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강해-7] 아름다운 교회 (스 7:6-10,27-28)
세상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 안산 땅에만 해도 수백개의 교회들이 있습니다. 같은 지역 안에도 여러 개의 교회가 있고, 심지어는 같은 건물 안에도 여러 개의 교회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안산의 어느 지역은 그 지역에 교회가 하도 많아서 ‘교회 골목’이라는 별명이 붙은 지역도 있다고 합니다. 고잔의 어느 지역은 너무 많은 교회가 세워져서 주민들이 항의를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 곳을 가보면, 불과 몇 십미터를 사이에 두고 교회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밤이 되면 교회를 가리키는 빨간 네온싸인의 십자가가 여기저기에서 반짝거립니다. 아마 한국 땅만큼 한 밤중에 네온 십자가가 많은 나라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어떤 외국인은 한 밤중에 빽빽이 서 있는 십자가들을 보면서, 그곳이 공동묘지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밤중에 곳곳에서 보이는 빨간 네온싸인의 십자가가 주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며, 마음에 잔잔한 평화와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만 어떨 때는 마음 한편이 씁쓸해 지기도 합니다. 마치 날 좀 보라는 식으로 너 높이, 더 화려하게 더 크게 경쟁적으로 다투어 반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많다 보니까,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나, 또는 이사해서 교회를 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느 교회를 가야 할지 망설이게 됩니다. 교회들을 놓고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교회를 평가합니다. 또는 목사를 평가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교회를 선택해서 다니게 됩니다. 물론 바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찾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가 많다 보니까, 소위 잘못된 교회나, 엉뚱한 것을 가르치는 교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교회들이 많다보니까, 교회들은 본의 아니게 서로 경쟁을 하게 됩니다. 복음을 더 전하기 위해서 경쟁을 한다기 보다는 복음 외적인 것들을 가지고 경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 교회가 더 좋은 교회, 더 편안한 교회, 더 큰 교회, 더 많은 프로그램을 가진 교회 더 훌륭한 목사님을 두고 있는 교회 그리고 더 아름다운 예배당을 가진 교회... 등등을 내세우면서, 서로 자기 교회로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새로 지어지는 교회들을 가보면, 얼마나 잘 짓는지 모릅니다. 그냥 상가에서 개척을 한다 하더라고 내부 인테리어에 상당한 신경을 씁니다. 교회가 옛날처럼 지저분하고 칙칙하면 사람들이 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서로 자기 예배당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많은 애를 씁니다. 우리 대안교회 예배당도 많은 공을 들여서 꾸민 예배당입니다. 그래서 지하 예배당 치고는 그런대로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들이 모여 교제하는 예배당을 예쁘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나쁠 것은 없습니다. 기왕이면 아름답고 멋지게 꾸미는 것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예배당이 아름답게 지어지고, 멋지게 꾸며진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교회가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중세시대 교회가 한참 힘을 쓸 때에는 훌륭한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어마 어마한 액수의 재정이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러한 예배당의 위엄과 화려함이 마치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양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한 예배당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 건물의 위엄과 영광스러움에 눌려서 절로 머리가 숙여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으며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는 예배당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볼 때, 교회의 그러한 건물들이 지어질 때가, 기독교가 가장 부흥했던 시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교회가 힘을 얻고 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기 때문에 마치 교회의 부흥기처럼 보여지지만, 역사는 그 때가 기독교가 가장 썩었고, 가장 쇠퇴하였던 시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복음이 가리워지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초대교회 시절 성도들이 핍박을 받으며, 지하 카타콤에서 살면서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하던 그 시기가 교회의 부흥기였던 것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가 자기 속한 교회가 좋아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더 많은 성도들이 모이고, 더 좋은 예배당이 세워지고, 더 좋은 시설, 더 아름다운 인테리어, 더 화려한 성가대.......,
하나님도 하나님의 교회가 아름다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본문 에스라7장2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전이 완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대적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하나님의 전이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 전이 완성이 된 이후에 하나님은 이제 그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보내신 사람은 목수나 실내 인테리어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을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서 보낸 사람은 바로 에스라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개하는 에스라는 특별히 율법에 익숙한 학사입니다. 아론의 십육대손으로 제사장이기도 합니다. 12절에 보면 아닥사스다왕이 조서를 내리면서 에스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성전을 아름답게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예비한 사람은 율법에 익숙하고 완전한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였습니다. 그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와서 하기로 결심한 것도,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함께 온 사람들도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노래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이라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쉽게 성전의 모양을 아름답게 하고, 뭔가 장식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전을 아름답게 하려는 뜻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건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건물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의미가 없어졌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헐어버리셨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성전이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참으로 짓고자 하는 성전의 설계도 내지는 모형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에 보면, 사람들은 당시에 미석과 헌물로 꾸며진 성전을 가리키면서 그것의 대단함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이 에스라 시대에 재건된 성전을 다시 증축해서 훨씬 더 크고 웅장한 규모로 수십년간의 시간에 걸쳐서 헤롯대왕이 완공한 성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규모와 아름다움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들 앞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은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울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자신이 다시 짓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머릿돌로 하는 참 성전을 지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그 베드로의 고백 위에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진정 짓고자 하시는 성전은 구원받은 믿음의 공통체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삼고 살아가는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교회의 부흥을 꿈꾸며, 건물의 화려함과 장식을 꿈꾼다면, 주님의 뜻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건물은 예배당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기에 적당하면 됩니다. 크기나 그 용도나, 기능이 거기에 적합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지나친 장식이나, 화려함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건물로 사람을 끌고, 건물로 사람을 감동시키고, 그들을 사로잡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물은 건물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2000년전에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의 의미는 이제 주님의 몸된 교회로 넘어왔습니다. 주님께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사흘 안에 짓겠다고 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 피 값으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주님의 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받는다면, ‘교회를 아름답게 하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성전을 아름답게 하시겠다는 것을 그 외양과 장식을 아름답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럴 뜻이었다면, 에스라처럼 율법에 정통한 학사나 제사장보다는 장식가나, 인테리어에 능한 사람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세우셨는데, 말씀에 정통한 사람, 에스라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도 그 말씀을 연구하며, 준행할 뿐 아니라, 가르치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인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대리석으로 장식하고, 기타 화려한 예술품들로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이 소성케 되어지는 것입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가 아름답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몸 담고 있는 대안교회의 어떤 모습을 꿈꾸고 계십니까? 어떤 교회가 되어지기를 소망하고 계십니까? 물론, 자체 건물도 있어야 겠지요, 여러 가지 부대시설도 좀 구비되어야 겠지요. 식당도 제대로 갖추고 있고, 교육관도 있고, 휴게실도 있고, 기도실도, 있고, 등등.
