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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자녀와 돈
본문 / 디모데전서 6:7-19
작년에 박 모라고 하는 한 젊은이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중 갑자기 귀국해서 돈 때문에 자기 부모를 칼로 난자하여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집안에서, 그것도 중직자로 뽑힐 정도로 믿음이 좋다는 가정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우리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지 아직 일 년도 채 안 되었는데, 교회도 다녔다고 하고 박사 학위를 받아 대학 강단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며 그래도 성실한 교수로 인정을 받고 있던 40대의 한 젊은이가 역시 돈 때문에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또 일어났습니다. 나이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이제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만한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데서 우리는 모두 마치 메가톤급 펀치를 맞아 꼬꾸라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제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죽인 그 사람에 대한 분노가 아닙니다. 바로 돈에 대한 분노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간교하게 돈으로 인간을 유혹해서 자기와 똑같은 악마로 만들어버리는 사단과 마귀에 대한 분노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자 은 삼십이라는 돈 때문에 죄 없는 스승을 팔아먹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스승에게 입맞춤하는 그런 냉혈인간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마귀가 선량한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으니까 몇 억 안 되는 돈을 손에 넣기 위해서 밤마다 탐정소설을 읽으며 자기 부모를 어떻게 죽일까를 궁리하는 무서운 악마로 변하고, 해부학 책을 뒤적이며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목숨을 단번에 끊어 놓을까를 연구하는 악마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데 돈보다 더 성능이 좋은 무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돈은 그 성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사람들 앞에 이것을 흔들기만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지 다 통하는 전천후의 무기라서 한번도 손질을 하거나 개량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이라는 무서운 독약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신문을 보십시오. 돈 때문에 망한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극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모두들 이것을 뻔히 보면서도 "돈돈" 하며 좇아간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돈에 미쳐버린 것입니다.
19세기 독일의 단막극 가운데 <돈불>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유한 아버지와 계모로 들어온 어머니, 아들, 딸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살던 가정 이야기입니다. 비록 계모로 들어왔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사랑 받는 아내였고 두 자녀에게 참 존경을 받는 사랑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행복했던 가정이 금새 싸움터로 변했습니다. 시체를 가운데 놓고 유산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계모는 계모대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가정 내의 위치로 보나 법적인 권리로 보나 유산은 마땅히 부인인 자기에게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이를 인정할 리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만이 재산을 상속받을 법적인 권리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딸 역시 절대 물러나지 않고 유산에 대해 자신도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시체를 사이에 두고 세 사람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을 하며 싸웠습니다. 한참을 이렇게 싸우다가 누군가 한 사람이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어이구. 우리가 왜 이러고 있지? 도대체 돈이 뭐기에 우리가 서로 철천지원수가 되려고 할까?' 하는 자각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이러지 말자.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화목하게 살아왔는데 돈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겠는가? 자, 내가 돈을 포기하겠다." 그러자 다른 두 사람도 그제야 이성을 되찾고는 맞장구를 칩니다. "좋아요. 우리 돈을 그냥 다 버립시다. 그리고 우리 서로 사랑하면서 같이 삽시다." 그리고 그들은 금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 안에는 지폐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그들을 그 지폐들을 모두 꺼내 하나도 남김 없이 불을 붙였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딸은 불타는 돈 다발에다 손을 쬐며 "야, 따뜻하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멋있는 광경입니까? 저는 돈 때문에 이 땅 위에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을 대할 때마다 세상에 있는 돈을 전부 끌어다가 그들처럼 몽땅 불질러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6년 전 일본에서는 1억 엔 이상 되는 지폐를 대나무 밭에 버린 사람이 있어서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된 일이 있습니다. 나중에 그 장본인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그가 왜 거액의 돈을 거기에 버렸는지 그 이유를 무척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배신하고, 사기 치고, 서로 죽이고 망하게 하는 것을 보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버려야겠구나 생각해서 그랬노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돈을 불에 태운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돈을 대나무 밭에 갖다 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문제는 돈에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돈을 보는 눈이 문제요, 돈을 다루는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아무리 돈을 불태우거나 갖다 버린다 해도 돈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돈은 여전히 우리를 망하게 하는 마귀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점검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거짓 선생들과 돈
본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교회 안에 가만히 숨어 들어온 거짓 선생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면서 자연스럽게 돈 이야기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요즈음도 이단들이 많지만 그 당시에도 가만히 교회 안에 숨어 들어와서 사람들을 이리 저리 유인해서 그릇된 길로 이끄는 거짓 선생들이 많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번에 일본에서 독약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해친 사이비 종교 교주를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나 이단에 잘못 물려 들었다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고 결국에는 개죽음을 당하는 일들을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보지 않습니까? 통일교와 박태선이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짓 선생이나 이단이 교회 안에 살금살금 들어와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목적은 바로 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모르고 그들에게 말려들었다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다 털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특별히 거짓 선생들을 경계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사람들을 유혹할 때 '경건'을 앞세웁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입니다. 입으로는 진리를 외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잃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거룩하게 말하는 것도 사실은 돈을 벌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설교를 얼마나 기가 막히게 잘 하는지 모릅니다. 또 어떤 때는 안수해서 여러 가지 병들을 낫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경건'을 앞세우는 것은 돈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거짓 선생들에 대해 경계하면서 돈에 대해서 교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
