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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시리즈 2 )
작가/ 낭독: 김인희 소설가
유튜브: 댕댕이와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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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2화
작가/ 낭독: 김인희 소설 / 유튜브: 댕댕이와 책을..
“지금 집을 사려는 사람이 없어요. 한창 좋았을 때 제가 팔라고 했는데 안 파셨잖아요. 그때가 최고를 찍고 그날부터 죽 내리막길이에요.”
부동산 사장은 매물 노트를 보여주었다. 같은 평수인데도 미자가 내놓은 시세보다 몇천만 원이 다 낮았다.
“이 가격에도 안 팔려요. 급매가 아닌 이상 달려드는 사람이 없어요.”
“가장 싸게 내놓아 주세요.”
“아주 급한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제시한 가격만 받아 주세요.”
때를 놓치고 말았다. 재개발 이슈로 사겠다는 사람이 한때 줄을 이었었다. 가만히 있어도 여기저기에서 팔라고 전화가 왔었다.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때 팔았더라면 엄마 간병비도 걱정 없고 비싼 대출이자도 안 물고 일도 줄여도 되었을 것이다. 후회되었다.
부동산사무실을 나오는데 속이 아려왔다. 달랑 하나밖에 없는 집은 미자의 꿈이고 노후였다. 꿈과 노후를 내놓고 나니 가슴속으로 휭하니 찬 바람이 또 불어왔다. 한 장을 낮춰도 찾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미자가 제시한 금액으로 팔린다 해도 담보대출금과 보험 대출을 갚고 나면 남는 돈이 얼마 안 되었다. 미자의 노후는 없는 것이다. 재개발 이슈가 없는 곳의 작은 빌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미자에게 욕심이 많다고 했던 이현수의 말은 두고두고 섭섭했다.
언젠가 대로변 메카 길 건너 KB 15층 빌딩을 가리키며 이현수는 말했었다.
“앞으로 50년 후, 저 빌딩 주인은 누가 될까요?”
“글쎄요.”
대로변이 훤히 내다보이는 메카 창가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미자는 15층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이 동네서 가장 높고 큰 빌딩에는 병원과 은행, 서점, 임영웅 팬들이 운영하는 카페도 입주해 있었다.
“지금 빌딩 주인이 50대라고 칩시다. 50년 후에도 그 사람일까요? 아니면 명의가 바뀌어 있을까요.”
“바뀌어 있겠죠? 자식이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로요.”
“빙고! 바로 그겁니다. 등기부등본? 그거 별 게 아닙니다. 죽을 때 예수가 그걸 인정해 준다면 또 모르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느니라, 하셨다죠?”
미자는 자신이 아직도 내려놓지 않은, 항아리에서 사탕과 과자를 움켜쥐고 손을 빼내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에 움켜쥔 것을 놓아야 한다. 그래야 항아리에서 손을 뺄 수 있다.
수업하러 가면서도 자꾸 휴대폰에 눈이 갔다. 너. 어디냐? 나 메카에 왔다, 라는 인숙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뒤숭숭한 마음으로 어떻게 수업을 마쳤는지 몰랐다. 차에 올라 시간을 보니 저녁 8시였다. 운전하면서 유튜브로 음악을 들었다. 아는 언니의 지인이 새벽에 보내준 것으로, 영화 ‘화양연화’의 주제곡이었다.
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더듬어 보았다. 음악을 들으며 미자는 지금이 화양연화이기를 바랐다. 더 늙지도 더 젊지도 않은 바로 지금. 혼자라도 괜찮았다. 어차피 인간은 혼자고, 늙으면서 혼자가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배우자의 불륜으로 가장 아팠던 시간에 양조위와 장만옥은 만났지만 지나고 보니 그때가 둘에게 화양연화였다.
음악을 보내주는 남자를 미자가 지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딱 한 번 아는 언니를 통해 만났을 뿐이었다. 그것도 관중으로 말이다. 아무튼 그 남자는 매일 새벽 6시에 음악을 보내주었다. 일요일은 빼고였다.
그 남자는 아는 언니가 가끔 산책길에서 마주친다는 60대 중반 홀아비였다. 아는 언니는 산책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영화도 같이 보고 칼국수도 먹고 함께 드라이브를 몇 번 했다고 했다. 물론 그 남자도 함께. 그 후로 남자는 함께 했던 여럿에게 새벽마다 음악을 선곡해 보내준다고 했다.
