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근대 이행기 시문학의 전개 과정
급변하는 시대일수록 시의 형태는 내용의 선진성에 뒤지기 마련이다. 하나의 양식이 굳어지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 동안의 정련이 필요한 법인데, 과도기에는 새로운 시형을 개발하여 한가로이 그것을 정련할 시간이 없는 까닭이다. 더구나 근대 이행기 한국 시문학은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의 취지를 널리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기에 지극히 계몽적인 내용 우위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행기의 시인들은 우선은 기왕에 전해오던 옛 노래의 틀을 빌어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시조나 가사, 민요 등은 그런 점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일 수 있었다. 그러나 담을 내용이 바뀐 만큼 옛 노래의 틀이 언제까지나 새로운 사상의 거처로 남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선은 옛것의 옷을 빌어 시를 짓되 서서히 새로운 형태의 표현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된다. 창가나 신시형의 발견이 그래서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행기 근대 시문학이란 옛것을 빌어 새것을 노래하던 단계로부터 출발해 거기에 걸맞은 새로운 옷으로서의 다양한 새 시형의 발견에 도달하는 과정에 붙여진 명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옛 시형의 지속과 변모
(1) 가사
옛 시형으로 새로운 시대 조류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행기 시적 작업의 제일 앞머리에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64)의 『용담유사龍潭遺詞』가 놓인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책은 「안심가安心歌」・「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 「도덕가道德歌」・「검결劍訣」 등 9편의 한글 포교布敎 가사가 실린 가사집이다. 시시각각으로 자국의 정체성을 위협해 들어오는 외세로서의 ‘서학西學’ 앞에 무능하기 짝이 없던 정권을 대신해서 자민족 사상의 주체성을 뚜렷이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동학東學’이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서세동점의 물결 앞에서 형성된 집단적 자의식의 분명한 발로였다. 뿐만 아니라 ‘동학’은 民민이 주인 되는 나라로의 개혁[內修]을 요구하며 19세기에 민요民擾, 민란民亂의 형태로 숱하게 나타난 민중적 열망의 최종적인 결집체라는 점에서, 내부적으로도 하나의 획을 긋는 운동이었다. 비록 이 운동이 안팎의 성숙하지 못한 여건 때문에 제도적 개혁의 완수로 이어지지 못하고 좌절함으로써 ‘난亂’이라는 이름으로 폄하되기에 이르렀지만, 1894년의 혁명은 분명 조선사회의 기층민중이 지닌 에너지가 역사의 전면으로 개화開花한 본보기였다. 개화 저지와 왜적 소멸을 등가로 놓은 좁은 시야⁷와 충군위국忠軍爲國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동학혁명이 자기 시대와 치열하게 부딪혀 나가려는 고민의 산물이었음은 다음의 시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련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 가련하다
전세임진 몇해런고 이백사십 아닐런가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요순성세 다시와서 국태민안 되지마는
기험하다 기험하다 아국운수 기험하다
개같은 왜적놈아 너희신명 돌아보라
너희역시 하륙해서 무슨은덕 있었던고
전세임진 그때라도 오성한음 없었으면
옥새보전 뉘가할꼬 아국명현 다시없다
-「안심가」의 부분
240년 전에 임진왜란을 겪고서도 우리나라의 운수가 여전히 가련하고 기험崎險하여 다시 “개 같은 왜적놈” 앞에 내맡겨진 신세가 되었다는 자탄과 분노가 가득 묻어나는 가사다. 4(3). 4조 4음보의 전통 가사 형태를 고스란히 빌어와 수운이 노리는 것은, 서학과 그 주구로서의 일본을 배격하자는 척사론의 계몽일 뿐이다. 계몽의 도구로 수운이 가사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한시는 독자층이 제한되어 있고 시조는 길이에 제한이 있어 많은 양의 교술적 내용을 담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사는 “상류층 인사로부터 규방의 여자에게까지 즐겨 사용된 가장 자유로운 형식⁸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수운으로부터 시작된 후천개벽의 동학혁명은 실패했다. 그러나 가사를 통한 새로운 사상의 계몽이라는 방법은 다른 쪽에서 보다 진전된 형태로 승계되었다. 1896년에 서재필에 의해 창간된 『독립신문』에 주로 실린 소위 ‘애국가’ 가사를 통해서였다. 『독립신문』에만 총 28편의 작품이 전하는 이 애국·독립가류 가사는 공통점보다 이채로운 점들을 많이 갖고 있는 시가형이긴 하지만 근본이 가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거의 예외가 없다.
