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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슥4:1-10)
교회는 다니는데 담배를 끊지 못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가족들의 성화가 말도 못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절대로 담배를 피지 않겠다" 는 서약을 했습니다. 각서도 썼습니다. 그런데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담배를 다시 피우다가 아내에게 들켰습니다.
"작심삼일이라더니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또 담배를 피우느냐고?" 잔소리를 들었습니다. 할말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이렇게 옆으로 서서 피우잖아?"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담배 하나 제대로 끊지 못할만큼 인간은 참 나약한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우리들의 무능함과 연약함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살펴 보면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은 유다 백성을 자기 나라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는 중에 바벨론이 바사에 의해 망했습니다. 이 신흥제국의 고레스라는 왕이 포로로 끌려와서 노예생활을 하는 유다 백성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고국을 등지고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 하던 유다 백성들이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귀환하여 돌아온 조국은 한마디로 폐허 그 자체였습니다. 70년 전의 전쟁에 패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우리나라 6.25전쟁 때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쓰러지고 무너지고 제대로 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더욱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그대로 70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진 모습을 본 이들의 마음도 다 무너졌습니다. 아름답게 지어진 교회 건물이 무너진채로 수십년간 방치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보기에 마음 아픈 일입니까? 그래서 이들이 마음을 한데 모았습니다. 성전을 다시 건축하자. 재건하자 그래서 이전 보다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전을 짓자. 마음이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사비가 모자랐고 또 방해도 있었습니다.
아마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일 것입니다. 실제로 건축회사들이 교회 건축을 가장 꺼립니다. 교회를 짓다가 부도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마귀가 별의 별 훼방을 다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건축하다가 중단이 될 때도 많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일어나 반대를 하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새로이 짓다가 그만 중단이 되었습니다. 힘이 딸렸습니다. 지쳤습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만 14년이 흘러갔습니다. 성전이 14년동안 짓다가 만 채로 있었습니다. 과천의 흉물이 바로 우정병원입니다. 저게 짓다가 그만 회사가 부도가 나서 중단이 되었는데 벌써 7년 째입니다. 누구도 손을 못 댑니다. 중단되었다가 짓는 것이 새로 짓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오랜 세월 부흥하고 성장하지 못하면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마련입니다. 이미 지역사회에서도 부흥 안되는 교회, 성장 못하는 교회로 인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자신도 '우리 교회는 이게 한계야. 더 이상 성장이 어려워' 이런 식으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리라 기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전에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조금만 우리가 더 노력하면, 기다리면 성전공사가 재개되리라 기대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장기간 안되다 보니 그 상태로 머물러 있다보니 사람들이 다 지쳤습니다. '안 된다 할 수없다. 우리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패배주의가 백성 전체를 전염시켰습니다. 절망과 좌절 그리고 부정적인 사고가 팽배했습니다 .온 나라가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계시가 스가랴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니까 스가랴 선지자가 어느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순금등대에 일곱등잔이 있는데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스가랴가 너무도 신기하여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6절 다같이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할렐루야.
중단된 성전 공사는 너희들 힘으로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신 성령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무너진 채로 방치된 예루살렘 성전처럼 답답한 일들이 있습니까?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인데 도저히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능력으로는 안되고 네 힘가지고 안되지만 오직 성령으로는 가능하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안되고 성령님은 가능하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천사가 성경책을 펼쳐 보여주는데 히11:6이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자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뭐라고 부릅니까? 무엇의 아버지입니까?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철학의 아버지가 아니고 황금의 아버지, 권력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믿음. 이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이냐 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빼놓지 않으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이 있었기에 고침을 받았고 문제가 해결이 되었고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연결해 주는 도화선과도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비싼 냉장고를 샀습니다. 여러 가지 음식들을 넣어 두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음식들이 모두 상했습니다. 화가 나서 대리점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기사가 정중하게 전화를 받더니 몇가지를 물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면 불이 켜집니까?' '안켜집니다.' '그러면 죄송하지만 가만히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까'? '안 들립니다.' '아 그렇다면 플러그가 제대로 꽂혀있는지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이 사람이 가만히 보니 냉장고 플러그가 빠져 있더랍니다. 아무리 비싼 냉장고라 할지라도 플러그가 전원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작동을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어떻게 생기느냐 성경은 이 믿음이 성령의 은사 즉 성령의 선물 가운데 하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성령을 받을 때 믿음을 은사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의지하고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자랍니다.
