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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Song of Solomon) 6.
▒⊙▒ 아가서 2:13-17 ▒⊙▒
아 2: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 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
아 2: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 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
계속해서 첫 사랑의 깊은 잠에 빠진 여자에게 왕이 찾아와 흔들어 깨우는 말씀인데 처음
은혜를 입은 초보의 도에 사로잡혀서 혼적인 신앙에 안주하게 하고 머무르게 하여 믿음의 진보
를 방해하는 자아의 한계를 벗어버리고 주님과 함께 생명과 진리의 교회생활로 나아가야 한
다고 혼을 깨우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사랑에 매혹되었지만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의 누림을 위해서 자신에게
맞춰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나 주님은 주님의 동무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으로
이끌어 그녀에게 더 완전한데로 나아가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그녀는 초보적인 교리추구로 만족하고 더 완전한데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얻어먹고 소화시켜서 생명으로 화합한 믿음의 행위인 교회생활의 실제를 아직 모르고
있는 중입니다.
생명의 실제가 없는 공허한 이론과 교리들에 붙잡힌 초신자들은 이런 신앙에 머물기를
좋아하지만 그대로 굳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영적 교만이 눈을 가리므로 믿음의 도리를
변질시키거나 뒤로 물러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구원의 말씀을 받으면 반드시 삶의 체험을 통해서 받은 말씀을 소화시켜서
믿음을 화합해야 하는데 복음을 믿었으면 반드시 믿음대로 행하는 믿음의 삶을 생활화해야
하며
분명한 푯대 즉 믿음의 결국 혼의 구원을 이루고(약1:21, 벧전1:9)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기까지
믿음의 진보를 이루기 위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처음 복음을 듣고 마음에 믿어서 영이 살리심을 받은 신자는 반드시 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자신의 부패하고 사악한 마음의 생각, 감정, 의지를 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성령을 따라 진리로 행하는 교회생활에 전심전력하여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먼저 주시며 주신 말씀을 소화하여 생명이
되게 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적절한 환경을 안배하여 믿는 이의 삶인 교회생활을 통해
서 말씀이 육신 되게 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란 언제나 어느 지체중의 누군가를 더 완전한데로 이끄시
기 위해서 쓴 나물을 유월절 고기와 함께 먹이시기 때문에 믿음생활이 순탄치 못하고
크던 작던 간에 여러 유형의 고통을 받는 형제자매들이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자아의 견고한 자기주장에 의하여 자신이 신앙적으로는 아직 어린아이임을 모르고
자신이 가장 뛰어난 신앙을 갖고 있는 줄 오해하여 그의 영이 교만할 때는 동일한 상황이 오
래 계속되거나 반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해진 신자의 병은 사람의 책망이나 돌봄으로는 치료되지 못하며 반드시 하나님
의 손에 의하여 매를 맞고 꺾어지는 과정을 거쳐서 내적 체험을 거쳐야만 새로워지고 믿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아 2:14- 바위틈 낭떠러지(계단의)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
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
주님께서 그녀를 바위틈 은밀한 곳에 있는 비둘기로 비유하심은 그녀의 신앙상태에 대한 정확
한 진단인데 비둘기는 그녀의 순결성을 인정하는 말씀이지만 바위 틈 낭떠러지의 은밀한 곳에
있는 비둘기는 멧비둘기의 안전한 처소가 아니고 외롭고 위태로운 처소에 거처를 정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바위틈의 낭떠러지가 안전한 처소라고 여기고 거기서 첫사랑의 잠을 자고
있지만 그 처소는 자기만의 은밀한 처소요 주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빛 가운데 드러난 상
태가 아니므로 문 밖에 계신 주님이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반구로 빗대어진 그녀의 소리는 부드럽고 그녀의 얼굴이 아름답다 하심은 그녀의 어리고 약한
영과 여전히 자신의 깊은 곳을 열지 않는 신앙상태를 지적하는 말씀인데 주님은 그녀가
비록 어리고 약하지만 그녀의 중심을 사랑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아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들 곧 포도원을 망치게 하는 작은
여우들을)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연한 포도들이 달렸기 때문이라) 꽃이 피었음이니라.-
왕이 그녀에게 너와 나의 사랑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기 위하여 포도원을 망가뜨리는 작은
여우들을 잡으라고 요구하시는 노래 말씀은 그녀의 속에서는 교활한 여우 새끼들이 은밀히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그 작은 여우들을 잡으라고 요구하는 말씀은 그녀의 신앙을 허물고 그 혼에서 포도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지적인데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작은 여우들은
애굽의 외와 마늘과 부추와 고기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적인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초신자가 신앙의 진보에 은근히 방해 요소가 되는
것은 육신의 생각들이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세상과 혈육의 욕구들을 과감하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약한 생각에 이끌리는 마음의 끈들로서 이런 요소들은 술람미의 신앙을 방해하고 여러
가지의 인생사들로 신앙적인 시험들을 반복해서 당하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교회생활을 방해하는 옛 사람의 자아로서 성경은 육체 혹은 육신이라고 표현하
는데 각 사람의 자아 속에서는 간교하고도 교활한 작은 여우들이 자신이 처한 환경들을 불평
하게 하고 자기의 육적인 만족을 채워주지 않는 주님을 향한 불만을 터트리게 하는 요인이 됩
니다.
