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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의 14대 군주 –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Никола'й II)의 결혼과 왕조의 몰락
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II, 1868년 5. 18. – 1918년 7. 17)
본명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1917년 혁명으로 퇴위했으며, 1918년 총살당했다.
러시아의 차르(황제) 체제가 몰락한 것은 1917년의 ‘10월 혁명’이 결정적이었지만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고질적인 유전질환도 혁명을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빅토리아는 9남매를 낳았고 이들이 유럽의 주요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인적으로도 ‘팍스 브리태니커’가 구현됐지만, 문제는 이들을 통해 혈우병이 유럽 황실로 퍼졌다는 데 있었다.
혈우병의 특징은, 여성은 병을 물려주는 매개자 역할을 할 뿐 직접적인 고통은 그 여성의 아들이 당한다는 점이다. 빅토리아도 아들 하나를 혈우병으로 잃었지만 고통은 빅토리아의 딸, 손자·손녀, 심지어 증손자에게까지 이어졌다. 막내딸은 혈우병으로 두 아들과 두 외손자를 잃었고, 둘째딸 역시 아들 하나를 혈우병으로 떠나보냈다. 둘째딸은 그녀의 막내딸 알릭스를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시집보내 혈우병 유전자를 러시아 황실에까지 전파했다.
빅토리아의 자녀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러시아의 황후 알릭스의 혈통을 언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가히 유럽왕족들의 할머니로 통했다. 외사촌이었던 독일 작센 색스코우버-고타(Saxe-Coburg and Gotha)라는 작고도 작은 나라의 왕자 앨버트와의 사이에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 아홉 자녀가 퍼뜨린 손자 수가 40여명이 넘었고 이들이 전 유럽왕족들과 복잡한 결혼관계를 유지하면서 모든 유럽왕족의 혈통은 빅토리아로 통하게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영국)의 9명의 자녀와 가족들.
빅토리아의 자녀들을 살펴보면 첫째인 빅토리아(Victoria:1840~1901)는 프로이센의 왕이며 독일황제인 프리드리히3세(FriedrichIII)에게 시집갔고, 둘째인 후계자 에드워드7세(Edward VII:1841~1910)는 덴마크의 공주 알렉산드라(Alexandra)와 결혼했으며, 셋째인 알리스(Alice)는 헤센의 대공 루드비히4세(Ludwig IV)에게, 넷째인 알프레드(Alfred:1844~1900)는 에딘버러 공작이자 친가인 작센색스코우버-고타공작으로 러시아공주 마리아(Marie)와 결혼했으며, 다섯째 헬레나(Helena Augusta Victoria:1846~1923)는 독일 북부의 작은 공국(公國)인 슐레츠비히-홀시타인의 왕자 리스티안(Christian)에게, 여섯째 루이즈 (Louise:1848~1939)는 스코틀랜드의 대귀족 존 캠벨, 아가일 공작(John Campbell : 9th Duke of Argyle)에게, 일곱 번째 아더(Arthur:1850~1942)는 프로이센공주 루이즈 마가레트(Luise Margarete)에게 여덟 번째 레오폴드(Leopold:1853~1884)는 독일의 제후인 발데크-피에몬테(Waldeck-Pyrmont) 공작의 딸인 헬렌(Helen)에게, 막내인 비어트릭스(Beatrice:1857~1944)는 독일 바텐베르크공작의 아들 하인리히(Henry)에게 시집을 갔다.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Tsar Nicholas II)와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Alexandra Fyorodovna),
러시아 마지막 황제와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이야기 하려면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2세(Nikolai II)가 독일의 한 공주와 결혼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러시아 황실에 대공(Grand Duke)이며 황자인 세르게이(Serge:1857~1905)가 독일의 제후국인 헤센(Hesse and by Rhine)에서 공주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했는데 이 공주의 이름은 엘리자베스(Elizabeth:1864~1918)였다. 당시 황제는 알렉산더3세(Alexander III)로서 세르게이는 황제의 친동생이었다.
