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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감사 (합3:16-19)
얼마 전 조선일보 논설 위원인 이규태씨가 그의 글에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병은 "감사 결핍증"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돌아설 때 "감사하다"는 말 대신 "또 오십시오"라고 하며 이기적인 인사로 합니다.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면 "고맙습니다"라는 말 대신 "야, 신난다"라는 말이 앞섭니다. 택시 정류장에서 바빠서 발을 동동 구는 사람에게 차례를 양보하면 고맙다는 말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그리고 많은 경우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운전을 하면서 제일 기분 나쁜 게 하나 있습니다. 좁은 길에서나 장애물이 있어서 먼저 가라고 양보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밤중에는 안 보이니까 빵! 살짝 클락션으로 감사를 표하고, 낮에는 손을 들거나 인사를 해서 감사하다고 표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유독 여자 운전자들은 감사를 잘 표현하지를 않아요. 왜 그럴까요? 어떤 때는 아주 힘을 들여서 양보해 주었는데도 인사 하나 안 하고 싹 가버립니다. 그럴 땐 정말 기분이 나쁩니다.
여러분, 왜 우리 한국 사람들은 감사 잘 표현하지 않을까요? 감사하는 법을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것도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 모두는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KBS1 TV에 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가족을 찾으면 방송국에 나와서 서로 상봉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순간 여러 번 그런 말을 듣습니다. "왜 빨리 나를 안 찾았느냐고. 왜 나를 버렸느냐고" 말입니다. 원망이 섞여 있어요. 그런데 갓난아기 때 해외로 입양 가서 독일이나 프랑스나 호주 같은 곳에서 자랐는데, 우리 한국에 왔다가 자기 생모를 찾으려고 나와요. 나와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그겁니다. "나는 원망 안 합니다. 나를 어쩔 수 없이 버린 이유가 있겠지요. 어머니 걱정 마세요. 나는 이해해요. 만나고 싶어요." 그럽니다. 원망 없어요. 왜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며 감사합니다. 기분이나 감정, 환경에 휩쓸리지 않아요. 아주 그들은 의지적으로 감사하려고 합니다. 이게 그냥 되어지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배운 거예요. 훈련받은 겁니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영국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고 있는 말이 "감사하다" 말이랍니다. 신문 한 장을 사도 감사, 과일 한 개 사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물건을 사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의 물건을 사주는데 내가 왜 감사해야 되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때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상점이 나로 하여금 이 물건을 살 수 있게 준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맞는 말입니다. 만일 상점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물건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당한 자세입니까? 이게 그냥 됩니까? 배워서, 훈련받아서 된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책에 보니 감사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라고 합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할 일에 대해 감사 표현을 해야 하는데, 한번 하지 않고 두 번 하지 않고 하다 보니 이젠 습관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이젠 영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훈련받아야 되요.
이 감사는 꽃과 같습니다. 꽃은 잘 가꾸면 가꿀수록 아름답게 피지요.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가지도 적당히 쳐주고 그래야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훈련받아야 되요. 그래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베넬 깁슨 박사는 「밤낮 누릴 행복」이라는 책에서 충고하기를 "그대가 손바닥에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하는 것은 그대의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대의 마음속에 감사가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셈이다. 그대에게 간곡히 부탁할 말은 다른 어떤 공부보다도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방법을 배우라"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들이 자칫 잘못하면 잃어버릴 수 있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감사의 정신입니다. 로마서 1장 12절, 디모데후서 3장 2절 성경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를 향해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강퍅해져서 감사를 하지 않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감사가 없는 현상이 말세의 징조하고 하였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더 감사를 잘 표현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감사를 잘 해보십시오. 우선 나의 마음이 기쁩니다. 감사를 받는 상대방의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교회가 훈훈해 집니다. 살 맛 나는 사회가 됩니다. 반대로 불평과 불만을 해 보십시오. 먼저 내 마음이 삭막해 집니다. 감사받기를 기대하였던 상대방의 마음이 닫혀집니다. 교회가 냉랭해 집니다. 사회가 어두워집니다. 감사는 마치 기계에 있어 윤활유와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에 매사를 부드럽고 매끄럽게 합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으면 기계에 기름칠을 안한 격이 되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도 어려워집니다.