우리가 언제 좌절하고 낙망합니까? 믿음이 없을 때입니다. 아무도 믿지 못할 때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사라졌을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력해집니다. 두렵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줍니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기를 줍니다. 하나님은 총체적으로 난국에 빠진 스가랴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지금은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을 보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보지 말고 비전을 보라는 것입니다. 환경의 나약함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나라든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러한 모든 문제를 산이라 표현했고, 그것도 아주 큰 산이라 말하고 있습니다.(7절) 해결하기 어려운 장애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해결하기 어려운 큰 산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의 큰 산은 교회 부흥일 것입니다. 교회 이전이나 구입또는 건축일 것입니다. 이 문제가 태산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처지와 현실을 보면 어쩌면 넘지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 어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령으로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산이 무너져 평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됩니다.
백성들이 말합니다. 성전공사를 재개하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형편이 풀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더 협조를 해줘야 합니다. 재료가 없습니다. 섣불리 시작했다가 또 중단되면 어떡합니까? 변명과 팽계를 갖다 댑니다. 나름대로는 일리가 있습니다. 현실적인 이유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들의 힘으로 하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백성들의 태도를 믿음이 없는 것으로 여기시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에게서 복을 거두어 가시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문제를 해결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불신앙적인 태도를 가지고는 큰 산을 넘어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산을 옮기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장애물을 뛰어넘고 큰 문제를 돌파하는 힘은 곧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성령께서 주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문제는 걸림돌이지만 믿음의 사람에게는 다리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있다면 성령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큰 산을 평지로 바꾸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잘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도가 하는 사업이 기업이 날마다 매출이 늘어나고 남 안될 때 대박을 날마다 터뜨리고 하면 얼마나 전도하기가 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가 매일 매일 성장하고 부흥한다면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잘 안됩니다. 매일 최선을 다하는데도 교회가 부흥이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어렵게 시작한 성전건축이었습니까? 모처럼 그들이 한마음으로 시작한 일인데 쉽사리 진행이 되어 무사히 빨리 마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리 문제가 많습니까? 웬 방해가 그리 많고 걸림돌이 그리 많습니까? 큰 산이 그들을 가로 막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나의 신으로"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인간의 힘이나 우리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이 쉽게 풀리지 않음을 원망합니다. 시시 때때로 장애물이 나타난다고 불평합니다. 시련과 역경의 산을 겨우 넘었는데 이번에는 더 큰 산이 기다리고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는 우리 힘으로 해 봅니다. 경험과 지식과 지혜를 다 동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봅니다. 그런데 안됩니다. 불가항력입니다. 조금도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럴 때 얼마나 절망합니까? 절망의 심연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나옵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도와주셔요'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는 중에 깨닫습니다.
'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려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매달리라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그렇게 하셨구나 '이런 자각이 생깁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실패하지 않게끔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는 성공은 그 자체가 실패입니다.
일본 보세요. 하나님주시지 않은 복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이 얼마나 잘 사는 나라였습니까? 그런데 지금 일본이 흑자 부도나게 생겼습니다. 10년 이상 장기 침체입니다. 일본 하면 소니 아닙니까? 우리나라 삼성이 벌써 소니를 추월하였습니다. 소니가 삼성을 이제 올려다 봐야 합니다. 국민들이 저축만 하지 소비를 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살다보니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게다가 지진은 얼마나 자주 일어납니까? 그러다 보니 돈을 모아야겠다 쓰지말고 저축해야지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비는 억제되고 생산량은 줄어들고 공장 기계는 멈추고 실업자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건이 안 팔리는게 아닙니다. 도요다 자동차의 경우 세계 2위로 올라섰습니다. 렉서스 시리즈로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그래도 안됩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국민은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이 태산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백성들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가치로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자신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비전을 기도제목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비전이 여러분 가정의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성공입니다.
아무리 좋은 쇠라도 자력이 없으면 바늘 하나 끌어당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쇠뭉치라도 자력을 회복하면 쇠뭉치를 끌어당깁니다. 아무리 고상한 사람도 성령이 떠나면 무능하고 무력해 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함께 하시면 시대를 이끌어 갑니다.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 성령의 기름이 넘치는 사람들에 의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오래전 일본에 에코노모(1876-1931) 박사가 연구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호두처럼 주름이 잡혀 있는 인간의 뇌는 그 두께가 약 3mm정도 되는데 이것을 펼쳐보면 신문지 한 장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무려 136억 5천 300만개 라는 어마어마한 신경 세포들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뇌는 지금까지도 신비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천재로 일컬어지는 괴테는 일생동안 0.4% 정도를 사용하였고, 아인슈타인이 0.6%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1% 이상의 뇌를 사용한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성령님은 오죽 하겠습니까?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닷물을 쓰고 또 써도 1cm도 줄어들지 않듯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덧입고 쓰고 또 써도 조금도 축나지 않는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나비와 나방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흡사 똑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둘은 여러면에 있어 완전히 차이가 납니다. 우선 나비는 낮에 날아 다닙니다. 나방은 밤에 날아 다닙니다. 날으는 모습이 나비는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나방은 천방지축입니다. 왜요? 나비는 태양으로부터 힘을 얻어서 날기 때문에 내 힘이 아니라 태양의 힘으로 납니다. 나방은 스스로의 힘으로 퍼덕거리고 날아 보지만 힘이 없습니다. 태양으로부터 힘을 공급받는 나비는 유연성이 있습니다. 부드러워 보지이지만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유연성을 상실한 나방은 불을 보고도 퍼덕퍼덕 날아가다 멈추지 못해 불속에서 타죽고 맙니다.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내 힘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은 허우적거려 보지만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차이는 지식의 차이가 아닙니다. 물질의 차이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차이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인가 아닌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인가 아닌가 그 차이입니다. 이 차이가 우리의 역사와 운명을 갈라놓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령님은 작은 일에 열심을 내게 하십니다.