러시아로 시집 온 이 독일 헤센의 공주는 적적한 생각이 들어 자신의 여동생을 러시아로 초대했는데, 당시의 황태자였던 니콜라이 즉 뒷날 니콜라이2세(Nicholas II)가 러시아를 첫 방문한 숙모의 여동생을 보고 첫 눈에 반하고 만다. 그리고 즉시 구혼(求婚)을 하였으나 헤센의 공주는 종교상의 이유로 거절해버리고 자기 나라로 차갑게 돌아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황태자는 상사병을 얻어버렸고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한 아버지 황제는 아들을 달래지만 아들은 매정히 가버린 공주를 생각하면서 병석을 차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1894년 알렉산드르 3세 황제가 덜컥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곧 황제에 즉위하게 될 황태자의 결혼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새로 즉위하는 황제에게는 황후가 필요한 것이다. 새 황제는 자신이 원하는 신부를 얻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이것을 위해 숙모인 엘리자베스는 여동생을 불러다 루터파와 정교회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안심시키고. 자신도 시집오면서 개종을 했지만 신은 다 같다며 동생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다.
니콜라이 2세의 결혼식.(1894년 11월 2일).
이렇게 언니의 설득으로 황제의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러시아로 시집을 온 헤센공주의 이름은 알릭스(Alix:1872~1918),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Alexandra Feodorovna)로 이름을 개명하게 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부인인 알렉산드라 황후다.
1894년 11월 2일, 니콜라이 2세와 알릭스가 결혼했다. 결혼은 두 사람을 서로 만족시켜 주었고 결혼 이듬해부터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그 기쁨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황후는 황자를 낳지 못하고 거듭 황녀만 내리 네 명을 낳았는데 장녀 올가(Olga:1895~1918), 차녀 타티아나(Tatiana:1897~1918), 삼녀 마리아(Maria:1899~1918), 사녀 아나스타시아(Anastasia:1901~1918)가 그들이다.
그러나 아들을 바라는 황실의 바램으로 황후는 다시 출산을 하는데 1904년 드디어 왕자를 낳았고 이가 알렉세이(Alexis)다. 이 오랜 바램 끝에 황자를 출산한 황후의 기쁨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이 하나뿐인 왕자가 태어나자마자 놀라운 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병이 바로 혈우병이었다.
1894년 11월 2일, 니콜라이 2세와 알릭스가 결혼했다.
알렉산드라 황후가 된 알릭스는 결혼 10년 만에 늦둥이 아들 알렉세이를 낳았으나
아들이 6주 만에 혈우병 증상을 보이면서 불행이 시작된다.
왕자가 이 병을 가지고 태어났을 때 당시의 의료기술은 이 병에 대한 지식이 희박했다. 그래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버리는 왕자의 고통에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지게 아팠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자의 병을 고쳐야겠다는 신념으로 마치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많은 사람들을 불러 치료하게 했는데 이때 등장한 사람이 정교회의 사제의 신분을 가지고 있던 바로 ‘그리고리 라스푸틴’(Rasputin, Grigorii Efimovich, 1872?~1916.12.30)이었다.
라스푸틴,Grigorii Efimovich Rasputin (1872 – 1916),
그는 의사이면서 다소 신비한 능력을 지닌 예언자였다.
라스푸틴은 개명한 이름이며, 본래 이름은 Grigory Yefimovich Novykh였고 튜멘주 토볼스크 출신의 예언자이며 의사였다. 당시 그에게 치료받은 농민들을 그를 성자라 우러러 보았다고 한다. 이런 소문을 듣고 황후는 혈우병으로 고생하는 알렉세이 왕자를 라스푸틴이 돌보도록 맡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러시아황실 몰락의 전주곡이 될지는 누구도 몰랐다.
‘신비한 주술능력’으로 혈우병을 앓고있는 황태자의 병세를 완화시켜 황후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라스푸틴은 점점 영향력이 커졌으며 내정문제와 외교문제까지 간섭하기 이르렀는데 심지어는 정치에도 적극 개입해 대독강화파(對獨講和派)를 형성, 귀족들과 대립했다.