포도원을 허물고 이제 막 맺힌 열매를 해치는 작은 여우들은 포도원의 열매들이 잘 자라서
아름다운 결실을 할 수 없도록 열매꼭지를 갉아먹어서 떨어지게 하거나 겉마르게 하는 여러가
지의 그럴듯한 이유들과 핑계거리들입니다.
세상적인 여러가지의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일들과 자신이 처한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에 대
하여 교회의 지체들이 너무 무관심하다고 생각하게 하거나 무언가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지
체들 간에 섭섭함을 강하게 느끼게 하여 교회에 대하여 점점 냉담해지게 하는 등의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은 다 평안하고 여유로운 형편에서 교회생활을 하지만 자신의 상황만은 특별하
게어렵고 힘든 상황이라고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며 자기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감당하기 어렵고 힘에 겨워하게 합니다.
이때의 신앙수준은 자신이 어린아이이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자신의 마음을 높은데 두고
있으므로 그의 영은 사실 매우 불안정하고 혼은 감정에 치우치고 아주 작은 사소한 문제를
만나도 쉽게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포도원을 위해 여우를 잡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간사하고 교활한 그녀의
옛 사람 성분인 자아를 죽이기 위해 네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나를 따르라는
요구입니다.
실제 주 안에서의 자유인 영의 자유란 죄와 세상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어 주 안에 갇히
는 것을 의미하며 자아 곧 육신의 생각을 부인하고 주의 성령에 의해 철저히 자신을 제한하
고 통제받는 절제생활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것이 광야의 훈련입니다.
이 말은 주 안에서의 자유란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뜻하므로 죄질로 조성된 옛사람이
진리와 생명의 영에 의해서 엄격히 통제받고 육체의 자유를 제한당하고 그의 옛사람을 철저
히 부인하는 과정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 2: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아5:13-입술로 비유)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
그녀는 주님을 개인적인 체험으로 연합을 누리고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 그녀의 교만이며
자신의 상황이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개인적으로는 주님과의 관계를 신뢰하고 있으나 그녀를
둘러싼 상황들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아니하므로 내적으로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은근한 불만과 저항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녀가 눈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은 왕은 자기만의 주님이 아니고 백합화들 가운데서
자기의 양떼를 먹이시는 분임을 인식한 것이니 주님은 그분의 교회안에서 술람미를 사랑하시
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그녀만 사랑하여 그녀만을 앞세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예루살렘 여자들과 자신을 대비하며 주님의 양떼와도 비교하면서 우리 중에
누가 더 큰 자인가라는 관념을 버리고 주님께서 친히 먹이시는 백합화 중의 지체들과 한 영
과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연락하고 상합하여 신의 처소로 건축되려면 앞으로도 많은 연단과
정을 거쳐서 넓혀져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 왕과 상관없이 스스로 왕 노릇할 때 조성 된 인간의 본성은 타고난 자신의 은사들과
지혜와 지식들과 세상적인 지위와 가진 모든 것들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는 관념에 굳어져서
자존심을 굳게 세워 은근히 교만하게 되었으며 주께서 함께 하여 먹이는 양 무리를 외모로
판단하고 함부로 얕잡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이 백합화 (순수한 무리들)가운데 함께 계신 주님에 대하여 인식하게 된
것은 그녀의 영적인 눈이 새로운 차원을 보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며 그녀의 육성인 교만한 마음
을 찔리게 하는 진실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육성의 교만이(포도원을 허는 여우) 그녀 자신을 괴롭게 하는 가운데서도 그녀의 눈이 순수한
무리들인 백합화가운데서 자기의 양떼를 먹이시는 주님을 본다는 것은 그녀를 다루시는 하나님
의 손이 그녀에게 자아에서 벗어나도록 도우셨음을 보여줍니다.