언젠가 딱 한 번 미자도 산책하다가 아는 언니와 마주쳤다. 그 남자와 함께였다. 비가 내리는 날 오후였다. 연예계에 몸담았었다는 그 남자와 셋이 스벅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는 언니와 그 남자는 1시간 넘게 음악과 영화 이야기를 했다. 미자는 커피를 홀짝이며 창문 너머 흐르는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둘의 대화는 장만옥과 양조위 주연의 ‘화양연화’ 였다. 바람이 거세어졌는지 창밖의 가로수 잎들이 심하게 흔들거렸다.
슬라이딩 도어처럼 둘은 비껴갔던가. 비껴가는 건 두고두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남겼다. 양조위의 검은 눈썹과 깊은 눈을 떠올리는 건 언제나 슬펐다.
“절대 절대 선을 넘지 말아야 해요. 우리는 그들과 달라요.”
배우자의 불륜으로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느꼈지만 감정을 아꼈다. 도덕에 얽매인 두 사람은 몸을 나누지 않았다. 홍콩을 떠난 양조위는 앙코르와트 사원의 벽틈에 사랑 고백을 쏟아 넣고 흙으로 틈을 막아버렸다.
화양연화의 주제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집으로 가는 골목에 다다랐다. 일부러 메카 쪽을 한 바퀴 돌았다. 파출소 옆에 자동차를 세우고 메카 안을 살폈지만 이현수는 없었다. 인숙에게 전화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혹시 이현수와 함께 있냐고 묻는다면, 상처받을 사람은 미자였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넌 가만히 있어도 사랑받고, 난 팔자가 드러워서 행동해야 차지해서 움직였다. 왜, 그러면 안 되냐? 너만 사랑받으라고 누가 주술이라도 걸어놓았다던?”
인숙을 말로 이겨본 적이 없었다. 듣고 보면 맞는 말 같았으니까.
사랑이 통속이 되지 않으려면 슬라이딩 도어 장치가 필요한지도 모른다고 미자는 생각했다.
개나리가 피고 라일락이 지고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핀 오월 어느 날, 퇴근해서 씻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인숙이였다. 두 달만이었다.
두 달 전, 미자에게 연락도 없이 찾아온 인숙이 메카 긴 테이블에 이현수와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던 장면을 본 이후 두 달이 넘도록 둘의 얼굴 코빼기도 못 봤다. 커피를 사러 종종 메카에 갔지만 이현수는 없었다. 집 문제로 의논하려고 몇 번 인숙에게 전화도 했다.
“나, 요즘 바빠. 너도 별일 없지?”
별일 없지? 라는 말이 건성으로 들렸다. 허구헌날 심심하다고 뻔질나게 전화하고 찾아왔던 인숙이였다. 60 넘어 서로 바쁘다는 건 잘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미자도 바빴으니까.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그럼. 미자야, 나 재혼할 거야.”
“재혼? 누구와? 너 연애하느라 바빴구나? 연락이 안 되어 뭔 일 있나 했다.”
“시방,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
“누가, 가 왜 중요하냐? 나 재혼한다고.”
“재혼? 엄밀히 말하면 너 재혼 아니잖아, 삼혼이지.”
“맞아, 삼혼여, 호호호.”
“호호호, 재혼이나 삼혼이나 그게 그거지.”
“아녀, 요즘은 서로에게 분명하게 밝힐 필요는 있어. 잘못하면 혼인 취소 사유도 될 수 있어. 유영재가 삼혼인데 재혼이라고 말했다잖아. 어째 첨부터 난 유영재가 맘에 안 들더라. 뺀질뺀질하는 게 영. ”
“아니야, 선우은숙도 유영재가 삼혼인 건 알고 있었대. 사실혼 동거녀가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나 봐. 너, 사별한 거, 이혼한 거 그 사람에게 솔직히 말했지?”
“당연하지. 그래서 더 가까워졌는지도 몰라. 한 번도 어려운데 두 번이나 어떻게 겪었냐고 그때부터 더 친절해지더라구.”
“동정심을 자극한 거야?”