그의 사생활은 문란한 여자관계와 사치와 방종으로 이어졌고, 이런 라스푸틴의 꼴을 보고 귀족들은 몹시 분개하여 그를 처단할 궁리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워낙 황후의 총애가 큰 터라 손을 놓고 있었다.
이런 일로 황실의 기강이 무너짐을 가장 염려했던 사람은 황제 니콜라이1세의 증손녀이자 대공 알렉산더의 딸인 공주 이레네(Irene:1895~1970)의 남편이었던 공작 펠릭스 유수포프(Felix Youssoupov:1887~1967)였다. 그는 이 ‘골치덩이’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황제의 조카사위 펠릭스 유수포프공(公)이 러시아귀족 블라디미르 푸리슈케비치와 공모해 라스푸틴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해 독살했다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후일, 유수포프는 라스푸틴에게 엄청난 분량의 청산가리가 든 케이크와 와인을 먹였지만 한 시간이 지난 뒤 죽은 줄 알았던 라스푸틴이 벌떡 일어났으며 공포에 질린 자신과 푸리슈케비치가 총을 쏘아 그를 죽였다고 밝혔다.
라스푸틴(Rasputin)을 암살한 니콜라이 2세의 조카사위,
‘펠릭스 유수포프(Felix Youssoupov)’
BBC 방송에 따르면, 영국의 역사학자 앤드루 쿡과 함께 라스푸틴의 사망원인을 조사한 전직 런던경찰청 수사관 리처드 쿨런은 “영국 스파이가 암살범이라고 99.9% 확신한다”며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BBC는 시신 사진을 조사한 결과, 라스푸틴이 각기 다른 총에서 발사된 3발의 총탄을 맞았으며 이 가운데 이마 한 가운데에 정확히 명중한 1발의 총탄이 숨을 끊어놓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암살당할 때 라스푸틴의 나이는 44세였다고 한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가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고 35만명의 독일군 포로를 석방하면 서부전전의 전황이 불리해 질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수사관 쿨런은 라스푸틴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사람은 러시아가 독일과 가까워지는 것을 우려한 영국이 러시아 황실에 침투시킨 ‘전문 킬러’ 레이너 였다고 주장했다.
쿨런은 암살현장 사진을 분석한 결과, 핏자국이 현관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문 앞에서 차량에 실리기 직전에 엄청난 분량의 피를 흘린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라스푸틴이 아직 죽이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전문가’가 근접거리에서 이마 한 가운데에 다시 총격을 가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유수포프의 친구이자 영국의 스파이인 레이너가 암살사건의 첫 단계부터 현장에 있었으며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직접 나서 일을 마무리 지었다는 것이다.
라스푸틴(Rasputin)을 암살한 장소로 알려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유수포프(Felix Youssoupov) 저택 응접실.
BBC가 발굴한 영국 비밀정보국(SIB) 상트 페테르부르크 지부 내부 메모는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목적이 달성됐다. 곤혹스러운 외부세력 개입설이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지만 ‘어둠의 세력(라스푸틴의 암호명)’의 소멸과 관련한 대응이 모두에 의해 접수됐다”고 적고있다.
방송에 따르면 레아너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핀란드 특파원으로 근무한 뒤 은퇴했으며 라스푸틴 암살사건과 관련한 비밀을 발설하지 않은 채 사망했다. 기이한 점은 자신의 친구이자 러시아 귀족이었던 펙릭스 유수포프의 이름을 따 자신의 유일한 아들의 이름을 존 펙릭스 레이너로 지었다는 점이다.