대죠션국건양원년 ᅎᆞ주독립깃버ᄒᆞ세
텬디간에사ᄅᆞᆷ되야 진츙보국뎨일이니
님군ᄭᅴ츙셩ᄒᆞ고 정부를보호ᄒᆞ세
인민들을ᄉᆞ랑ᄒᆞ고 나라긔를놉히달세
나라도을생각으로 시종여일동심ᄒᆞ세
부녀경ᄃᆡᄌᆞ식교휵 사ᄅᆞᆷ마다홀거시라
집을각기흥ᄒᆞ라면 나라몬져보젼ᄒᆞ세
우리나라보젼ᄒᆞ기 자나ᄭᆡ나생각ᄒᆞ세
나라위ᄒᆡ죽ᄂᆮ죽엄 영광이제원한업네
국태평가안락은 ᄉᆞ롱공샹힘을쓰세
우리나라흥ᄒᆞ기를 비ᄂᆞ이다하ᄂᆞ님ᄭᅴ
문명ᄀᆡ화열닌세샹 말과일과ᄀᆺ게ᄒᆞ세
아무것도몰은ᄉᆞ람 감히일언ᄒᆞ옵내다
-「셔울 슌쳥골 최돈셩의 글」, 『독립신문』 3호, 1896.4.11
이른바 애국가류 가사의 효시로 꼽히는 이 작품에는, 1896년의 대한제국 개국을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의 기초로 믿어 의심치 않는 지은이의 정치적 순진함이 배어 있다. 하지만 수운의 경우와는 달리 개화 저지를 자주독립의 기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문명개화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진일보해 있다. 형태적인 측면에서도 이 시가는 용담유사 소재의 가사들과 유를 달리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차이점이 바로 짧은 분련체 分聯體 형식에 있다. 4음보 2행을 나란히 놓아 대구對句시키고 그러한 형태를 중첩해가는 이 방식은 동일 곡조에 여러 절의 가사를 바꿔 붙이는 찬송가류의 구성과 그 형태가 유사하다. 더구나 몇몇의 애국가류 가사들에서 합가나 후렴구⁹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몇몇의 가사들이 실제로 노래로 불렸다는 기록¹⁰이 있거나 대부분의 애국가류가 가창 가능하다는 것 등으로 판단할 때, 이 분련체 형식은 전통적 의미의 노래하기가 아니라 서구적이고 기독교적¹¹인 의미의 노래하기라는 새로운 가적歌的 요소의 도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다음 단계의 ‘창가’는 바로 이 ‘애국가류’ 가사들로부터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애국가’ 가사가 시정 범인凡人들의 아마추어적 소작所作이라면, 『대한매일신보』에 집중적으로 발표된 ‘사회등’ 가사¹²는 신문의 편집진이 번갈아가며 쓴 보다 전문적인 성격의 작품들이다. ‘애국가류’보다 무려 10여년이나 뒤늦게 발표되기 시작했으면서도 이 ‘사회등’ 가사는 형식에 있어 보다 완고한 모습을 보인다. 4·4조의 자수율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형식에의 강박 현상은 가사체 형태로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내용을 담아낼 수 없다는 것, 즉 내용과 형식의 괴리가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애국가류’가 대한제국의 개국이라는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에 비교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화자를 내세운다면, ‘사회등’ 가사는 이미 외교·군사권을 침탈당한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함으로써 매우 비판적인 화자를 앞세우게 된다. 그나마 초기에는 당대의 여러 부정적인 인간군을 비실명으로 열거하여 비판하고 풍자하던 것이 후기로 가면 실명 비판의 형태를 띰으로써, 다음에서 보는 것처럼 해당 인물들의 반민족성을 고발하는 강력한 목소리를 내게 된다.
李完用氏드르시오 總理大臣뎌地位가
壹人之下萬人之上 그責任이엇더ᄒᆞᆫ가
修身齊家못ᄒᆞᆫ사람 治國인들잘ᄒᆞᆯ손가
前日事는如何턴지 今日부터悔改ᄒᆞ야
家庭風氣바로잡고 百度政務維新ᄒᆞ야
中興功臣되여보소
―「勸告現內閣」 부분, 『대한매일신보』, 190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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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현·김윤식, 『한국문학사』, 민음사, 1981, 71쪽.
8 조지훈, 『조지훈전집』 7, 일지사, 1973.뿐만 아니라 소리 내어 읽는 한글 정형시의 성립 가능성을 가장 강하게 찾을 수 있는 양식이 가사였다는 점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노래가 아니라 소리 내어 낭독하는 시적 기초로서의 4음보격 확립도 여기서 그 가능성을 따져볼 수 있었다. 문제는 서세의 동점이 너무나 강력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점에 있었다. 가사에 기초를 둔 한글 정형시 양식은 제대로 문화 저변에 자리 잡힐 새도 없이 일본 경유의 서양 시문학 물결과 맞닥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9 「니필균의 노리」, 「최병헌의 독립가」, 「무궁화 노리」 등.
10 권오만, 개화기시가연구』, 새문사, 1989, 178쪽.
11 동학의 '한울님'과 달리 최돈성의 '하느님'은 기독교도의 어법이다. 이미 기독교와 찬송가의 영향을 상당 부분 받았음을 보여준다.
12 1907년 12월 18일부터 1910년 8월 17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가사는 총 610여편에 달할 정도로 그 양이 많다.
13 권오만, 앞의 책, 137쪽.
2024. 4. 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