“빙고! 남자는 모름지기 한참 모지란 남자도 자기보다 2프로 부족한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거든. 미자 너가 연애를 못하는 이유가 뭔 줄 아냐? 남자 앞에서 부족한 면을 드러내지 않아서여. 남자들은 그런 여자 딱 질색하거덩. 골치 아프니께. 뭐하러 늙는 것두 서러운디 어려운 여자를 고르겄냐? 죽을 날도 코 앞인디 시간 낭비할 겨를이 없지. 그래서 쉬운 여자를 고르는 거야.”
“글쎄.”
“너 그러다가 큰코 다친다?”
“왜?”
“잘 난 남자들은 부족한 여자를 고르고 조금 잘난 남자는 더 부족한 여자를 고르고, 그럼 잘난 여자는 누가 고를까?”
“글쎄.”
“정신 차려, 미자야. 아무도 안 만나고 고상한 척하는 너 같은 여자는 헛다리집기 명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거덩? 잘난 여자는 아무도 안 고르다가 맨 밑바닥 하수가 고르게 되어 있어. 사기 기질이 농후한 남자들이 단련된 언변과 준수한 외모와 허세로 잘난 여자를 붙잡는 거야. 왜? 수지타산이 좋거든. 사기꾼이 손해 보는 장사 허겄냐? 여자헌티 붙어서 피 빨아먹고 살려고 달라붙는 거잖어. 너 거머리 알지? 거머리는 떼어낼려고혀두 안 떨어져야. 나두 여기저기 기웃거려 봐서 알어야. 돌싱 클럽도 가봤구 재혼 카페도 기웃거려봤구. 거긴 사기군들이 득실득실해. 내 눈에 다 보이지. 이건 천만 원 주고 들어야 할 연애 비법인데 너한테 그냥 공짜로 푸는 거야.”
“너 재혼 상대 잘난 남자야?”
“그렇지.”
“그럼, 잠도 잤니?”
“아녀.”
“아니라구? 그러면서 재혼한다구?”
갑자기 인숙이 시무룩해졌다.
“기회는 많았는데 다 놓쳤어. 인견 빤쓰까지 핸드백에 넣고 나간 날은 꼭 훼방하는 놈이 나타나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거야. 난 다 줄려고 했는디 안 됐어. 될 거 같다가도 안 되고, 워낙 진중하고 소극적인 남자라 표현을 잘 안 해. 하지만 난 눈빛만 봐두 다 알잖어. 내가 누구냐? 연애 쪽 고수 아니냐.”
“나 퇴근해서 지금 씻는 중이야. 씻고 나서 통화하자.”
샤워하면서 미자는 인숙의 남자가 누굴까 생각해 보았다. 이현수일까? 인숙이 연락하지 않은 두 달 동안 둘이 재혼까지 약속한 사이가 되었을까. 어찌 보면 둘은 잘 어울렸다. 인숙이 덜렁대고 성급하고 밀고 추진력 있는 성격이라면 이현수는 글쎄, 종잡을 수 없었다. 보기 드문 호인으로 보였지만 사람의 마음속은 알 수 없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알기란 힘들었다.
배가 고픈데도 저녁이 당기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뱃살은 빠지지 않았다. 아침에 삶아놓은 달걀 한 개와 베지밀을 먹고 있는데 인숙이 다시 전화했다.
“미자야, 난 어떤 남자가 내 스타일인지 이제 알겠어.”
“그래? 어떤 스타일?”
“난 그동안 적극적으로 리드하는 남자가 좋았거든? 근데 이번 남자는 아니야. 좀 어렵긴 하지만 내가 리드하면 또 어떠냐? 지나치게 소극적이지만 배려심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견딜만 해.”
“견딘다고? 뭘? 옷도 고를 땐 피팅룸에서 이것저것 입어보고 고르잖아. 한 번 입고 버릴 게 아니니까. 앉아도 보고 뒤태도 보고 오래 입을 것 같은지 보고 고르잖아. 서두르지 마.”
“그이는 나랑 너무 달라. A이냐고 물으면 A다, B다, 라고 답해야 하잖아? 근데 그렇게 대답을 안 해.”
“그럼 C라고 대답해?”
“그럼 다행이게? A도 B도 C도 아냐. 뭔가 안갯속 같아. 그래서 감질나.”
“너, 어려운 상대를 만난 거 아니냐? 이 나이에 왜 어렵게 연애를 하냐?”
