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24:1-9
TS: 은혜를 잊으면 자기를 과시한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모파상의 단편 소설인 '목걸이'가 있다. 내용은 문부성의 하급관리 루아젤의 부인 마틸드는 친구 포레스티에로부터 빌린 가짜 보석 목걸이를 잃어버린다. 그것이 모조품인지도 모르고, 빚을 내어 꼭 같은 목걸이를 사서 되돌려준다. 그리고 10년 동안 빚을 갚기 위해, 하녀처럼 온갖 궂은일을 하다가 폭삭 늙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사치와 허영심이 인간을 어떻게 눈멀게 하고, 병들게 하는지, 젊음과 세월을 낭비하게 하는지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처음부터 자기 분수를 알고, 사치와 허영에 물들지 않았다면, 가짜 보석을 위해 인생을 허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포장하고, 자기를 과시하며 살고 있다.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이뻐져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성형 수술을 하고, 사람들의 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싼 명품 빽을 들어야 하고, 옷을 걸치고, 돈이 없다면 짝퉁이라도 사서 메고 다녀야 사람 행세를 한다고 생각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이 병든 세상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되겠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과시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한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이 요압에게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고 했다. 인구 조사를 하는 이유는 군사력 강화에 있었다. 군사력 강화를 통해서 자기의 왕권을 더욱 강화하고 견고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의도를 파악한 요압은 다윗에게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중의 왕으로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요압의 말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이 나라와 백성을 보호해 주셨고, 하나님이 왕의 백성을 이렇게나 많이 축복해 주셨는데, 왜 왕이 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왕이 책임지려고 하느냐, 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왕의 의도는 선하지 못하다”고 책망하였다.
다윗은 이런 요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구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징계하여 심판하였던 것이다.
다윗의 잘못은 무엇인가? 인구 조사를 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인구 조사를 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이다. 만약, 인구 조사를 하는 목적이 하나님이 이렇게 복을 주셨구나, 이 백성들을 잘 다스려야 되겠구나, 이 백성들을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백성들로 삼아야 되겠구나 했다면 하나님이 무척 기뻐하셨을 것이다.
다윗에게 다가온 문제는 나라가 강성해지고, 백성들이 풍요롭고, 잘 살게 되니까?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두지 않고, 자기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블레셋 아기스에게 망명생활을 할 때, 오직 하나님은 나의 방패요, 나의 산성이요,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며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했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심을 확신 했다.
그러나 권력이 생기고, 나라도 안정이 되고 나니까? 한 마디로 등 따뜻하고 배가 부르니까? 이 정도만 됐다는 교만한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하나님 중심 보다는 자기중심이라는 유혹이 싹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싹을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자르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 중심 보다는 자기중심으로 살려고 할 때, 그 욕망한 강렬해서 그것을 막기는 쉽지는 않은 것이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과시하려는 삶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때 온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자기를 과시하게 된다.
역대하 32장 25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생명이 15년 더 연장되어지는 복을 받았다. 그 증거로 일영표가 10도 뒤로 가는 물러가는 기적도 보여주셨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구원에 대해서 감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바벨론 사자들이 왔을 때, 왕의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군기고와 창고등을 바벨론 사자들에게 안보이는 것이 없이 다 보여주었다. 왜 보여주었는가?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에 날이 이르면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고,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의 왕궁의 환관이 된다고 하였다.
히스기야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아니한 점과 하나님이 복 주셔서 나라가 잘 되었다는 것 보다는 자기가 통치를 잘 해서 성공했다는 자기 과시를 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축복과 저주는 언제나 종이 한 장의 차이이다.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이시요 가져가시는 이도 여호와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호수아 23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유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13절에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 축복인 줄 알았는데, 그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멀리하면 축복이 올무가 되고, 덫이 되고, 가시가 되는 것이다.
한 노인이 사막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맑은 샘물과 우거진 야자수가 있었다. 노인은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퍼주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그네들은 좋은 물을 먹었다면 노인에게 몇 푼의 동전을 건네주었다.
노인은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금고에 동전이 쌓여가면서 욕심이 생겼다. 노인은 이제 돈을 모으는 것에 몰입했다. 그리고 샘물을 철저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그네에게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어느날 노인은 샘물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잎이 무성한 야자수가 샘물을 흡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야자수를 몽땅 잘라버렸다. 결국 샘물은 말라버렸다. 야자수가 만들어 낸 그늘도 없어졌다. 이제 아무도 노인의 오두막집을 찾지 않았다. 노인은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한 체 죽고 말았다고 한다.
