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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예수님의 탄생
누가복음 2장 1-7절 / 1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마태복음 1장 18절-2장 12절 / 1: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2: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1.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의 역사적 배경이 갖는 구약 예언의 성취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고한 예수의 탄생은 (눅1:26-37) 아구스도가 가이사 - 로마의 황제 - 로 있은 때에 있게 됩니다. 아구스도의 원래 이름은 옥타비안(옥타비아누스)이었으나 후에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로 호칭했습니다. 아구스도는 B.C.27년 1월 6일에 로마의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1) 가이사 아구스도는 정기적으로 호적령을 내려 로마 제국 통치하에 있는 모든 땅의 인구 조사를 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행하는 정기 인구 조사는 세금 부과와 강제 병역에 동원한 자들을 파악하기 위한 두가지 목적을 가지고 행해졌는데 유대인들은 병역이 면제되어 있어 군대에 동원되지 않았으므로 팔레스틴에서의 인구 조사는 주로 과세가 그 목적이었습니다. 유대는 수리아의 한 지방으로서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으며 당시 수리아의 총독은 구레뇨였습니다. 그는 B.C.12년에 로마의 집정관이 되었으며 그 후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총독의 자리에 오르자 아구스도의 호적령에 따라 온 유대에도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첫 번 한 것입니다. 이 호적령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고향, 곧 본적지에 가서 등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유대인은 호적등록을 하기 위해서 제각기 선조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 - 다윗의 후손 - 이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다윗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거리가 대략 120-150km 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해 주신 예언의 성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서 한 예언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장차 베들레헴 이라는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유대 땅으로 나아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미 5:2).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 그 예언이 성취되기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참된 구원자 되시는 예수께서 출생하실 때가 가까울 즈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미가에게 주신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가이사 아구스도로 하여금 호적령을 내리도록 하는 섭리를 베푸셨습니다. 이 호령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후손인 요셉도 자신의 고향이며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연스럽게 선지자 미가에게 주신 구약 예언을 성취하게 되어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출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가 B.C.4년입니다.
2. 아기 예수님이 탄생할 때의 상황이 갖는 상징적 계시의 의미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유대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데 그때는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머물고 있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우유에 뉘었습니다. 그것은 사관-동네 여관-이 다 차서 그들이 들어가 있을 수 있는 방이 없었기 때문에 가축들이 있는 곳에라도 들어가 아기 예수를 출산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깊은 뜻에 의한 섭리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마 3:17)로서 하나님의 본체(빌 2:6)이십니다. 그 예수께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임하신 모습을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가 하면 종의 형체, 사람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하고 있으며(빌 2:6-7), 베들레헴 마굿간 - 또는 외양간 - 이요 구유 안에 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신 모습이 너무나도 비천하게 나타나신 것이 아닌지요. 그러나 이 비천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강보에 싸여 마굿간의 구유에 누워 있을 수 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아기가 탄생할 요건이 갖추어진 따뜻한 방에서 탄생하지 않고 마굿간에 놓여 있는 구유에서 탄생하신 것은 이것이 상징하고 있는 두 가지의 계시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1) 하나는 그가 장차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서 희생 제물이 되실 자신에 대한 상징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을 입으시고 구유에서 출생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기뻐하시는 원하심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아기 예수님의 출생은 마굿간의 구유에서 있도록 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출생은 장차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인데 그들을 위하여 대신 희생되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에 의해서입니다. 그 사실을 스스로 증거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러한 예수님이실 것이기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라고 하였습니다.
(2) 또 하나는, 아기 예수님의 출생은 본래 하나님이시나, 가장 고귀하신 신분으로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음을 의미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곧, 예수님의 비하의 신분과 상태에 처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8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으며 싫어버림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이렇게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 죽음의 고난은 죄인들에게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와 그에 따른 형벌을 다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비하되신 것은 율법의 정죄 아래 놓여 있는 사람 그들 안에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이 받을 율법의 요구- 하나님의 진노 - 를 자신이 대신 담당하여 다 받으시는 자격으로서 입니다. 이에 대해 루이스 벌콥은 그의 조직신학 기독론 제2편 그리스도의 신분에서‘비하의 신분’을 다루면서 다음과 말하였습니다.