그는 교회 안에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각각 돈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첫째로, '우리'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바울과 디모데를 가리키며 이차적으로는 교회 안에 있는 거룩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돈을 쌓아놓고 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날마다 길에 나가서 구걸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날마다 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갈 따름인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절대 내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일이면 하나님이 또 하늘에서 만나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날그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사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우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부하려 하는 자들'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예수를 믿기는 믿되 돈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은 이후에도 돈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한 자들'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예수 믿기 전에 재산을 좀 모았을 가능성이 있거나 예수 믿은 후에 하나님이 물질에 축복을 주셔서 비교적 여유 있게 쌓아놓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에베소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깨끗하게 번 돈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나쁜 수단과 방법을 통해 부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절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느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입니까? '부하려 하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부한 자들'입니까? 그 어떤 부류에 속하든지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돈에 대해서 들려주시는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돈으로 인해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돈을 앞세워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는 마귀의 간교한 궤계를 물리치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를 모른 채 돈으로 인해 망해 가는 숱한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우리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 족한 줄로 알라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8절 말씀에 그 교훈의 핵심이 고스란히 다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족한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6절에서는 "자족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자족한 마음이란 우리가 영적으로 누리는 평안을 말합니다. 재물이 별로 없어도 그것 때문에 마음에 풍랑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기가 엄마 품에서 젖을 맘껏 먹고 나면 생긋이 미소를 지으며 잠자는 것을 자주 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신령한 은혜를 풍성히 부어주시면 좋은 집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진수성찬을 먹으면서 살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와 같은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는 인생을 똑바로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열어주시는 눈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눈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하나님이 열어주신 눈으로 인생을 똑바로 보는 사람은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마음에 자족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거창하게 쌓아놓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을 보아도 "공수래공수거" 이 말 한 마디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누군가가 밍크 오버를 입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지나가도 마음의 평안을 절대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 누리는 기가 막힌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하나님이 날마다 일용한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빠듯하게 하루하루를 살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날마다 나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만 가지고 빠듯하게 사 는 사람들을 '서민층' 혹은 '저소득층'이라고 부르면서 멸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칭찬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90 퍼센트가 소위 '우리'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다지 풍족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지처럼 살지도 않았습니다. 한 평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기에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아도 이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 일을 감당했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우리'라는 그룹에 속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의 칭찬을 마음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임이요."(눅6:20) 행복은 많이 가진 자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족하는 자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아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부자라고 할 것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에게 주는 교훈 - 돈을 사랑치 말라
다음으로 하나님이 "부하려 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마음에 재물에 대한 강한 애착과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일해서 잘 살아 보겠다고 하는 사람 모두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열심히 일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그 대가를 받아 부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살아 보겠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부하려 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재물을 많이 모아서 선한 일을 해 보리라는 꿈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사람을 말한다는 것입니까? 바로 돈에 대해 병적인 애착심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그들은 돈을 사랑하고 또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 그들은 돈에 환장해서 날마다 "돈돈" 하는 심정을 안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본문을 통해 디모데에게 경고하는 말씀은 모두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놓고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에베소 교회 안에는 분명 부하려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 시간에 거룩한 얼굴로 앉아 청산유수와 같은 기도를 하지만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항상 "돈돈"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고 은혜 충만한 사람은 자다가도 "주여!" 