“근데 내가 두 남자와 이미 살아봤잖니? 결국 잘못 선택한 거였잖니. 이젠 관점을 달리해야 해. 남자 보는 관점을.”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그래서 재혼이 어려운가 봐. 나도 빛 좋은 사람은 경계부터 하는 버릇이 있어. 그런데 그냥 혼자 살면 안 되냐? 지금도 괜찮지 않냐?”
“뭐가 괜찮냐? 혼자 사는 게. 난 외로워. 넌 말끝마다 초를 치냐. 내 몸이 이렇게 탱글탱글헌디 그냥 놔둔다니? 그건 죄여.”
“호호호, 재혼할 남자가 생겼다니 축하해.”
“난 그 남자 앞에만 있으면 심장이 방망이질 쳐서 그 비싼 음식도 깨작깨작 먹다가 말고, 글쎄 두 달 사이 7킬로나 빠져버렸어. 돈 들이고 다이어트할 이유가 없어졌어.”
“헐, 진짜? 아니 맛있는 음식 시켜 놓고 못 먹는다니 진짜 사랑에 빠졌네. 천하의 정인숙이 남자 앞에서 음식을 다 남기다니. 근데 어떻게 만났어?”
“응,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인데 그 남자가 먼저 고백했어.”
“뭐라고? 고백했다고?”
“응. 카톡을 보냈더라. ‘당신은 나의 빛입니다. 평생 제 곁에 있어 주십시오.’ 라고.”
“정말? 그 남자 로맨티스트다. 진짜 인숙이 널 사랑하나 보네. 근데 왜 말로 하지 카톡으로 프로포즈를 했을까?”
“그건 신중해서 그렇지. 소극적이기도 허구.”
“넌 뭐라고 답장 썼니?”
“눈도 침침한데 답장을 어떻게 해? 다음 날 직장으로 찾아갔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사 들고. 엄청 놀라더라. 날 좋아하면서 그동안 표현을 못하고 있다가 달랑 시 구절 나부랭이 하나 보내면 된다니? 프로포즈는 얼굴 보고 해야 하는 거잖아. 당장 분위기 좋은 데로 끌고 가서 엎어치고 메치고 눅신하게 녹여주고 싶은 걸 이 악물고 참았다.”
“호호호, 너답다. 언제 소개시켜 줄 거야.”
“소개는 무슨, 결혼식 때 보면 되지.”
“왜? 섭섭하다. 나한테 얼굴도 안 보여주고 재혼한다니.”
“남사스럽잖니, 이번에는 증인만 양쪽에 세우고 조용히 할 거야. 참, 미자야, 너 증인 서 줄 수 있지?”
“증인? 당연하지. 서 줄게.”
인숙이 갑자기 대화 중에 전화를 끊었다. 아마 새로 생겼다는 애인이 그 새 또 연락한 모양이었다. 애인이 생긴 지 두 달 이상 넘었다면서 미자에게 말하지 않고 오늘까지 참은 인숙이 몹시 놀라웠다.
침대에 누웠다.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인숙의 새 애인은 이현수가 아닌 게분명했다. 둘을 오해한 게 미안했다. 정체 모를 감정이 스멀스멀 찾아왔다. 갑자기 자신이 왜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미자는 돌아누웠다. 잠도 오지 않았다. 언젠가 유튜브를 통해 만나 동갑나기 친구가 된 이 선생에게 미자가 물었다.
“어쩌면 그렇게 긍정적이고 힘이 넘치죠? 제가 이 선생님께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 강인한 의지를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저요? 전 포기하지 않아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다 견딜 수 있어요.”
“그 점이 저에게 힘을 주었어요.”
“왜 저라고 외롭지 않겠어요.”
“외로우세요? 외롭다는 게 어떤 걸까요? 몰라서 묻는 거예요.”
“미자씨는 외롭지 않아요?”
“예. 전 외롭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해본 거 같아요.”
“진짜요?”
“예, 그래서 알고 싶어요. 외로움의 정체를. 혹시 바빠서 모르는 걸까요?”
“아니죠. 저도 미자씨만큼 바쁘게 살면서도 왜 사나 싶을 때가 있잖아요.”
“아, 그거요? 저 그런 생각 많이 하는데요? 그건가요?”
“그렇지요.”
“아, 이제 정확하게 알겠어요. 저도 외로움을 많이 느끼네요.”