라스푸틴은 1916년에 피살됐으나 러시아의 내우(內憂)는 중층으로 쌓여 이미 러시아에는 볼셰비키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1917년의 ‘2월 혁명’이 있은 뒤 두마(의회)와 소비에트는 니콜라이를 퇴위시키되 알렉세이를 통한 군주정은 그대로 존속시키기로 합의했다. 12세의 어린 황제를 통해 차르 체제는 연명시키되 무력화시킨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부부가 ‘혈우병에 걸린 아들과 떨어져 살 수 없다’는 이유로 동생 미하일을 다음 황제로 지목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스스로 몰락을 재촉했다.
혈우병을 앓았던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
황제가 된다는 것은 성인 전제군주가 다시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2월 혁명’ 세력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그 해에 ‘10월 혁명’은 일어났고 황제 일족은 이듬해 모두 살해됐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은 황태자의 유전질환인 혈우병으로 인해 라스푸틴을 불러들였고 그에 대한 빗나간 신임이 나라를 망쳐버린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참고자료 출처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OD&office_id=053&article_id=0000004358
http://kdaq.empas.com/qna/view.html?n=6031891&kc=O&kcs=1894&pt=T&pts=1894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부른 ‘10월 혁명’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Никола'й II)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 (1896년 5월 26일)
맨 왼쪽은 니콜라이 황제의 어머니인 마리아 표도로브나 모후(Maria Fyodorovna)
그 옆은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Alexandra Fyorodovna)
서있는 사람이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Tsar Nicholas II)다.
유년 시절과 황제 즉위
니콜라이 2세는 1868년 5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 알렉산드르 3세와 덴마크 출신의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남에게 봉사하는 따뜻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유약했기 때문에 군주감으로는 적합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1881년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1891년 극동 방문 중 일본에 들렀을 때, 이른바 오쓰 사건으로 부상을 입어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1894년 11월 2일, 영국의 빅토리아의 손녀인 알렉산드라와 결혼하였으며, 그 해 부황인 알렉산드르 3세가 신장병으로 서거하자 제위를 계승했다. 당시 니콜라이는 황제가 될 준비가 아직 안되어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대관식이 진행되던 중 목걸이가 그의 목에서 떨어지자 모두들 불길한 징조로 여기고 목격자들에게 함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역시 좋지 않은 징조를 예견하는 듯한 사건이 일어났다. 옥외에서 열린 황제 즉위 행사에 군중이 너무 많이 몰려 사상자가 100명이나 발생했고 부상자도 수천 명이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그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행사를 취소했다.
시대의 흐름을 반영 못한 전제정치
헌신적인 남편이자 관대한 아버지였던 니콜라이 2세는 정치보다 가정생활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그럼에도 막상 황제가 되고 나서는 그는 부황의 뒤를 이어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를 계속 펼쳐 전제 정치의 힘만 더욱 강해져 버렸다.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와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Maria Fjodorovna and Alexander III of Russia in Denmark 1893)
1881년의 임시법을 계속 적용, 확대하여 언론과 사상을 엄격히 통제했고, 교육에도 많은 제한을 가했다. 젬스트보와 시 정부의 권한은 더욱 축소됐다. 젬스트보의 과세대상도 줄였고, 젬스트보 위원과 고용인의 임명 비준을 거부하여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만이 공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종교 박해도 더욱 심해졌다. 분리파 정교도가 심한 탄압을 받았고, 아르메니아 교회와 그 밖의 종파들에도 많은 제약이 가해졌다. 유대인의 지위도 더 악화됐다. 유대인의 토지 매입을 더 엄격히 규제했고, 1903년 베사라비야의 키시뇨프에서 시작돼 우크라이나 일대로 확대된 대규모의 유대인 약탈과 학살을 방조했다.
1809년 러시아에 합병된 이래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받고 있던 핀란드에도 강력한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여 많은 권리를 박탈했다. 반대 운동이 격화되면서 핀란드는 혁명 세력의 주요 근거지가 됐다. 경제 면에서는 1906년까지 비테를 계속 중용, 강력한 산업화 정책으로 큰 성과를 낳았으나, 균형 잃은 산업화는 한편으로 위기를 가져왔다.