“빌립보서에 있는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비하의 신분에서의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요소는 모든 지상의 주님, 즉 최고의 율법 수여자이셨던 분이 그의 백성을 위해 그 언약적이고 형벌적인 의무들을 면제하기 위하여 자신을 율법 아래에 두셨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이 일을 행하심으로써 그는 법적으로 우리의 죄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되셨다!”
3, 아기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것이 주는 구속사적인 의미
누가는 예수께서 탄생하신 때와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의 탄생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알려줍니다. 1절에서 ‘그 때에’는 앞서에서의 사가랴의 예언이 있었는데, 그 예언이 성취한 때의 시점을 알려줍니다. 즉, 사가랴를 통해서 예언하신 대로 흑암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마침내 임하는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통치가 미치는 영역>에 있는 사람은 모두다 호적 등록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레뇨가 수리아<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실시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 이 영에 따라 모든 사람은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 각각 자기 고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요셉도 갈릴리 나사렛 마을을 떠나 다윗의 마을인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올라갔습니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을 등록하러 그곳에 갔는데, 이 때 마리아의 복중에는 아이가 잉태된 중이었고,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해산할 때가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마리아는 낳은 아기를 천으로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마리아가 이처럼 아기를 구유에 뉘인 것은 온 천하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로 베들레헴에는 여행객으로 만원을 이뤄 이미 여관마다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어서 들어갈 빈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요셉은 임시방편으로 짐승들이 묶는 처소인 마굿간을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아들을 낳았으며, 짐승들의 먹이통으로 사용하는 구유를 이용하여서 강보에 싸인 아기를 뉘여 놓았습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낳는 장소는 산모와 아기를 보호할 수 있는 따뜻한 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기를 낳는 장소가 사람이 들어갈 방이 아닌 짐승이 머무르는 마굿간이며, 강보에 싸인 아기가 뉘일 곳으로서의 방이 아닌 짐승들이 먹이통으로 사용하는 구유입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일이 있는 것은 단지 그때의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이 매우 급박하고 돌아갔고 또한 열악한 상태에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도에 의한 섭리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린 호적 등록 시기에 예수님의 나심이 있게 한 것은, 그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빈 방을 얻지 못하여 짐승의 마굿간에서 예수님의 나심이 있게 하고 구유에 뉘여 있게 한 것은,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10-12절)
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라고 하신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표적’을 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마리아가 마굿간에서 아기를 낳고, 그 낳은 아기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것은 이 아기 예수님이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시고 계신 것이며, 그래서 이를 통하여 마리아가 낳은 아기 예수님이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알아 볼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근방에 있던 목자들은 이 표적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경배 할 수가 있었습니다(15-20절). 그런가 하면, 별을 연구하는 동방으로부터 올라온 박사들에게는 그들이 연구하는 별을 표적으로 주셔서 별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 별이 안내해 준 아기 예수님이 뉘인 곳에 찾아 들어가 아기에게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마 2:2, 9-11).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낳은 곳을 한 지붕 밑에 방 한 칸짜리 본체와 마굿간이 함께 있는 가정인 팔레스타인의 한 농부의 가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맞지 않습니다. 방 한 칸짜리의 집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도 작고 좁은 방이라고 할지라도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방이 있으며 낳은 아기를 뉠 공간이 있는데 굳이 낳은 아기를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였다고 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마리아가 낳은 아기 예수님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놓기 위하여 마굿간의 구유 - 구유가 마굿간에 자유롭게 놓여 있든지 또는 마굿간의 벽에 부착되어 있든지 또는 마굿간에 인접한 본채 마루 위에 놓여져 있든지 간에 - 를 굳이 방 안으로까지 갖고 들어와서 그곳에 뉘여 놓음으로써 이것이 표적이 되게 하기 위하여 연출하듯이 표적이 되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6-7절)은 요셉이 해산할 때가 이른 마리아를 들일 방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것은 여관의 방이 없었던 것이며, 여관이 아닌 팔레스타인의 한 농부의 가정의 방, 그러니까 민박할 집의 방을, 그것도 마굿간이 딸린 방 하나를 겨우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곳에서 낳은 아기 예수님을 굳이 구유에 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님이 구유에 뉜 사실을 기록하면서, 이것을 이것이 너희(목자들)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12절)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여관이든, 민박이든 요셉과 마리아가 그 집에 들어가서 방을 얻지 못하므로 구유가 있는 마굿간을 이용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이곳에서 낳은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뉜 것을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이 구주이신 그리스도가 나신 분이심을 알아보는 표적으로 주시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님이 구유에 뉜 것은 이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가 낳은 아기 예수님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뉜 것은 이 아기가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이제 곧 찾아와 그 표적을 보고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경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그분을 알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경배에 있게 하셨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께 목자들이 한 경배에 우리들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이신 예수님이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아기 예수께 경배에 있은 목자들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세상 끝날이 이를 때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에 있는 믿음에 있는 사람들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믿음에 있는 복 있는 자입니다.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이분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순종하여 경배에 있었던 자들은 그를 낳은 요셉과 마리아, 이들의 친족인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리고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표적을 받은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 등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그늘에 있는 자들이 세상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며 배척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이는 요한에 의해서 증거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5-11)