여러분! 신앙과 감사는 서로 비례합니다. 아무리 신앙 생활을 잘 한다고 해도 감사가 빠져 있으면 그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나의 신앙은 감사를 잘하는 건강한 신앙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병들어 있는 신앙입니까? 감사 생활을 통해 신앙의 건강도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감사하는 태도를 보면 세 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감사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입고도 입을 싹 씻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달 동안 특별한 실험을 했습니다. 어떤 마을의 일정한 구역에 있는 각 집에 조건 없이 매일 일만 원씩 나누어 준 다음 그 결과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주 첫째 날 집집마다 들러서 현관에 만원을 놓고 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돈을 집어갔습니다. 다음날도 거의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셋째 날 넷째 날이 되자 그 동네는 만원씩 선물로 주고 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신기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주가 되자 동네사람들은 돈을 나눠주는 사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이웃마을까지 퍼져가게 되었습니다. 셋째 주가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들이 와서 돈을 주는 것을 신기하거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넷째 주가 되자 매일 만원씩 돈을 받는 것이 마치 세끼 밥을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는 것같이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실험기간이 끝나는 한달 마지막 날 실험을 계획했던 사람은 평소와는 달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지 않고 그냥 골목을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저기서 투덜거리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을 거칠게 열고 현관까지 와서 "내 돈 어디 있습니까?" "왜 나에게 돈을 주지 않는 것입니까?" 당연한 권리로 생각했습니다. 이거 우스운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의 날마다의 삶에서 공짜로 많은 것을 받고 있습니다. 매일 햇빛을 받고 있습니다. 공기를 받고 있고 비와 모든 것들을 하늘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또한 영적으로도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감사를 잃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내가 누릴 이 당연한 권리를 하나님이 빼앗는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뭔가 부족하고 없으면 원망합니다. 공짜로 돈 안 놔두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감사로 시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매일 매일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를 받고도, 나중엔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실패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결국 감사생활의 실패였던 것입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할 일 앞에서 감사하지 않음으로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2.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즉 감사의 조건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사업이 번창을 해서 감사합니다. 건강해서 감사합니다. 자식이 공부 잘해서 감사합니다. 바라던 일이 이루어져서 감사합니다. 그때만 감사하는 겁니다. 이럴 때 감사만 잘 해도 얼마나 다행입니까?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영어의 "Thank", 즉 "감사하다"라는 말은 "Think", 즉 "생각하다"라는 말과 그 어원이 같습니다. 감사는 생각할 때 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별로 감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안 받은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한 번 받은 것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불평의 눈으로 보면 불평할 일이 수두룩합니다. 불평을 말하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나는 왜 요렇게 생겼나?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나? 왜 똑똑하지 못하나? 왜 우리 가정은 요 모양 요 꼴인가? 왜 내 자식은 저렇게 지질이도 못 낫나? 왜 우리 교회는 이런가? 왜 우리 교회 목사님은 저렇게 하나?' 모든 것이 다 불평 깜입니다. 그렇지요?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지요?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이 없는 사람을 생각하면 가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자식이 없는 사람을 생각하면 자식이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부모가 없는 사람을 생각하면 부모가 있음이 감사합니다. 일할 곳이 없는 사람을 생각하면 현재 일할 곳이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을 보니 화달 교회에 다니는 것이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감사할 제목이 너무 많게 됩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한 어머니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우산 장사를 하고, 둘째 아들은 소금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아들들 때문에 날마다 눈에서 눈물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이유인즉 날씨가 좋으면 우산 장사하는 아들이 우산을 하나도 못 팔기 때문에 울고, 날씨가 비가 오면 소금 장사하는 아들이 소금을 못 팔아 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날씨가 좋아도 울고, 반대로 안 좋아도 울고, 이거 안 우는 날이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반대로 생각하면 날마다 웃으며 살 수 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소금 장사하는 아들이 장사를 잘 하니 웃고, 날씨가 안 좋아 비가 오면 우산 장사하는 아들이 우산을 많이 파니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날마다 웃으며 살 수 있는데, 그 어머니는 날마다 안 좋은 쪽만 생각하여 울면서 산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없는 것, 안 되는 것만 생각하면서 날마다 찡그리고 울고 불며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좀 그 반대로 생각하여 그래도 오늘 내게 있는 것, 내게 남아 있는 것만 생각하면 늘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있듯이, 진정 감사와 불평 사이에도 생각 하나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 문제는 현실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현재 나의 형편, 처지, 입장, 환경, 상황 등이 불평의 재료가 될 수도 있고, 감사의 제목이 될 수도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파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모두가 파랗게 보입니다. 또 빨간 안경을 쓰고 보면 빨갛게 보입니다. 불평의 안경을 끼고 보면 모든 것이 불평할 것뿐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안경을 끼고 보면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감사의 안경을 끼고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감사할 만한 일이 없는데도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감사는 불행 중에서, 고난 속에서 하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는 고차원적인 감사이며 성숙한 신앙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가 이런 감사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 유다를 하나님은 바벨론 군대를 끌고 와서 심판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바벨론 군대를 너무나도 잔인한 군대입니다.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나라와 백성이 어떻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국토도 황폐해질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의 열매들은 다 떨어질 것입니다. 외양간의 소는 끌려갈 겁니다. 우리 안에 있었던 양들도 다 가져갈 겁니다. 이제 남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극한 상황에 빠질 겁니다.