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22일, 여느 때라면 성당에 갈 시간에 굶주림에 지친 노동자들이 황제에게 급료를 올려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성가를 부르며 눈길을 걸어 황궁으로 갔다. 청원서를 가지고 행진하는 대열은 점점 불어나 급기야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이 행렬 앞에는 이콘과 황제의 초상이 게양되어 있었다. 그 행렬 선두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가폰 신부가 있었다. 브치로프의 공장에서 노동자 3명이 부당해고를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가폰 신부 아래 노동자가 결집하게 되었고, 이들이 황제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게 된 것이다. 이 파업은 이미 1주일 전에 발생하여 계속되다가 이날 22일에는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쓰게 된 것이다.
청원서 행렬은 오후 2시, 광장에 집결했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들이여, 인민들을 쏘지 말아라”고 하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막아선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대포도 여러 발 발사되었다. 이 일제사격으로 1천 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행렬에 대해 마지막으로 황제의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이리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피의 일요일.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된 일명 '피의 일요일'은 1905년 1월 22일 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의 초상화와 성상을 앞세운 채 황제를 만나 청원서를 제출하려고 겨울궁전으로
행진했던 시민을 무차별 발포한 사건이다. 평화적 시위에 대한 이런 과잉 진압은
14만이라는 군중에 대한 차르 정부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모스크바, 사라토프, 바르샤바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44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항의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이때까지 니콜라이 2세가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파정을 가져올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사이, 10월에는 대규모의 파업이 발생하여 러시아 경제는 파탄(한마디로 '국가 자체가 정지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받들듯이 섬겨온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수많은 동료들이 살상된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 민중 속에 신앙과 같이 뿌리 깊던 황제 숭배는 일시에 무너지고 사람들은 황제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당시 조선과 만주를 놓고 일본과 전쟁 중(러일 전쟁)이던 러시아 정부로서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은 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츠머스 회의에 전권대사로 파견된 비테는 의회를 구성하겠다는 약속으로 국민을 설득하여 가까스로 난국을 진정시켰으나, 제국 정부의 도덕적 정통성이 무너짐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은 훗날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황제의 퇴위로 왕조를 마감하는 니콜라이 2세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에도 황제에 대한 불만이 여전하다고 여긴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때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황제 자신도 괴승 라스푸틴의 예언을 감쪽같이 믿고 1915년부터 전선에 뛰어들었다. 실제로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무려 1천 500만 명이 전선에 나가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노동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국내의 불안은 고조되어갔다. 각지에서 파업과 시위운동이 발생하고, 혁명의 기운은 날이 갈수록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917년 어느 날, 마침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9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이 파업 데모에 참가하여 “빵을 달라”고 외쳤다.
1917년 6월, 러시아혁명.
이틀 후에는 시위가 시내 전체로 확산되었다(2월 혁명). 시위대는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붉은 깃발을 휘날렸다. 이에 니콜라이 2세(실제로 겁쟁이이기도 했던 그는 1916년에 전선에서 도망쳐서 궁전으로 되돌아왔다고 함)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수만 명의 군 병력과 예비군을 배치시켜 시위대를 저지하려 했지만, 군대는 물론이요 예전에 혁명가들을 칼로 살해했다던 악명높은 기병들조차도 (오랫동안 굶었던 탓인지) 시위대에 동정심을 느껴 결국 혁명군에 가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혁명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더군다나 황제와 친했던 관리들마저 사퇴하여 혁명파에 붙은 자도 있었다.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며 절망에 빠진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3월 15일 제위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퇴위선언을 했다. 이로서 러시아 제정 정부는 총사직하고, 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케렌스키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원래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의 아들 알렉세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어린 나이인데다 혈우병을 앓고 있는 알렉세이였기에 동생 미하일에게 제위를 양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은 미하일 역시 니콜라이 2세와 다를 바 없다 하여 반대했다.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아들 알렉세이,
Czar Nicholas II and his son, the Czarevich Alexei.