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돈돈"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에 있는 게 그대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목사나 장로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목사나 장로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렇게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벧전5:2) 무슨 말입니까? 돈에 목적을 두고 교회 안에서 장로 일이나 목사 일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집사나 일반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디모데전서3:8을 보십시오. 집사를 선정할 때 어떤 사람은 세우지 말라고 하십니까? 더러운 이를 탐하는 사람입니다. 돈을 사랑해서 마음으로 항상 "돈돈"하는 사람은 절대 집사로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도 돈에 애착을 가지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돈에 애착을 갖는 사람은 심각한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처음에는 시험에 빠집니다. 그러나 일단 시험에 빠져 들어가면 올무에 발목을 잡혀 꼼짝달싹 못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목에 오랏줄까지 감깁니다. 그러는 동안 마귀의 집요한 충동질로 인해 결국은 해로운 정욕에 빠져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침륜과 멸망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침륜과 멸망'은 한 가지 의미를 전달하는 합성어로서 물에 빠져 죽는 절망적인 상황을 가리킬 때 하는 말입니다. 당신이 타고 가던 배가 암초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서 가라앉아 버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려 보지만 주변에는 나무토막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건져 줄 수 있는 사람이나 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망망대해에서 그렇게 허우적대고 있을 때 당신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제 고기밥이 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침륜과 멸망에 빠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돈돈 하다가 나중에는 돈 때문에 시험에 빠지고 올무에 걸려들어서 마침내는 정욕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이 없나요? 돈 때문에 엄마에게 온갖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는 자식들이 없나요? 한꺼번에 많은 돈을 벌어보겠다고 집을 뛰쳐나가 사창굴에서 몸을 파는 딸이 없나요? 온갖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여 돈을 끌어들이다가 들통이 나서 허겁지겁 도망하여 지구 모퉁이 어딘가에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 없나요? 이 모두가 부하려다가 침륜과 멸망에 빠진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여 애착을 가지다 보면 우리 역시 이러한 침륜과 멸망에 빠지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을 가리켜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10절) '뿌리'(root)는 원어로 '흐리자'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원래 정관사(the)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 말이야 정관사가 별 의미가 없지만 헬라어는 정관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뜻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권위 있는 성경학자들이 해석하는 바에 따르면 '뿌리'라는 말에 정관사가 없는 것은 질(質)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뿌리의 질을 강조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뿌리와 일만 악이 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뿌리 자체가 곧 일만 악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어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또 아직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무슨 흉측한 일을 범하지도 않았고 거짓말을 한 적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돈을 사랑하는 그 음흉한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일만 악 자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시나무의 뿌리를 만져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가시나무의 뿌리가 얼마나 보들보들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부드러운 뿌리에는 가시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 뿌리 역시 가시나무라는 사실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가 보기에는 악이 아닐 지 모릅니다. 이것으로 무슨 악을 행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일만 악 그 자체입니다. 일만 악이 되는 뿌리가 사람의 마음속에 점점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자라나 그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마침내 그는 돈 때문에 유혹을 받게 됩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믿음에서 떠나게 될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돈돈 하는 사람에게는 근심이 늘 떠나지를 않습니다. 가진 사람은 놓칠까 걱정이고 못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좀 더 벌까 걱정인 것입니다. 바울이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10절)
오늘날 부하려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평신도들은 물론이거니와 장로와 목사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짐 베이커라고 하는 목사님은 7년 전 미국의 텔레비전 전도자로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한번 복음을 전하면 수천 명이 텔레비전 앞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면 온갖 병을 앓던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벌떡벌떡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여러분, 선교를 위해서는 여러분의 헌금이 필요합니다. 헌금을 보내주십시오" 라고 호소하면 은혜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헌금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돈이 엄청나게 쌓이다 보니 그의 마음속에 숨을 죽이고 숨어 있던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습니다. 돈은 쌓을 수록 애착이 생기고, 돈은 보면 볼 수록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 역시 엄청나게 쌓이는 돈을 볼 수록 욕심이 더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헌금을 자기 통장으로 빼돌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조금씩 그렇게 한 게 자그마치 800만 불이라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 64억 원이나 되는 거액을 자기 포켓에다 집어넣었다는 것입니다. 이자만 따져도 엄청날 텐데 그가 그 많은 돈을 무슨 수로 다 쓰겠습니까? 그래서 마당에 있는 자기 개집에 에어컨까지 달아줬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모든 부정이 드러나서 그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불신 재판관이 판결문을 읽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짐 베이커씨. 당신은 목사로서 디모데전서 6장 10절의 말씀을 무시하고 살았소." 디모데전서 6장 10절이 무슨 말씀입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서 자기를 찔렀도다."
혹시 여러분 중에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분들이 계시면 꼭 기억하십시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의 손에 치료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깨끗하게 고침 받기를 바랍니다.