야자수가 은혜라고 할 때, 은혜를 떠난 인생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잘 보여 준다. 이 노인이 버림받고 실패하는 이유는 불필요한 과욕으로 인해 은혜의 근원인 야자수를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렇게 자기를 과시하려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이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햐여 진노하셨고,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를 조사하라고 했다. 역대상 21:1절을 보면 “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고 했다.
사무엘하는 하나님이 다윗을 격동했다고 했고, 역대상은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했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진노하셨고 다윗 한 사람 때문에 진노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본문 10절을 보면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후에 마음에 자책하면서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와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일을 범하였나이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자신의 잘못이었음을 고백한다. 한 사람의 죄가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격동했는가? 격동했다는 말의 뜻은 ‘충동시키다’. ‘자극하다’는 말이다. 심사숙고한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순간적인 감정의 변화를 통한 행동을 말한다.
왜 하나님은 다윗에 마음에 이런 좋지 않은 마음을 주었는가?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축복을 멸시하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이렇게 달콤함과 즐거움이 있다. 자기만족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한 것이다. 내 버린다두었다는 말은 유기했다는 말이다. 전날 갔으면 사탄이 다윗에게 충동질 할 때 하나님이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시고, 승리하게 해 주셨다. 왜냐하면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 중심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에서 떠나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된 순간 하나님은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기까지 그대로 내 버려 둘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자원하는 마음을 통해 경배를 받고, 찬양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어,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면 인격적인 관계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었으니 당연히 내 앞에서 와서 경배하라는 식으로 채권자가 채무자의 관계는 아닌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벗어나 스스로 자의식을 가지고 독립하려고 할 때, 하고 싶은 대로 내 버려두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 만약, 강제로 막았다면 아버지는 아들과 비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훗날 탕자가 뉘우치고,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에 온전히 회복이 되었다. 버려두는 것이 저주이다.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은혜요 축복이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순간, 저주였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은혜요 축복이었다.
자동차에는 차를 멈추게 하는 제동장치인 브레이크가 있고, 차를 앞으로 가게 하는 가속 장치인 엑셀레이터가 있다. 운전 초보자에게 위험한 부분이 브레이크과 엑셀레이터를 잘못 밟는 경우이다. 서야 할 때 서야하고 가야 할 때 가야 하는데, 이 순사가 바뀌면 큰 사고로 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다. 자기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까지 피해를 줄 수 있다.
영적으로 브레이크와 엑셀레이터를 잘 조절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성경 66권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약해 말해 준다. 행하라, 행하지 말라. Go와 Stop, 갈 때와 멈출 때를 말해 준다.
다윗의 치세 중에 두 가지 큰 실수가 있었는데, 첫 번째가 밧세바 사건이요, 두 번째는 인구 조사이다. 이 인구 조사는 다윗의 통치 말년에 있었던 사건이고 밧세바 사건은 통치 초기에 있었던 사건이다.
다윗은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그만 임신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윗은 스톱하며 브레이크를 밟았어야 한다. 그렇지만 다윗은 브레이크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엑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전장에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게 했다.
다윗은 사탄의 달콤한 속삭임에 유혹되었다. 다윗아, 너희 왕국을 보아라. 너희 왕국이다. 너가 왕이야, 너가 그 동안 이룬 업적들이다. 너희 백성들을 한번 보아라. 너의 왕국의 금은보화를 보아라. 다 너의 것이다. 이 달콤한 속삭임에 대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쳐야 하는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셨을 때, 마귀가 시험하러 왔다. 세가지 시험을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천한 만국의 영광을 보여 주면서 나에게 한번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는 유혹할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말씀으로 물리쳐 승리했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 이상일 경우 면허정지가 되고 0.1% 이상일 경우는 면허가 취소가 된다. 다윗의 경우는 면허 정지인가? 면허 취소인가?
말씀의 신호등이 브레이크를 밟으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그 경고의 말씀을 보지 않고, 깨닫지 못하고 브레이크가 아니라 엑셀레이크를 밟으면 위험하다. 나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내 차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나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
다행히 접촉사고나 경상이면 다행이지만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평생 불구가 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이렇게 불행하게 된 원인은 다 나에게 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브레이크를 밟았다면 나 혼자만 면허 정비를 받고, 심지어 면허 취소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차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안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나를 자랑하고 자를 과시하면 큰 일 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말씀의 브레이크가 잘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말씀의 부도가 나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브레이크가 잡았는데, 서지 않으면 큰일이다. 이런 큰 일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가? 늘 점검해 보아야 한다. 확인하고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알콜을 먹지 않는 일이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내 속에 내가, 내가 들어오면 문제가 커진다. 요나가 문제이다. 은혜를 잊으면 자기를 과시하게 된다.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