이러한 사태를 지켜보던 임시 정부는 미하일에게 제위를 버릴 것을 권고했고, 미하일은 그러한 제의를 받아들였다. (실제로 미하일은 "저 또한 폐하처럼 백성들로부터 욕들을 짓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로써 군주제는 폐지되었고, 304년 동안 지속되어 온 독일계 왕조인 '홀슈타인 - 로마노프 왕조'는 퇴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임시 정부와 10월 혁명
2월 혁명을 주도했던 임시정부(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가 집권해도 '가난한 국가'라는 오명을 벗기지는 못했다. 케렌스키가 내놓은 상품은 아주 파격적이었지만, 식량 부족만은 여전했다.
1917년 9월 어느 날, (당시 러시아의 영토였던) 라트비아에서는 독일이 겨자 가스를 뿌렸던지 수많은 러시아의 사병과 장교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당시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現 상트페테르부르크)조차 독일-오스트리아 주도의 동맹국들에게 점령을 당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나돌았다. 그 시기에 케렌스키 내각은 코르닐로프 장군으로부터 전복을 당할 뻔하는 아찔한 상황을 견뎌야만 했다.
1917년 10월 어느 날, 민중들은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2월 혁명이 피를 많이 흘렸는데 반해, 10월 혁명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기간도 길지 않았다. 결국, 케렌스키 내각은 퇴임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레닌 주도의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언된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켰던 레닌.
하지만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가 집권해서 그런 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였던 1918년, 러시아에는 내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기근으로 죽어갔고, 볼셰비키에 반감을 드러낸 자들은 그들로부터 숙청당하여 백군으로 돌아선 자도 있었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동맹국과 상대로 맺은 가혹한 조약 때문에 서방 연합국들은 물론이요 일본과 미국조차도 볼셰비키를 비난하여 백군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2월 혁명 이후,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들은 (황제의 명령이 아닌 케렌스키의 명령을 따르게 된) 군졸들의 감시를 받아 가면서 우랄 지방의 민가에 거처하게 되었다. 약 8개월동안 비록 화려한 궁정생활은 아니었지만 가족끼리 단란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들을 감시하는 군졸들은 그들의 대화까지도 엄격히 검열했다.
시베리아 유폐지 가옥의 난방을 하기위해 나무를 톱질하는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와 아들 알렉세이 황세자.
황제 가족은 처형당한 이곳 에카테린부르크에서 78일간 지냈다고 한다.
이어 볼셰비키의 10월 혁명 뒤 황제 가족은 시베리아로 이송되어 예카테린부르크의 한 숙소에 감금되었다. 1918년 7월 17일, 이곳 볼셰비키들은 옴스크에 있던 백군 코르차크 부대가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 가족을 서둘러 총살해버렸다. 그들은 숨진 황제의 가족 가운데 황태자 알렉세이와 셋째 공주 마리아의 시신을 먼저 불태웠고 시간이 너무 지체되자 다른 시신 9구는 그냥 갱 속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1991년에 이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들어서면서 1991년 이들의 유해는 발굴되었다. 에카테린부르크 근처의 숲에서 발굴된 유해가 유럽 족보 기록을 바탕으로 니콜라이 2세 및 황후 가문의 사람들과의 혈연 관계 대조를 통한 DNA 검사에서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시신으로 밝혀졌다.
러시아는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시신을 찾았다고 공식 발표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피터 폴 성당에 안치하였다
처형당한 러시아 비운의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유해 발굴
니콜라이 2세 부부와 5명의 아이들.
왼쪽에서 5번째가 아나스타샤이고 그 옆이 알렉세이(알렉시스)다.
1917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 일가족은 혁명세력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며 그들의 시신 11구는 폐광에 버려져 불태워졌다. 수십 년간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가운데, 1992년 옐친은 미국의 법의학팀을 초청해 시체 발굴을 허락했다. 유명한 인류학자인 메이플 박사가 DNA 분석으로 찾아낸 시체는 모두 9구. 막내딸 아나스타샤와 혈우병을 앓던 황태자 알렉세이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해서 이 두 명의 행방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1991년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1,100km 넘게 떨어진 예카테린부르크 근방의 폐광에서 유골 9구가 발견되었다.