'부한 자들'에게 주시는 교훈 -마음을 높이지 말라
마지막으로 '부한 자들'에 대해서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이 이들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이것입니다. 마음을 높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조금 가졌다고 해서 교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만큼 무서운 죄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신8:18) 하나님이 벌게 해서 번 것이므로 우리가 가진 돈도 사실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잠깐 맡아 관리하는 사람에 불과한데 무슨 거드름을 피우겠습니까? 안 믿는 사람은 그럴 수 있어도 성경 말씀을 읽는 사람은 절대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 저는 재벌이라고 할 만한 분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별장 같이 큰 저택에는 보통 그 집을 관리하는 수위가 있지 않습니까? 그 집 정문에도 수위가 있었는데 그가 어떻게 거만하게 구는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제 자동차를 보고 그랬는지 제 외모를 보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단한 거만을 떠는 것입니다. 그 집 마당에 있는 나무 한 포기도 자기 것이 아닌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거만하게 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주인은 정문까지 나와서 "아이고, 목사님 오셨습니까?" 하고 공손하게 맞이하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내가 가진 돈이나 부동산, 금 덩어리, 땅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것들을 들고 그렇게 거드름을 피웁니까? 그것은 수위가 거드름을 피우는 거나 다를 바 없습니다. 절대 교만하지 마십시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하나님이 부한 자들에게 주시는 두 번째 교훈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돈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돈에 의지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
하나님이 세 번째로 주시는 교훈은 더 중요한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돈을 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선한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십시오.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나눠주십시오. 그렇게 할 때 장래에 자기를 위해서 좋은 터를 쌓게 될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떳떳하게 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참된 생명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19절)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소위 '부한 자'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꽤 될 것이라 봅니다. 이 말씀대로 사십시오. 우리 나라 모 재벌 회장이 몸이 아파서 고생을 하다가 매우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주변에 둘러서 있던 의료진을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1년만 더 살게 해 주십시오. 1년만 더 살게 해 주시면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돈을 모으는데는 대단히 성공했지만 돈을 돈답게 써보지 못하고 이때까지 살았습니다. 1년만 더 살게 해주면 내가 모은 돈을 한번 멋지게 써 보고 세상을 떠나겠습니다." 그는 안 믿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나 봅니다. 비록 믿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에 가책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설 때 무슨 면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때늦었지만 써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1년을 채 살지 못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도 그런 가책을 받는데 하물며 인생이 공수래공수거에 불과한 것임을 아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재물을 움켜쥐고만 있다가 하나님 앞에 빈 손 들고 서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최근에 유산 안 남기기 운동이 참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84년도에 시작된 이 운동은 이미 280명의 회원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한국 유리의 최재섭 회장을 비롯해서 이영덕 전 총리와 이한빈 총리, 정근모 장관, 손봉호 교수 등 상당수의 유명인사들이 끼어있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줌으로써 자녀들이 무위도식하거나 낭비하게 만들어 자녀들의 인생을 망칠 위험성이 크다는 인식 하에 자신들의 재산의 3분의 2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던지 이 사회의 선한 일에 바치고 세상을 떠나겠다고 서약하는 것을 기본 강령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서약에 다짐을 하고 실천하려는 부모들의 간증을 제가 읽어보았는데 참 재미있는 말들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산을 남겨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겠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겠다.' 했더니 아이들의 눈매가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이제는 내 힘으로 살아야 되겠구나' 하고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나 사회 단체에 기쁜 마음으로 헌금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서 좋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해마다 유서를 새로 쓰다 보니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고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돈에서 마음이 떠나니까 유서를 쓰면서도 "공수래공수거" 하면서 인생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되고, 가진 것을 마음대로 선한 일에 내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인간이기에 돈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을 가진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장담하거나 큰 소리 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돈으로 인해서 오늘 이 사회가 얼마나 참혹한 지옥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보면서 우리부터 정신을 차려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우리를 향해서 돈을 바로 다루라고 말씀합니다. 돈을 바로 다루기 위해서 내 마음이 고쳐져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날마다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라고 생각되십니까? 자족하십시오. 행여나 마음속에 부자 되고 싶어하는 욕심이 살아 있어서 '돈돈' 하고 있습니까? 하루 빨리 회개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물질의 부요를 누리는 분들이 계십니까? 쌓아놓지 말고 흩어 쓰십시오. 선한 일에 힘쓰십시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좀더 밝혀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 귀한 일에 하나님께 쓰임 받는 멋진 백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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