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대한 욥의 질문과 절규
욥7:1-21 찬송; 410, 141
<서론>
자신을 정죄하고 참회를 촉구하는 엘리바스의 충고를 받고 분한 심정으로 자기 의를 주장했었던(6장)
욥은 본문에서 인생의 허망함(1-10절)과 연약한 인간을 향해 내리시는 징계로 인한 고통과 비탄에 찬 질문(11-21 절)을 절규에 가까운 어조로 행하고 있다.
<본론>
1. 인생은 고통스럽고 허망하다.
$ 인생, 특별히 욥과 같이 고퉁 중에 있는 인생은 그 삶이 마치 군인의 격렬한 전투와도 같고 저녁을 기다리는 품군의 피곤함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마치 아침이 오기를 밤새 열망하며 잠못 이루는 밤들의 연속이며, 절망과 비극의 연속이라 할수 있다(1-6절). 이러한 처절한 인생살이는 모든 인간이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그린점에서 전도서기자는 인생살이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고 정의하지 않았던가?
정녕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난 모든 인생들은 이같이 절망하고 탄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졌다(창 3:7-19). 참구원은 바로 이같은 인간의 실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2.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만이 장래가 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고통의 심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해 심각한 회의에 젖어들었다(17절). 그리하여 허락만 되면 지금이라도 죽음을 맞겠노라고 말하기 까지 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욥은 그같은 회의와 번민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고백 하였다(17-20절), 뿐만 아니라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죄악을 사하여 주실것을 탄원하며 절규하기 까지 했다(20절). 결국 고통스린 현실에 처한 욥의 시선은 절망적인 자신에게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시며, 인간의 행불행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 이처럼 비록 자기 부인은 탄식할 수밖에 없는 형편 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영광된 미래가 주어질 것이다(사 40:31).
(사40: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3. 자신의 곤고한 처지를 호소했습니다(1-10절).
욥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극한 고통의 연속을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전쟁도 일정한 전투의 날이 있듯이 품군도 노동의 시간이 정해있는데 자신의 고통은 밤과 낮이 따로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음을 욥은 호소했습니다.
밤에는 그 지독한 고통을참을 수가 없어서 어서 빨리 해가 뜨기를 기다렸 다가도, 아침이 되면 여전한 고통과 자신의 추한 몰골로 인해 어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곤고함의 연속 이었습니다(4절). 욥의 악창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차라리 죽기를 갈망했고, 그리고 실제로 죽음의 그림자가 문턱에 얼씬 거리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6-10절) 성도 여러분 욥의 그 참혹한 고통, 소망 없이 죽음만을 찾아 헤메는 그 처절한 절망, 구더기가 살을 파먹는 그 추악한 모습은 비단 4000년 진의 욥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이 임하기 건, 사단의 시험에 빠져 죄악 속에 허덕이던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호로 치료받기 전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4. 사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11-21절).
욥은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홍망 성쇠를 휼로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욥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토록 심하게 다루시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특별한 관려와 경계를 받아야 하는 바다도 아니요 용도 아닌데(12절), 어찌 그리 밤낫으로 아침마다 분초마다 '침 삼킬 동안도' 자신을 놓지 않고, 그렇게도 세밀하고도 끈질지게 추적하시는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18,19절).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읍은 고통과 절망 중에서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이 원한대로,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 하지 않았습니다. 곧 신앙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 안에서' 원망하고 호소했으며 절망했습니다. 죽음조차도 하나님께 죄악을 구했습니다(16절). 자신의 뜻을 좇아 마음대로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성도는 그 어떠한 곤고한 처지일지라도 절대로 막 가서는 안 됩니다.
곧 하나님을 저주한다거나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예 모르고 무시하는 불신자들의 행동입니다.
그깃은 사단의 노예가 되어, 죽음 이후 에서까지도 영원토록 처절한 고통에 시달리는 무서은 행동입니다. 하지만 욥은 그렇지 않았기에, 후일에 영육간의 갑절 축복을 누리는 복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 론>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도록 하자. ........때가 이르면 어느듯 곤고와 고통의 날이 지나가고
욥처럼 영육간에 갑절의 축복이 임하는 ..................귀하고 복된 시간이 반드시 찾아오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