10절에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보다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외형의 크기를 보시지 않습니다. 작다 크다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로 따지십니다. 성령이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꼭 크기를 따집니다. 사이즈를 봅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작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왜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큰 것만이 좋은 것이라 여깁니다.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힘이 세야지만 능력이 있어야지만 눈에 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지도자는 작은 부분을 더 세밀하게 봅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모든 큰 사고 사건들은 지극히 작은 부분을 소홀히 여김으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인사법칙 제 일조는 그가 작은 일에 충성했느냐 입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때 하나님은 양을 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은 양 한 마리에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 나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지 않느냐 고민하지 마십시오. 지금 주신 작은 일을 성실히 감당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충성으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소수의 사람과 작은 규모의 내용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 단 한사람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당시 가장 작고 약한 민족이었습니다. 땅도 보잘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강원도 보다 작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12명입니다. 배우지 못하고 직업도 변변치 못하고 가난합니다. 성격도 모가 났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니 작은 것을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작다고 깔보면 안됩니다. 내가 누군데 이런 일을 맡기느냐고 화를 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극히 작고 미약한 가운데서 시작됩니다.
믿음에 문제가 생겼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교회 일이 시시하게 여겨질 때입니다. 교회가 초라하게 여겨지고 하던 일들을 그만 하고 싶어질 때입니다. 스룹바벨이 성전을 짓기 위해 한 일은 돌 하나를 갖다 놓는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볼 때 얼마나 시시해 보입니까? 미미한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냉소합니다. 팔장을 끼고 바라만 봅니다. 어디 잘 하나 보자. 그래 갖고 되겠나? 얼마나 견디나? 곧 그만 두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렇게들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 미미하고 초라해 보이는 그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시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그 눈이 지극히 작은 일의 시작을 보고 계십니다. 주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의 시작을 보실 뿐만 아니라 마침까지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9절입니다. "그 일을 내가 마치리라" 내가 완성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음으로 시작한 그 작은 일을 마침내 완성시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속된 말로 말하면 하나님은 끝내주시는 분이십니다. ' 내가 끝내주리라 !' 그러니 작더랃 출발해야 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출발입니다. 위대한 일의 스타트입니다.
빌립보서 1:6에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 분이 이루실 줄을 믿노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혈혈단신 혼자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당시의 땅끝인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때마다 하나님은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 주십니다.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때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때로는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자원을 넉넉하게 풍성하게 공급해 주십니다.
에스라서를 살펴보면 성전 재건의 역사는 다리오 왕 6년에 마쳐집니다. 모든 역사가 마쳐집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 혹은 제2성전이라 부르고 봉헌식을 올렸습니다. 승리했습니다. 백성드리 즐거워 하며 유월절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제 방해하던 원수가 모두 물러갔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찬송하며 몰려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과연 우리 하나님은 끝내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큰 산이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의 큰 산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되는 그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산을 평지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제 외치시기 바랍니다. '큰 산아 네가 평지가 될지어다' 이 역사는 오직 성령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문제가 많습니까? 현실이 어렵습니까? 문제는 크고 어려움은 많은데 나는 작고 연약하고 미미해 보입니까? 괜찮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에게는 능치못함이 없으십니다.
모든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는 작은 일로부터 미약한 가운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작다고 아직 약하다고 멸시하지 마십시오. 깔보면 안됩니다.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면서 3년 6개월 가뭄을 일시에 해결해 줄 소나기를 바라보았습니다. 거대한 축복의 소나기를 미리 바라본 것입니다. 따라서 손바닥만한 구름만 보여도 축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일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쳐주시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낙담될때마다 소리내어 말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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