미자는 외롭다고 생각했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집을 나왔다.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였다. 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현수가 보였다. 두 달 넘게 못 만났던 이현수를 보니 몹시 반가웠다. 인숙과의 관계를 의심하며 양다리 세다리 걸쳤다고 흉봤던 일이 미안하기도 했다. 종업원들은 이미 다 퇴근했고 홀에는 이현수 혼자였다.
미자가 들어서자 이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째진 작은 눈이 커졌다. 미자가 멋쩍게 웃었다.
“어, 영업이 끝났나요? 제가 늦었죠?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마시고 싶어서 왔어요.”
“잘 오셨습니다. 영업은 끝났지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이현수가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마법 주문을 외었더니 성공했네요.”
“어떤 마법요?”
“아무도 없는 홀에서 미자씨와 단둘이 커피를 나누는 상상을 하곤 했지요.”
오늘 제가 그래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엉뚱하게 나왔다.
“뭐 그런 걸 마법까지 걸고 그래요? 이왕 걸 거면 거창한 거 걸어야지요?”
미자는 머그잔을 이현수 잔에 살짝 대었다가 떼었다.
“퇴근이 늦었네요? 늦게까지 일하시나 봅니다.”
“뭐, 요즘은 한가한 편이에요. 아이들이 없잖아요.”
“아, 아이들이 줄었군요. 젊은이들이 결혼을 안 하니 아이들이 태어날 일이 없는 거지요. 그럼 수입도 줄었겠네요?”
“예, 줄었어요. 하지만 적당한 편이에요.”
미자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남의 수입이 줄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이현수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외로우니까.
“왜 퇴근 안 하세요?”
“여기가 집인데 어딜 갑니까?”
“예? 여기서 산다고요?”
“몰랐다니 섭섭합니다. 전 가게에서 삽니다. 주방 옆에 작은 방이 하나 있어요. 궁금하면 한 번 보시겠어요?”
혼자 사는 남자의 방이 궁금한 건 아니었다. 미자는 내색하지 않고 이현수를 따라 주방 옆으로 갔다. 가끔 메카에서 화장실을 다녀올 때 지나치던 공간이었다. 이현수가 작은 방에 불을 켰다. 아늑하고 깔끔한 방이었다. 1인용 침대와 옷장만 덜렁 있었다. 침대에는 이불과 베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청소가 잘 된 공간이라고 느꼈다.
“짐이 없네요?”
“짐을 보관할 장소도 필요해서 집을 구하러 열심히 다녔지만 마땅한 집이 나타나지 않네요.”
“정말 이 동네로 이사 오시려고요?”
“예, 그래서 집 보러 같이 가자고 한 것 아닙니까? 미자씨가 매몰차게 거절했잖습니까.”
미자는 호호호 웃었다.
“집 보러 같이 다닌다고 덧나는 것도 아닌데,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두 번이나 거절하셨잖아요.”
“부부도 아닌데 같이 집을 보러 다니면 이상하잖아요?”
“누가 이상하게 봅니까?”
“제가요.”
“홀아비 혼자 집 보러 다니는 게 더 이상하게 뵈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오늘은 잠이 안 올 거 같은데 우리 술 한잔 할까요?”
미자는 이현수의 우리, 라는 말이 외설스럽게 들렸다. 하지만 퍽 마음에 들었다. 집을 나오기 전 외로웠던 마음이 희석되는 느낌이었다.
“예? 여기서요?”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왜 안 됩니까? .”
“전 여기서 산 지 십 년이 넘었어요. 아는 사람이 꽤 있어요.”
“에이, 생각만큼 그들은 미자씨에게 관심이 없어요. 저만 미자씨에게 관심이 있지.”
“호호호, 그건 그렇겠네요. 다들 제 코가 석 자인데 누가 저한테 관심이나 있겠어요. ”
몇몇 사람들이 지하철역 출구로 쏟아져나왔다. 막 전철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메카를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아, 밖에서 여기가 훤히 보이나 봅니다. 불편하시면 홀 안쪽에서 마셔도 되고 그것도 불편하다면 홀의 불을 끄고 제 방에서 마셔도 됩니다. 그것도 싫으시다면 술집으로 갈까요?”
“여기가 좋아요,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는 것도 좋네요.”
“미자씨와 전 비슷한 사람 같습니다.”
“예?”
“솔로 탈출 못 하는 것.”
“전 솔로가 좋은데요? 탈출할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바로 그 부분이 우리가 닮은 겁니다.