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말이죠.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말해 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2-14)
라고 말입니다.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서는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시라는 소식을 들어도 그러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신 표적을 받아도 그렇습니다.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에 있는 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오신 구주이신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있을 수 없는, 사람의 힘으로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으므로 있을 수 없는, 그 일이 우리에게서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큰 자비를 입음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믿음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는지요. 우리가 무엇을 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겠는지요. 우리네 주변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에 오해를 가질 수 있는 잘못된 설교를 하는 것을 너무나 쉽게 대할 수 있습니다.“성도 여러분이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쁜 짓을 많이 해야 합니다.”라고 말이죠. 이는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쁜 짓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기쁘게 되면 우리를 사랑하실 뜻을 가지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설교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사랑 받을 일을 해야 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여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어린 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서는“할머니, 할아버지, 나 잘했지, 나 이쁘지!”하는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 아시죠? 내가 하나님께 사랑 받을 수 있는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그러니 말이죠. 하나님 저를 많이 이뻐해 주실 거죠?”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복 많이 주실 거죠?”,"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실 거죠?”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어떤 일을 하기도 전에, 그러한 일의 삶을 살았건 살지 않았던지 간에 하나님은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라고 하시면서 말이죠.“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게 하신 것을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말이죠.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 경배에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경배하는 믿음에 있는 것은 다른 어떤 행동을 해 보이며 온갖 사랑 받고자 하는 예쁜 짓을 많이 하는 것으로도 결코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서는 결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래서 사람의 힘으로서는 결코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의 힘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저들 힘으로서는 결코 하지 못하기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아들여 그분을 경배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말이죠. 하나님의 힘을 입어서 이 믿음에 날마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믿음에 말입니다. 이 믿음이 지닌 하나님의 능력, 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발휘하시는 능력이 얼마나 큰지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게 해주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4. 다윗 왕의 계보에 있는 그리스도이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
이러한 예수께서 탄생할 때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칙령에 의해 다윗의 후손인 요셉도 다윗왕의 고향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다는 것을 누가는 알려주고 있음으로써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절) 라고 하였고,“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16-17절) 라고 기록하여 예수님이 다윗의 왕조를 통한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다윗 왕의 계보에 있는 그리스도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계보를 요셉으로부터 시작하여서 그를 낳은 위로 추적하여 올라가“그 위는 다윗이요”(눅 3:31)에 이름으로써 다윗 왕의 계보에 있을 뿐만 아니라,“그 위는 아브라함이요”(눅 3:34) 라고 말하여 줌으로써 마태가 말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의 계보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고 다윗의 자손 계보에 있는 것은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의 계보는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이요”(눅 3:38)에 이르며, 아담의 위는 “하나님이시다.”(눅 3:38)를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심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심에 의해서 되어졌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브라함, 그리고 다윗 왕의 계보에 있는 것은 이 계보를 통해서 오셨다는 것에 있으며, 이 계보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혈통의 방법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아들은 육의 혈통을 취하지 않으시고 약속의 씨<후사>를 주시는 것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언약을 잇는 자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이삭이며, 이삭에게서 야곱을, 야곱에게서 유다를, 유다에게서 다윗이 오게 되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약속의 씨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이는 다윗에 이르러서도 그렇습니다. 다윗에게서 그의 왕조를 잇는 솔로몬은 다윗이 단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낳았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에 의한 왕조를 닫으시고 -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는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남은 아들인 이스보셋은 사울에 이어 왕에 올랐으나 곧 암살을 당하였고,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에게 남은 아들 므비보셋이 있으나 그는 절뚝발이의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왕 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울 왕에게는 두 딸이 있었으며 그 중에 둘째인 미갈이 다윗의 아내가 되지만 그녀는 죽는 날까지 자식을 갖지 못하였다. 이로써 사울 왕가에는 왕 위를 이을 대가 끊기고 멸문하였다. -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들인 솔로몬이 다윗의 왕 위를 잇게 하시는 섭리를 하심으로써 다윗 왕조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주도되었습니다.
