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익한 자 된 오네시모
11절에서 14절까지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돌려보내기로 작정하면서 오네시모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한다. 1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이 말은 참으로 흥미 있는 뜻을 갖고 있다. 오네시모라는 말의 뜻은 "유익하다"는 뜻이다. 이 유익하다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는 오네시모가 전에는 미욱하였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따.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여 읽는다면 "유익이 무익하였으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름은 유익하지만 실제로는 무익한 사람 오네시모는 자기의 이름 값을 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이 여러분을 낳고,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기대를 가지고 당신의 이름을 지어 주셨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이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밝은 앞날이라는 부모님의 기대가 담겨져 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이름 값을 다하고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의 오네시모도 마찬가지이었다.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이 말을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을 담아서 읽는다면 이런 뜻이 된다.
"전에는 이름이 유익이었지만 실제로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그 이름의 뜻대로 유익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오네시모가 진짜 오네시모가 되었기 때문에) 저를 네게로 돌려 보낸다."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은 유익한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아주 무익했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유익한 존재,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존재, 주님 앞에 "오네시모(유익한자)"가 되었던 것이다.
시편 기자의 말씀에 보면 존귀한 자가 되엇다는 말이다(시 16:3). 우리는 다 주님의 "오네시모"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어떤가? 정말 주님이 보시기에 유이간 존재인가? 하나님 나라의 필요한 존재인가? 분명히 그렇다고 믿는가?
오네시모는 참으로 유익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감옥에 내려간 오네시모는 인생의 역경을 만난 것 같으나 사도 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 그는 이름 값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오네시모는 누구인가?
바울을 만나기 전에는 주인의 돈을 훔쳐 달아남으로 주인의 가슴에 상처를 입힌 자였고, 빌레몬의 사적인 일에서나, 교회의 일인 하나님의 일에 무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을 만난 후 그는 이제 바울에게 충성스러운 복음의 협조자가 되었고, 또 자기의 옛 주인인 빌레몬을 향해서도 마음으로 복종하려는 진실한 종이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홰개한 사람의 참 모습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런 열매가 없다면,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회개는 한 번쯤 의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오네시모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므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자.
정경은 아니지만 외경의 하나로 "도마 복음서"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의 기록 중에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회개란 무엇인가? 그것은 동쪽이 서쪽이 되고, 서쪽이 동쪽이 되고 남쪽이 북쪽이 되고 북쪽이 남쪽이 되는 것이다"라는 외경속에 이 말은 진정한 회개는 "온전히 돌아 섬"을 뜻함으로서 180도의 전환을 가리켜 주는 말이다.
완전히 돌아섬이 바로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주님을 향하여 그의 삶의 방향을 온전히 돌이킨 새 사람오네시모를 본문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이 사람이 유익한 존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심복이다.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나의 심복이 되었다."라고 말함으로서 오네시모는 바울의 사랑 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한 오네시모를 바울은 그의 옛날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심을 한다. 본문 13절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이 말씀에서 바울은 "내 심정 같아서는 오네시모를 내 곁에 두고 싶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14절을 살펴보면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다." 오네시모의 본래 주인은 빌레몬이었다.
바울은 이런 이유로 빌레몬의 승낙이 없이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빌레몬이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울 사도님 그는 본래 아주 나쁜 제 종인데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었음을 함께 기뻐합니다. 그리고 제 종인데 선생님이 데리고 계십시오. 또한 마음대로 쓰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같이 일하십시오."라고 말할 수도 있는 사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의적으로 하는 것이 되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남이 하라고 시켜서 하는 것은 진정한 봉사로서의 의미가 없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이 사람을 내가 데리고 있겠다고 말해도 빌레몬은 그렇게 하라고 말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보다 네가 자의로 한 것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사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빌레몬이 그를 다시 자기에게로 보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 보내었다.
골 4:7~9의 말씀에 나타난 것을 보면 두기고라는 사람과 함께 오네시모를 돌려 보낸다. 도망친 노예는 그 당시에 생사권이 전적으로 주인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사랑으로 부탁하고 있다.
오네시모로 하여금 과거의 잘못을 확실하게 깨닫고 분명한 댓가를 원하는 바울의 심정을 보라. 그리고 우리에게 공의의 칼을 들고 적용해 보자.
그렇다고 오네시모가 옛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확실하게 변했다. 그리고 참으로 회개했다. 그러나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위해서도 그 일이 교정되는 것이 필요하였으며 그 일의 마무리를 위하여 오네시모를 돌려 보내려고 한 목적이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과거를 바로 잡으려는 결단이 없이 입술로만 회개를 한다면 이는 암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참된 부흥의 운동일 것이다.
본문의 13절과 14절의 말씀은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한 것은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그것이 당연한 그리스도인의 예절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예절을 무시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바울은 억지의 봉사, 억지의 헌금, 억지의 전도, 억지의 구제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바꾸고 있다.
진정한 봉사는 자의에 의한 것이다.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심정으로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영광스러운 사역에 동참하기를 스스로 할 수 있는 진정한 봉사를 하자.
그리고 바울은 꼭 필요한 노예로서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는 것은 그를 달래려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만약에 바울로부터 그러한 관심을 거절한다면 이것은 더 없이 무례한 짓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네시모를 되돌려 받는 것을 반가운 선물로 여기겠다는 암시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그를 그 집에서 학대받지 않고 되돌아오게 하고 있다. 오네시모를 돌려 보내라는 바울의 암시를 세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을 대신해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
둘째 : 겸손한 마음에서 빌레몬의 권리를 박탈하고 싶지 않다는 점
셋째 : 자기 종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돌아간 뒤에 그를 되돌려 보낼 경우, 이것을 더 없이 반갑게 여기겠다는 점등을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요점에서 바울의 교훈은 복음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자들이 복음 증거를 위하여 수고할 때 우리는 지체 의식으로 마땅히 도와 주며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가 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하나의 사사로운 개인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 붙어 있는 지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교회를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복음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된 임무인 만큼 모두가 나서야 하며 단결된 힘으로 대처해야 되고 특정인에게 위임하거나 한 사람에게만 맡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이제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빌레몬이 자기 종이 변화된 성품과 새로운 행실로 돌아오는 문제에 대해서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개인적인 체험으로 그의 회심을 입증했다는 점을 지적할 때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