그러나 그것으로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있으면, 편리할 것입니다.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앞다투어 자랑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내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는 훌륭하신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며, 선택의 폭이 넓고 체계적인 좋은 프로그램들이 있으며, 차량이 운행되고, 자체 건물을 가지고 있으며, 냉난방 장치 잘 되어 있는 좋은 예배당과 교육관을 갖고 있으며, 또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 좋은 수양관이 지어져 있고, 재정이 풍성하고, 많은 성도들이 조직적으로 잘 움직이며, 등등,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것들 때문에 정작 보여야 할 주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정작 자랑되어야 할 복음과 주님은 뒤로 감추어지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피 뭍은 주님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그 주님이 감추어진 교회, 결코 아름다운 교회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고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어떤 교회를 꿈꾸고 계십니까? 수천명이 모여서 버글거리며, 담임목사는 유명세를 타서 이리 저리 불려다니고, 메스컴에 등장하고, 안산의 어느 교회 하면 대한민국 모르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교회는 점점 커지고, 그래서 그 교회 다니는 것이 자랑스럽고, 그런 꿈이 있다면, 빨리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좋은 교회를 꾸민다고 붙여놓은 이것 저것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그 영광을 가리움으로 그 아름다움을 가리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교회의 건물이 온갖 보석으로 지어졌다고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입니다. 그런데 그 그 교회를 아름답게 한다고, 그 위에 커텐을 치고, 이것저것, 장식품들을 갖다 붙이고, 그림을 걸고 한다면, 그것은 그 건물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아름다움을 가리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건물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을 가리우는 것들을 다 제거하고, 그 건물 그대로만 드러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 그 몸 된 교회가 아름답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그 아름다운 교회 위에 세상의 것들을 치렁 치렁 걸어놔서, 그 아름다움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교회를 자꾸 세상의 것들로 덧 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가리워지고, 예수가 가리워지고, 십자가가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을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서 말씀의 전문가를 보내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아닥사스다에게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을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을 통회자복하게 하며,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저들이 그 전에 나아와 온전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무수한 제물과 번제와 짐승의 기름만으로 드리는 헛된 제사로 성전의 마당만 밟는 것이 아니라, 그 심령을 찢으며, 자신의 죄를 버리고, 그 말씀에 순복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 전을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장식이나,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참으로 경배하며 예배하는 그 백성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 가운데 거하는 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을 전할 에스라를 준비하시고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 성전을 아름답게 하는 역사,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역사가 대안교회 안에서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말씀이 말씀으로 선포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눈이 열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그것을 그대로 선포하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성도들은 그 말씀을 목말라 사모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이 송이꿀처럼 달게 다가오는 그런 은혜가 이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에스라가 수문앞 광장에서 그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했을 때에, 새벽부터 오정까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듣고, 그 백성들이 깨닫고 울며 통회자복하며, 그 심령을 찢었던 것과 같은 말씀의 역사, 심령의 회복의 역사, 참 부흥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참된 부흥의 역사는 치열한 영적전투입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의 상황들 속에 말씀을 읽을 수 없는 상황, 들을 수 없는 상황 묵상할 수 없는 상황, 나눌 수 없는 상황들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 상황들 속에서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전쟁에서 좋은 작전 중에 하나나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큰 전투에서 승패는 여기서 갈라졌습니다. 우리의 영적 보급로 끊어지지 않도록 이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의 맛을 다시금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밥맛을 잃었다고 밥을 먹지 않으면, 더욱 밥맛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좀 먹어야 기운이 나고 밥맛도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씀의 삶은 매우 심각한 영적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안되면, 복종이라도 해야 합니다. 어찌됐건 말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그 말씀의 역사로 이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욱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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