오늘 밤, 이현수는 자꾸 우리, 라는 표현을 썼다.
“그건 못된 성격때문이 아닐까요?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상대들이 질려서 먼저 차버리고 갔을걸요?”
“바로 그겁니다. 프로포즈하기도 전에 여자들이 떠났지요.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르거나 했지요. 자, 무얼 마실까요? 양주도 있는데, 시원한 맥주도 있어요.”
“전 양주가 좋습니다. 스트레이트로 한 잔만 마실게요.”
이현수가 맥주잔 두 개를 들고 왔다.
“스트레이트는 독합니다. 아이스를 몇 개 넣겠습니다. 온도가 차가워야 제맛이 나거든요.”
“전 스트레이트가 좋아요. 아이스는 녹으면서 밀도를 달라지게 하지요.”
“밀도?”
“예. 전 아이스아메리카노도 안 마셔요. 밀도가 달라지는 걸 못 견디죠.”
이현수는 또 미자의 잔에 양주를 따랐다. 미자는 홀짝 마셔 버렸다. 얼른 취하고 집에 가서 취한 채로 잠들고 싶어서였다. 이현수가 작은 눈을 크게 떴다. 과일을 가져온 이현수는 미자 잔에 또 술을 따랐다. 아니에요, 라고 손사래를 쳤으나 이미 취기가 올라 또 마셔버렸다. 머리가 핑 돌고 알딸딸해졌다. 혀까지 꼬부라졌다. 혀 꼬부라진 소리는 욕망에 간절한 남자를 자극할 것이다. 딱 한 잔으로 끝내자, 고 했던 것이 두 잔째 이어졌다.
이현수가 냉수를 주었다. 냉수를 마시면서 미자는 자신의 잔에 얼음을 넣는 이현수의 손등을 보았다. 아까는 검게 보였던 털이 조명에 얼핏 회색으로 보였다. 접은 셔츠의 소매 밑으로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검은 털들이 보였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그의 손동작을 지켜보았다. 털이 많은 남자군, 하고 미자는 생각했다.
털이 소복한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 첫 직장의 지점장이 떠올랐다. 중년인 지점장은 와이셔츠 단추 두 개를 풀고 있었다. 셔츠 사이로 검은 털들이 성난 잔디처럼 일어나 있었다.
인천이 집이었던 지점장은 가끔 귀가하지 않고 서울시청 옆에 있는 모텔에 머물곤 했다. 모텔에 머무는 횟수가 잦아지자 사회 초년생이었던 미자의 귀에까지 지점장의 부적절한 소문이 들려왔다. 아침에는 긴급하게 회의를 소집하고 팀원을 거느려 실적을 올리려 갖은 애를 쓰다가 밤이면 귀가하지 않고 모텔에 투숙하던 중년 남자의 일탈에도 남모를 사연은 있을 것이다. 털 많은 지점장에게 결제를 받을 때마다 미자는 털과 모텔을 동일시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현수도 가슴에 털이 있을까. 상상하자 지점장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그만 가겠어요.”
“제가 바래다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잔을 비울 때까지만이라도.”
“좋아요,”
미자는 혀 꼬부라진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똑바로 말하려고 했지만 발음이 자꾸 꼬였다. 이현수가 놀란 눈으로 미자를 쳐다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어떤 눈이지요?”
“말 안 할래요.”
“에구, 말 안 한다고 제가 모릅니까?”
“예? 안다고요?”
“당연히 알지요.”
“말해 보세요.”
“저도 말 안 하겠습니다.”
“말 안 하면 저 갈게요.”
이현수가 일어서려는 미자의 어깨를 잡았다. 꽤 힘이 세군, 라고 미자는 생각했다. 이현수의 손이 미자의 팔을 잡다가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볼록 나온 미자의 똥배를 스쳤다. 미자는 울고 싶어졌다. 하필 만져도 남의 똥배를 만질 게 뭐람. 하지만 곧 똥배를 만진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가슴이라도 스쳤다면, 아 그건 정말 서로 민망할 일이었다. 얼굴이 더워지고 온몸이 뜨거워졌다. 예기치 못한 감정이었다.
“저 아이스 디카페인 한잔 추가요.”
미자가 바지 주머니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이현수가 커피 대신 얼음물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미자씨, 언제 답을 주시겠습니까?”