예카테린부르크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강제 폐위된 니콜라이 2세가 1918년 감금 중에 총살을 당한 지방이었다. 당시 레닌의 지령을 받은 이 지방 볼셰비키 유로프스키는 지하실에 감금한 채 황제와 부인, 네 딸, 아들, 그리고 의사와 하인 셋 등 모두 11명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1년 발견된 9구의 유해는 사지가 절단됐고, 불에 그을려 있었으며, 심지어 산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볼셰비키들이 주검의 신원을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복잡한 DNA 검사를 거치면서 유해는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공주 3명, 어의와 시종 3명의 것으로 추정됐다. 공교롭게도 황태자 알렉세이와 공주 1명의 유해는 보이지 않았다.
폐광에서 발견된 유해.
1991년, 황제 가족들이 유폐되어 살았던 예카테린부르크에서 30㎞ 떨어진 폐광 속에서
고고학자들이 9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유해는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공주 3명, 어의와 시종 3명의 것으로 추정됐다. 공교롭게도 황태자 알렉세이와 아나스타샤 공주의 유해는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막내 공주 아나스타샤(1918년 당시 17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외국으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그 중에는 베를린에서 "내가 바로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하며 어린 시절 황실생활까지 소개했던 어느 여성도 있었다.
그러나 2007년 나머지 2구로 추정되는 시신이 주민들에 의해 발견됨으로서, 알렉세이 황태자와 아나스타샤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해결되었다고 한다.
2007년 8월, 2구의 유해가 묻힌 장소를 발견한 이들은 고고학 전문가들이 아닌 아마추어들이었는데 이들은 유로프스키가 남긴 소비에트 시기 비밀 기록을 면밀히 살피다가 시체 2구를 따로 처리했다고 기술하고 있는 부분과 ‘근처’ 내지 ‘바로 여기’로 해석될 수 있는 러시아어 구절을 찾아냈다. 이것을 추론으로 기존에 유해가 발견된 장소 주변을 뒤졌는데 2구의 유해는 처음 9구의 유골이 발견된 장소에서 6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찾았다고 한다.
유해는 처음 발견된 유해와 마찬가지로 심하게 그을려 있었고 산으로 부식됐다. 그리고 산을 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항아리 조각이 처음 발견된 항아리와 같았다.
유해가 발견되자 주민들은 고고학자를 불러 전문가가 유해를 발굴 하도록 했다. 그리고 러시아정교회도 관찰자로 초청했다. 과학적 조사 절차 없이 아무렇게나 행해진 첫 발굴의 교훈 때문이다.
황실 가족의 생사를 둘러싼 이런 논란과 갖가지 소문의 진상은 이제 확실히 가려졌다고 알고 있으나 러시아 정교회는 아직도 처음 발견된 유해를 러시아 마지막 황제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들의 사망 80주년을 맞은 1998년, 이들 황제 일가의 유해는 전통적으로 로마노프 황제들의 유해를 모셨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피터 폴 성당으로 이장되어 모셔졌다. 러시아가 마지막 황제에 대한 최종적 빚을 갚은 셈이다.
발췌 /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9123
87년 만에 귀환한 러시아 마지막 모후 – ‘마리아 표도로브나’
러시아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Empress Maria Fyodorovna. Gatchina Palace, 1885.
덴마크의 공주였던 마리아(Maria Fyodorovna)는
로마노프 왕조의 알렉산더 3세와 결혼하면서 러시아와 인연을 맺었다.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다.
볼세비키 혁명 다음해인 1918년 니콜라이 2세는 가족과 함께 처형당했으며
황태후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크림반도에 피신해 있었다.
