있는데서 이야기를 했는가 봅니다.
“아버지, 또 형님들! 제가 또 신나는 꿈을 꾸었답니다. 제 얘기 좀 들어 보십시요. 해와 달과 열 한 별들이 저에게 엎드려 절하더군요...”
아무리 자기가 애지 중지하는 아들이라 할지라도 그 언행이 지나쳐 가정의 불화가 심해질 것을 알게 된 야곱은 요셉을 꾸짖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 녀석이 두 번이나 그런 꿈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이 아이가 장래에 큰 인물이 되려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가 봅니다. 본문 11절에서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요셉의 꿈) 간직해 두었더라”고 합니다.
III. 요셉의 꿈은 온 세상으로부터 절받는 꿈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요셉은 꿈꾸는 사나이로 나옵니다. 요셉이 꾼 꿈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꿈꿀 때 물어야 될 첫번째 질문이 이 꿈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비롯된 꿈은 개꿈입니다.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루어져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도 불행하고 너도 불행합니다. 때로 내 행복 때문 이웃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우리가 꾸어야 할 꿈이 아닙니다.
요셉이 꾼 꿈은 해 같은 아버지, 달 같은 어머니, 열 한 별인 형제들로부터 절을 받고 군림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요셉의 마음이 너무나 위대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감동을 받고 존경하게 된다는 겁니다. “몸은 내 속에서 나왔지만 마음은 하늘이 주었구나.”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이 그를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회사에서 업무적으로 사원들이 사장에게 절을 합니다. 그런데 회사원 가운데 성실하고 진실하고 그 마음이 아름다울 때 사장은 감동을 받고 속으로 절을 합니다. ‘그대는 참 위대하다’라고 생각하며 존경하게 됩니다. 제가 설교하는 목사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절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에서 목사를 감동시키고 하늘을 울리는 교인을 보면 저는 마음으로 절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 살면서 꿈을 갖되 자기의 부모마져 감동시켜 우러러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부자 되는 꿈도 가져야 되고 잘되는 꿈도 가져야 되지만, 최고의 꿈은 자기 부모마져 아니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꿈입니다. 온땅이 내게 절하는 꿈! 말입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야 합니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대통령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장이 되었다고 우러러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의 마음을 담으면 그가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하든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절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위대한 꿈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그런 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부자가 되었다 합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존경은커녕 인정 없는 수전노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그 애써 모은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드릴 것까지 움켜쥐고 살아야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회사에서 남을 제치고 올라갔다 합시다. 그러나 동료들에게 남을 생각할 줄 모르고 자기 이속만 챙기는 사람이라고 따돌림을 당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는 지위가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신다면 한참 낮아진 것입니다. 아무리 큰 교회가 되어도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부러움을 살수 있을지 모르지만 존경을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러움의 대상과 존경의 대상은 다릅니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꿈은 세상적 꿈입니다. 존경받고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는 꿈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꿈입니다.
여기 요셉에게 절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무엇입니까? 해와 달과 별은 전 세계를 가르킵니다. 해, 달 별은 온 땅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전 세계가 요셉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민족에게 복을 나누리라는 아브라함의 비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릎을 꿇는 다는 것은 힘으로 굴복 당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인격에 감동이 되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표시한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바다같이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들, 자기를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아 버렸던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었습니다. 형들이 복수당할까봐 두려워 떨고 있을때 요셉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형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족,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해 나를 먼저 이곳에 보낸 것 뿐입니다.” 이만하면 전 세계가 무릎 꿇을 만 하지 않습니까?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요셉은 집에 있을 때 아들 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해도 절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도 죄수들에게 절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신하가 되어도 왕에게서 절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절받는 존재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절 받는 사람이 되려는 꿈은 좋은 꿈입니다. 요셉은 절 받는 꿈으로 그의 생애를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가정이 있지 않습니까? 아내에게 절받는 남편이 되십시요. 자녀에게 절받는 아버지가 되십시요. 그 어느 곳에서든지 그 자리에서 만인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십시요. 절대로 욕먹는 존재가 되지 마십시요. 회사에 들어가도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비웃음을 사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요. 자기 신성한 자존심을 가지고 만민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려는 꿈을 가지십시요. 꿈을 가지면 됩니다. 인물 잘난 사람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 많이 했다고 절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과 같이 그 마음가짐이 높고 위대하면 어떤 사람도 거기에 절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가 절받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까? 사탄은 우리를 속입니다.
① “네가 많은 돈을 벌어야 절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② 권세가 있어야 절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③ 명예를 얻어야 절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④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얼굴이 아름답게 보여야 절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⑤ 큰 교회 목사가 되어야 절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이 모두가 다 거짓말입니다. 이런 조건들을 다 갖추면 사람들이 부러워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조건들이 사람들을 감동시켜 절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온 세상에서 절받는 꿈을 이룰 수 있습니까? 계속해서 요셉의 삶을 살펴 보십시다.