“예? 무슨 답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두 달 전에 프로포즈를 했는데. 뭐 급한 것은 아닙니다. 전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미자는 프로포즈를 받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현수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통 종잡을 수가 없어서요. 뭐 무쏘의 뿔처럼 혼자 가도 되는 사람 아닌가요?”
“미자씨, 신끼가 있으시군요. 영혼이 맑으면 상대의 마음이 보이나 보지요? 전 혼자서도 잘 살아갑니다. 여자? 숱하게 겪었지요. 여자에 대해 모르는 게 없습니다.”
“어련하시겠어요. 근데 왜 저한테 프로포즈를 하셨지요? 두 달 전에 저한테 프로포즈 하셨다면서요.”
“그건 단순한 게 아닙니다. 미자씨는 저와 다르니까요. 지난번 덕수궁 근처 삿뽀르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말 꺼내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그날은 잊어주세요. 제발요. 기억에서 싹 지우시라고요. 왜 저에게 프로포즈를 했냐고 물었어요.”
“미자씨에게 제가 필요하니까요.”
“아닌데! 오히려 반대 같은데요? 현수씨에게 여자가 필요한 거잖아요.”
“맞습니다. 다음 생은 모르겠지만 이번 생은 우리, 하고 싶은 대로 삽시다.”
“우리에게 아직 이번 생이 남아 있을까요?”
“당연하죠. 지금까지는 그랬다 쳐도 60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60부터요?”
“예, 바로 지금부터. 오늘부터, 이 시간부터.”
미자는 화양연화를 떠올렸다. 잠 안 오는 밤, 이현수와 거리를 내다보며 커피와 술을 마시는 지금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화양연화일 것이다. 커피는, 술은, 이현수는, 미자에게 위안의 반려자임에 틀림없었다. 미자가 이현수를 쳐다보고 씩, 웃었다.
“지금 그 웃음은 답한 거지요? 프로포즈에 답한 거 맞지요?”
“예, 언젠가는.”
“언젠가는? 우리에게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별로 없어요. 함께 산다고 해도 20년쯤 지나면 한 사람이 먼저 죽고 그를 보낸 사람은 혼자 남아 쓸쓸히 죽겠지요? 전 미자씨보다 하루 더 살고 싶습니다.”
“어머, 왜요?”
“미자씨를 먼저 보내는 것이 더 나으니까요.”
미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현수가 고마웠다.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빨리 집에 가서 엉엉 울고 싶어졌다. 미자보다 미자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니, 외로움이 술 향을 따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창밖에 늙은 여자가 지나가고 있는 게 보였다.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는 인숙을 닮았다. 인숙의 말이 생각났다.
“미자야, 유영재 말 본 새 봤지? 지가 선우은숙보다 나중에 죽고 싶다고 했잖아. 그런 검은 속셈이 어딨냐? 선우은숙이 먼저 죽으면 그 재산을 지가 쓰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그건 추측이잖아.”
“추측? 그런 맘이면 평소에 아플 때도 정성을 보여줘야 하잖아. 이런 걸 어불성설이라고 하는 거야.”
미자는 어두운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이현수는 미자가 아프면 잘 보살필까? 이현수가 아프면 미자는 이현수를 잘 보살필까? 며칠 돌보는 척하다가 이현수를 요양원에 보내는 건 아닐까? 미자는 자신이 없었다. 만약 이현수에게 치매가 오면 이현수를 요양원으로 보내지 않고 돌볼 수 있을까. 미자는 자신이 없어졌다. 엄마를 요양원에 보낸 여자가 재혼한 남자를 요양원에 보내는 일은 더 쉬울 것이다. 연애 고수인 이현수는 아마 그것까지는 모를 것이다.
인간의 예의, 라고 미자는 중얼거렸다.
거리는 더 어두워졌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어깨를 측 늘어뜨리고 지나갔다. 그들은 메카 쪽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술에 취한 미자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행인들을 지켜보았다. 혹 미자가 아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쳐다볼 수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미자는 취했고 오늘 밤은 잠이 안 오니까.
미자가 고개를 돌려 이현수를 보았다.
“그럼, 우리 친구할까요?”
미자가 이현수의 옆얼굴을 보았다. 이현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미자는 후회했다. 만약 그럽시다, 우리 친구합시다, 한다면, 그건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 아닌가. 미자는 이현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지막 잔을 입 속에 털어 넣은 이현수가 고개를 돌려 미자를 쳐다보았다. 눈이 이글거린다고 미자는 생각했다.