그래서 본문 17-18절에 나온 말들은 모두 없는 것뿐입니다. "...못하며...없으며...없으며...없으며...없으며...없을지라도." 6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없습니다. 다 없습니다. 되는 노릇이 없습니다. 모두가 절망입니다.
이런 비극적 상황이 틀림없이 다가올 것을 알면서도 하박국은 감사를 했습니다. 그는 왜 감사할 수 있었습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환난과 아무 것도 없는 절망의 상태에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의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차 이 나라가 초토화되는 비극을 맞이하겠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이 모든 상황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 사람과 똑같은 상황을 만나고 처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 현실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가지는 예외적인 특권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차이가 있다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을 확실히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엔 우리의 삶을 괴롭게 하고 슬프게 하는 현상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맑고 개인 날씨보다 어둡고 구름 덮인 날이 더욱 많습니다. 체념과 반항, 불만의 젊은이들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이런 어렵고 힘든 상황,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떤 여집사님이 설교하시는 목사님의 얘기를 귀담아 두었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많이 하여야 응답이 오는 것이 아니고 감사의 기도를 해야 기도에 힘이 있고 응답이 옵니다." 하지만 그 여집사님은 한숨만 쉬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휴! 나도 남편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거의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자정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는데 어떻게 집은 찾아 왔는지 집까지 와서는 문 앞에 쓰러져 있습니다. 그렇게 쓰러진 남편을 침대에다가 누이는 것이 일상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여집사님은 이런 남편만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고 하면 신세 한탄만 나오고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서 울화가 치밀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원망스런 기도를 했습니다. "왜 나를 저런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서 이 고생을 하게 하십니까?"
그런데 낮에 들었던 목사님의 설교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오늘만이라도 남편을 위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감사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그때 성령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생각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코를 골고 자고 있는 남편이라도 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저렇게 취해 있어도 용케 집까지는 찾아와서 문간 앞에서 쓰러져 주는 것도 고맙지 않느냐? 그리고 토요일은 술을 더 많이 마시고 와서 주일날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고 있으니 집을 봐줘서 교회 가기 좋지 않느냐?"는 등의 생각이 마음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것입니다. 이 부인은 생각나는 대로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한편 마음속에서는 웃음이 자꾸만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웃으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때 남편이 목이 말라서 잠을 깨서 눈을 살며시 떠보니 아내가 옆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웃으면서 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뭐가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이 지혜로운 집사님은 대답하기를 "당신 같은 남자하고 사는 것이 감격스러워서 웃었어요"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 한마디에 남편이 감동을 해서 약속을 합니다.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 줄게!"
여러분, 성도의 삶에 우연이 있겠습니까? 남편을 위해 10년을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었는데 그 날 단 한번의 감사의 기도가 10년의 소원을 이루어 준 것입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믿음으로 감사" 했더니 기대 이상으로 채워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소화시키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떠나간다 해도 구원의 하나님이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는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더 감사할 수 있도록 은총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장래를 예측하지 못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어떻게 닥칠지 모릅니다. 갑자기 건강이 나빠질지, 자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사업에 어려움이 있을지, 잘 다니던 직장에서 문제가 있을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결국 내 삶을 책임지고 계시는, 그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성숙한 감사요 믿음의 감사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형통할 때나 곤고할 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일이 잘 되어갈 때나 잘못 되어갈 때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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