5.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계시는‘임마누엘’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하여 나시다
누가복음 2장 1-20절과 함께 마태복음 2장 1-12절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십니다. 베들레헴은 유대 땅의 한 고을로 작은 동네 정도입니다. 이 작은 고을은 선지자 미가에 의해서 메시야가 나실 곳으로 예언된 곳으로, 이곳에서 나시는 분은 유대 백성을 다스리실 분이니 그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목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그분은 사관(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심을 드러내 보이시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시는 표적으로서였다. 예수님의 나심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내린 영<호적령>을 받은 수리아의 총독으로 구레뇨가 재임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이 표적이 주어짐으로 해서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 - 별을 연구하는 일을 통해서 메시야의 오심의 징조를 알아보는 일에 있었다 - 그리고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이 출생을 다루기 전에 주의 사자가 지시한대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라고 알려주었었습니다. 이것에 의한 출생이 아닐 경우,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의 출생은 어떤 것이 되겠는지요. 마태복음 1장 1-17절에서“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씀해 주면서“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를 낳고…”라고 하여“누가 누구를 낳았다”라고 하는 문장 형식을 통해 말씀해 주고 있는데 따라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에게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이죠. 여기서‘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는 것이 없으면, 즉‘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략하고, 그래서 빠져버리면, 예수님은 누구의 자손이 되는지요. 아브라함의 유전자(DNA)가 있는 그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한 사람인 예수이며, 또한 다윗의 유전자(DNA)가 있는 그야말로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한 사람인 예수가 아닌지요. 그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불리면서 유대인들의 사회를 휘젓고 다닌 유대인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닌지요. 만일 예수께서 그런 사람으로서 오신 분이시라고 하면, 그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바라왔던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할 자에서의 메시야일 뿐이다. 그 예수님은 예수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일 뿐이지, 가령 후삼국 중 하나인 후고구려(후에 국호를 마진, 태봉이라고 함)를 세운 궁예가 자신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하며 자신의 두 아들을 신광(神光)보살과 청광(靑光)보살이라고 하여 자신은 물론 두 아들까지 신격화하면서 자신을 따름에 있는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미륵신앙에 있게 한 것과 다름 아니며, 무함마드(A.D 570-632, Mohammed; 영어식인 마호메트 ‘Mahomet’또는 모하메드‘Mohammed의 아랍어.“찬양을 받으실 분”이란 뜻)가 자신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유일신이신 알라의 예언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내세워 알라의 예언자임을 말하며 이슬람2)을 창시하고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 및 그의 제자들 모두가 자신이 받은 예언을 받은 예언자라며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사도들과 자신과 같은 예언자로 취급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라 신을 믿는 자들이 따라야 할 예수와 같은 지도자로 여기게 한 것에서 보는 사람들이 따를 지도자에 다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예언하는 일을 하여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보냄을 받은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그리고 다윗보다 이전에 있었던, 즉 아브라함보다 그리고 다윗보다 먼저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이 땅에 있는 자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바다에 있는 것의 형상을 가지고 신격화하여 우상숭배에 있습니다. 사람을 따르는 자는 특출 난 뭔가의 특징을 인해 그를 신격화하고 또는 유일한 지도자로 자신들이 따를 주(主)로 추앙합니다. 그래서 인도의 한 왕자가 부처가 되고,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 사는 쿠라이시 부족의 하심 가(家)에서 출생한 한 사람이 마지막 예언자요 지도자가 되고, 나라를 잃어버렸던 신라의 왕가 서족 출신이 미륵불이 되며 각각의 메시야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그들을 자신들의 메시야로 인식하며 바라보는 것은 이들에게서“세상을 구원할 분”을 바라보고 그 기대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는 그런 기대가 무너집니다. 예수님에게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보고 기대에 있게 하는 그런 기대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기대치를 제시한 적이 예수님에게서는 없습니다. 