“전 친구 싫습니다.”
“왜요?”
“친구, 라는 말은 설레지 않습니다. 전 미자씨의 연인이 되고 싶습니다. 연인, 얼마나 설레는 말입니까?”
미자는 연인, 이라고 나지막하게 발음해 보았다. 이것이다. 미자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미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화양연화는 바로 지금이다, 라고.
바래다준다는 이현수를 뿌리치고 일어섰다. 이 기분을 온전히 혼자 느끼고 싶었다. 먼저 손을 내밀어 이현수와 악수하고 돌아섰다. 유리문을 열면서 미자는 중얼거렸다.
‘칫, 내가 저를 필요로 한다고? 웃끼고 있네. 지가 날 필요로 하면서 그렇게 말하면 좀 낫나? 남자들 욕망은 딱 하나야. 내가 모를 줄 알고?. 나도 알만큼은 다 안다구.’
미자 안에 수많은 미자가 있었다. 이현수 옆에 있으면 자꾸 삐딱해지는 자신을 보았다. 비틀비틀 횡단보도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오토바이를 탄 배달원이 미자를 치고 달아났다. 미자는 넘어졌다. 아스팔트에 엉덩방아를 찧고 일어나려다가 발목을 삐끗했다. 이현수가 달려왔을 때는 오토바이의 그림자는 온데간데 없었다. 엉덩이가 몹시 아팠다. 발목도 삐었는지 걸을 수가 없었다.
“제등에 업혀요. 집으로 데려다줄게요. 다친 부분을 보고 상황을 봅시다. 응급실로 가야 할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뭐라고요? 지금 나이가 몇인데 괜찮다는 겁니까? 여긴 어두워서 알 수 없으니 미자씨 집으로 갑시다.”
미자는 엉망진창인 집을 떠올렸다. 식탁도, 안방도, 거실도, 화장실도 엉망이었다. 절대 이현수가 봐서는 안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청소라도 할 걸. 수업 끝나고 지쳐서 샤워만 하고 누웠었다.
“안 돼요. 곧 괜찮아질 테니 저를 그냥 내버려 주세요.”
“그럼, 가게로 들어가 상처 난 부위를 어디 좀 봅시다.”
미자는 이현수 등에 업혀 메카로 다시 들어갔다. 주방을 지나 작은 방으로 들어가 이현수의 침대에 누웠다. 이현수는 주방으로 가서 얼음찜질 주머니를 만들어왔다. 발목과 종아리에 얼음찜질하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응급실에는 안 가도 되겠어요.”
미자의 발과 종아리등을 주무르는 이현수를 누운 채 쳐다보았다. 이현수의 행동이 외설스럽다고 느꼈다. 이미 늘어질 대로 물렁물렁해진 허벅지를 주물렀을 때 미자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맨발인 것도 창피했다. 발과 허벅지를 주무를 때마다 몹시 아팠다. 미자는 낮게 비명을 질렀다.
“좀 참으십시오. 미자씨, 발이 예쁘시군요?”
미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만 내밀었다.
“지금 농담이 나와요?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미안합니다. 발이 이렇게 이쁜 여자는 처음 보아서요.”
미자는 다리를 뺐다. 몹시 아팠다. 이불을 덮고 눈을 반쯤 뜨고 이현수를 올려다 보았다. 수분이 빠져버린 그의 얼굴은 건조해 보였다.
턱선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이현수의 얼굴을 보는 것은 민망하고 슬펐다. 마치 미자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다 가요. 좀 나아지면 집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요.”
“예? 여기서요? 그럼 현수씨는요?”
“난 홀에서 의자를 몇 개 붙이고 자면 됩니다.”
“갈래요, 집이 코 앞인데.”
“제발 고집부리지 말고 말 좀 들어요. 말 안 듣다가 넘어진 것 아닙니까? 놀란 발목을 얼음찜질로 마사지해 줘야 합니다. 고집부리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안 잡아먹습니다. 털끝 하나 안 건드립니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미자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현수가 작은 방 조명을 껐다.
“혼자 있고 싶으면 제가 홀에 나가 있을까요?”
대답도 듣기 전에 미자는 잠이 들었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피로가 해일처럼 밀려온 것이다.
첫댓글
나를 밝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
나를 따뜻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것,
그것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