아 2: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이 되어라)같아여라. -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라는 묘사는 그녀가 하루 종일을 뜨거운 햇빛아래에서 큰 시험
을 받아 첫 번째 신앙의 시험을 힘들게 넘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며 스스로 시험을 받도록 여러
가지의 고통을 주던 육신의 생각들인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하는 시험의 때를 거쳐서 주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주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주님이 백합화 가운데서 먹이시는 주님의 양떼 가운데로 영과
마음이 온전히 연합되어 함께 어린양의 신부로, 영원한 신의 도성으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한 낮의 햇빛은 영에는 빛이 되지만 육에는 뜨거움이 되는 것이니 육이 태워질 때 영은 생명의
빛을 받아 혼에 반사하므로 육신의 생각들 곧 작은 여우들을 잡아낼 수 있게 합니다.
실제 신앙생활의 시험을 받는 경우는 주님께서 백합화 가운데서 먹이시는 양떼의 외모를 보고
자기 속에 조성된 관념에 따라 나름대로 판단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잘 것 없
는 무리 중에는 자신이 가진 것들에 비교할 수 없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지식을 따라올 자 없
다고 착각하는 영적인 교만이 그녀의 영을 손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주님이 친히 먹이시는 양떼무리에게 동화되고 한 영과 한 마음이 되어 함께 건축되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과 자기 나름대로의 영적 지식들이깨지고 자존심이 무너지는 아픔들을
해가 지고 날이 기울기까지 겪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적인 자존심 무너지는 것도 힘들지만 천성적인 옛사람 속에 세상교회에서 장비한 성경지
식은 그 사람의 영을 교만하게 하여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결정적인 동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을 배우는 과정이 이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유대교의 탁월하고 유능한 교사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은 끝내 주님의 제자들과 연합되지 못하
고 결국은 버림을 당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주님을 무식한 자라고 폄하하였을 뿐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을 학문 없는 범인으로 여기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과 주님의 양떼를 우습게 여겼
던 것입니다.
베데르(분리함) 산이란 분리하는 높은 것을 의미하는데 술람미가 자신을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했을 때(아2:7) 주님은 술람미를 처음에는 바로의 준마로 칭하였으나 노루와 들 사슴으로
칭해주셨는데(아2:9) 본문에서는 베데르 산의 노루와 들 사슴이 되라고 하십니다.
본문의 베데르 라는 단어는 분리하여 나누는 것이라는 뜻으로서 그녀의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자신 안에서 나누는 생명의 체험으로서 이 체험은 그녀를 신앙으로 어린아이의 상태에
서 벗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입니다.
노루와 어린 사슴으로 보신 것은 그녀의 영적인 상태가 천진난만하며 순수하고 꾸밀 줄 모르는
귀염둥이 같으며 귀가 예민하다는 뜻인데 그녀가 백합화 무리와 한 영이 되고 한 마음이 되어
한 흐름에 동화되기 위한 적응을 위해서는 자아의 파쇄를 위하여 내적인 갈등과 고통가운데서
점점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에 대하여 말씀으로 쪼개고 나누어서 분별하는 능력이 더해갈 것입
니다.
자신이 거하는 산과 주님의 양떼가 거하는 산이 분리된 것은 세상에서 스스로 왕 노릇하던
습관(習慣)때문이며 세상교회 사람의 경우에는 세상교회에서 배우고 익힌 성경지식 때문에
주님과는 한 영과 한 마음이 된듯하나 주님의 양 떼와는 무언가 분리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아직 그녀가 내적으로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으로 믿지만 사실은 주님은
자신의 양떼를 백합화 가운데서 먹이는 중이며 바위 틈 절벽(계단)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신과는 분리되어 있는 중인 것입니다.
이것이 초신자 때 흔히 겪는 혼동입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주님 자신의 교회와 함께 계신 것이지 나와만 함께 계신 것이 아니며 특히
예루살렘 여자들과 예루살렘 성을 지키는 순찰자들과 함께 계신 것이 아닌데도 술람미 여자
는 자꾸 주님과 자신의 관계에만 집착하고 주님은 넓고 큰 길가의 큰 성에 계실 것이라고 여
기기 때문에 사실은 주님과 자신이 분리된 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직 베데르 산에 있는 노루와 사슴같이 들을 귀가 있어서 왕의 동무 종들과 백합화무리
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예루살렘 여자들의 산에서 어떻게 분리되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중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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