세상 부귀, 영화, 권세, 명예, 이를 위한 성공을 예수님에게서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구주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잘 설명한 바와 같이“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보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임하여 우리 중에 거하신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은 단 하나의 이유 아닌지요.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임마누엘’은 언제나 우리에게서 충만 상태입니다.‘성령으로 잉태케 하신’그 성령께서 권능으로 우리를 사로잡으시고 그 권능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름에 있게 하십니다. 이 분으로, 이분을 인해 산 삶, 그게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을 치르는 삶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무엇인데요? 인과 나팔과 대접에 의해서 환상 계시로 주시고 있는 세 가지 재앙의 결국에서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그래서 무너진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큰 성 바벨론에서 무너짐을 보세요! 그렇게 무너지는 그 무너짐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 있습니다. 큰 성 바벨론의 무너짐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이름을 놓지 않는 믿음의 담대함과 그 견고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것은 그들이 붙들고 있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서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 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강 건너 불 보듯이 있는 남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의 백성은 큰 성 바벨론의 무너짐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생명을 영원히 같이 하는 운명에 있습니다. 이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임마누엘’이신 분으로 계십니다.
이것이 있는 일이 예수로 그 이름이 불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나시는 것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출생은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다윗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주권으로 되어집니다.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자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또한 다윗의 계보에 의해서 오시는 그리스도이심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에서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주가 되심으로 있는 ‘임마누엘’, 곧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것에서 예수께서 행하시는 자기 백성의 구원이 다윗 왕과 함께 하시며 통치력을 행사하셨던 그 왕권에서 되어질 것이란 사실을 구속론적으로 알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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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서 아구스도라고 불리는 인물은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로,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이다. 그는 B.C. 63년 9월 23일 출생하였고, 44년에 암살당한 시저(Caesar)의 유언에 따라 그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라틴어 : CAIVS IVLIVS CÆSAR OCTAVIANVS)로 불렸다. 시저의 후계자가 되어 로마를 지배하게 된 그는 B.C. 27년에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으며, A.D.14년 8월 19일에 사망하였다.
2) '이슬람'이란 말은 알라를 신앙하는 복종에 있는 것을 의미하며 ‘무슬림’은 이슬람을 신앙하여 그 법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무슬림들은 알라는 유일하고 전능한 신으로 신앙하는데, 알라를 통해서 구원 얻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다음의 다섯 가지 규범을 따름에 있다. (1) 신앙고백 :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다. (2) 기도 :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한다. (3) 구제 : 의무적, 또는 자발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품으로써 자비를 행한다. (4) 금식 : 라마단 동안에는 금식한다. 라마단은 보통 29일에서 30일이 되는데, 무슬림들은 이 30일 간의 금식 기간 동안 신체적, 감정적으로 완전히 변해야 한다. 그러나 라마단의 금식이 하루 종일 하는 금식, 그래서 30일 한 달 내내 금식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금식일은 새벽 4시 30분쯤 일찍 일어나 5시 10분쯤 금식이 시작되기 전 사후라고 불리는 식사를 함께 하며 시작된다. 동이 트면 하루 다섯 번 드리는 기도의 첫 번째인 파지르가 드려진다. 그들은 오후 일찍과 늦게 두번째, 세번째 기도를 각각 드린다. 금식이 끝낸 직후, 무슬림들은 네번째 기도를 드리는데, 이는 마그립 기도라고 불린다. 저녁 식사후 무슬림은 모스크라 불리는 자신들의 예배의 장소에 가서 이샤 기도라고 불리는 마지막 다섯번째 기도를 드린다. (5) 성지순례 : 일생에 적어도 한번은 메카를 순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