2006년 9월 3일~9월 28일은 덴마크와 러시아의 역사를 새로 쓰는 날이 되었다. 러시아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스 2세의 어머니인 덴마크 출신의 마리아 표도로브나(Maria Fyodorovna Romanova, 1847-1928) 황태후가 28일 자신의 마지막 소원대로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로마노프 왕실 묘역에 묻혔다. 그녀가 1919년 소련에 의해 추방된 지 87년이 지나서야 다시 러시아로 되돌아온 것이다.
표도로브나 황태후의 유해 이장식은 2006년 9월 23일 코펜하겐 서부의 로스킬데 성당에서 덴마크 여왕 마르가레테 2세와 가족, 덴마크와 러시아 정부 관리, 로마노프 왕실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이장식을 마친 그녀의 유해는 덴마크 해군 함정에 실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 현지에서 9월 28일 미사를 가진 다음 러시아 황제 가족의 유해가 있는 로마노프 왕실 묘역인 요새의 납골당에 자리를 잡았다. 혁명 당시 총살당한 그녀의 아들,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의 유해도 지난 1998년 이 곳으로 옮겨져 안장된 바 있다.
원래 덴마크의 마리 공주였던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는 원래 덴마크의 크리스찬 9세의 둘째 딸이었다. 크리스찬 9세는 아들 중 한 명이 나중에 그리스 국왕이 되었고 그의 손자 중에서 노르웨이 국왕이 나왔다. 또 세 딸은 영국 황후, 러시아 황후 및 영국 캔터베리 공작부인이 되어 ‘유렵의 장인(丈人)’이란 아름다운 별명을 얻었다.
1918년 7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온 가족들 즉, 황제, 황후, 황태자 및 4명의 공주들은 그들을 지키고 있던 소련 공산당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들의 시신은 유황과 휘발유를 발라 소각되었다. 유골은 시베리아의 에카체린부르크의 한 동굴에 묻혔다.
당시는 제정 러시아가 격변에 빠져든 시기로 그녀는 쾌락과 음모, 폭정을 하릴없이 지켜보아야 했다. 혁명이 일어나자 황태후 표도로브나는 크림 반도에 피신하고 있었다.
1919년 4월 영국은 크림 반도에 군함을 보내 표도로브나 황태후를 구출토록 했다. 200t에 달하는 짐들이 하인들에 의해 함정에 실렸다. 표도로브나 일행이 탄 함정은 얄타를 거쳐 이스탄불로 향했다. 함정은 몰타를 거쳐 마침내 영국 포츠머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런던의 망명 생활도 행복하지 못했다. 표도로브나는 권력을 이미 상실했고, 망명자들에 대한 영국의 무관심에 괴로워하며 지내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후 표도로브나는 영국 왕실 사람들로부터 까다롭고 사치스럽다는 평가를 받으며 반목했고 결국은 고국 덴마크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고국에 돌아와서도 그녀는 제국과 왕실이 무너진 것을 슬퍼하면서 지냈다.
1928년 숨지면서 아들의 묘지 옆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지만 짜르 시대를 인정하지 않는 소련은 이같은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가 최근 푸틴 대통령이 덴마크 왕실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녀의 이장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이번 마지막 황태후의 러시아 이장은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의 러시아가 러시아의 전통을 역사적 맥을 찾았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그녀의 이장과 관련한 의식을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이 직접 주관해 최대한의 예우와 격식을 갖췄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는 소비에트에 의해 부정됐던 과거 러시아의 민족적 유산을 복원하고 전통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번 마지막 황태후의 귀환도 이 같은 러시아의 전통 찾기의 일환으로 해석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 역시 과거 소비에트 시절에는 철저히 부정됐지만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러시아라는 국호로 복귀한 이후 정교회 역시 급속히 세력이 확장되고 있다.
배굉호
http://www.namchun.org/?doc=bbs/board.php&bo_table=board06_12&page=5&wr_id=80
http://www.zhengjian.or.kr/new/bbs/char_j/char_view.php?seq_no=541012192903&bbs=cul&page=2
[출처]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결혼과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작성자 햇무리