IV. 요셉은 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산 요셉은 빈들 우물에 갇혀 있다가 미디안 장사꾼을 통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요셉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갔습니다. 요셉은 성실하고 진실하게 그 주인을 섬겼습니다. 후에 그 가정의 일을 다 맡아 관리하는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 가정의 총무가 되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39장 6절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미남이었다는 거지요. 이것 때문에 요셉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자꾸 통정하자고 하니까 그것을 거절하다가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이 계속 요셉에게 눈짓하며 동침하자고 유혹할 때 요셉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8절-9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내가 어찌 하나님께 죄를 짓겠냐는 것입니다. 코람데오! 나는 하나님앞에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므로 요셉의 순결은 인간간의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원칙이었던 것입니다.
“내게는 꿈이 있다. 나는 이 꿈을 주시고 이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요셉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 꿈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 못지 않게 옷 때문에 어려움을 당합니다. 12절을 보시면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참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채색옷 때문에 팔려왔다가 지금은 또 부인이 옷자락을 쥐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옷을 벗어놓고 도망갔기 때문에 요셉은 감옥에 가게 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유혹의 옷자락을 벗어 던지고 그 일로 감옥에 갈지언정 하나님앞에서 살아가는 영적인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습니다. 인류역사 특별히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외에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십니다. 요셉은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하는 윤리가 있었습니다.
V. 나아가 요셉은 성령에 감동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 사람을 감동시킬 수가 있고 온 땅으로부터 절받는 존재가 됩니다. 바로 왕이 요셉의 탁월성에 감동되어 한 말이 있습니다. 41장 37절과 38절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나님을 모르는 바로가, 신으로 숭배 받던 바로가 요셉을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당신은 영감이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입니다.”라고 그를 높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당시 세계적인 경제공항을 타계하는 세계적 인물이 됩니다.
요셉이 만일 이 시대 사람이라면 노벨 평화상과 경제학상을 너끈히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요셉과 같은 경제 장관이 나오길 바랍니다. 경제가 매우 어렵습니다. 41장 39절에서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같이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VI. 절하고 싶은 사람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저는 군대시절을 공군에서 교관생활을 했습니다. 저희 교관실은 전부 장교들만 있어서 교관실과 화장실을 청소해주는 단기 소집병이 한둘씩 배치가 되어 그냥 뒷정리를 해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일하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해요. 걸레를 깨끗하게 빨아서 말려놨다가 다시 짜서 해야 하는데, 어제 쓴 것, 축축한 것, 냄새나는 것으로 슬슬 문지르고 다니니까 청소하고 나면 온 교관실에 썩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가르쳐도 안되고 꾸중해도 안됩니다. 그런데 한 번은 제가 제대 시기가 다 되었을 때에 단기 소집병 한명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달랐습니다. 이 사람이 지나고 나면 청소가 깨끗합니다. 화장실은 언제가도 정결하게 빈틈없이 정돈이 되어 있습니다. 한 번은 한겨울에 야외 화장실에서 훈련병들이 잘못사용해서 화장실 구석구석에 대변들이 뭉터기씩 쌓여 있어요. 아침에 출근하면서 보니까 이 어린 군인이 도끼를 어디서 가져왔는지 그 얼어 있는 변 뭉치를 깨서는 깨끗하게 정리를 하고 더운물로 깨끗이 쓸어서 청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청년을 지켜보고 있다가 6개월을 마치고 그가 제대를 할때, 제가 두꺼운 성경 찬송을 한 권 사서 그에게 인사말을 깍듯이 썼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꼭 붙들고 차 한잔을 함께 나누면서 “김형, 당신은 이 부대의 진정한 사령관이었소. 당신은 이 부대에 어떤 장교보다도 위대한 자국을 남겼소.” 이 젊은이가 지금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이런 젊은이는 가정에 있으나, 회사에 있으나, 어느 구석에 있으나, 틀림없이 온 땅으로부터 절받는 존재가 되어서 살아가리라 확신합니다.
지난 주간 어떤 집사님을 만났는데 회사에서도 성공하는 사람은 「왕같이 생각하고 머슴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머슴같이 생각하고 왕같이 일하기 때문에」 쓰임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절하고 싶은 사람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진심으로 절하고 싶은 사람이 그립습니다. 목사가 절하고 싶은 교인, 교회의 교우들이 절하고 싶은 사람, 특별히 우리교회 안에서 앞으로 전세계 G12 셀교회가 절하고 싶은 인물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우리 한소망 교회의 과제가 있다고 하면, 이 교회가 앞으로 몇 명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과연 이 교회가 이 역사앞에 절받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교회의 커다란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꿈을 가지십시오. 어려운 때일수록 꿈을 가져야 됩니다. 비전을 가져야 됩니다. 온 땅으로부터 절받는 신령하고 높은 차원의 꿈을 갖는 신령한 비전을 갖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활짝 여시고 달려나와서 사랑하는 종아, 내가 너를 지어 이 땅에 보낸 목적을 알고 살았구나. 너를 향한 나의 꿈이 무엇인지 너는 알고 살았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댓가를 지불할 줄 알았구나. 그 꿈을 이루어 주었구나. 사랑스럽다. 종아 어서 오너라.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하늘을 울리고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귀한 인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비전이 꿈이 여러분 심장에 넘쳐서 그 꿈을 이루는 행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